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 21: 17. 베다니로 가심 - 마 21: 19.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마 21: 17. 베다니로 가심 - 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 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
1] 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예수는 감람산 동쪽 기슭의 나사로와 그의 누이들의 집이 위치한 베다니에서 그의 수난의 마지막 며칠 밤을 유하셨던 것 같다.
* 마 26: 6 –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 막 11: 19 - 그리고 날이 저물매 그들이 성 밖으로 나가더라.
* 눅 21: 37 - 예수께서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
그가 예루살렘 성 밖에서 숙박했던 이유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의견이 있다.
Ⓐ 예루살렘성이 순례자들의 방문(訪問)으로 무척 붐볐기 때문에 베다니로 나오셨다고 하는 설이다.
로마 식민 시대 당시 유대 예루살렘의 명절에는 사람들이 약 270만 명 정도나 모였다고 한다.
Ⓑ 하나님이 정하신 때 즉 그가 체포, 구금되고 사형의 시간이 될 때까지 유대 산헤드린이 그를 체포할 수 없게 하기 위하여 위험한 예루살렘 성 안 보다는 성 밖에서 유하셨다고 하는 설이다.
아마도 예수께서는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베다니에서 밤을 보내셨을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예수께서는 천지만물의 주인이시다.
그는 예루살렘에 올라가려 하실 때 두 제자를 맞은편 마을에 보내셔서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어오게 하시며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무례한 것이 아니고 그가 온 세상의 참 주인이심을 증언한다.
그는 원하시는 것을 사용하실 수 있는 우주의 주인이시다.
둘째, 예수께서는 겸손히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그는 자기 소유나 제자들의 공동 소유의 말이나 나귀가 없으셨다.
그는 나귀 새끼를 빌려 타고 가셨다. 그것은 우리에게 교훈이 된다.
셋째, 예수께서는 성전이 강도의 소굴이 된 것을 노 하셨다.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성전의 제사들과 제물들을 돈벌이의 방식으로 생각하고 사용하고 있었다고 보인다.
종교의 부패는 가장 가증한 일이다.
넷째, 예수께서는 성전에서 맹인과 저는 자들을 고쳐주셨다.
그는 갈릴리에서도, 유대 땅에서도 병자들을 불쌍히 여기셨고 고쳐주셨다.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신 그는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다섯째, 어린아이의 환영을 받았다.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주님을 배척했다.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 스스로 찬양을 준비(準備)하시고 완전케 하신다.
* 눅 19: 40 -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3. 무화과나무가 마르다 ( 21: 18-22. 막 11: 12-14, 20-24 )
18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19 길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20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이르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마 21: 18. 시장하심 -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
이른 아침이긴 하지만, 예수님 일행에게 아침식사를 제공하는 자가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가난한 환경은 그의 사역에 아무런 지장이 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사역은 가난 때문에 좌절되지 않는다.
1] 이른 아침에
이 구절 때문에 예수께서 감람산에서 기도하시기 위하여 이른 새벽에 나왔을 것이라고 하는 견해와 베다니의 한 집에서 유숙하신 것이 아니라 길에서 노숙(露宿)하셨을 것이라고 하는 주장이 있다.
2]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시장하다'고 하는 이 표현은 예수의 '인성'(人性)을 분명히 드러내주고 있다.
따라서 이것은 예수께서는 신(神)이시며 인간의 육체는 임시로 취하셨기 때문에 아픔, 배고픔, 죽음 등의 고통을 느끼시지 못한다고 하는 가현설(Docdtism)을 반박할 수 있는 증거가 되고 있다.
예수님의 측근에 있던 사람들은 물질적 여유가 있는 부유한 자들이 아니었던 것 같다. 이른 아침이긴 하지만, 예수님 일행에게 아침식사를 제공하는 자가 없었던 것 같다.
이처럼 주께서는 비교적 가난한 환경에서 사역하셨다. 그러나 그런 환경은 그의 사역에 아무런 지장이 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사역은 가난 때문에 좌절되지 않는다.
