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 마련의 기쁨
홍 재 석
이 세상 누구에게나 삶의 안식처이며 행복과 사랑의 꽃을 피우고, 희망의 꿈을 펼쳐가려면 내 집 마련의 보금자리가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우리들 생활에서 집이란 개성과 형편에 따라 고대광실 같은 좋은 집이던, 언덕위에 초라한 초가집이라도 마음이 편안한 보금자리가 가장 행복하고 소중한 내 집이 될 것이다.
나도 대학 진학을 위해 이 고장에 온지 5년 만에 사랑하는 아내와 결혼을 하고, 객지에서 처음 남의 문간방에 세를 얻고 신접살림을 시작했다. 비좁고 소꿉장난 같은 살림살이 이었지만, 신혼의 단꿈에 빠져 불편함도 아랑곳 하지 않고 무척이나 즐겁게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마음 한편으로는 나 자신의 부족함과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으로, 내 집 마련의 꿈은 저 멀리 산 넘어 하얀 뭉게구름처럼 피어났지만 잡을 수도 없었고 의욕만 점점 커져 갔다. 이후 마음을 다잡고 전속으로 근무하는 프린트사 주필 이외에, 시내 타 여러 업소의 필경위탁의 부업을 하였다. 퇴근 후에 집에서 밤잠을 설치면서 쉬는 날도 없이 억척으로 일을 했다. 특히 아내가 필경을 배우고 도움을 주무로서 4년여에 작은집을 마련할 큰 돈을 모았다.
그해 봄에 공무원으로 취업 되여 직장을 바꾸고 내 집을 마련하려고 다리품을 팔았지만, 가진 돈에 맞추다 보니 집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집이 눈에 들면 자금이 모자랐다. 그래서 반년 가까이 마음조이며 구불득고의 고심을 하면서 밤마다 공상의 기와집도 수없이 지었다.
결국은 부질없는 욕심으로 여기고 내 능력에 맞추다보니, 울도 담도 없으며 산 밑에 있는 남의 터지만 목조 와가이기에 집 만보고 마음을 정했다. 위치로 보면 중고등학교 뒤편이라 맹모삼천지교를 생각하면 환경도 좋은 편이다. 한편 도시의 변두리로서 시골 냄새가 솔솔 풍겨 오기에 향수(鄕愁)에 저져서 방안에 도배만하고 초가을에 이사를 하였다.
물론 아내가 더 좋아했고 나 역시 내 집의 소유감으로 뿌듯한 기쁜마음의 감격에 벅찼다. 이 소식을 제일먼저 시골 아버지에게 알렸더니 할머니를 모시고 함께 오셨다. 대청마루에서 80의 고령이신 할머니께서는 손부의 손을 잡고 춤을 추시며, “너가 복덩이다 장하다” “이제 가도 여한이 없다”고 하시면서 부둥켜 안아주시니, 온가족들의 눈시울에는 뜨거운 눈물이 매치고 더없는 기쁨을 만끽 했다.
그 이후에도 부업을 계속하여 이듬해 봄에 대대적인 집수리를 하고 도색을 하였다. 앞쪽 언덕에는 석축과 낮은 담도 예쁘게 둘러치고, 앞마당 화단에는 각종 꽃나무를 뒤 텃밭에는 유실수의 묘목을 사다가 내손으로 정성껏 조경을 하였다. 상수도와 전화도 처음으로 설치하고, 아내의 명의로 프린트 사업자 등록을 마치고 간판을 걸고 보니, 등 따습고 배부르면 그만이란 격언처럼 부러울 것이 없었다.
아늑한 남향집으로 ㄷ자형 한옥의 운치가 제법 풍기며, 마치 포근하고 조용한 산사의 작은 별채 같이 보였다. 잔잔한 기쁨이 내 마음 속에서 향기처럼피어나는 행복감을 느꼈다. 집터도 후에 사드렀다. 또한 퇴근 후에는 곧장 귀가를 하게 되니, 아내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늘 피어 있었고 반기는 기쁨도 즐거워 생활의 리듬이 바뀌었다.
