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 베트남 7박 9일 여행기.5(완)
이번 남 베트남 여행 후반부인데 싶어 마음을 다잡아 먹으며 호텔 조식을 마쳤다.
베란다를 나서서 호텔 본관을 올려다 보니 마치 계단식으로 쌓아올린 듯했다.
무이네 관광은 오전 내내 4인승 지프를 이용했다.
맨 처음 들른 곳은 요정의 샘이라는 작은 협곡이었는데
발목까지 차오른 맑은 물길을 거슬러 왕복 1시간을 올라 작은 폭포까지 다녀오는 코스였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모래 언덕이 가팔랐고 그랜드 캐년이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였다는데
냇가 언덕 나무들 뿌리가 드러나 모래주머니로 둑을 쌓아 노점을 세워둔 상태였다.
노점상들은 열대과일 쥬스나 특산품을 전시하고 있었지만 오전이라 흥정하거나 문의하는 관광객은 보이지 않았다.
일행 한 분이 휴대폰 지갑을 분실해서 그걸 찾느라고 한참 우왕좌왕하다가
슬리퍼 가게에 떨어진 걸 보관 중인 걸 알게 되어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시 오른 지프는 너른 평야를 가로질러 레드샌드라는 사막지대로 갔다.
거대한 모래 언덕이 보이고 그 앞에 꽤나 큼직한 오아시스가 보였다.
지프는 용하게도 모래에 빠지지 않고 중턱까지 비틀거리며 잘 올라갔다.
오토바이처럼 보이는 모래 자동차들은 모래 언덕 중턱 위에까지 잘도 미끌어졌는데
우리 일행은 걸어서 꼭대기에 올라야 했다.
다리가 아픈 몇은 지프 옆 차 그늘에서 일행의 오르내림을 지켜보았다.
사막이라고 하기엔 뭔가 이상한 게 식물이 자란 흔적이 선명하였기 때문인데,
가이드는 말없이 발끝으로 사막 모래를 파보였다. 10cm 정도 팠을 뿐인데 물기가 스며 나왔다.
이미 건기에 접어들었어도 우기 내내 땅에 스민 물기가 남아 있다는 증거였다.
레드 샌드 주차장에서 모두 코코넛 주스를 마셨고, 나중에는 코코넛을 잘라 속까지 숟가락으로 파서 먹었다.
갈증을 잊을 만큼 시원했다.
점심 식사는 베트남식 돌솥밥을 먹었다.
자그마한 질그릇 솥에 찹쌀을 안쳐 익힌 것으로 숟가락으로 긁으니 마치 누룽지를 먹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한 친구는 그걸 긁어서 마치 빵처럼 만들어 뜯어먹기도 했다.
미역 냉국 같은 국물에 말아 먹는 이도 있었고, 샐러드에 비벼서 먹기도 했다.
어쨌든지 일행 중 입맛에 맞지 않는다는 이는 없었다.
점심을 먹은 다음 화이트 샌드라는 곳에 사막에서 미끄럼을 타는 체험을 하러 갔다.
우리가 타고 온 지프와 이별이라고 했는데 운전석 뒷좌석 보관함에 꽂아둔 모자를 깜박했다.
가이드에게 얘기하려다가 우리 지프를 운전했던 청년이 모자가 없었단 걸 생각하고 선물한 셈 치기로 했다.
돌아오는 길에 일행들은 머드 온천 체험장에 들렀다.
따뜻한 머드에 몸을 푹 담근 뒤에 아로마 온천에서 다시 피부를 달래고
바깥에 있는 야외 수영장에서 몸을 식히는 체험이었다.
판티엣에서의 마지막 저녁 식사는 삼겹살 무한 제공 한국 식당이었는데,
일전에 들렀던 곳과 아주 가까운 곳에 위치했다.
관광객을 실은 대형버스들이 오가는 바람에 식사후 다시 버스에 타려다가 교통혼잡이 벌어졌다.
베트남에서 최초로 거리 안전 지도원과 버스 운전기사 사에이 벌어진 언쟁을 목도하게 되었다.
운전기사는 교통 혼잡에 대해 양해를 구했으나 미리 옮기지 않은 것만 지적하며 가시돋친 고슴도치마냥
길길이 날뛰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버스를 출발시켜 언덕길을 먼저 내려오고
일행 중에 몇은 가이드와 1km 정도를 걸어서 이동해야 했다.
사회주의 국가의 교통지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게 되었고,
가이드의 해설로 그 지도원이 인민위원회에 고발을 하게 되면
운전기사 개인과 운수회사에 모두 페널티가 부과된다고 했다.
인구 1억의 숫자만큼 많은 오토바이 운전자들도 똑같이 대우를 받으므로
교통사고를 줄이고 교통안전이 유지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오토바이들은 스치듯 지나칠 때도 짤은 경적말고는 상대에게 항의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시비가 붙으면 해결도 어려우며 자칫 오토바이를 압수당하거나 재판을 받아야 하니
생계를 위해서도 양보하고 참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호텔로 돌아와 씻고 느즈막하게 잠이 들었다.
