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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수지환(菽水之歡)
콩과 물만 먹는 가난한 생활 속에서의 즐거움이라는 뜻으로, 가난한 중에도 부모를 잘 섬겨 그 마음을 기쁘게 함을 이르는 말이다.
菽 : 콩 숙(艹/8)
水 : 물 수(水/0)
之 : 갈 지(丿/3)
歡 : 기쁠 환(欠/18)
출전 : 예기(禮記) 단궁하(檀弓下)
이 성어는 콩을 먹고 물을 마시는 가난한 처지에서도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여 그 마음을 즐겁게 함을 뜻한다.
효(孝)의 유래는 멀리 한국시대(桓國時代)의 오훈(五訓)에서 찾아볼 수 있어 우리 민족이 효사상(孝思想)을 얼마나 중요시 하여 왔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한국시대(桓國時代)의 다섯 가지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성실하며 거짓이 없어야 한다.
둘째는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않을 것이다.
셋째는 효도하여 부모의 뜻을 어기지 않을 것이다.
넷째는 깨끗하고 의로워 음란하지 않을 것이다.
다섯째는 겸손하고 온화하여 다투지 않을 것이다.
이와같이 우리 민족의 생활 윤리 규범을 정하고 그중 세번째로 효를 제시하고 있으므로 효사상은 우리 민족 사상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배달국시대(倍達國時代)에 3윤(三倫) 9서(九誓)가 있어 세가지 윤리 중 그 첫번째가 부모와 자식간에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으며 9서 중 첫째가 효로서 힘써 집에서 효도하라고 효를 첫번째 규범으로 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조선시대(古朝鮮時代)에 개국 이념을 홍익인간(弘益人間)으로 하고 홍익육덕(弘益六德)과 양생칠일이화(養生七日理化)와 홍익오정(弘益五精)과 홍익삼강(弘益三綱) 및 홍익팔조금법(弘益八條禁法)을 제정하여 인간의 사명인 사랑을 베푸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였으니 모든 행실의 근본을 효로 삼고 있으며 효행이 인간의 기본 도리임을 말하여 주고 있는 것이다.
효경(孝經)에서 공자(孔子)는 무릇 효는 덕의 근본이다 하였으니 실로 효는 인(仁)을 이루는 근본이며 자비와 박애와 충(忠)을 이루는 근본인 것이다. 때문에 효는 덕도(德道)로 행하여야 하는 것이며 부모와 자식간에는 하늘이 맺어준 인연 즉 천은(天恩)이 있는 것이므로 인륜의 근본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효도는 백가지 행실의 근본이라고 하였고 모든 선(善)의 원초(原初)이다고 하여 천만생실(千萬行實)의 기초로 삼았다.
효도란 하늘의 밝은 것을 본받고 땅의 옳은것을 쫓아서 천경지의(天經地義)를 사람이 본받아 천하를 순(順)하게 하는 것이라 하였다.
증자(曾子)가 공자에게 묻기를 “성인의 덕이 효도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까?” 하니 공자가 대답하기를 “만물이 천지에서 받은 성품중 사람이 가장 귀하니 사람의 행실에 효도보다 더 큰 것이 없다”고 대답하였다.
또한 부자(父子)의 도리는 하늘의 성품이요. 부모가 나를 낳으셨으니 대잇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고, 부모의 은혜를 보답하는 것 중 효보다 중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부모를 사랑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자는 덕이 눈꼽 만큼도 없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효에는 여러가지 종류가 있지만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부모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드리고 부모의 뜻을 받드는 효도이다. 이것을 양지(養志)의 효도라고 한다. 양지란 부모의 뜻을 잘 받들어 드리는 것으로, 부모를 정신적으로 편안하고 기쁘게 해드리는 효도이다.
둘째는 부모의 몸을 편안하게 봉양하고 부족한 것이 없도록 해드리는 효도이다. 이것을 양구체(養口體)의 효도라고 한다. 양구체란 부모의 몸을 물질적으로 봉양하는 것으로, 부모를 육체적으로 편안하게 해드리는 효도이다.
부모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드리는 것 못지 않게 부모의 몸을 편안하게 해 드리는 효도 역시 중요하다. 하지만 어느 것이 더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바로 부모의 뜻을 받드는 양지(養志)의 효도라고 말할 수 있다.
