도깨비 바늘
친구와 골프장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지금 가고 있는 골프장의 위치를 물으니 충북 감곡이라고 했다. 충북, 감곡?
나는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오생리란 곳에서 태어났는데 태어나자마자 집안이 모두 서울로 옮겨갔다가 7살 때 6.25가 일어나 다시 그곳으로 피난을 가 5년을 살았다. 그때 5년 동안의 그곳 생활의 기억과 향수는 나의 가장 깊은 곳에 침전되어 내 정서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으며 지금도 때때로 되살아나는 그때의 향수는 나를 끝없는 추억의 나락으로 몰고 가 오랫동안 상념에 잠기게하곤 한다.
생극면과 인접한 감곡면이란 이름을 그때 들어보았을 터이고 그 이름을 우연히 다시 듣고 보니 한 동물의 회귀본능인양 생극에 관한 궁금증이 증폭되어 골프장의 몇 캐디에게 생극에 관하여 물어보았으나 그곳에서 자동차로 30분 정도면 갈 수 있는 가까운 곳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오생리란 원래 '윗다라께'란 전래적인 명칭으로 통용되던 오지이다. 동쪽으로는 수리산, 남쪽으로는 부엉산이 병풍처럼 둘러쌓인 서쪽 산자락에 위치한 이 마을은, 현재 충주로 향하는 산업도로가 개통되기 전까지는 6.25의 전화도 피해 갈 만큼 외딴 지역이었다.
다음 날 나는 누이와 함께 오생리를 찾아 나섰다.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중부내륙고속도로로 옮아타고 감곡 IC에서 장호원쪽으로 가다가 감곡에서 충주방향으로 향하는 국도로 들어서니 어렴풋이나마 낮익은 모습들이 하나 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우선 도로의 방향을 알려주는 선명한 단어 생극. 어느새 내 마음은 두근거리기 시작하였다. 지금도 2차선 도로에 포장만 되어있어 어느 국도보다도 초라해 보이지만 그러기에 더 정감이 가고 막연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충주행 국도! 당시는 을지로 6가에 있던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오생리까지는 광나루 다리를 건너 자갈길인 이 국도를 따라 온 종일 흔들리며 시달려야 했었다. 지금은 한 시간 반이면 갈 수 있는 이 길을.
곧 생극에 도착하였다. 생극면의 면소재지인 이곳에 생극초등학교가 있다. 누이는 이곳에서 6학년 1년을 다니고 부산으로 가서 중학교엘 갔는데 어쩌면 나보다도 선명하게 그때의 풍경과 일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 저기 새 건물이 들어섰네! 아니 그 많던 플라타나스는 하나도 없네! 아니 바다처럼 넓던 운동장이 왜 이렇게 작아졌어! 야! 스쿨버스가 다 있네! 누이에게는 모든게 경탄의 대상이었다. 당시는 오생리에서 10리가 넘는 이곳까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신작로를 따라 걸어서 등교하며 갖은 애환을 다 겪은 누이에게 특히 스쿨버스란 샹그릴라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전설같은 존재일 것이다.