마 21: 19.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 길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 길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
배가 고프셨던 예수께서는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있을까 하여 가까이 가셨다. 여기에 예수님의 인성(人性)의 증거가 있다. 사람이신 그는 배고픔을 느끼셨고 지식의 제한성을 가지셨다. 그의 인성은 우리의 것과 같은 참된 인성, 즉 육신적 연약성과 지식의 제한성을 가진 인성이셨다고 보인다. 그러나 그는 죄가 없으셨다.
* 히 4: 15 -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예수님의 무화과나무 저주는 부당한 그의 감정적 행위이셨는가?
무화과는 보통 열매가 먼저 생긴 후 잎사귀가 커진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잎사귀가 있다는 것은 열매가 이미 열렸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나무의 경우는 비정상적이었다. 열매가 열리지 않은 채 잎사귀만 무성했다.
이것은 선한 행위의 열매가 없이 종교적 형식들만 가득한 당시의 타락한 종교를 잘 나타내 주는 것 같았다. 예수님의 무화과나무 저주는 제자들에게 교훈을 주시기 위함이었다.
1] 길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유대 율법에 의하면 길가에 무화과나무가 있다고 하면 그 열매를 따 먹는 일이 허락되어 있었다.
* 신 23: 24-25 – 24 네 이웃의 포도원에 들어갈 때에는 마음대로 그 포도를 배불리 먹어도 되느니라. 그러나 그릇에 담지는 말 것이요 25 네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때에는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되느니라. 그러나 네 이웃의 곡식밭에 낫을 대지는 말지니라.
톰슨(Thomson)에 의하면 오늘날까지도 길가의 무화과나무는 모든 사람이 마음대로 취할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다고 한다.
지중해 연안 국가에서는 무화과를 '가난한 자의 양식'이라고 부른다고 한다(Hendriksen). 무화과나무는 풍요와 번영의 상징으로 나무 자체가 우람하고 보기에 아름답다.
* 왕상 4: 25 - 솔로몬이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살았더라.
* 왕하 18: 31 – 너희는 히스기야의 말을 듣지 말라. 앗수르왕의 말씀이 너희는 내게 항복하고 내게로 나아오라. 그리하고 너희는 각각 그의 포도와 무화과를 먹고 또한 각각 자기의 우물의 물을 마시라.
밑 둘레의 굵기가 약 1m, 높이가 5-6m나 되며 가지가 8-10m의 너비까지 뻗기 때문에 그 그늘은 기도와 명상과 휴식의 장소로 이용되곤 한다.
또한 잎과 꽃이 무성하게 되었을 때 그 열매도 함께 열리는데 이스라엘에서는 그 열매를 일 년에 두 번(태양력으로 6월과 9월) 혹은 세 번(6월과 8월과 12월) 딸 수 있다고 한다.
* 요 1: 48 -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2] 잎사귀 밖에 아무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푸른 빛깔을 띤 무화과 열매들은 대개 6월까지는 먹을 수 있을 만큼 완전히 익지 않아서 6월에 먹기에는 매우 껄끄럽지만 그래도 먹을 수는 있었다.
잎이 있다는 것은 비록 완전히 익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열매는 맺혔음을 암시한다.
마태는 이런 모든 것들을 그의 유대인 독자들이 잘 이해할 것이라 생각했으므로 '잎사귀 밖에 아무것도 얻지 못하시고'라고 간결하게 언급하였다.
문제는 막 11: 13에 의하면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보고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본문의 해결점이 된다. 그때가 무화과의 때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왜 예수가 이 특별한 나무, 곧 잎이 무성하기 때문에 눈에 잘 띄는 나무에 갔는가를 설명해 준다.
그 나무의 '잎들'은 '열매'를 맺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었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했다. 따라서 자신의 시장기를 메울 수 없으셨던 예수께서는 기억에 남을 만한 실물 설교의 기회를 포착(捕捉)하시고 그 나무를 저주했다.