다음날은 여장을 다시 꾸려 버스에 싣고 판티엣 시내 관광에 나섰다.
가장 먼저 천 년 전 참파 왕국 유적지를 찾아갔다.
당시에 세워졌다는 구운 벽돌로 거대한 첨탑을 세웠는데, 지금은 두 곳 사원만 남아 있었고,
옆 공터에서는 소수민족의 공연 연습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관악기와 현악기 그리고 타악기의 어울림이 귀에 설었으나
구경꾼을 이식하지 않고 땀을 쏟는 연주자들의 열정만큼은 인정하게 되었다.
사원 앞 쉼터에 앉아 쉬고 있던 베트남 여학생 몇이 ‘코리안’이라며 저희끼리 수다를 떨다가
몇 마디 영어로 대화를 시도했지만 그저 웃기만 해서 아쉬었다.
다음 관광 코스는 이곳 개발을 주도하고 있는 미국 와인 기업이 건설했다는 와인캐슬이었다.
미국의 나파벨리를 모방했다는데 중세의 성처럼 벽돌로 성을 쌓고 중세 기사 복장을 한 수문장을 세워두고,
마당에는 오크통 모양의 조명탑과 영국왕실 마차를 세워둔 채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계단을 올라 실내로 들어서자 냉기가 확 밀려왔다.
방문록에 대표가 서명하고 지하 계단을 통해 와인 저장고와 제조시설 전시 시설을 차례로 둘러보고 나오면서
시음도 했다.
우리 일행 중에서 제공하는 화이트 와인 말고 레드 와인을 특별히 청한 이가 있었지만,
베트남 안내원은 상냥하게 한 전 더 제공해주었다.
밖으로 나서는 곳에는 기념품 코너가 있었지만 소지와 보관이 힘들어서인지 아무도 구매하는 이는 없었다.
바깥에는 유렵 동화 속 배경이 될 만한 새장, 마녀상, 호박 모형, 초기 비행선 등 여러 형상과 식물원이 있어서
기념 촬영도 여러 번 했다.
출구로 걸어 나와서는 버스가 올 때까지 매점에서 소프트아이스크림으로 더위를 식히기도 했다.
아이스크림값은 1만동(한화 560원)에 불과했으니 우리나라 관광지와 달리 꽤 싸다는 생각도 했다.
점심 식사는 베트남 수산물 중심 가정식이었는데,
파인애플 볶음밥이 중심으로 구이와 튀김이 제공되었다.
식사 후에는 4시간을 이동해서 베트남 전쟁의 중심지였던 쿠치터널이 있는 곳으로 갔다.
베트남이 남북으로 갈려 전쟁을 치르는 동안 남 베트남을 지원한 미군이 북 베트남 군과
무려 열두 번 전투에서 단 한 차례도 승리하지 못했던 그 유명한 땅굴이 남아 있는 곳이다.
지상에는 우거진 밀림 때문에 고전을 했고,
땅굴을 파 놓은 채 기습 전투를 감행하는 베트콩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지역이다.
지하에 사령부와 작전회의실, 야전 병원에 주방까지 설치된 것을 둘러볼 수 있었다.
복사용지 B3 크기 만한 잔디 판을 들추면 지하로 들어갈 공간이 생기고,
들어가서 덮으면 지상과 구별하기조차 어려웠다.
땅굴은 한 사람이 오리걸음으로 걸을 정도이거나 허리를 굽혀 이동할 수 있었는데,
관광객을 위해 50m, 100m 체험 구간을 개방하고 있었다.
가이드의 설명으로는 그런 땅굴이 무려 250km에 이를 정도라고 했다.
다시 버스를 타고 호치민으로 이동했다.
도로 양옆으로는 고무나무가 빼곡하게 식재되었는데, 채취가 끝난 나무는 가구재로 벌목된다고 한다.
농부가 마음만 먹으면 3모작도 가능한 기후라서 굶어 죽을 걱정도 없을뿐더러 열대 과일도 풍부한 자연환경인데도
왜 아직 후진국 경제를 벗어나지 못했을까 궁금했다.
아마도 역사적 지리적으로 변방에 속하다 보니 외침에 시달리면서 겁난 상황을 피하는 데 익숙해져서
불확실한 미래를 설계하지 못하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버스 안에서 고선지 장군, 호산 이씨 이야기 삼국지 속 칠종칠금 이야기까지 나오게 되었다.
호치민은 예전에 남 베트남 수도로 사이공이라 불린 곳인데
독립한 뒤에 호치민으로 바뀌어 경제 수도의 위치에 이른 곳이다.
고무나무 숲이 보이지 않으면서 사이공 강을 건넜고,
여행자에게 맥주를 제공하는 야시장 투어를 하면서 한국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판티엣에서 먹던 한식과 큰 차이점 없이 4인이 덜어 먹는 방식으로 스프와 반찬들이 제공되었다.