부모가 자식에게 바라는 것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따스한 얼굴과 말씨, 그리고 정성이 담긴 손길이다. 진정으로 부모를 가난하고 초라하게 만드는 것은 초라한 집이나 남루한 옷이 아니라 마음이 담겨 있지 않은 물질적 봉양이다. 효도란 이와 같이 부모의 마음을 즐겁고 편안하게 해드리는 양지(養志)의 효도가 최상이다.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가지고, 인으로서의 올바른 심성을 기르며, 올바른 자세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효도의 실천이다. 돈을 많이 벌어 큰 부자가 되는 것도 좋고, 높은 지위에 올라 명예를 얻는 것도 좋지만 효도를 할 줄 모른다면 이런 것들은 모두 의미가 없게 된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옛날에 임금님이 시골로 행차하게 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가까이에서 임금님을 한번 보고 싶어 하였다. 옛날에는 직접 보지 못하면 볼 수가 없어서 임금님이 지나가신다고 하면 원근 각처에서 길 양쪽에 모여 들었다.
부모도 얼굴 한번 보고 싶어 하였고 이 말을 듣고 아들은 어머니를 업고 70리를 걸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많아서 어머니가 임금님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아들이 엎드려 어머니가 그 위에 올라가서 임금님을 보고 있었다.
임금님이 지나가다가 이 모자(母子)의 모습을 보고 임금이 말했다. “멈춰라!” 그리고 아들에게 물었다. “너는 어떻게 그렇게 엎드려 있느냐?”
아들이 대답했다. “어머니가 임금님을 뵙고 싶다 하셔서 제가 모셔왔습니다. 그리고 안 보이신다고 하셔서 엎드렸습니다.”
임금이 말했다. “참으로 효자로다” 임금님은 그 자리에서 효자 아들에게 상을 후하게 주었다. 이 소문이 퍼졌다.
다른 마을에 아주 불효자가 아들이 있었다. 이 아들이 이 소문을 듣고 어머니를 강제로 업고 나갔다. 그리고 빨리 달려가서 그렇게 하였다. 임금은 그 모습을 또 보았다. 임금은 흐뭇해하면서 행차를 멈추어 선 후 그 아들을 보고 말했다.
그 불효자도 효자의 말을 그대로 흉내 내어 말했다. “어머니가 임금님을 뵙고 싶다 하셔서 제가 모셔왔습니다. 그리고 안 보이신다고 하셔서 엎드렸습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동네 사람들이 말했다. “아닙니다. 임금님. 저 놈은 흉내를 내는 것입니다. 불효자로 소문이 나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임금님을 껄껄 웃으면서 대답하였다. “흉내라도 좋아. 효도를 흉내내는 것은 좋으니라.” 그리고 불효자에게도 상을 후하게 주었다.
효도는 흉내를 내어 하여도 좋은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은 무조건적으로 순종하고 효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데 조건적으로 부모에게 효도하는 잘못된 모습을 볼 수 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부모가 자신에게 잘 해주었느냐 잘못해 주었느냐 하는데 따라 효도의 강약이 조절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부모가 유산이라도 많이 물려 줄 것 같아 효도의 질이 달라진다면 안 된다는 것이다. 부모의 가진 재산이 많고 적음에 따라 효도의 척도를 가늠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부모가 나에게 잘못을 해도 어떤 불이익이 있다 하더라도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자녀가 마땅히 해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군대 간 군인이 상관이 잘해주고 못해준 결과에 따라 순종의 여부가 있다든지 순종의 질적인 면을 달리 한다면 안 된다는 것이다. 상관의 명령은 달라 질수 없다.
일본에서 통계를 보면 부모가 때릴 때 같이 때리고 싶다는 충동이 일어난다고 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손으로 때릴 때 손목을 자르고 싶은 충동, 발로 찰 때 발을 자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고 한다. 회초리로 때릴 때 회초리를 빼앗아 부러뜨리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집에 올 때면 술취하여 들어오고, 들어 와서는 아내와 자녀들을 들들 볶는 아버지에게 견딜 수가 없어서 고발하여 감옥에 가게 한 자녀들도 있었다.
그런 아버지에게도 공경하여야 하나? 자녀가 부모를 수치스럽게 할 때도 있지만 부모가 자녀에게 부끄러움을 줄 때가 있다. 그럴 때에도 공경하여야 하나? 부모 같지 않을 때에도 공경하고 순종하여야 하나?
