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자동차로 2시간 거리인 충남 공주시 한일고등학교. 주변이 논밭과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학교 주변엔 서점이나 학원도 하나 없는 ‘시골 학교’다. 한 학년이 5개반 160명에 불과한 이 작은 시골학교가 일을 냈다.
올해 졸업생 160명 중 119명이 이른바 ‘스카이(SKY) 대학’인 서울대, 연·고대에 합격했다(중복합격 포함). 카이스트·포항공대·경찰대 합격자까지 합하면 141명에 달한다. 10명 중 8~9명이 명문대에 합격한 것이다.
졸업생의 반 수 이상이 명문대에 진학한 게 올해로 4년째로, 서울의 특목고 이상 가는 성적이다.
비결이 뭘까? 김종모(金鍾模) 교장은 “아이들이 사교육의 때를 벗어내고 홀로 서는 훈련을 한 결과”라고 말했다.
실제로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하는 이 학교에선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이 단 한 명도 없다. 학교 일정 자체가 사교육을 받기가 불가능하게 짜여 있다. 학생들은 평일 오전 6시에 일어나 오후 5시까지 정규수업을 한다. 이어 밤 12시까지 보충학습과 자율학습이 이어진다. 주말에는 자유롭게 학원에 다닐 수 있지만, 학원수업을 마다하고 대부분 학교 도서관에서 개인 공부를 한다. 방학 때도 마찬가지로 전원 기숙사에 남아 자율학습을 한다. 3학년 서준석(18)군은 “선배들마다 ‘우직하게 선생님만 믿으라’고 입버릇처럼 말한다”며 “스스로 공부하는 법을 터득한 상태라 사교육은 도움이 안 된다”고 했다.
수업 진도도 숨가쁘다. 최용희(49) 입학상담실장은 “아이들 실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2학년 때 고교 3년 진도를 끝내고 심화학습을 진행한다”고 말했다. 2학년 신요섭(17)군은 “학교 수업과 보충수업을 따라가려면 딴생각 하기 힘들 정도”라고 말했다. 교사들이 밤 10시까지 남아 아이들을 돌보는 것도 예사다.
처음부터 이런 건 아니었다. 입학 전까지 대부분의 신입생들은 요즘 보통 학생들처럼 사교육 의존도가 심했다. 그래서 입학 후 100일째 되는 날이면 구내 식당에서 ‘100일 잔칫상’을 차려준다. 교사와 선배들이 “사교육의 때를 벗고 ‘진짜 한일인’이 된 것을 축하한다”며 격려해 주는, 일종의 작은 ‘의식’이다.
올해로 개교 20년이 된 이 학교가 이처럼 주목받는 학교로 변신한 것은 2002년 자율형 학교로 전환한 뒤부터다. 그때까지 비평준화 지역이어서 대입성적은 좋았지만, 학생수준을 더 높이려면 전국 단위에서 우수학생들을 뽑아야 한다고 교사들이 재단(학교법인 한일학원)측에 건의했다. 이후 해마다 중학교 내신 상위 1~3%에 속하는 지원자들이 1000명 이상 몰려들고 있다. 그 중 60% 이상이 서울과 수도권 출신 학생들이다.
실력 있는 아이들이 학교와 기숙사를 오가며 단체생활을 하는 것도 ‘시너지 효과’를 낳고 있다. 휴대폰과 인터넷 사용도 제한된 엄격한 기숙사 생활을 돕는 건 바로 끈끈한 선후배 관계다. 신요섭군은 “선배들이 진로나 고민 상담도 해준다”며 “우리에겐 엄마·아빠와 같은 존재”라고 했다. 기숙사 방별로 독서 토론 그룹이나 수학공부모임을 자발적으로 만들어 학생들이 서로 가르치는 모습은 이 학교에서는 흔한 풍경이다. 2학년 조승완(17)군은 “가장 좋은 선생님은 바로 친구와 선배들”이라며 “모르는 게 있으면 서로 해결해주고 자극을 받는다”고 했다. 우수한 학생들이 모였을 때 흔히 나타나는 내신 경쟁이나 스트레스도 찾기 힘들다. 서준석군은 “기숙사 생활을 하기 때문에 서로를 적(敵)으로 생각하면 단체생활은 끝”이라며 “우리의 경쟁상대는 전국의 특목고·자사고 학생들임을 늘 잊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고 이 학교에 꽉 짜인 수업일정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학생들은 장애인시설을 찾아 봉사활동을 편다. 방학 때는 일본과 중국의 명문고를 방문한다. 서울에서 유명한 음악회나 오페라 공연이 있으면 수업이 끝난 뒤 상경해 단체로 관람한다. ‘시골 학교’에서 겪을 문화적 소외감을 덜어주고, 빡빡한 공부 일정 속에 갇힌 아이들의 숨통을 틔워주기 위해서다. 교사들이 마련한 특강에는 돈 헬만 미국 워싱턴대 정치학과 교수(2006년)와 카이스트 전 총장인 러플린 박사(2005년)도 참여했다. 성교육 강사로 유명한 구성애씨는 4년 전 특강하러 왔다가 이 학교에 반해 아들을 입학시키기도 했다.
거침없는 이 학교의 목표는 어디일까? 김종모(金鍾模) 교장은 “영국의 이튼스쿨이나 미국의 필립스 아카데미(미국의 최상위 보딩스쿨)처럼 세계적인 명문 보딩스쿨을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공주 한일고는…
공주한일고는 자율형 학교다. 일반학교와 달리, 교과과정을 자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 대신 자립형사립고와 달리 학비는 훨씬 저렴하다. 한일고의 경우 학비와 기숙사비는 월 60만원 정도. 설립자(한조해·1997년 별세)가 한의사로 일하며 평생 번 돈 200억원을 쏟아 20년 전 설립했다. 2세인 한동현(47) 이사장(한의사)은 “학교 발전을 위해 쓰겠다”며 최근 90억원에 달하는 일가 땅을 처분했다. 학교 운영은 교장에게 일임한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