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5일 대구에서 열린 방정환이야기마당에 앞서 미리 대구에 도착하여 대구 근대 골목길을 추연창 선생과 함께 둘러보았다.
대구 동학의 발자취를 찾아서 1
대구에는 경북 일대를 통괄하던 대구대교구가 있었다.
대구교구에서 활동한 주요한 인물은
홍주일, 이채일, 신상태, 정운일, 남형우, 변상태 등이다.
● 1914년. 7월~8월 / 23개 대교구를 37개 대교구로 개편, 경상북도의 경우
대구 대교구 교구장 신태련 = 대구부 교구(申泰練), 성주군 교구(金乾熙), 영천군 교구(李菜一), 안동군 교구(李鐘燁)
경주 대교구 교구장 김진용 = 경주군교구, 울산군교구
⚫ 이채일 : 제1회 연성수련생(1912.4.15.~49일기도), 법문전수(1914.4) 73인 중 1인. 1871년 영천군 성내동 출신. 1907년 입교. 봉훈, 도사, 신포덕 1등포상(1911). 영천군교구장, 경상지역 포덕사, 제2구종법사, 영천종리원부령(1934.1) 등
⚫ 1922.11월 종법원 포덕사
- 전희순 : 창원, 진주, 사천, 김해, 하동, 울산, 창녕, 밀양, 양산, 남해, 함양, 합천, 함양, 거창, 의령, 고령, 함안, 산청,
- 황태익 : 동래, 통영, 고성, 의성, 군위, 칠곡, 성주, 김천, 선산, 상주, 문경, 예천, 영주, 봉화, 울릉도
- 이채일 : 달성, 경산, 영천, 경주, 영일, 영덕, 영양, 청송, 안동,
⚫1922년11월 신교헌으로 당선된 각교구 종리사
- 김천 배세창, 영천 이종원, 성주 권기현, 용담전교실 엄기조,
▶권기현. 1887상주군 월항면 장산동 출신. 성주군교구전교사(1918.5), 성주군교구장(1921.4), 성주군종리사, 포덕과대표(1923)
▶이종원. 숭암.1874 영천군 화동면오미동 출신. 1911년 입교. 도사, 전교사, 영천군교구 금융원(1914.11), 공선원(1923.5), 영천군종리사(1922.9)
홍주일 洪宙一 1876(고종 13)∼1927. 독립운동가.
대구 출신. 1915년 1월 15일달성군 수성면 안일암에서 시회(詩會)라는 명목으로 모임을 가지고 윤상태(尹相泰)·서상일(徐相日)·이시영(李始榮) 등과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朝鮮國權回復團中央總部)라는 비밀결사를 만들어 기밀부장으로 활동하다가 붙잡혀 대구형무소에서 1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하던 1916년대구에 명신학교(明新學校)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취임하여 학생들에게 조국광복의 기수가 될 것을 역설하고, 광복회·의용민족대동단 등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각 민족단체의 지도자들과 계속 연락을 취하였다.
1919년 3월, 서울의 이갑성(李甲成)과 연락을 취하면서 김태련(金兌鍊)·이만집(李萬集) 등과 대구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던 중 3월 3일 일제에 예비검속되어 다시 2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대구에서 교남학교(嶠南學校)를 설립하고 교육을 통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다가 일제에 의하여 교직을 박탈당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申相泰. 1889. ~ 1951. 대구대교구 서기(1915.1), 전제원(1916.1~1917.7), 금융원(1917.1) 애족장 (90) 경상북도 칠곡(漆谷)군 약목(若木)면에서 태어났다. 1909년 신민회 계열의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한 비밀 청년단체로서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안희제(安熙濟) 이원식(李元植) 남형우(南亨祐) 이시열(李時說) 배천택(裵天澤) 등 8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창립하여 지하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5년에는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 중앙총부에서 활동하다가 한때 체포되기도 하였다. 1927년 2월 자치론을 비판하고 절대독립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新幹會)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하여 신간회 김천지회(金泉支會)를 조직했다.
광주학생사건을 지원하기 위하여 신간회가 민중대회를 준비하던 중 간부들이 다수 체포됨에 1930년 11월 중앙집행위원회를 개최해서 새 간부를 선출할 때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鄭雲馹 천도교에서 운영하는 대구명신여학교 교감(1912.7.2.~1913.2.10.), 대구교구 전제원(1914.6.5.~ ), 교구서기(1914.8)
옛 천도교 대구시교구가 있던 곳.
천도교 대구교구장을 역임한 홍주일은 3.1운동이 일어나기 4년전인,
1915년 1월 15일 대구 앞산 안일사에서 시회(詩會)라는 명목으로 모임을 가지고 윤상태(尹相泰)·서상일(徐相日)·이시영(李始榮) 등과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朝鮮國權回復團中央總部)라는 비밀결사를 만들었고,
이 비밀결사의 본부는 천도교 대구교구였다.
아래는 대구시교구의 옛터로 추정되는 골목.
우현서루 터. 대구은행 자리.
천도교에서 경영에 참여하였던 학교가 대구에도 있었다. 교남학교과 명신여학교. 교남학교는 지금의 대륜고등학교로 바뀌었고 명신여학교는 복명초등학교로 되었다.
교남학교가 처음 출발했던 곳이 우현서루.