이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그렇다. 그런 아버지도 공경하여야 한다. 효도는 조건이 없기 때문이다.
성경(聖經)에 보면 제대로 된 아버지만 공경하라가 아니라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이지 어떤 조건이 없다. 아버지가 잘 할 때에만 공경하라. 아버지가 아버지 노릇 잘 할 때에만 공경하라. 똑똑한 부모만 공경하라. 돈 잘 벌어다 주는 아버지만 공경하라고 되어 있지 않다.
아무 조건이 없다. 아버지면 공경하여야 하고 어머니이면 공경하여야 한다. 자녀를 낳기만 하면 아버지요, 자녀를 낳기만 하면 어머니이다. 아버지이면, 어머니이면 공경하라는 가르침이다.
옛날 비엔나에서는 죄수를 일정기간 동안 길거리 청소를 하게 하였다. 어느 날 수상이 한가로이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상한 장면이 나타났다.
옷을 말끔히 입은 청년이 눈을 쓸고 있는 죄수에게 다가 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꾀죄죄한 죄수의 때 묻은 손을 잡고 입을 대더니 키스를 하였다. 그리고 다정하게 이야기를 하다가 헤어졌다.
수상은 그 죄수는 정치범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 청년은 그의 추종자일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궁금하여 그 청년을 불렀다. 그리고 조용히 물었다. “자네가 손에 키스한 그 죄수가 누구인가?”
그 청년이 말했다. “각하, 그 사람은 저의 아버지 입니다.” 그 청년은 자랑스럽게 대답하였다.
뜻밖의 사실을 알고 할 말을 잃은 수상은 죄수가 존경스러워졌다. 어떻게 저렇게 당당한 아들을 두었을 가하는 생각에 빠졌다.
수상은 국왕에게 이런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말했다. “저렇게 자식을 잘 기른 아버지는 나쁜 사람일 수가 없다.” 그래서 석방되었다고 한다.
또 성경에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계명이니(엡6:1-2)’라고 말씀하셨다.
부모 공경은 약속을 주신 중요한 계명이다. 효는 첫 계명이다. 어느 종교든지 계명이 있다. 불교(佛敎)도 있고 회교도(回敎徒)들도 계명이 있다. 힌두교도 있다.
불교에서는 살생을 금하는 것이 계명이기 때문에 기어다니는 벌레도 밟지 않고 다니는 계명이 있다. 인간의 몸에 해로운 빈대나 이가 있다. 그래서 죽이지 않는 계명이 있기 때문에 밖에다 옷을 훨훨 턴다는 이야기가 있다. 살생을 금하기 때문이다. 부모 공경하는 것은 계명이기 때문에 이 같이 계명을 지키는 차원에서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도록 되어 있다.
고부간(姑婦間)에 갈등이 심한 부부가 있었다. 기세등등 하던 시어머니도 나이는 속일수가 없는지 기력이 쇠하여 식사 때마다 손이 떨렸다. 그래서 숟가락도 놓치고 밥을 흘렸다. 그리고 국을 쏟고 그릇도 깨뜨리는 때가 종종 있었다.
참다못한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구박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마침 방구석에서 밥을 먹고 있는 고양이가 보였다. 고양이 밥그릇은 나무로 되어 있었다. 아무리 밟아도 깨지지 않았다. 아무리 쓰러뜨려도 다시 제자리에 놓으면 그 뿐이었다.
며느리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래서 고양이 밥그릇에 시어머니 밥을 담아 드렸다. 나무 그릇을 더 구하여 국도 퍼드렸다. 이제는 그릇을 깨뜨리는 일이 없어졌다. 아들도 참 머리가 좋다고 칭찬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이들 부부가 시장에 다녀와서 보니 초등학교 3학년된 아들이 옆 집 친구와 함께 통나무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부엌칼로 나무속을 파내고 있었다. 방안이 온통 어지러워져 있었다. 엄마가 물었다. “뭐 하니?” 아들이 말했다. “엄마. 이 다음에 엄마 아빠 사용할 밥그릇 만들고 있어요.”
꼭 심는 대로 거두게 된다. 효는 첫 계명이다. 인간의 도리이다. 또한 부모를 공경하면 형통의 복을 받게 된다.
