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 가해 11월30일 목요일 [(홍)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수도회] 철저한 버림과 떠남을 통한 사랑의 응답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로마 10,9-18
† 복음 마태 4,18-22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어망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안드레아
형제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이런 부르심이 일상생활 중에서
일어난다는 점에 먼저 머무르고 싶습니다. 시몬과 안드레아 형제,
야고보와 요한 형제 모두, 생업에 몰두하다가 부르심을 받지
않았습니까? 그러고는 곧바로 예수님을 따라나섰지요.
흔히 우리는 성스러운 장소에서, 특별한 계기가 있어야, 또는 특수한
사람만 주님의 부르심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복음처럼,
일상생활 속에서 이런 부르심이 있다는 점을 묵상했으면 합니다. 심지어
지쳤거나 고통 중에도, 억울할 때마저도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기를
요구하신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우리도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상대방에 대한
나의 작은 배려와 희생, 인내가 그를 편안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나의 사랑과 관심이 상대방에게 평화를 가져다줄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겉으로는 자신만만하고, 아무 문제가 없는 듯
당당하게 행동하지만, 사실 속으로는 얼마나 많은 문제와 걱정, 아픔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런 만큼 자신의 문제를 진지하게 들어줄
사람, 자신의 속마음을 알아주고 이해해 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먼저 다가가 그들을 받아 주고, 그들의 벗이 되어
준다면, 우리는 분명 사람 낚는 어부가 될 것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모든 것이 기적인것처럼
2017년 가해 11월30일 목요일.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제1독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10,9-18
복음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18-22
어떤 사람이 햇볕에 그을린 건강한 피부색을 갖기 위해 바닷가에
누워서 선탠(Suntan)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햇빛이 너무
눈부시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얼굴에 손을 올리고 잠든 것입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여러분의 예상처럼 이 사람은 이상한 모양의
선탠을 하게 되었습니다. 얼굴에 손가락 모양이 남겨진 것이었지요.
여기서 책임을 묻는다면 누구에게 물을 수 있을까요? 그렇게 피부를
그을리게 만든 태양에게 잘못이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손을 올리고
잠든 이 사람에게 있다는 것을 그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이 사람이 태양에게 잘못을 묻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게 잘못을
묻는다면 이상한 사람 취급을 하거나 판단력이 부족한 사람을 생각할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사람들이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과 시련의 문제에 대해
하느님께 원망을 드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자신이 무슨 잘못이
있다면서 말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생각에 앞서서 하느님 아버지의
깊은 뜻이 있다는 것을 먼저 헤아릴 수 있다면 어떨까요? 부정적인
생각을 넘어서,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을 뛰어넘는 하느님 아버지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는 오직 두 가지 방법밖에 없다. 하나는 아무것도
기적이 아닌 것처럼 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이 기적인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모든 것이 기적인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이야 말로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하는 사람이 아닐까요? 그리고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매 순간
감사함을 체험하면서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은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입니다. 이 축일에 맞춰서 복음은
안드레아 사도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는 장면이 나오지요. 그는 잘
알다시피 어부였습니다. 그의 형 베드로와 함께 호수에서 어망을
던지고 있을 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런데 이 부름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이렇게 부르심에 곧바로 따른다는 것이
과연 쉬울까요? 바로 평소에 이미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관심과 사랑을
갖고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기도했기 때문에 아무런 이유나 핑계 없이 곧바로 따를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사도들처럼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때,
매순간의 삶이 기적임을 체험하면서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방치된 정원에 잡초가 자라듯 노력하지 않는 사랑은 어느새 다른
감정들에 의해 가려진다(앙드레 모로아).
성 안드레아 사도.
마음의 문을 여십시오(‘좋은 글’ 중에서)
두 손을 꼭 움켜쥐고 있다면 이젠 그 두 손을 활짝 펴십시오. 가진 것이
비록 작은 것이라도 그것이 꼭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나누어 주십시오.
이는 두 손을 가진 최소한의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두 눈이 꼭 나만을 위해 보았다면 이젠 그 두 눈으로 남도 보십시오.
