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閔妃暗殺>⑩-4
고종은 대원군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집정으로서의 대원군의 부활이며, 위정척사파의 승리였다.
국왕의 조서(詔書)가 발포(發布)되었다. 그 가운데 왕은 “이와같이 미증유의 큰 변을 초래했다” 부덕 불명을 백성들에게 사죄하고, “금후의 정령은 전부 국태공에 따라야 한다”호 말했다. 대원군의 문안을, 왕궁의 제1비서관이 적은 것이다.
대원군이 다시 집정이 되었다는 소식은, 이때도 아직 왕궁을 점령하고 있던 군병들을 미칠 듯이 기쁘게 했다. 그러나 그들은 「군란에 참가한 장병 및 시민은 즉각 해산해야 한다」는 명령에 순순히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중전을 잡을 때 까지는 창덕궁을 떠나서는 안된다」 고 그들은 주장했다. 대원군도 그것을 억제하려고 하지 않고, 민비의 수색은 더 한층 열심히 계속되었다.
창덕궁은 제3대왕 태종(太宗)이 1405년에 세운 왕궁이지만, 이것도 임진난(豊臣秀吉의 출병)으로 소실되고, 17세기 초에 재건되었다. 병화(兵禍)를 면하고 지금도 창건당시의 모습으로 남아있는 것은, 민비의 목숨을 노리던 난군이 돌입한 돈화문(敦化門)뿐이다. 2층의 지붕, 미묘한 활처럼 휜 것으로 보이는 선에 마귀를 쫓기 위한 작은 동물을 올린 이 누문은, 단정한 모습에 조선왕조 발흥기의 강력한 힘을 보여주고, 녹물주황색으로 도색된 목조부분과 엷은 색의 지붕기와와의 대조가 마음에 스며드는 아름다운 문루다.
창덕궁의 총 면적은 43만 평방미터, 이중에 자연의 지형을 교묘하게 이용한 “비원(秘苑)”이라고 불리우는 대 정원이 있다. 난군의 병사들은, 작은 산이나 언덕이나 연못 사이에 부용정(芙蓉亭), 소화당(咲花堂), 애련정(愛蓮亭) 같은 아름다운 이름의 작은 건축까지가 산재하는 드넓은 정원을, 민비를 찾아 구석구석까지 마구 짓밟았다.
군병들은 어제부터 흥분의 연속이었다. 그 정점이, 대성공리에 군란이 끝나려고 하는 이때였다. 어제부터의 목숨을 건 행동의 결말로, 민비 목숨의 뿌리를 끊고 싶은 그들은, 전쟁터의 병사와도 비슷한 일종의 이상심리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시간이 지나 대원군으로부터 제3의 해산명령이 내려와도, 민비의 수색을 멈추려고 하지 않았다.
대원군이야말로 병사들에게 빠지지 않는 열의로 「민비 발견」소식을 전해 줄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국왕의 “섭정(攝政)”이 된 그가, 언제까지나 왕궁 안을 난군 병들의 활보에 맡겨 두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의 명령으로 군란에 종지부를 찍고, 왕궁의 질서를 회복하여, 금방이라도 신내각의 인사에 착수해야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대원군은, 큰맘 먹고 대책을 냈다. 생사도 알 수 없는 민비의 국장을 거행하려는 것이다. 장의라는 형태로 “민비시대의 종언”을 천하에 강하게 인상지으려는 목적도 있었다고 생각되지만, 아무래도 시기상조였다. 일거에 일를 꾸미려고 하는 대원군의 초조한 마음이 엿보인다.
대원군은 난군의 지휘자들을 향해, “민중전은 오늘 오후, 난군 중에 붕어(崩御)했다. 아직 유체는 발견되지 않았으나, 바로 국장준비에 들어가므로, 일종은 조속히 해산하라”고 고했다. 이것으로 겨운 난군의 병사들은 왕궁을 물러갔다.
국장준비에 착수할 것인지, 아닌지, 대원군은 곧 정신들의 저항을 받았다. 도승지(제1비서관)은 책상위의 벼루를 밀어내면서, “유체도 확인하지 않고” 라고 완강하게 국장반포를 쓰려고 하지 않았다. 제2비서관이 대원군의 강요를 받아 마지 못하는 표정도 드러내면서 겨우 필을 들었다.
이어서 장의위원장을 맡을 국장도감이 임명되고, 민비의 거실에 있던 중전복을 유체로 간주하여, 납관(納棺)의 이식을 치루었다. 국장은 이날로 시작된 것이다.
이튿날부터 대원군은 조각에 몰두했다. 먼저 그의 맞아들인 이재면에 훈련대장, 이조판서, 선혜청 당상을 겸임시키고, 군사권과 재정권을 장악했다. 민비 파로 걸었던 장자의 과거에, 구애될 필요는 없다. 일찍이 대원군의 부하였던 사람들이 전부 민씨 일복에 추방되고, 또는 처형되어, 지금 그의 뜻을 받들어 일을 맡을 사람이 없다. 중신들과의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골이 느껴지고, 영의정은 부랴부랴 홍순목(洪淳穆) 유임로 결정했으나, 그는 칭벼하고 좀처럼 나오지 않는 형세다. 9년 가까운 공백은 대원군이 예상하는 이상의 무게로 누르고 있었다.
다시 대원군은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폐지하고 3군부를 부활시켰으며, 군제도 별기군을 폐지하고 종래의 오영(五營)을 부활했다. 반란에 참가한 장병들은 일본계의 별기군 폐지를 즐겼으며, 군료(軍料) 지급공약으로 생활도 안정되고, 서울 거리는 평정을 되찾았다.