중국 한(漢)나라에 곽거(郭巨)라는 이가 있었다. 그는 몹시 가난하였다. 노모 부부 그리고 자라나는 세살된 아들이 있었다. 노모는 자라나는 아들에게 맛있는 것을 다 먹였다. 배고플까 몹시 신경을 썼다. 손자에게 주느라고 자신은 굶을 때가 많아 여위기까지 하였다.
이를 본 곽거는 이런 생각을 하였다. 차라리 아들을 죽여 구덩이에 파묻자. 자식은 또 낳을 수 있지만 부모는 다시 얻을 수가 없지 않느냐?
그는 뒷뜰로 가서 구덩이를 파기 시작하였다. 두어자 가량 팠을 때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조심스럽게 파보았더니 큰 금솥이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었다. 효자에게 내리는 하늘의 복이다. 누구도 빼앗을 수 없으리라. 이같이 효도에는 형통의 축복이 들어 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어느 날 밥상에 닭고기가 올라 왔다. 잡수려던 아버지가 물었다. “얘야! 이 닭고기 어디에서 났니?”
아들이 무뚝뚝하게 대답하였다. “아버지는 그런 것은 묻지 마시고 잡수시기만 하세요.”
이런 때 탈무드는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렇게 대답하는 아들은 천국에 갈 수 없다.
효도는 자녀가 부모에게 드리는 예의이기 때문에 그 근본적인 정신은 항상 같을지 몰라도, 부모와 자녀가 어떤 관계에 있느냐에 따라 그 구체적인 모습은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즉 자녀가 부모로부터 보살핌을 받는 시기와, 자녀가 성장하여 부모와 함께 활발하게 사회활동을 하는 시기, 그리고 부모가 연로하여 자녀가 부모를 모셔야 하는 시기에 따라 부모와 자녀간의 구체적인 관계는 달라지게 된다.
여기서는 부모가 연로하신 경우 어떻게 부모를 편안하게 모실 수 있을까 하는 점을 생각해보자.
(1) 거짓없이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한다.
부모님이 이렇게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뿌리임을 잊지 않는 것, 그것으로부터 부모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은 시작된다. 부모님은 삶의 파도를 헤쳐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존경받기에 충분하다.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을 먼저 걸어가면서 험한 길을 편안하게 닦아 놓았다는 이유만으로도 존경받아 마땅하다. 타인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에게도 존중받지 못한다. 가장 가까운 부모님조차 존중하고 공경하지 않는 사람을 어느 누구도 존경하거나 따르지 않을 것이다.
사회학자 브린튼은 노인을 대접하지 않는 사회는 이미 희망을 잃어버린 사회라고 말했다. 성서(聖書)에는 백발은 빛나는 면류관이며, 착하게 살아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어버이의 머리에 서리가 내리기 시작했으면 이제 우리 부모님게 효도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라고 생각해야 한다.
만일 누군가가 부모님에 대한 사랑이 마음속에서 우러나지 않는다면 먼저 우리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 스스로를 사랑 할 수 있을 때 우리를 있게 한 부모님도 사랑할 수 있다. 우리가 스스로를 미워하고 포기할 때 부모님과의 관계 역시 포기하게 된다.
그런데 사람이 자기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으면 인생을 의미있게 살 수 없다. 인생을 망난이처럼 살아가서 결국 부모의 간절한 바램도 저 버린채 불행한 종말을 맞이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사랑할 줄 모르고 증오하는 사람이다.
(2) 부모님 입장에서 생각한다.
일본에는 노인처럼 경험할 수 있는 실습 공간이 있다. 이곳에 들어가면 발목과 손목에 무거운 쇠사슬을 달고 허리는 노인처럼 구부려야 한다. 그런 상태로 계단을 오르내리고 목욕탕에 들어가며 집안을 걸어 다닌다.
이렇게 몸이 힘들고 불편한 상태가 바로 평범한 70세 노인의 육체라는 것을 알면서 많은 사람들은 색다른 감회를 느낀다. 노인들의 발걸음이 얼마나 힘이 들며 엎드려 머리를 감는 자세가 얼마나 불편한지를 깨닫게 된다.
