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閔妃暗殺> ⑪-1
대원군 납치사건
청국정부는 주일 청국공사관으로 부터의 전보로, 조선의 군란을 알았다. 이때 청국에는 조선의 영선사(領選使) 김윤식(金允植)과 문의관(問議官) 어윤중(魚允中)이 와 있었다. 두 사람은 8월2일, 청국정부에 반란진압을 위한 파병을 요청했다.
6년 전, 1876년(명치9년)에 조선이 일본과 “강화조약”을 맺을 무렵, 청국은 타국과의 분쟁으로 다망하고, 조선의 강력한 후견국이 될 여력이 없었다. 일본은 조약 중에 조선을 “自主의 邦(자주의 나라)”로 하고 직접교섭의 대의명분을 쟁취했다.
그러나, 노대국인 청국은 이 정도의 일로 종주국이라는 지위가 저하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특히 이홍장(李鴻章)이 북양대신이 되고부터는, 조선의 문호개방에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고, 구미제국에 대해서는 「조선은 우리 속방」이라고 표방해 왔다. 그것은 강화조약 이래, 조선에 대한 세력을 급속히 강화해온 일본과, 친일적 경향을 심화하는 조선정부에 대한 견제였다. 거기에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청국은 일본정부에 대하여 「조선국왕의 요청으로, 소수의 병력을 파견한다. 군란의 진압이 목적이지만, 일본공사관이나 거류민의 생명 재산에 대한 보호도 우리나라가 담당한다, 또 군란의 손해배상에 관해서는 일본을 위하여 조정의 역할을 맡는다」 등의 요지로 제안을 했다.
이에 대하여 일본정부는 「강화조약에 명시되어 있는 대로, 조선은 자주의 나라이며, 제3국인 청국의 개입은 필요치 않다. 군란의 배상문제 등은, 당사국간에 처리한다.」고 답하고 제안을 거부했다.
다시 청국정부는 주일공사로부터의 보고로, 상상 이상으로 강경한 일본의 태도를 알았다. 그래서 「즉시 조선출병을 단행하여, 군란을 진압하고, 일본의 기선을 제압한다」는 방침을 굳혔다.
이때 伊藤 博文(이토 히로부미)는 베를린에 있었다. 뒤에 伊藤는 우리나라 최초의 총리대신이 되었으며, 네 번의 조각 후, 1905년(명치38년)에는 조선의 초대 통감으로 임명되었다.
임오군란이 일어나기 3개월 전, 「헌법조사」의 임무를 띠고 일본을 출발한 伊藤는, 근대국가로 발전중인 일본에 있어서 가장 바람직한 헌법의 성안을 얻기 위해, 베를린에서 악전고투 중에 있었다. 임오군란 소식은 伊藤에게 강한 충격을 주었다. 일청 양국 간에 일촉즉발의 긴장을 일으켰다고 안 그는, 금방이라도 귀국하고 싶은 초조감에 사로잡혔지만, 움직일 수는 없었다. 伊藤는 山縣(야마가타)를 비롯한 3인의 참의(參議)앞으로, 체재연기를 바란다는 편지를 쓰고 있다.
伊藤는 참의 대장경(大藏卿) 松方正義(마쓰카타 마사요시) 앞으로의 1883년(명치16년) 1월8일자 편지에, 영국이 이집트를, 또 프랑스가 안남(역자 주: 지금의 베트남)지방을 속국으로 하는 “깽판”의 “유럽 현금의 형세”를 쓰고, 「군비확충은 우리 힘이 미치는 한 전력을 다해야 한다」고, 군사력 증강의 필요를 강하게 말했다. 「동서의 대세를 비교하고, 우리 독립의 안위를 생각할 때마다, 침식을 편히 할 수 없다」는 문면에서, 伊藤의 심경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조선 문제로, 언젠가는 일본이 싸우는 날이 온다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임모군란이 일어난 지 15일이 지나도, 민비에 대한 정보는 무엇 하나 왕궁에 다다르지 않았다. 왕은 식욕도 떨어지고, 잠도 깊이 들지 못해, 중병인과 같이 수척해 졌으며, 오로지 민비의 무사를 빌었다. 정무에 다망한 대원군의 가슴에도 민비의 생사가 무거운 응어리가 되어, 그의 사고력을 무디게 할 정도의 압박감을 주고 있었다.
밤마다 편한 잠을 이룰 수 없는 고종이 몇 번이나 몸을 뒤척이고 있을 때, 복심 한 사람이 몰래 침실에 들어와, 가만히 한통의 편지를 올렸다. 복심이 밝힌 등불 밑에서 그것을 연 왕은, 자기도 모르게 놀라는 소리를 질렀다. 틀림없는 민비의 필적이다.
