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p
“독서는 행복한 삶의 감미로움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고,
묵상은 그 감미로움을 발견하는 것이며,
기도는 그것을 청하는 것이고,
관상은 그것을 맛보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독서는 단단한 음식을 입으로 가져가는 것이고,
묵상은 그것을 잘게 씹어서 가루로 만드는 것이며,
기도는 그것을 맛보는 것이고,
관상은 기쁨과 새 힘을 주는 감미로움 그 자체입니다.
독서가 껍질에 머무는 것이라면 묵상은 그 속 깊은 데까지 뚫고 들어가는 것이요,
기도가 갈망하게 된 바를 청원하는 것이라면
관상은 얻게 된 감미로움을 누리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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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방이 있는 자리에 동일한 처지로 함께 현존하기!
하느님께서 사람을 ‘돕는다’는 것도 대개 이런 것이 아니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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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대기에 싸여 시골 여관 마구간의 구유에 누인 아기 안에서 하느님의 영원한 말씀을 알아 뵙고
(루가2,7참조),
별 볼일 없는 동네 나자렛 출신 목수 아들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를 알아 뵙고(마르8,29),
십자가에 달린 재수 더럽게 없는 한 인간 안에서 하느님의 아들을 알아 뵙고(마르15,39)
악인들 중 하나로 간주 된 사람 안에서 참으로 의로우신 분을 알아 뵙고(루카22,37)
‘죄가 되신 분’(2코린5,21)안에서 거룩함 자체이신 분을 알아 뵙고,
하느님 같은 건 눈을 씻고 보아도 없을 것 같은 십자가 형장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알아뵙는 것이 신앙의 눈입니다.
124p
스스로를 쪼개지 않고 이루어지는 사랑이 있던가요.
자신의 몸이 다 쪼개지고 갈기갈기 찢길 정도로 온전히 받아들여진 고통……
우리 주님의 한평생이 그런 것이었거니와,
그 한평생의 요약이 바로 만찬(마르14,22-24; 1코린11,23-26)이었다면,
이 만찬의 요약은 바로 십자가 사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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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야말로 사람과 사랑에 빠진 얼빠진 하느님,
바보 같은 하느님의 얼굴이니 말입니다.
이 사랑을 알아들은 이가 어떻게 덩달아 바보가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142p
용기를 내어 그분의 시선을 마주 바라보아야겠습니다.
그분이 얼마나 내 상처와 누추함, 벌거벗음에 함께 계시는지,
얼마나 나를 사랑하며 알고 계시는지, 깊이 바라보며 오래 머물러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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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은 모두 “흥, 지가 뭔데 감히…” 하며 예수님의 정체를 못 알아 뵙지만,
죄인인 나는 그분을 ‘그 예언자’로 내 구원자로 알아 뵈올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여인처럼, 뻔뻔스러울 정도로 자유롭게, 눈치 보지 않고, 계산 없고,
철없이, 그분에 대한 사랑을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164p
오직 하느님의 살아 계신 현존 앞에서만 내가 작다는 것, 작고 가난해져야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이미 충분히 작고 가난하다는 사실을 안심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될 때라야 비로소 교회 안팎의 사람들 앞에서도
몸에 밴 의인 행세, 지도자 행세, 어른 행세를 버릴 수 있게 됩니다.
211p
기도는 하느님께서 미리 정한 뜻을 바꾸셔서 내 뜻을 들어주시도록 조르는 과정이 아니라,
내 원의가 그분의 원의로 변해 가는 정화의 여정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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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제가 있는 곳보다 훨씬 낮은 곳에서 저를 올려다보며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
그 누구도 더 이상 될 필요가 없고
그 무엇도 더 이상 이룰 필요가 없는 사람의 기쁨과 배짱이 제 안에 성장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당신처럼 기꺼이 형제들의 노예가 됨으로써
우주의 큰 주인공 자리에 저도 모르게 들어가 있는 천복(天福)을 누리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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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하느님께 취하면, 하느님 아닌 모든 것의 취기(醉氣)에서 비로소 깨어납니다
(사도2,13 참조).
첫댓글 올려주신 멋진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