모든 윤리의 근본 정신은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것이다. 입장을 바꿔 생각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부모님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은 예상외로 쉬울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부모이기 때문이다. 혹은 미래에 부모가 될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녀와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부모와의 관계가 쉽게 이해될 수 있다. 부모와 나는 결코 다르지 않다. 부모의 분신이 나이기 때문에 내가 노인이 되었을 때의 모습 또한 부모님의 모습과 크게 달라질 것이 없다.
동일 선상에서 내 부모를 바라보기, 내 입장이 아닌 부모님의 입장에서 모든걸 생각하기, 이것이야말로 부모님께 가장 편한 자식이 되는 지름길이다.
(3) 친밀함을 행동으로 표현한다.
한 이불속에서 부모와 자는 행위는 친밀감을 형성하고 진한 정을 느낄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만일 한쪽 부모님만 계시다면 배후자와 상의해서 가끔 부모님과 잠자리를 같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도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잘 기회를 만들어 주어 혈육의 정을 느끼게 해준다. 부모님들은 잠든 손자 손녀의 귀여운 모습을 지켜보면서 위안과 존재감을 느낄 것이다.
또한 가끔 부모님을 모시고 목욕탕을 함께 가보는 것도 부모를 위하는 길이다. 목욕탕에서는 부모님의 건강상태를 정확히 알 수 있다. 함께 살고 있는 노인이라도 증세를 말로 표현하지 않는 한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목욕탕 안에서는 벗은 몸을 보면서 얼마나 노화했는지, 기력은 어느 정도인지, 몸무게는 줄어들지 않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손을 맞잡고 가슴과 가슴이 만나는 자리에 깊은 정이 솟아난다. 손을 맞잡으면 마음의 장벽이 허물어지고 응어리가 녹는다. 부모님 가슴에 외로움이 응어리져 있다면 그것을 풀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따뜻하게 손 한번 잡아 드리는 것이다.
사소한 행위일지라도 함께 목욕가서 등을 밀어드릴 때와는 또 다른 온화한 감정이 밀려 들 것이다. 애인과의 사랑도 손을 잡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듯 부모님과의 미뤄 두었던 애정 나누기는 이렇게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손을 잡아 드리는데 그치지 말고 안마하는 것은 더 좋은 방법이다. 여기 저기 쑤시는 곳을 찾아 두드리고 주물러 드리면 부모님은 시원함과 행복감을 맛볼 수 있다.
부모님과 가까워질 수 있는 방법은 의외로 사소한 일상에 있다. 연세가 많아 눈이 안 좋은 부모님이라면 손톱, 발톱을 깍아드릴때 부모님은 행복감을 느낀다.
단지 함게 산다는 것이 효도의 전부는 아니다. 같이 사는 데서 오는 일상성과 편안함이 빚은 무신경이 부모님을 내면으로 더 섭섭하게 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사소한 것에도 신경을 써서 온 가족이 함께 할 일을 찾아보고 자연스럽게 한 자리에 어울릴 수 있는 기회를 자주 만들어야 한다.
✳ 효도(孝道)의 십계명
1. 부모님과 가능한 많은 대화를 나누어라.
부모는 자식과 대화의 시간을 가장 즐거워 하신다.
2. 부모님께 일감을 드려라.
효도란 부모님을 가만히 모셔만 놓는 것이 아니다.
3. 부모님도 취미를 가지시도록 도와 드려라.
사회에서나 교회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즐길 수 있도록 하여라.
4. 여행의 기회를 드려라.
노인은 새로운 분위기와 경험을 즐기신다.
5. 부모님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라.
연세가 드시면 기억력도 쇠약해지고 마음도 소심해 지고, 잔소리도 늘게 되고, 공연한 고집도 부릴 때 가 있다. 그 이유를 파악하라.
6. 가족끼리 외출할 때 부모님도 종종 모시고 가도록 노력하라.
자녀들만 데리고 나가는 아들과 며느리에 대해 섭섭함을 가질 때가 있다.
7. 집에 손님이 오면 부모님께 먼저 인사드리도록 한 후 대화를 나누라.
이런 예법을 어린 손자 손녀들에게 가르쳐라.
8. 사소한 병이라도 나시면 꼭 병원으로 모시고 가라.
연세가 드실수록 생명에 대한 애착, 건강에 대한 근심이 더 많아진다.
9. 매월 일정한 용돈을 드려라.