보는 것이 비록 좁다 할지라도 도움이 꼭 필요한 사람을 본다면
찾아가서 도움을 주십시오. 이는 두 눈을 가지고 해야 할 임무이기
때문입니다.
두 귀로 꼭 달콤함만 들었다면 이젠 그 두 귀를 활짝 여십시오. 듣는
것이 비록 싫은 소리라도 그것이 꼭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들어주며
위로 하여 주십시오 이는 두 귀를 가지고 함께 할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입으로 늘 불평만 하였다면 이젠 그 입으로 감사 하십시오. 받는 것이
비록 작다 해도 그것을 감사하는 사람과 손잡고 웃으면서
고마워하십시오. 이는 고운 입 가지고 살아 갈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꼭 닫으면서 살았다면 이젠 그 마음의 문을 여십시오. 마음
씀이 비록 크지 않더라도 그것을 주변의 사람을 향하여 미소로써
대하며 사십시오. 이는 내가 사랑을 받고 나눠야 할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연다면 어떨까요? 삶 전체가 기적처럼 여겨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렇게 우리와 늘 함께 하시는 주님을 느끼면서 기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갈릴래아의 배를 상징하는 이스라엘 막달라 성당의 제대.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철저한 버림과 떠남을 통한 사랑의 응답 -
기 경호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11월30일 목요일.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마태 4,18-22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마태 4,20)
철저한 버림과 떠남을 통한 사랑의 응답
갈릴래아의 벳사이다 출신인 사도 안드레아는 어부였습니다
(마태 4,18). 그는 베드로 사도의 동생이자(요한 1,41)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습니다. 공관복음서에 따르면 그는 베드로와 함께 가장 먼저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 받습니다. 한편 요한복음에 따르면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던 그가 요르단강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뒤따라갔다가
맨먼저 그분을 알아봅니다. 그리고는 형 베드로를 예수님께
이끌었습니다.
안드레아 사도는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셔 시몬의 장모를 낫게
했습니다. 또 예루살렘 멸망과 세상 종말이 언제 일어날지 질문했고,
예수께서 오천명을 먹이실 때 한 소년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다고 그분께 알려드립니다. 그는 예수를 뵙게 해 달라는 그리스인의
청을 그분께 전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는 예수께서 승천하신 뒤 다른
이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남아 성령을 기다렸습니다(사도 1,12-14).
그렇게 안드레아 사도는 예수님 가까이 머물렀고 그분을 갈망했습니다.
나아가 그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직접 깨우치고 체험하여
열정적으로 선포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예수께서 승천하신 뒤
예루살렘을 비롯해서 러시아 남부에서 발칸반도를 거쳐 희랍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선포하다가 체포되어 에케오 총독에게 심문을 받고
십자가에 X자로 못 박혀 순교했습니다.
안드레아 사도는 형장에 끌려가 죽음을 앞두고 십자가 앞에 꿇어
두팔을 쳐들고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고 합니다. "내가 바라고 사랑하며
오랫동안 찾던 영광의 십자가여! 너를 통하여 나를 구하신 주님께서
나를 받아주시도록 나를 빨리 이 세상에서 빼내어 주님 곁으로 가게
해주오." 그는 그렇게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주님을 얻었고, 생명의
주인이신 그분께 자신을 남김없이 되돌린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서 부르시어 제자로 삼으십니다. 그들이 먼저 청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일방적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신 것은 오직 '사랑의
독단' 때문이었습니다. 이렇듯 주님의 부르심은 사랑의 초대입니다.
안드레아 사도는 그 사랑에 기꺼이 응했고 그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
죽기까지 쏟아부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안드레아 사도를 본받아 주님의 사랑의 부르심을 깊이 새기고
살아내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분께서
사랑으로 부르시기에 감사한 마음으로 기꺼이 응답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은 “곧바로”(4,19. 21) 이루어져 할 것입니다.