이런 중에서, 민비의 국장은 관례대로 이루어지고 있었으나, 3일째의 “소렴(小殮)”, 5일째의 “대렴(大斂)”으로 진행됨에 따라, 비난은 점점 격화되고, 대원군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영의전을 비롯한 중신, 많은 원로들이, 「유체의 발견도 확인도 없이, 국모의 장의를 집행한다는 것은, 백성을 속이고 우롱하는 행위」 라는 주지의 상소문을 연일, 왕엗게 올렸다. 예의와 윤리를 무겁게 여기는 이나라의 지도계층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으나, 그 가운데는 보신을 위해서도, 민비의 생사가 불명한 동안에는 섣불리 태도를 결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민비가 살아 돌아온다면, 대원군은 지체 없이 실각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대원군은 어디까지나 기세가 대단했다. 국장비난의 상소문이 임금 앞에 산더미처럼 쌓여도, 그는 관례를 엄수하여 장중한 의식을 올리고, 그것은 9일째의 마지막 의식인 “성복(成服)”까지 혼란 없이 계속되었다. 이것으로 국장은 완료했지만, 상소문은 더욱더 이어졌다.
이 같은 상황 하에서 대원군은 강력한 내각을 조직하여 정부 내의 친일색, 민비색을 일소하려고 노력을 이어갔다. 일찍이 대원군의 유력한 부하였던 사람들이 감옥에서, 또는 유배지에서 석방되어 그의 곁으로 모이고, 각각 중요한 지위를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쇄국시대에 활약한 사람들로, 그 후의 격렬한 시대변화에 지체없이 대처할 수가 없었다. 대원군의 인사는 점점 차질를 거듭해 간다.
7월23일밤 호우를 맞아가면서 도피행을 계속한 花房(하나부사)공사 일행은, 겨우 찾아든 인천에서 부사(府使)의 극진한 보호를 받았다. 그러나 긴장을 푼 것도 잠간, 얼마 되지 않아 서울로 부터의 연락으로 실정을 안 부병(府兵)들은 花房(하나부사) 일행을 덮쳐, 일본 측 사상자는 10명을 넘었다. 작은 배로 바다로 피한 그들은, 때마침 난바다에 있던 영국 측량선 플라잉⦁피쉬호에 구제되어, 일본으로 향했다.
花房공사가 長岐(나가사키)에 도착한 것은 7월29일 밤이었다. 그는 사변의 전말을 외무성에 타전하고, 이에 의하여 7월31일, 대책을 협의하기 위한 긴급각의가 열렸다.
각의는 그 후에도 몇 번인가 열렸지만, 그 내용은 처음부터 대단히 강경하여, 「이 내란은 배일운동에 있고, 외교관계의 전면적인 단절을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단호히 무력간섭으로 임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특히 참의(參議)인 山縣 有朋(야마가타 아리토모)는 “담판이 임박한 때에 이르면 우리 군대로써 개항소를 점거하고, 또는 시기에 따라 요충의 여러 섬을 점령하여 이로써 보상을 요하는 담보로 하는 것은 공법상으로 당연히 허용될 것” 과 같이, 이미 개전이 결정된 것과 같은 의견을 말하고 있다.
조선의 내란을 알게 된 일본의 각 신문사는 일제힌 호외를 내고, 대중은 동포의 조난에 격앙하여,
「지체없이 군대를 출동시켜라!」
「조선정부에 책임을 물어라!」
등, 열광적으로 부르짖었다. 지금이라도 대 조선 전쟁이 시작되는 듯한 소동 가운데, 임오군란(壬午軍亂)의 錦絵(にしき絵·니시키에/풍속화를 색도 인쇄한 목판화)가 날듯이 팔렸다.
일본정부는 花房공사를 전권으로, 무력을 배경으로 하는 강경한 태도로, 조선정부와의 교섭에 임하기로 결정했다.
임오군란때에 일본에 있었던 소수의 조선인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던가----.
지난해, 1881년에 신사유람단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왔고, 그 후에 유학생으로 남아있던 유길준(兪吉濬)과 윤치호(尹致昊) 두사람은, 일본의 태정대신(太政大臣)에게 “군함을 파견해서 인천 근해에 출항하여 우리나라의 왕과 왕세자를 구해내어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 그 후에 대원군의 죄를 규명하도록” 요청했다.
이미 일본이나 구미에 문을 개방한 조선이 개화(근대화)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위정척사론자인 대원군을 물리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었다.
이해 3월에 일본에 온 김옥균(金玉均)은, 귀국을 위해 下關(시모노세키)체재중에 군란을 알았다. 2년 후인 1884년에 독립개화를 목표로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켜 “3일천하를”이루었던 김옥균은, 사상적으로는 정반대인 대원군에 대해, 앞에서 말한 유학생들과는 전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김옥균은 「섭정국부(攝政國父/대원군)는 완고하지만 그 정치는 정대하고, 국왕전하는 총명하지만 과단성이 부족하니, 죽음으로 국부를 설득해야 한다」고 말하고 귀국을 서둘렀다. 그는 결사적인 각오로 대원군을 설득하고, 그 위정척사사상을 180도 전환하여, 개화사상으로써 조선의 발전에 진력하고 싶다는 기대를 걸고 있었다.
대원군에게는 “호위(虎威)”가 있다고들 말한다. 김옥균도 호위를 가진 대원군의 정치력, 통수력을 높이 평가하고, 개화파가 반대파를 눌러 나라의 근대화를 진척하는데는, 대원군의 “호위”야말로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