그것은 제철이든 아니든 그것이 열매를 맺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이 마치 열매가 있는 양 무성한 잎만 자랑했지 실상은 아무 열매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6월에야 비로소 열매 맺는 무화과나무임에도 불구하고 4월에 벌써 그 잎을 냄으로써 '열매'에 대한 기대를 잔뜩 부풀리게 했다.
이 나무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상징하고 있다.
(1) 선민이라고 하는 자의식(自意識) 속에서
형식에 불과한 희생 제사를 위해 부지런히 성전을 오고 갔지만 단 한 번의 진정한 희생 제사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려는 메시아이신 예수를 거부하는 유대인들을 상징한다.
(2)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처럼
겉으로는 경건의 모양을 자랑하면서도 실제로는 아무 신앙의 열매도 맺지 못하는 유대인들의 이율배반적인 생활 태도를 상징한다.
(3) 이와 더불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크리스천이라고는 하지만 그에 어울리는 사랑의 계명들은 실천하지 못하고 입으로만 '주여, 주여'를 찾는(7: 21) 오늘날의 수 많은 교인(churchman)들을 가리킨다.
3]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는 팔레스타인에 있는 여러 나무 중에서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애용되고 있는 나무로 이스라엘을 상징했다.
* 호 9: 10 -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을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같이 하였으며 너희 조상들을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같이 하였거늘 그들이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저희가 사랑하는 우상같이 가증하여 졌도다.
* 욜 1: 7 - 그들이 내 포도나무를 멸하며 내 무화과나무를 긁어 말갛게 벗겨서 버리니 그 모든 가지가 하얗게 되었도다.
이 나무는 언약의 땅을 가리켜 '무화과나무의 땅'이라고 하는 표현에 사용되기도 하였다.
* 신 8: 8 -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그 열매는 가나안으로 정탐(偵探)갔던 사람들이 그 땅의 비옥함과 번영을 증명하기 위해 가져온 산물(産物) 중의 하나였다.
* 민 13: 23 – 또 에스골 골짜기에 이르러 거기서 포도송이가 달린 가지를 베어 둘이 막대기에 꿰어 메고 또 석류와 무화과를 따니라.
그리고 사람들이 무화과나무 그늘에 앉아 있는 것은 바로 평화와 안녕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 왕상 4: 25 - 솔로몬이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살았더라.
* 미 4: 4 -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의 입이 이같이 말씀하셨음이라.
* 슥 3: 10 -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무화과나무를 마르게 하시고 쳐서 죽게 하실 때는 바로 여호와의 진노의 날에 해당한다.
* 시 105: 33 - 그들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치시며 그들의 지경에 있는 나무를 찍으셨도다.
* 렘 8: 13 -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을 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 없어지리라. 하셨나니
* 호 2: 12 - 그가 전에 이르기를 이것은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내게 준 값이라 하던 그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거칠게 하여 수풀이 되게 하며 들짐승들에게 먹게 하리라.
따라서 예수의 무화과나무의 저주는 바로 여호와의 진노의 날이 임박해 왔음을 알리는 선포이다.
그가 삼년을 이곳 예루살렘에 와서도 열매(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따르는 제자)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이제는 그 나무(예루살렘)를 찍어버리겠다고, 즉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셨다.
* 눅 13: 7 – 포도원 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4]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마가복음에 의하면 무화과나무는 그들이 보는 그 자리에서 곧 마르지 않았다.
'곧'의 뜻인 부사 '파라크레마'(*)는 물건을 살 때 그 물건과 함께('파라') 돈('크레마')을 지불한다고 하는 즉각적인 현금지불의 뜻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마태의 본문에 의하면 무화과나무는 예수의 저주가 선포되는 동시에, 비록 그 외형은 그대로였지만 그것은 순간적인 연장일 뿐 이미 그 본질상 마른 나무로 바뀌었다(교환)고 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 사실은 결국 예수께서 지니신 신적 능력과 위엄을 보여 준다. 즉 예수께서는 종말의 때에 인류의 심판 주로 오셔서 그 외모(잎)가 아닌 내면(열매)의 유무(有無)를 관찰하시고 그에 준해 심판하실 것이다.
