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의 여중군자 사임당 신씨, 정부인 장씨
조선시대 여성의 사회진출은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아무리 신분과 학식이 출중해도 사회 진출의 관문인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으며 가사 외의 사회적 직책을
수행할 수 없는 시대였다. 그나마 여류 예술가들이라고
하면 기녀들이었으므로 일반 여성으로서 뚜렷한 업적을
남긴 조선시대 인물은 찾기 어렵다.
이러한 가운데 율곡 이이(栗谷 李珥)의 사임당 신씨와
갈암 이현일(葛庵 李玄逸)의 어머니 정부인 안동 장씨
군계일학(群鷄一鶴)으로 조선시대 여성으로 군자(君子)라
할 만한 인물로 조명(照明)되고 있다.
군자란 예의 바르고 덕이 충만한 지식인을 말하는데
공자께서는 이상적인 인간성을 군자로 보았다.
☛ 사임당 신씨 (1504-1551)
사임당 신씨의 본명은 신인선(申仁善)이며
강릉 오죽헌에서 신명화씨와 용인 이씨 사이의 5녀 중
2녀로 1504년에 태어났다. 부친 신명화씨는 본관이 평산으로
오죽헌의 용인 이씨네 집 데릴사위로 사마시에(司馬試)에
입격한 진사 신분의 선비였다. 신명화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특히 서화(書畫)에 소질을 보인 둘째 딸 인선의 재능을
살여 주기 위해 결혼 후 시집살이가 비교적 가벼운 혼처를
찾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양의 명문 덕수이씨 가문의
편모슬하 외동아들 이원수를 신랑감으로 골라 19세에
혼인시켰다. 그 당시 이원수의 당숙이 영의정과 좌의정으로
있던 새도가 집안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충무공
이순신도 동생 벌(18촌)되는 집안이었다.
사임당은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 태임을 본받는다는
의미로 아호로 정하였다. 시, 그림, 서예에 대한
재주가 탁월하였고 성리학적 소양도 있었으며 십자수와
옷감 제작에도 능하였다. 성리학적 지식과 도학, 문장
고전, 역사 지식 등에 해박하여 동시대의 여성인 문정
왕후, 정난정, 황진이 등과 비교되면서 생전에도 부덕과
현모양처의 상징으로 존경 받았고 사후에는 아들 율곡의
정치적 학문적 대성으로 존경받는 어머니상의 전형으로
추앙받았다.
사임당과 이원수 사이에는 4남 3녀의 자녀를 낳아 훌륭히
키웠다. 자녀 중 3남인 율곡 이이는 조선시대 문신,
성리학자, 사상가로 퇴계 이황(퇴계 이황)과 양대 학맥을
이룬 대학자였다. 장녀 이매창과 4남아우가 사임당의
예술성을 이어 받아 시와 서화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결혼생활이 원만한 것은 아니었다. 놀기 좋아하는
이원수와 모든 일에 빈틈이 없는 사임당 사이에는 다틈이
잦았다. 사임당은 남편 이원수에게 고분고분 순종하지
않았으며 남편 이원수에게 과거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10년간 별거를 약속하고 좋은 명신을 알아내 남편을
보내기도 했다. 남편 이원수는 별거를 약속하고 산으로
들어갔다가 아내가 보고 싶어서 다시 되돌아왔을 때
결단력 없는 남편을 나무라기도 하였다. 남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녀는 가위로 머리카락을 자르며
제대로 공부하지 않으면 비구니가 되겠다고 협박하여
남편을 학문에 정진하도록 하였으나 결국 남편 이원수
3년 만에 학문을 단념하여 과거시험을 보지 못하고
음서로 관직에 겨우 진출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원수는
부인 사임당을 어느 정도 멀리하게 되었다.
신사임당은 남편 이원수에게 아버지 신명희와 외할아버지
이사 온 처음 자상하고 인자한 태도와 한 평생 여자문제가
없는 인품을 기대하고 있었으니 남편으로 인해 뜻하지
않은 시련과 정신적 고통을 당하게 된다.
남편에게 다른 여인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는
일시적으로 충격을 받기도 했다. 남편의 외도는 사임당
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사건이었다.
신사임당은 예법과 자녀교육을 들어 자신이 죽은 후에도
남편의 외도나 재혼을 강력하게 거부했지만 결국 현실은
그녀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남편 이원수는 외도에서
끝내지 않고 첩을 두게 되는데 첩 권씨는 술주정과
행패가 심했으며 사임당 사후에 후처로 집안에 들이게
되었다. 신사임당은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 유명하지만
재능 있는 여성이었다. 서예가이자 시안이기도 한 그는
어머니가 그리워 등의 한시를 여러 편 남겼다.
그림으로는 산수도, 초충도, 영로도, 자리도, 노안도.
요안조압도와 글씨로는 6폭 초서병풍이 대표적 작품
그림, 서예, 자수 등의 작품을 다수 남겼다.
조선 후기에 우암 송시열, 명재 윤증 등이 사임당
작품의 예술성을 높이 평가하였다.
신사임당은 여성으로 성리학적 지식이 해박했다는
점과 아들 이이, 이우, 딸 이매창을 대학자와 화가
작가로 길러냈다는 점 역시 사후 그가 찬탄되는
이유가 되었다. 그녀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문정왕후와
정난정은 탐욕의 상징으로 황진이는 음란의 상징으로
비난했던 조선의 사대부들이 신사임당을 부덕과 현모
양처의 전형으로 칭송하였다. 그의 아들 이이가 서인의
지도자이자 노론의 학문적 시조가 되면서 우암이나
명재 등에 의해 국가적 위인으로 격상된 점도 있다.
1551년 48세로 별세 후 경기도 파주군 율곡 촌에
안장되었고 후일 남편 이원수를 그녀의 묘소 곁에
안정하였다. 아들 이이가 종1품 우찬성과 판의금
부사로 승진함에 따라 사임당은 정경부인에 추증
1960년대 제3공화국 당시 아들 이이와 시댁 친족인
충무공 이순신을 국가적 영웅으로 추앙하면서
신사임당 역시 다시 부덕의 상징으로 현창하고
국사와 국어 교과서 미술교과서에 시와 작품이
실리고 위인전으로 널리 알려졌다.
2007년 여성계의 반발이 거셌으나 정부는
대한민국의 5만 원 권 지폐의 주인공으로 도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