사랑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며 긴급한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부르심에 대한 응답은 버림과 떠남을 전제로 함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토록 오랫동안 애정을 가지고 해오던 기존의 삶의 방식의
방편들인 그물과 배, 가족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처럼 온전히
떠나야 합니다. 철저히 버림으로써 자신을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가난의 상태가 됩니다. 그때에야 진정 예수님과 복음이 선포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단순하게 응답하고, 철저한 버림과 떠남을 통해, 죽기까지
하느님 나라의 진리와 선과 사랑을 열정적으로 선포했던 안드레아
사도의 거룩함을 살아냈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마태 4, 22)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11월30일 목.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마태 4, 22)
잠시 머물렀다 떠나가는 우리의 시간입니다.
버려야 따를 수 있고 버려야 되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버리라 하십니다.
버려야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버리지않고서는 새로워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라야 할 삶의 자리는 내려놓고
버리는 지금 우리의 시간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하기에
그 무엇에 앞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버려야 제대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자신의 것을 버리고 내려놓는 진정한 사랑입니다.
성 안드레아 사도또한 우리에게 버리고 따르라 말씀하십니다.
버려야 예수님을 만날 수 있고 버려야 예수님 안에
머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원] 사도 성 안드레아 축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11월30일 사도 성 안드레아 축일
복음: 마태 4,18-22: 즉시 그물을 버리고 그분을 따랐다
안드레아는 “남성적인” 이란 뜻으로 친절하고 항상 준비되어 있고
열려진 마음을 가진, 열심한 사람으로 나타난다. 벳사이다의 요나의
아들이며(마태 16,17), 베드로의 동생이었다. 그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고, 거기에서 사도 요한을 알았으며 그와 함께 처음으로 예수를
따랐고, 베드로를 예수님께 인도하였다(요한 1,35-42).
사도단에서 안드레아 사도의 역할을 그리 많지 않으나 매우 의미 있는
일들이었다. 굶주린 군중 앞에 안드레아는 예수께 어린 아이가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드린 일이
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그 아이가 내어놓은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부르게 하신 기적을 행하셨다.
전승에 의하면 안드레아 사도가 자신의 사도직을 그리스와
소아시아에서 폈다고 전하고 있다. 이 전승에 의하면 사도는 소위
“성 안드레아의 십자가”라는 X형으로 된 십자가 위에서 Patrasso에서
순교하였다고 한다. 바오로 6세 교황은 성 베드로 성당에 보관되어
있던 안드레아 사도의 유해를 동방 교회에 되돌려 주었고, 후에
Patrasso로 옮겼다.
안드레아 사도는 사도들 중에 첫째 “선교사”였다. 처음 부름 받을 때
함께 있던 사도 요한이 그것을 증언하고 있다. 예수님을 만나고 즉시
안드레아는 자기 형 시몬에게 증언하고 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그리고 그를 예수께 데려 갔다(요한 1,41).
우리의 성체성사도 “우리는 주님을 만났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적극적인 지향으로 미사에서 출발하지 않고, 다른 형제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여 그들이 우리와 함께 아버지의 식탁에 모이도록 서두르지
않는다면 소용없는 것으로 남게 될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시고 계시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자마자 곧바로 그물을 버렸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즉각적인 순종을 바라신다. 그러면 이 가난한 두 어부가
버렸으면 무엇을 얼마나 많이 버렸겠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사람의 재산보다도 그 마음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사람은 많은 것을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와 안드레아가 탐내는 마음과 무엇을 소유하려는
마음을 버렸을 때, 그들은 많은 것을 버린 것이다. 자기가 소유한 것과
그것을 가지려는 마음 자체를 버리는 사람은 많은 것을 버린 사람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따른 그 가난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아
마음대로 탐낼 수 있었던, 그들보다 잘 사는 사람들이 가진 것만큼
많이 버렸다. 그 버림을 얼마나 큰마음으로 이루었느냐이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19절)
이 말씀을 따라 어부들은 하늘의 아버지를 얻기 위해 세상의 아버지를
떠났다. 그리고 세속적인 낚시에서 거룩한 낚시로 바뀌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물고기를 낚듯이 인류의 구원을 위해 깊은 오류의 바다에서
사람들을 낚도록 부르셨다. 그리고 사람들을 미혹시키는 세상, 늘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며 누구에게도 안전하지 않은 세상에서 그들이
하느님 말씀의 그물로 사람을 잡도록 사도로 삼으셨다.