복음서들은 때때로 사건을 간략히 증거 한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던 날에 성전에 들어가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 때가 저물자 열두 제자들을 데리고 베다니에 나가셨다.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일이 있었고, 그 날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고 성전을 깨끗하게 하셨다.
매일 저물 때마다 그들은 성 밖으로 나갔다. 아마 그 다음날 아침, 그들이 지나갈 때에 저주받은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보았다.
마태복음은 이틀간의 사건을 한 사건처럼 간략히 증거 했다. 그러면 여기 ‘곧’이라는 말은 저주를 선언한 지 여러 날이 지나지 않고 하루 만에 라는 뜻이 될 것이다. 시장하신 예수께서는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있을까 하여 가까이 가셨다.
막 11: 13에는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라고 증언하였다.
여기에 예수님의 인성의 증거가 있다. 인간 예수님은 배고픔을 느끼셨고 지식의 제한성을 가지셨다. 그는 멀리서 무화과나무의 열매가 있는지 없는지 알지 못하셨다.
그의 인성은 우리의 것과 같은 참된 인성, 즉 육신적 연약성과 지식의 제한성을 가진, 그러나 죄는 없는 인성이셨다.
* 히 4: 15 -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예수님의 무화과나무 저주는 부당한 그의 감정 풀이셨는가?
무화과는 열매가 먼저 생긴 후 잎사귀가 커진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잎사귀가 있다는 것은 열매가 이미 열렸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이 나무의 경우는 비정상적이었다. 열매가 열리지 않은 채 잎사귀만 무성하였다. 이것은 선한 행위의 열매가 없이 종교적 형식들만 가득한 당시의 타락한 종교를 잘 나타내 주는 것 같았다.
3] 무화과 나무의 저주
(1) 예수께서 무화과나무 열매를 구하심
예수께서 베다니에서 주무시고 이른 아침에 예루살렘 성으로 오시다가 시장하셨다. 그래서 길가의 무화과나무에 가서 열매를 구하셨으나 열매가 없음으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다.
베다니에는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가 살고 있었으며, 예수는 예루살렘 방문 때마다 이 베다니에서 쉬셨다.
* 요 11: 1-2 – 1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2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 막 14: 3 –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 마 21: 17 - 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예수께서 이른 아침에 예루살렘 성으로 오시다가 시장하셨다고 하신 것을 보면, 아침 식사 이전에 베다니에서 출발하신 것으로 본다.
예수께서는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배고프고, 목마르고, 또 여행하실 때는 피곤을 느끼시기도 하셨다.
* 요 4: 6 -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이런 삶을 사신 것은 우리 인간의 질고를 지시기 위해서다.
* 사 53: 4 -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셨던 예수님께서 시장하게 지내신 것은 바로 그런 뜻으로 이해한다. 간고를 겪고 멸시를 당하신 것도 우리 인간들의 허물과 죄악 때문이었다.
(2) 예수께서 베푸신 기적
① 건설적 기적
예수께서는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다. 그 기적은 모두 인간의 생명을 살리거나 질병과 불구자를 고치시거나 귀신을 쫓아내시거나 배고픈 사람들에게 떡을 나눠 주시기 위해서였다.
때로는 풍랑의 위험에서 건져 주시기도 하셨으며 바다에서 고기를 많이 잡게도 하셨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 인간들의 생명과 존엄성 회복에 근거하고 있다. 모두 건설적인 성격의 기적이었다.
예수께서 이런 기적들을 행하실 때는 생물이나 무생물을 동원하셨으며, 귀신까지도 동원하셨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전능성을 나타내신 것으로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예수의 의지에 순종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② 유일한 충격적 기적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신 일 가운데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은 그 성격이 유독 충격적(저주하여 죽게 함)이었다.