살아 있었구나! 기쁨에 가슴이 떨리고, 넘치는 눈물을 손가락으로 눌러 닦으면서, 왕은 욕심을 부리듯이 긴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무사히 왕궁 밖으로 피해 나온 다음, 여러 곳을 거쳐, 지금은 충청북도의 장호원에 있는 민응식(閔應植)의 집에 숨어서 살고 있다--- 고 왕비는 썼다. 또한 도주의 경로라든지 근황이 상세하게 쓰여 있었는데, 그러나 그뿐 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왕궁에서 살고 있을 무렵, 중신들을 접견하는 왕의 병풍 뒤에서 조언했던 것과 같이, 그 편지에는 「지금 왕이 해야 될 일」이 이로정연하게 쓰여 있었다.
민비가 왕에게 준 비책은, 청국정부에 대하여, 「대원군의 지나친 양이쇄국(攘夷鎖國)과 척왜(반일)정책은 드디어 임오군란을 일으켰고, 일본공사관을 불태우고 관헌을 살상했기 때문에, 일본에 출병의 구실을 주고 말았다. 대원군의 죄를 분명히 하고, 일본군의 일방적 개입을 저지하도록, 상국의 온정 있는 처치를 간원(懇願)한다」는 내용의 청원을 하는 것이었다.
민비의 첫째 편지를 받고, 그때까지 심신모약(心神耗弱)상태이던 고종은 소생했다. 그는 새삼스런 말 같지만 민비의 두뇌활동에 경탄하고, 그 건의에 혀를 내두르며, 조속히 행동으로 옮겼다. 그는 민태호와 조영하를 비밀리에 불러들여, 민비의 헌책(獻策)에 따라서, 청국으로 밀행시켰다. 천진(天津)에 체재중인 김윤식, 어윤중과 연락을 취하였으며, 청국정부에 대한 공작을 위해서이다.
대원군이 이 일련의 움직임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어째서일까. 그는 민비가 없어진 후의 왕이나 민비파 사람들을 무력하다고 간주하고,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 위에 대원군은 대내, 대외 다 같이 어려운 문제를 안고, 다망의 극에 있었던 것이다.
민비를 숨겨준 장호원의 민응식은, 일찍이 그녀에게 은혜를 입은 충주목사(군수)였다. 민비는 그의 저택 깊숙한 일실에서 쥐 죽은 듯이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민응식의 부인이 하녀의 손도 밀리지 않고, 밥상을 옮겨오는 이외에는, 단 한사람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가까이 하지 않는다. 그 예외란, 파발꾼인 이용익(李容翊)이다.
당시의 통신사정은, 화급한 경우에는 봉화(烽火)불을 놓고, 그에 이어서 역마, 일반에게는 “보바리”라고 하는 파발꾼이 뛰어가서 편지 같은 것을 갖다 줬다. 일반의 보바리는 하루에 80리(조선 이 수)에서 100리를 뛰아가는 것이 상식이지만, 민비의 비밀 보바리일을 맡았던 이용익은 하루에 300리를 뛴다는 특기의 소유자다. 조선의 300리는 일본의 30리, 거의 120km나 된다. 일본이라면, “위타천(韋馱天/아주 잘 뛰는 사람) 容翊”이라고도 불렀을 것이다. 그는 민비의 편지를 긴 천에 싸서 배에 감고, 만일 그것이 발각되는 경우에는 죽을 각오를 하고 왕이 계시는 곳으로 전력을 다해 뛰었다.
이용익이 민비의 역사에 등장한 것은, 민응식의 추천이 아니었을까---. 뒷날 이용익은 민비의 부름에 따라 탁지부대신(대장대신)까지 되고, 왕실의 재정을 장악하게 되었다.
민비는 간소한 책상을 향해서, 한 마음으로 필을 움직이고 있었다. 머지않아 편지를 받으려 이용익이 오는 시각이다.
장호원에서 민비가 보내는 나날은 고독하였으나, 그녀에게는 그것이 조금도 괴롭지 않았다. 왕궁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도, 그녀는 자기만을 상담상대로 보냈다. 지금 장호원에서, 재차 대원군 타도의 계책을 짜는 민비에게 있어서, 누구에게나 사고를 어지럽히지 않는 고독은 오히려 다행이었다.
민비는 하루 종일 작은 탁자 앞에 않아, 전지전능을 짜서 이리저리 두루 생각했다. 자기 능력의 한계에 도전하는 생각이다. 대원군의 건방진 용모가, 눈앞에 어물거린다. 대적이라고 생각하면, 투지는 더욱 솟구쳐 오른다. 그녀는 씨줄과 날줄의 실을 짜는 듯이 책모를 다지고, 그에 여러 각도의 검토를 거듭한다. 어딘가에 약점이 보이면 그 전부를 허물고 또다시 처음부터 고친다. 이리하여 다시 완결된, 왕에 대한 헌책(獻策)을, 그녀는 남자와 같은 달필로 종이에 써내려 간다.
민비는 피로도 잊은 체, 대원군과의 맞대결 승부에 정혼(精魂)을 기울이고 있었다. 대원군은 그것을 알 이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