생극을 떠나 드디어 오생리로 행하였다. 굴령게 모퉁이를 돌아서 수리산이 성큼 눈 앞에 다가서자 70을 바라보는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훌쩍 반 세기를 거슬러 올라 이곳에 돌아와 풍경 하나하나에 스며들며 얼룩지운다.바다에 주저앉는 빙산처럼 자꾸만 무너져 내리는 풍경들. 아---
오생리와 생극 중간의 벌말이란 마을에 생극국민학교 분교가 있었다. 오생리에서 생극까지는 10리가 넘는 먼 길이었기에 저학년 아이들은 통학이 힘들어 나때부터 분교가 생겨, 나는 이 학교에서 5학년까지 마치고 서울로 올라왔다. 말이 학교지 그때 우리 학년이래야 모두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는 숫자가 책상도 없는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공부를 했는데 농번기에는 전 학급이 동원되어 인근의 농사일 도우랴, 겨울이면 난로도 없는데다 눈이라도 내리면 제설장치도 없어 학교를 닫는 일이 다반사라 제대로 공부라는 걸 한 적이 드물었다. 내가 떠난 후 가까운 곳에 정규 오생국민학교가 세워졌는데 나는 이 오생국민학교의 1회 졸업생에 해당되는 것이다. 벌말에 당도해 보니 옛 분교는 자취도 찾을 수 없었고 분교가 있던 자리에는 배추가 가득 심어져 여인 서넛이 배추를 수확하고 있었다. 그때 분교 옆에 살던 한상용이란 학생 이름이 문득 떠올라 한 여인에게 그에 관하여 물어보니 정확한 이름은 모르고 저 집이 한씨네 성이니 한 번 알아보라며 새로 지은 양옥집 한 채를 가리켰다. 벌써 50년도 지난 일이라 무슨 소용이 있으랴 싶었지만 그래도 호기심에서 그 집을 향하여 걷기 시작하였는데 한 노인이 이쪽을 향하여 걸어오고 있어 그에게 혹시 한상용이란 이름을 아는지 물어보자 그는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왜 묻느냐고 다그쳤다. 자초지종을 얘기하니 자기가 바로 한상용의 형인 한상혁이라고 하며 그 자리에서 핸드폰으로 서울에 있는 동생을 연결해 바꿔 주었다. 그 당시는 전화라고는 본 적도 없으며 서울 충주간 시외버스만이 유일하게 서울에 닿을 수 있는 길이었는데 이제는 즉석에서 손바닥 안에 드는 작은 물체로 서울을 불러내다니!
전화를 받아들고 나는 잠시 당황하였다. 상용이인들 그 옛날의 일을 기억할까?
마침 나는 그때 그 학교에서 성적이 늘 일등이라 전교 대표였던 것에 기대를 품고 떠듬 떠듬 내 소개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는 대뜸 나를 알아채고 반가워 하였다. 나는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았으나 길거리에 선 채 오래 그러기도 뭐해 그의 전화번호만을 받아들고는 그의 형 집으로 끌려들어가 차 한 잔을 대접받은 후 서둘러 오생리로 향하였다.
새로 지은 건축물들이 여기저기 보였지만 늘 그리던 그리운 산과 들, 아직도 남아있는 추억 속의 몇몇 집들과 느티나무, 여름 내내 첨벙거리며 뛰놀던 방죽, 장마가 져 물이 불어나면 고맙게도 학교를 쉬게해주던 시내, 어느것 하나 예사로 지니칠 수 없는 것들이 나의 발목을 껴안고 놓지 않았다. 벗찌가 채 익기도 전에 다 따먹던 그 벛나무, 오디를 따려고 뽕나무 위에 올라갔다가 큰 가지를 부러뜨리는 바람에 왼 종일 검숭골 노인에게 야단맞던 뽕나무밭, 이제는 숲이 무성하여 사라져버린 뒷산으로 오르는 오솔길 등은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아쉽기도 했다.
주마등처럼 한없이 흐르는 추억 속을 헤메며 방죽에 이르렀다. 지금은 방죽으로 이르는 길마저 없어져 방죽에서 나오는 수로의 작은 뚝을 따라가야만 했다. 긴 방죽 뚝엔 전에 없던 억새꽃이 지천으로 퍼져있었으며 인기척에 놀란 새떼들이 하늘로 날아 오른 후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맴돌았다. 방죽뚝을 따라 걸어들어가 보려 했지만 빼꼭히 들어찬 억새풀에 가시나무까지 뒤엉켜 돌아서고 말았다.
억새풀 틈에서 벗어나오니 온 몸에 도깨비 바늘인 가시들이 가득 묻어있었다. 곁을 스치는 사람이나 동물에 붙어서 떠다니며 종자를 퍼뜨린다는 도깨비 바늘, 이 방죽 안에서 깨벗고 물장구치던 소년 하나, 도깨비 바늘이 되어 세월에 실려 온 지구를 떠돌다 이제 초로의 행색으로 수구초심의 감회에 젖어 바라다 보는 하늘엔 세떼들도 이 불청객이 낯설지 않은 듯 다시 방죽을 향하여 내려앉기 시작하였다.
첫댓글 그때가 어제 같은데 어언 60여년전!! ㅎㅎㅎ 60년전! 1950년대.
송공의 윗글을 읽으면서, 나의, 우리세대의 지난날을 읽는 듯했습니다.