지금 생각해도 내 생에 가장 행복한 시절로 여겨진다. 그때가 아름답고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이기에 아련한 그리움이 마음속 깊이 다가 온다. 내가 공직생활을 시작한 해에 내 집 마련을 하고 정년퇴임을 할 때까지 오랜 세월 집을 가꾸면서 살아 왔기에 남다른 애착을 가졌다.
여자와 집은 손질하기에 달렸다는 격언처럼 집을 가꾸는 재미도 있지만 요즈음 사람들은 편리한 생활을 쫓아서 아파트를 선호하며,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루고자 너무나 애를 태우고 있지 않는가.
대도시의 비싼 집값은 거품에 떠받쳐 내려올 줄을 모르고, 전세 값은 천정부지로 오르고 있다니, 젊은이들의 꿈과 사랑의 보금자리인 내 집 마련의 고민이 더 깊어지고 있는 현실이 문제이다. 반면에 농촌의 빈집은 날로 늘어만 가니 시골 사정은 더 답답한 사연이 아닌가.
이제는 어디고 대중교통이 편리하여 한 시간이면 백리를 더 간다. 고유가 시대에 맞물려 지혜로운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대도시를 벗어난 내 집 마련을 하고 있는 추세라니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나도 일찍이 정년퇴임 후 귀농생활로 황혼 길에 도시에서는 맛볼 수 없는 자연친화적인 행복한 경험을 해 보았다. 건강에도 도움이 되었고 경제적인 보탬도 많았다.
지금이라도 대도시 집값의 반만 가지고 시골에다가 보금자리를 마련한다면 몸은 고단해도 마음은 더 즐겁고 노후에도 강건하며 편안할 것이다. 더불어 대자연속에서 얻어지는 자기만의 소중한 보물 같은 향수를 언제고 가지며 느낄 수 있음이 더 즐겁고 기쁘지 않을까?
첫댓글 "지금 생각해도 내 생에 가장 행복한 시절로 여겨진다. 그때가 아름답고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이기에 아련한 그리움이 마음속 깊이 다가 온다."
잔잔한 삶의 도야를 밟아오신 길을 보는듯 합니다. 좋은글 잘 감상 하였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저 역시 신혼시절 전세 살이로 시작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세월이 언젠지 엊그제 같은데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마음이 갑자기 안개로 덮히고
한 자락 비가 내리네요,
참말 인생이란 공허한 것인데
무엇 땜시 아웅다웅하여야 하는 건지,
오늘도 날은 저물고 끝도 보이지 않는 인생길을 성급히 가는지,
강이 보이는 나즈막한 언덕에 작은집 짓고
청산 살자l
애들이 바쁘다 핑개로 안 와도 좋고
다저녁 피라미 은빛 비늘 창공차면
모닥불 피워 지지미 만들고
100여평 뜰에는 애들 김장감을 심어요,
애들이 오던 안 오던
그렇게 살고 지고...
저도 홍선생님처럼 그렇게 살고 싶어요, 감명깊은 글 잘 보았습니다,
첫 번째 집 사던 시절, 하도 좋아서 몇 날 며칠밤을 새웠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도 샛방살이 하던 때가 더 그리워지는걸요. 선생님 추억의 글 감상 잘 하였습니다.
선생님 좋은글 잘읽었습니다.
내집마련은 예나 지금이나 서민들의 으뜸과제이겠지요.
'아늑한 남향집으로 ㄷ자형 한옥의 운치가 제법 풍기며, 마치 포근하고 조용한 산사의 작은 별채 같이 보였다.
잔잔한 기쁨이 내 마음 속에서 향기처럼피어나는 행복감을 느꼈다..'
내집을 마련 하시고 행복해 하셨던 선생님의 모습을 상상 하면서 읽고 갑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