부모님의 이름으로 통장이라도 만들어 드리시면 더욱 좋아하실 것이다.
10. 부모님께 신앙의 기회를 드려라.
천국의 안내자가 될 때 가장 큰 효도를 하는 것이다 .
⏹ 다음은 한글漢字문화에 나오는 숙수지환(菽水之歡)의 글이다.
콩과 물만 먹는 가난한 생활 속에서의 즐거움이라는 뜻으로, 가난한 중에도 부모를 잘 섬겨 그 마음을 기쁘게 함을 이르는 말이다.
이 성어는 예기(禮記) 단궁하(檀弓下)에 나오는 말이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路曰; "傷哉, 貧也! 生無以爲養, 死無以爲禮也."
자로가 말했다. "슬프구나, 가난이란 것! 어버이가 생존하실 적에는 봉양할 수가 없고, 돌아가신 뒤에는 예를 다할 수 없구나."
孔子曰; 啜菽飲水盡其歡, 斯之謂孝.
斂手足形, 還葬而無椁, 稱其財, 斯之謂禮.
공자가 말했다. "콩을 먹고 물을 마실지라도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하면, 그것을 효도라 한다.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머리와 발만 겨우 염습하여, 장례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장례를 지내며, 관을 쓰지 못해도 자기의 분수에 맞게 하면, 그것을 예라 하는 것이다."
🔘 자로부미(子路負米)
子路負米(列國 魯)
仲由字子路, 孔子弟子. 事親至孝.
중유의 자는 자로인데 공자의 제자이다. 부모 섬김을 지효(至孝; 지극한 효도)로 하였다.
家貧, 食藜藿之食, 爲親負米, 於百里之外.
집이 가난하여 나물 음식(藜는 명아주, 藿은 콩잎)을 먹으며 부모를 위하여 백리 밖에서 쌀을 져 왔다.
親歿之後, 南遊於楚, 從車百乘, 積粟萬種.
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에 남쪽으로 초나라에 가서 벼슬을 할 때 뒤따르는 수레가 일백승이요, 창고에는 수많은 곡식을 쌓아두고 먹었다.
累茵而坐, 列鼎而食.
자리는 겹으로 깔고 앉고, 부엌에는 솥을 여럿 벌려 놓았다.
乃歎曰; 雖欲食藜藿之食, 爲親負米, 不可得也.
이에 중유(仲由)가 탄식하여 말하되 "비록 나물을 먹으며 부모를 위하여 쌀을 지려하나 가히 이루지를 못하겠도다" 하였다.
孔子聞之曰; 由也可謂生事盡力, 死親盡思者也.
공자가 들으시고 말씀하시되 "자로는 가히 부모가 살아 계실 때 섬김을 다하고 돌아가신 뒤에는 사모(思慕)하기를 다했다고 이를만한 자이다"라고 하시었다.
▶️ 菽(콩 숙)은 형성문자로 叔(숙), 尗(숙)은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초두머리(艹=艸; 풀, 풀의 싹)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叔(숙)이 합(合)하여 콩을 뜻한다. 그래서 菽(숙)은 ①콩(콩과의 한해살이풀) ②대두(大豆) ③콩잎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콩 두(荳), 콩 두(豆)이다. 용례로는 콩깍지를 숙기(菽萁), 콩나물을 숙아(菽芽), 콩과 물로 변변하지 못한 검소한 음식을 숙수(菽水), 콩과 보리를 숙맥(菽麥), 콩과 조라는 뜻으로 매일 먹는 느끼하지 않고 산뜻한 음식을 숙속(菽粟), 순두부를 숙유수(菽乳收), 콩나물을 숙아채(菽芽菜), 빛이 푸른 콩을 벽숙(碧菽), 세금으로 바치는 콩을 세숙(稅菽), 시아주버니로 남편의 형제를 시숙(媤菽), 콩인지 보리인지 분별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어리석고 못난 사람을 숙맥불변(菽麥不辨), 콩을 먹고 물을 마시는 가난한 처지에서도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여 그 마음을 즐겁게 함을 숙수지환(菽水之歡), 일반 사람들이 두루 알 수 있는 쉬운 글을 숙속지문(菽粟之文), 콩과 물로 드리는 공이라는 뜻으로 가난 속에서도 정성을 다하여 부모를 잘 섬기는 일을 숙수지공(菽水之供), 콩을 먹고 물을 마신다는 뜻으로 집은 가난하여도 부모에게 효도를 극진히 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철숙음수(啜菽飮水) 등에 쓰인다.