모든 기적이 건설적이고 유익한 결과를 가져왔던 것에 비하여 무화과나무의 저주는 생명을 죽게 한 기적이었다.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이렇게 충격적인 기적을 행하실 수가 있는지 이 일에 대하여 상고해 보기로 하겠다.
(3) 무화과나무의 저주
① 직접적인 의미
예수께서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직접적인 뜻은 '불순종'에 있었다.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시고자 하시면 물이 예수를 가라앉지 않도록 순종했다.
* 마 14: 24-33 – 24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26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27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28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32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풍랑도 예수의 꾸지람을 듣고 순종하였다.
* 눅 8: 22-25 – 22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23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24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25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
물고기도 예수의 뜻에 따라 세금 낼 돈을 물고 왔다.
* 마 17: 24-27 – 24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이르되, 너의 선생은 반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25 이르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이르시되,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 관세와 국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26 베드로가 이르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27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예수의 뜻을 따라 오천 명을 먹이고도 남을 만큼 증식했다.
* 막 6: 34-44 – 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35 때가 저물어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날도 저물어가니 36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37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38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이르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39 제자들에게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40 떼로 백 명씩 또는 오십 명씩 앉은지라. 41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시매 42 다 배불리 먹고 43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44 떡을 먹은 남자는 오천 명이었더라.
죽은 나사로를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 하시니 곧 순종하여 살아났다.
* 요 11: 17-44 – 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20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28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29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30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시더라. 31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3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34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37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원하시면 모든 것이 이에 순종했다. 그러나 오직 무화과나무만큼은 예수의 뜻에 불순종했다. 예수의 요구는 곧 창조주 하나님의 요구(뜻)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뜻에 부응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이 무화과나무는 그것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유일하게 예수의 저주를 받았다.
예수는 생명을 줄 수도 있고 빼앗아 갈 수도 있다. 건설할 뿐 아니라 능히 파괴하기도 하신다.
② 간접적인 의미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은 성전청결 사건과 연관하여 간접적으로 교훈하는 바가 있다.
성전청결이 율법 종교의 종말에 대한 경고인 데 비하여 무화과나무의 저주는 유대 나라의 종말에 대한 경고다. 무화과는 유대 나라의 국화다. 무화과의 죽음은 곧 유대나라의 멸망을 뜻한다.
* 시 105: 33 - 그들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치시며 그들의 지경에 있는 나무를 찍으셨도다.
* 호 2: 12 - 그가 전에 이르기를 이것은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내게 준 값이라 하던 그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거칠게 하여 수풀이 되게 하며 들짐승들에게 먹게 하리라.
* 렘 8: 13 -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을 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 없어지리라. 하셨나니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 민족은 하나님을 섬기되 극도의 위선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장로들의 유전을 더 중히 여겼다.
* 마 15: 3 -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예배는 외식주의로 전락하고, 교권은 탐욕에 빠져 있었다.
* 마 23: 23 -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민족은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헤롯당으로 분열되어 있었으며 지도자들은 회칠한 무덤과 같이 생명이 죽어 있었다.
* 마 23: 27 -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하나님은 타락하여 창조의 목적에서 떠나 변질되면 심판하신다. 유대는 멸망할 것이며, 그날은 임박해 있었다. 이 경고는 오늘 우리 교회에도 적용된다.
무화과나무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가에 서 있었듯이 교회는 언제나 천국으로 가는 길가에 서 있다. 그러나 교회가 열매를 맺지 아니하여 그리스도의 기대(요구)에 어긋나게 되면 심판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탐욕과 비정과 위선에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
|
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께서는 천지만물의 주인이시다.
💖늘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듯 언제나 새롭고
희망찬 하루 당신의 오늘 하루를 응원합니다.💖
예수께서는 천지만물의 주인이시다.
설교 감사합니다.
예수께서는 천지만물의 주인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