사도들은 즉시 그물을 버림으로써 세상의 것을 소유한 채로는 누구나
거룩한 것에 도달할 수 없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이렇게 살면서 결국은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 4,20)하고 자신 있게 말하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른 사람들의
복음선포는 은총 체험을 통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사도들의 믿음과 순종을 보자.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들은
한창 일하던 중이었지만, 미루거나 꾸물거리지 않았다. 엘리사가
엘리야를 따라갔을 때 그랬던 것처럼(1열왕 19,20-21 참조), 그들은
‘집에 가서 식구들하고 이야기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20.22절) 하느님의
뜻 앞에는 한 치도 망설임을 허용하지 않으시는 모습이다.
오늘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고 계시다. 이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응답을 드리며 살고 있는지, 듣기는 하면서도 실천을
올바로 하면서 그분을 따르는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우리도 지금 이
순간에 하느님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우리의 생각과 고정관념을 모두
버리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자꾸 뒤를
돌아다보는 생활을 하지나 않는지 살펴보고 주님 앞에 나의 자세를
올바로 가져야 할 것이다.
좀 더 우리의 삶의 자세를 하느님 안에 이어가게 하는 삶이 될 수
있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기심, 교만
그리고 집착을 피하면서 주님의 부르심에 언제나 응답을 드리며 실천할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약한 신앙을 굳게 해주시도록
기도하자.
- 수원교구 상하 성모세 성당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서울]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지난 주일에는 마치 제가 마르타가 된 것 같았습니다. 마리아처럼
주님의 발치에서 조용히 있고 싶었습니다. 몸도 불편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날은 오래전부터 약속되었던 일들이 있었습니다. 전주교구
복자성당에서 특강이 있었습니다. 장충동 분도회관에서 피정
파견미사가 있었습니다. 교구장님의 축일 모임이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가졌던 주님과의 깊은 친교는 없었지만 마르타처럼 분주하게 하루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아침 일찍 기차를 타고 전주 역에 도착하니 외삼촌께서 저를 기다려
주셨습니다. 성당에 도착하니 고모부님께서 저보다 먼저 오셔서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조카를 위해서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강의를
마치니 시골의 형님들, 누님들이 반갑게 맞이해 주셨습니다. 본당
신부님께서 오늘 강의를 듣는 분들의 상당수는 다른 본당에서 오셨는데
아마도 저를 보기 위해서 오신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전주는 저의
고향이기 때문에 고향의 가족들이 많이들 오신 것 같았습니다.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형님께서 맛있는 감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긴 하루였지만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일부러 시간을 내서 고향을 방문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제게 일을 통해서 고향을
방문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쩌다 마르티처럼 바쁜 하루를 보냈지만 늘 분주한 시간을
보내시는 분이 있습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시는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님이십니다. 지금도 교황님의 미얀마 방문에 함께 하시기 위해서
미얀마에 계십니다.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님을 위해서 기도를
부탁드리면서 제가 곁에서 본 추기경님의 모습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추기경님은 소탈하십니다. 교구장이 되신지 5년이 되셨지만 한 번도
축일 행사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번에도 교구청 식구들과 간단하게
저녁을 하셨습니다. 격식과 절차를 굳이 따지지 않으십니다. 마치
동네에 사시는 인자하신 어르신 같습니다. 소탈하신 만큼 함께 있는
신부들에게도 많은 것을 요구하시지 않으십니다. 저희들이 일을 할 수
있도록 격려해 주시고, 지지해 주십니다.
추기경님은 조금 느리신 것 같지만 꾸준히 일을 하십니다. 산행을 하실
때도 천천히 오르시지만 한 번도 포기하신 적이 없습니다. 탁구를
시작하신지 1년이 조금 넘으셨지만 지금은 상당히 잘 치십니다. 역시
꾸준히 연습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느린 거북이가 빠른 토끼를 앞설 수
있었던 것은 꾸준함 때문이었듯이, 한국교회의 어르신이 되신 것도
추기경님의 꾸준함 때문인 것 같습니다.