▶️ 水(물 수)는 ❶상형문자로 氵(수)는 동자(同字)이다. 시냇물이 흐르고 있는 모양을 본뜬 글자로 물을 뜻한다. 본디 물 수(水)部는 시내의 뜻이었다. 부수로 쓸 때는 삼수변(氵=水, 氺; 물)部로 쓰는 일이 많다. ❷상형문자로 水자는 ‘물’이나 ‘강물’, ‘액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水자는 시냇물 위로 비가 내리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水자의 갑골문을 보면 시냇물 주위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물’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水자가 부수로 쓰일 때는 대부분이 ‘액체’나 ‘헤엄치다’, ‘범람하다’와 같이 물과 관련된 의미를 전달하게 된다. 참고로 水자가 부수로 쓰일 때는 氵자나 氺자로 바뀌게 된다. 그래서 水(수)는 (1)오행(五行)의 하나. 방위(方位)로는 북쪽, 계절로는 겨울, 빛깔로는 검정을 나타냄 (2)수요일(水曜日) (3)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물 ②강물 ③액체(液體), 물과 관련된 일 ④홍수(洪水), 수재(水災), 큰물(비가 많이 와서 강이나 개천에 갑자기 크게 불은 물) ⑤수성(水星: 태양에 가장 가까운 별) ⑥별자리의 이름 ⑦물을 적시다, 축이다 ⑧물을 긷다, 푸다 ⑨헤엄치다 ⑩물로써 공격하다 ⑪평평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내 천(川), 강 강(江), 물 하(河), 바다 해(海), 시내 계(溪), 바다 명(溟),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메 산(山), 큰 산 악(岳), 뭍 륙/육(陸), 불 화(火),빌 공(空)이다. 용례로는 물 속에서 몸을 뜨게 하고 손발을 놀리며 다니는 짓을 수영(水泳), 축축한 물의 기운을 수분(水分), 물속에 잠김을 수몰(水沒), 물을 보내는 통로를 수로(水路), 물의 겉을 이루는 면을 수면(水面), 홍수로 인한 해를 수해(水害), 물에 의해 발생하는 힘을 수력(水力), 물의 깊이를 수심(水深), 저수지에 설치하여 수량을 조절하는 문을 수문(水門), 물의 양을 수량(水量), 물 속에서 자라는 풀을 수초(水草), 물과 물고기의 사귐이라는 수어지교(水魚之交), 깊고 넓은 물에는 큰 고기가 깃듦을 수관어대(水寬魚大), 물이 흐르면 자연히 개천을 이룬다는 수도거성(水到渠成), 물이 흐르면 고기가 다닌다는 수도어행(水到魚行), 흐르는 물과 하늘의 뜬구름이라는 수류운공(水流雲空), 물이 빠져 밑바닥의 돌이 드러난다는 수락석출(水落石出), 물과 물고기의 사귐이라는 수어지교(水魚之交), 물과 불은 서로 통하지 않는다는 수화불통(水火不通),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다는 수적천석(水滴穿石) 등에 쓰인다.
▶️ 之(갈 지/어조사 지)는 ❶상형문자로 㞢(지)는 고자(古字)이다. 대지에서 풀이 자라는 모양으로 전(轉)하여 간다는 뜻이 되었다. 음(音)을 빌어 대명사(代名詞)나 어조사(語助辭)로 차용(借用)한다. ❷상형문자로 之자는 ‘가다’나 ‘~의’, ‘~에’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글자이다. 之자는 사람의 발을 그린 것이다. 之자의 갑골문을 보면 발을 뜻하는 止(발 지)자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발아래에는 획이 하나 그어져 있었는데, 이것은 발이 움직이는 지점을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之자의 본래 의미는 ‘가다’나 ‘도착하다’였다. 다만 지금은 止자나 去(갈 거)자가 ‘가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之자는 주로 문장을 연결하는 어조사 역할만을 하고 있다. 그래서 之(지)는 ①가다 ②영향을 끼치다 ③쓰다, 사용하다 ④이르다(어떤 장소나 시간에 닿다), 도달하다 ⑤어조사 ⑥가, 이(是) ⑦~의 ⑧에, ~에 있어서 ⑨와, ~과 ⑩이에, 이곳에⑪을 ⑫그리고 ⑬만일, 만약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이 아이라는 지자(之子), 之자 모양으로 꼬불꼬불한 치받잇 길을 지자로(之字路), 다음이나 버금을 지차(之次), 풍수 지리에서 내룡이 입수하려는 데서 꾸불거리는 현상을 지현(之玄), 딸이 시집가는 일을 지자우귀(之子于歸), 남쪽으로도 가고 북쪽으로도 간다 즉, 어떤 일에 주견이 없이 갈팡질팡 함을 이르는 지남지북(之南之北) 등에 쓰인다.