게다가 80년대 회사일로 음성에서 금왕-생극-감곡으로 해서 충주 다닐때가 생각났습니다.
또 한번 더 읽을랍니다. 고맙습니다.
죽기전에 하여야할 100가지중의 하나가 옛고향 찿아 가는건데 귀하는
그건은 해결했으니 남은 99가지만 실행하면됨.
언젠가 시간이 되면 그 남은 99가지가 무언지 좀 알려주시길.
그랬군요... 송진씨... 감회가 깊으셨겠어요..
글을 읽으니 제가 7년전(?)에 4sisters가 6.25 때 피난 가 4년간(50년전)살던 곳(제주도)을 여행하고 느꼈던
그 감동과 아주 흡사합니다... 그 때의 기적같은 해후는 끝도 없었지요...
저는 송진씨 처럼 이렇게 멋지게 쓰지는 못한답니다...
외국에서 살거나 국내에서 살거나 마음의 옛 고향을 50년만에 찾은 건 마찬가지네요...ㅎㅎㅎ
오랫만에 대하는 '그랫군요'로 시작하는 정겨운 서두. 언제였던가? 또 다른 감회에 젖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앞두고 보는 세상이 또한번 아름다움으로 다가올 수 있다면 인생은 얼마나 아름다운 한 편의 시일 수 있을까?
아름다운 한 편의 시와 같은 생을 살고 간 사람들을 간혹 볼 수 있지요. 세상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자리에 서야지만 가능한 일일 것이고 그 '자리'에 접할 수 있는 혜안은 찾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만 가능하겠죠.
우선 글이 매끄러워 네가 5년동안 시문학을 공부하였다는것이 입증되었다. 한국에서 좋은 추억 많이 만들고 가길 바란다.
나는 고향이 이북이여서 꿈에 가끔 고향모습이 보였는데 요즘은 안보인다, 한번 가보고 죽어야 할텐데...
우리네만 겪는 엄청난 비극. 내가 고향에 찾아가 느낀 감회를 피력하는 것이 왠지 실향민의 한 사람인 자네에게
죄송스런 감이 드는군. 용서하게나.
난 고향이 종로구 인사동 인데 추억이 하나도 없어. 그래서 시골이 너무 좋아요.
고향이 서울인 사람은 생의 중요한 한 부분이 결여된 것 같아 일말의 동정심마저 듭니다. 물론 자신의 과실은 아니지만.
'꿈에 본 내 고향'이란 노래가 있었지요? 그건 아마 실향민의 노래였던 것으로 기억 되는데,
돌이킬 수 없는 추억의 시간을 만난 감회, 고국에서 갖고 가는 가장 귀한 선물이겠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돌아간 후에도 한동안 반추하게 될 것입니다.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고향을 찾고 친구의 형님도 찾을수 있었는게 다행이지요. 나는 장충동에서 자랐는데 그동안 우연히 근처 호텔에 몇번 들게되어 살던델 찾아갔는데 알만한 사람들을 못만난건 물론 살던집이 어디있었는지도 전혀 감이 안가는더군요.
"고향에 찾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려고..."하는 가사가 생각나는군요. 그때 느꼈을 상실감 같은 것이 전해오내요.
오랫만에 오신 '고향사람',
오생리, 벌말 도깨비 바늘이 몰려와
'가지마오 가지마오' '나를 두고 가지마오' 하며
송공의 다리를 잡지 않던가요?
추가: 갈려면 혼자 가지 말고 날좀 데려가요, 하면서
다리가랑이에 쪽쪽 붙지요. 떼 놓기가 얼마나 힘드는데...
정확히 사진의 것이었습니다. 도깨비 가시라고도 부른다는군요. 박희민 씨의 여러가지 솜씨 늘 경탄해 마지않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날도, 간다고 이야기를 하고 가야하나? 아니야 분위기 break하지 말고...
그런 마음이었는데, 차대감 홍대감 밖의 소파에.....; 나 지금 가야해 하니까,
알았어. 마음편히 귀가. (꽤나 멀어요 ㅎㅎㅎ)미안합니다.
장시간 비행기 여행에는 '바른자세'가 최고라고 합니다.
take care n good luck, alway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