추기경님은 기록의 달인이십니다. 서품자들과의 면담도 하나하나
기록하십니다. 저는 그렇게 기록을 하지 않는 편입니다. 추기경님께서는
다음에 면담을 하게 될 경우에는 전에 기록하셨던 노트를 꼭
참조하십니다. 저는 잊고 있었던 일들도 추기경님께서는 기억하고
계십니다. 저와 면담을 하셨을 때 기록하셨기 때문입니다. 적는 사람이
그렇지 않는 사람보다 앞선다는 ‘적자생존’의 법칙을 잘 알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서품자들에게 ‘지금 나의 십자가는 무엇인가?’라고
질문하셨습니다. 학업이 십자가인 친구도 있었고, 나이가 많은 것이
십자가인 친구도 있었고, 건강이 십자가인 친구도 있었고, 인간관계를
잘 맺지 못하는 것이 십자가인 친구도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나의 욕심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십자가인 친구도 있었고,
시기와 질투가 십자가인 친구도 있었습니다. 나뭇잎은 바람에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십자가가 없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저 역시도
교구장님의 질문을 듣고,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지금 나의 십자가는
무엇일까?’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서품자들을 보셨다면 아주 흡족했을 것
같습니다. 준비된 사목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이 아니라, 신학교라는 못자리에서 신학, 영성,
철학을 공부한 신학생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곧 사목의 일선에서 새
출발을 하게 될 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준비한
사목의 그물을 힘차게 던지시기 바랍니다!’
오늘 하루를 지내면서 ‘나는 누구인가? 하느님께서 나를 어떻게 이끌어
주셨고, 나는 어떻게 응답하였는가? 지금 나의 십자가는 무엇인가?’를
묵상한다면 11월의 마지막을 피정하는 기분으로 지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따름으로서 얻게되리라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7년 가해 11월30일 목요일 성 안드레아사도 축일(마태4,18-22)
따름으로서 얻게 되리라.
축일을 맞이한 분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리며 사도의 삶을 잘 살 수
있는 은총을 입으시길 기원합니다. 제자들은 처음부터 대단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다른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기꺼이 따름으로써 큰 믿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온전히 따르려니까
자기의 모든 것을 버려야 했고 마침내 버림으로써 주님을 얻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삶의 시작은 단지 순명으로써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과 행동의 변화와 더불어 무엇보다도 주님을 따름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리재고 저리재고 하지 말고 "곧바로" 버리고
떠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약에 주저한다면 그것은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무엇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시 응답할 수 있는 영혼은
자유롭습니다. 도전할 때 새 일을 만날 수 있고 또 그 안에서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순명과 실행을 통해서 주님의 섭리와 안배를 깨닫게
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첫 말씀은 ‘나를 믿어라’
하지 않으시고 ‘나를 따라라’하셨습니다. 믿어서 따르는 것이 아니라
따름으로 확고하게 믿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곧바로'
따를 수 있는 믿음을 지닐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안드레아 사도는 시몬 베드로와 형제지간 입니다. 특별히 요한과 길을
걷다가 예수님을 만난 일이 있는데 그는 곧장 집으로 달려가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1,41)하며 형에게 말하고 예수님께 자신의 형을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에게도 소개하였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요한6,8-9)를 가진 아이를 예수께 데려간 사람도
안드레아입니다. 그는 혼자만 메시아를 따른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소개하는 열성을 보였습니다. 그는 보고 들은 것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예수님 곁에서 예수님의 생활에 참여함으로써 삶의 쇄신과 회개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체험을 전해야 합니다. 마태
복음사가는 말합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마태5,16). 주님을 따름으로서 믿음을 견고케 할 수 있듯이, 믿음이
약한 이들이 우리를 보고 믿음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되도록 먼저
우리의 믿음을 다져야 하겠습니다.
큰 나무는 잘 부러지지 않고 큰 강물은 소리를 내지 않으며 깊은 샘물은
마르지 않는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인답니다.
예수님께서 크신 분이셨듯이 우리 모두가 큰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믿음의 모범과 표양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과 줄다리기 하지
말고 곧바로 따릅시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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