▶️ 歡(기쁠 환)은 형성문자로 欢(환), 歓(환)은 통자(通字), 欢(환)은 간자(簡字), 懽(환)은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하품 흠(欠; 하품하는 모양)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雚(환)으로 이루어졌다. 하품 흠(欠)部는 사람이 앉아서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모양이고, 歡(환)은 음식 앞에 앉아서 입을 벌리고 있는 뜻으로 음식을 먹는 일은 즐거운 일이므로 기뻐하는 뜻으로 쓰인다. 그래서 歡(환)은 ①기쁘다 ②기뻐하다 ③사랑하다 ④좋아하다 ⑤기쁨 ⑥즐거움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기쁠 희(僖), 기쁠 희(喜), 즐길 오(娛), 기쁠 이(怡), 기쁠 열(悅), 즐거울 유(愉), 기쁠 희(憘), 즐길 낙(樂), 기쁠 흔(欣), 달 감(甘), 즐길 탐(耽),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슬플 애(哀), 슬퍼할 도(悼), 성낼 로(怒), 슬플 비(悲), 쓸 고(苦)이다. 용례로는 기쁜 마음으로 맞음을 환영(歡迎), 기쁘고 반가워서 고함을 지름을 환호(歡呼), 매우 즐거움을 환희(歡喜), 기쁘고 즐거워 하는 마음을 환심(歡心), 떠나는 사람을 축복하고 기쁜 마음으로 보냄을 환송(歡送), 기뻐서 외치는 소리를 환성(歡聲), 마음에 즐겁고 기뻐하는 모양을 환연(歡然), 반갑게 맞아 대접함을 환대(歡待), 기쁘고 즐거움 또는 기뻐하고 즐거워함을 환락(歡樂), 기꺼이 승낙함을 환낙(歡諾), 즐겨 이야기 함을 환어(歡語), 기쁘고 즐거워 하는 마음을 환정(歡情), 기쁘고 즐거움 또는 기뻐하고 즐거워함을 환오(歡娛), 즐거워하고 경하함을 환경(歡慶), 국가들 사이에 우호적인 관계를 목적으로 동맹을 맺음 또는 그러한 동맹을 환맹(歡盟), 정답고 즐겁게 이야기함 또는 그러한 이야기를 환담(歡談), 즐겁고 흡족함을 환흡(歡洽), 즐거운 마음으로 서로 사귀어서 즐김을 교환(交歡), 슬픔과 기쁨을 애환(哀歡), 임금 또는 부모의 기쁜 마음을 받듦을 승환(承歡), 슬픔과 기쁨을 비환(悲歡), 기쁨을 같이 함을 합환(合歡), 한껏 기뻐하거나 기뻐하게 함을 경환(罄歡), 여러 사람이 다 같이 기뻐함을 통환(通歡), 환락을 마음껏 누림을 갈환(竭歡), 기뻐서 소리치며 날뜀을 환호작약(歡呼雀躍), 하늘을 우러르고 기뻐하고 땅을 굽어보고 기뻐한다는 뜻으로 대단히 즐거워하고 기뻐함을 이르는 말을 환천희지(歡天喜地), 원망과 한을 생각지 않고 옛 정을 회복함을 환여평석(歡如平昔), 심중의 슬픈 것은 없어지고 즐거움만 부른 듯이 오게 됨을 척사환초(慼謝歡招), 기쁨과 슬픔과 애처로움과 즐거움을 희비애환(喜悲哀歡), 콩을 먹고 물을 마시는 가난한 처지에서도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여 그 마음을 즐겁게 함을 숙수지환(菽水之歡)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