● 1910년 이후 천도교에서 직간접으로 간여한 사학
용산 - 양영학교, 양덕여학교
마포 - 보창학교, 삼호보성소학교
청파동 - 문창보통학교
교동 - 오성학교
전주 - 창동학교
대구 - 교남학교, 명신여학교
청주 - 종학학교
안동 - 봉양의숙
선천 - 보명학교 등
● 천도교에서는 전국적으로 관리하는 학교가 많아지자 관리규정을 종령81호로 제정. 1911.6 마련, 1912년 1.19개정 공포
- 직접, 간접 두종류의 학교로 구분하였다.
□ 직접 : 설립 또는 인계한 것, 현기관에서 통괄. 지방에 有한 것은 교구장에 위임도 함
□ 간접 ; 보조금 지급. 보조금은 학교장이 금융관장에게 직접 청구.
교남학교-대륜고등학교
천도교가 보성학교(현 고려대학교 전신), 동덕여학교, 명신여학교에 관여한 것 못지않게, 지역 교육계에도 깊이 영향을 끼친 사건이 바로 대구 교남학교(현 대륜학교 전신) 설립과 경영이다. 대구 교남학교는 홍주일, 김영서, 정운기 3인이 설립하였고, 초대 교장은 정운기가 맡았다. 청도 운문사람인 홍주일은 대구 안일암(현 앞산 안일사)에서 시회를 가장하여 도모되었던 조선국권회복단 사건(1915)의 주역이다. 홍주일은 조선국권회복단 사건으로 인해 일 년여 복역하고 나와서도, 광복회 의용민족대동단 등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요시찰인물이던 홍주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만집 백남채 정재순 등과 함께 대구 3·1운동을 주모하였다. 왜경은 서울에서 의암 손병희 등의 주도로 3·1운동이 터지자, 홍주일을 예비검속하여 감옥에 처넣어버렸다.
3·1운동 복역 후 출옥한 홍주일, 김영서 등은 새로운 민족학교를 짓기로 하고, 교남학교를 창설할 것을 완전 합의하였다. 첫 교사는 이장가의 우현서루로 정해졌다. 지금의 대구은행 북성로 자리에 들어섰던 우현서루는 소남 이일우 선생이 사비로 중국 등지에서 1만여 권의 서적을 수입, 청년들을 위한 공간으로 제공되었다. 우현서루 이후 교남학교는 대구 남산동으로 정해졌다. 교남학교가 서있던 남산동에는 오랫동안 교남학교의 옛 건물을 거의 유지하고 있었으나 지난 1, 2년 사이 반월당 삼정코아란 건물이 들어서면서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이 교남학교 3인 설립자 중 한 사람이자 교편을 잡았던 홍주일(당시 천도교 대구교구장)의 장례식은 학교장으로 치러졌다. 모든 존재는 한울님을 가슴속에 모시고 사는 평등한 존재라는 시천주 사상을 바탕에 깔고 있는 천도교 대구교구장이자 대륜학교 설립자 홍주일 선생이 가던 날, 하늘에서는 애도의 폭우가 쏟아졌다.
대구 명신여학교의 '페미니즘'
천도교의 여성운동은 우리나라 여성운동사에서 가장 초기를 장식한다. 천도교의 여성에 대한 관심은 교단내 여성(내수도라 일컬음) 모임인 내수단(오늘날 천도교 여성회)뿐만 아니라 여성운동, 여성교육운동 등 여러 갈래로 나타났다. 지역에서 천도교가 여성교육에 관심을 보인 현장은 대구 명신여학교이다.
천도교는 경영난에 빠진 대구명신여학교를 인수, 경영하다가 김울산 여사에게 넘겼다. 대구 명신여학교는 순종이 대구를 순시하면서 내린 하사금 200원을 종자돈으로 1910년 8월 26일, 대구 여성의 개화교육을 위해 문을 열었다. 김울산 여사가 인수한 이 학교는 오늘날 복명초등학교로 1백 년 역사를 이어오는 ‘장수 학교’이다. 최미화기자 magohalm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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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약령시
대구제일교회와 교남YMCA
영남대로 대구구간
영남대로는 수운대신사께서 경주에서 체포되어 영천-대구로 이송되었고,
또 대구에서 과천으로 다시 대구감옥에 갇히는 동안 고초를 당했던 길이다.
추연창 선생께서 문화해설사 역할을 톡톡히 하셨다.
관덕정 터.수운대신사께서 참형당하신 곳.
염매시장. 이 시장안에 곡주사라는 식당이 있다. 대구학생운동의 요람의 역할을 했다는 식당. 이 식당에 문화원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추선생과 막걸리 한잔을 하고 관덕정 터를 둘러보았다.
대구지하철 1, 2호선이 교차하는 반월당 사거리. 현대백화점 앞에 순도비추진위에서 순도비를 추진하였으나, 순도비 명칭 등의 문제로 아직 순도비는 세우지지 않고 았다. 자전거 뒤 화단 터를 대구시에서 순도비세울 자리로 제공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다시 추진하여 순도비가 세워질 수 있기를 바랄뿐이다.
순도비건립추진위의 조감도 http://cafe.daum.net/choecheu-martyr-grav/QaKq/53
순도비 건립 관련 기사 링크 http://blog.daum.net/muaedongcheon/1477
최제우나무
종로초등학교 교정에 있다.
가운데 전봇대 있는 곳이 경상감영 감옥터. 이곳에서 수운대신사께서는 모진 고문을 당하셨다.
아래사진은 이근의 가톨릭성당. 순교자들을 잘 기리고 있다. 서울의 서소문공원과 마찬가지로 대구의 서학순교지도 대부분은 수운대신사께서 고초를 당하시고 참형당한 곳으로, 서로 중복되어 있지만, 동학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