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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뭐꼬? 시심마(是甚麽)?
一念現前微喚時(일념현전미환시) 한 생각 나타나서 부른 적이 없어도 天地萬物不聞聞(천지만물불문문) 천지만물 두두물물 들음없이 들음이요 風雲造化無用處(풍운조화무용처) 바람 구름 풍운조화 작용이 없는 곳에 眞空妙有不見見(진공묘유불견견) 진공묘유 참된 이치 봄이 없이 보는도다.
是甚麽 시심마 ? 이뭣꼬 ? 【解說】 설선당(說禪堂)의 주련인 만큼 선지(禪旨)가 묻어나 그 깊은 뜻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다만 글자를 좇아서 대강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 깊은 뜻은 무엇인가 잘 헤아려 보세요.
一念現前微喚時(일념현전미환시) 한 생각 나타나서 부른 적이 없어도 天地萬物不聞聞(천지만물불문문) 천지만물 두두물물 들음없이 들음이요
일념(一念)이란 아주 짧은 시간을 나타내기도 하는데 순간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는 한 번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염(念)이란 사념(思念)을 말하는데, 심념(心念), 관념(觀念), 칭념(稱念) 등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심념(心念)은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을 말하고, 관념(觀念)은 법성(法性)의 이법(理法)이나 부처님의 상호(相好), 혹은 시절의 인연(因緣)이나 중생의 소질(素質)과 능력(能力)을 관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칭념(稱念)이란 부처님의 명호(名好)를 부르는 것을 말합니다.
현전(現前)이란 현재전(現在前)이라고도 하는데, 현재 눈앞에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또 눈앞에 존재하는 것을 말합니다. 미환시(微喚時)는 '부름이 없을 때'라고 새겨지는데 미(微)는 없을 무(無)와 같은 의미로 쓰인 것 같습니다. 미(微)는 '작을 미'자인데 때에 따라서 '없을 미'자로도 쓰이고 '아닐 미'로도 쓰입니다.
천지만물(天地萬物)은 삼라만상(森羅萬象)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 두두물물(頭頭物物)이라고 하지요. 불문문(不聞聞)이란 들음없이 듣는다 라는 뜻이죠. 백의관음무설설(白衣觀音無說說) 남순동자불문문(南巡童子不聞聞)의 그 불문문입니다. 말하기 전에 알아차린다는 말이죠.
한 생각 일으키어 부르기 전에 천지만물은 이미 들었다는 것이니 한 생각 이전에 모든 것이 드러났다는 뜻으로 여겨집니다. 한 생각 일으키기 전 한 마음은 모든 것을 구유(具有)한 소소영영(昭昭靈靈)한 마음입니다. 그러니 부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風雲造化無用處(풍운조화무용처) 바람 구름 풍운조화 작용이 없는 곳에 眞空妙有不見見(진공묘유불견견) 진공묘유 참된 이치 봄이 없이 보는도다.
풍운조화(風雲造化)란 바람 구름의 변화가 무상함을 말합니다. 무용처(無用處)란 '쓸모가 없다', '쓸모없는', '필요없는 곳', '쓸 곳이 없다', '작용이 없는 곳'등으로 새겨집니다.
진공묘유(眞空妙有)란 실상(實相)을 말하는 것입니다. 일체법(一切法)은 인연을 따라서 생겨난 것이므로 아체(我體)라든가 본체(本體)라든가 실체(實體)라 할만한 것이 없기에 공(空)이라 합니다. 그래서 제법개공(諸法皆空)이라 합니다. 이렇게 모든 법이 공하다고 보는 것을 공관(空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은 공(空)은 허무(虛無)가 아니므로 공을 관(觀)한다는 것은 실상(實相)을 관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실한 가치를 본다는 의미입니다. 실상이 그렇기 때문에 진공(眞空) 그대로가 묘유(妙有)입니다. 이를 진공묘유(眞空妙有)라 합니다.
불견견(不見見) 봄이 없이 본다는 의미인데 눈으로 보지 않아도 본다는 의미이니 마음으로 본다는 의미입니다. 풍운조화는 변화가 무상함을 말합니다. 해와 달과 별을 보려고 하려면 하늘이 맑아야 합니다. 바람이 불어 구름과 안개를 걷어내야 보입니다. 이와 같이 덮인 것을 걷어내면 일월성신(日月星辰)이 보이게 되고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드러나 보입니다. 풍운조화는 마음이 번뇌망상으로 요동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요동치는 마음이 가라앉은 것이 즉 무용처(無用處)입니다. 일월성신 삼라만상이 드러남은 지혜가 드러남이니, 이 반야지혜로 실상을 여실히 봄을 뜻합니다. 실상을 반야로 관하니 진공묘유(眞空妙有)입니다. 번뇌망상이 걷히는 순간 진공묘유의 실상이 드러나는 것이 그대로 불견견(不見見)입니다.
이 주련 전체를 보면 미환시(微喚時)와 무용처(無用處)가 대(對)를 이루고, 불문문(不聞聞)과 불견견(不見見)이 묘하게 대를 이루고 있음을 봅니다. 참 마음이 두루 밝으면 부르지 않아도 알고 마음이 고요하면 보지 않아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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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나무아미타불...감사합니다_()_
함박꽃내음님...
고맙습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