느즈막히 베트남 여정에서 마지막으로 묵게 될 호텔로 갔다.
특이하게도 객실까지 짐을 옮겨주는 벨보이들에게 팁을 주었으나 한사코 거절하는 진풍경도 겪었다.
원달러가 아니어서 그랬는지, 2만 동이 아니어서 그랬는지 짐작하기 어려웠지만,
하룻밤만 묵을 것이어서 상관치 않기로 했다.
아침 일찍 여장을 재정비하여 출국할 준비를 마치고, 호텔 조식을 먹었다.
준비되는 식사 메뉴와 서비스 정도는 여행사가 5성급이라 자랑한 것과는 달리
베트남에서 묵었던 다른 호텔보다는 적어도 한 급 아래였다.
호텔을 나와 호치민에서 첫 방문지로 남 베트남 대통령이 항복문서 조인을 했다는 통일궁으로 갔다.
중앙에 분수가 치솟고 있는데 마당 구석에 당시 대통령궁 담장을 뚫고 진입했던 소련제 탱크가 전시되어 있었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는 총독부 관저였다는데,
지금은 박물관으로 운영되면서 현지인들과 관광객을 맞아 시끌벅적한 곳이 되고 있었다.
한 무리의 베트남 청춘 남녀들이 곳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데
전통복장 아오자이를 걸쳤거나 한 묶음의 꽃을 들고 같은 장소에서 여러 포즈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가이드는 베트남 사람들의 꽃 사랑이 그만큼 유난하다고 했다.
특히 붉은색과 황금색을 좋아한다니 어쩌면 동양인 공통의 특성일까 싶기도 했다.
통일궁을 나와 전쟁박물관으로 갔다.
베트남 전쟁 당시 관련 물품과 사진이 층층마다 전시되어 있었는데
기름칠한 상태로 무기들은 여전히 섬뜩했고 사진은 참혹했다.
특히 고엽제 후유증으로 아직 까지도 기형아 출생율이 어느 지역보다 높다는 게 놀라웠다.
서양인들은 개별적으로 사진을 꼼꼼하게 둘러보고 있었는데,
베트남 학생들은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 해설사의 안내를 받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참전이었다고는 해도 우리나라도 베트남 참전국으로 분류되는 만큼
베트남 국민들의 호감을 얻기 어려울 것으라 짐작되었다.
전쟁박물관에는 한국군에 의한 참상도 사진 기록으로 남아 있었다.
나의 종숙도 참전용사이고, 친했던 문우는 고엽제 피해자로 인정받은 참전용사였기에 마음이 착잡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한국군이 주둔했던 지역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반한 감정이 거의 없고
오히려 친한을 넘어 동경하는 나라가 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해결하지 못한 라이따이한(당시 한국군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해 출생한 사생아와 그 가족) 문제가 남아 있단다.
언젠가 대한민국의 세심한 책임 보상이 이루어질 것을 기대해 본다.
호치민 시내 중심가에서 중앙우체국과 노틀담성당을 찾아 갔다.
중앙우체국은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 건축된 곳으로 아름다운 외관과 건축양식은 물론이고
베트남에서 가장 크고 현재까지 실제 운영되는 우체국이다.
많은 관광객들이 엽서를 사서 고향과 친지에게 부치고 있는 진풍경이 이채로웠다.
우체국 앞에는 프랑스 노틀담 성당 판박이인 성당이 때마침 보수 중이라
보호막으로 둘러쳐진 상태라서 살짝 아쉬웠지만,
그 앞 로타리에는 언젠가 피눈물을 흘렸다는 성모 마리아상이 우뚝 서 있어서 잠시 묵상에 빠질 수 있었다.
외곽지구로 이동해서 베트남 현지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돌솥밥(콤메이유)인데
달랏에서와 비슷하면서도 솥이 조금 달랐으며, 모닝글로리 스프가 국을 대신해 먹을만 했다.
일행 중에 여성들이 큰 관심을 보이는 짝퉁시장엘 들렀다.
세계적인 유명 브랜드 제품과 흡사한 물건을 전시 판매한다는데
실제 명품매장과 불과 500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신기했다.
본디 살 것도 없었지만 피곤이 밀려와 버스 안에서 기다렸더니
40여 분만에 일행이 저마다 한 보따리 씩 들고 돌아왔는데, 아내도 백팩 하나를 선물 받았다면서며 들고 왔다.
일행 중에서 인연이 깊은 분이 3개에 한화 4만원 에 구매했다고 한다.
얼핏 보기에 개당 1만 4천 원이 치지 않았는데도 괜찮아 보이기는 했다.
어둠살이 내리기 시작했고 사이공 강에 띄워놓은 크루즈 선상 레스토랑으로 가서 해산물 뷔페를 즐겼다.
베트남에서의 마지막 식사인데, 메뉴도 풍부했고 맛있는 게 넉넉하게 제공되었다.
도중에 밴드가 등장해서 전통음악과 재즈 음악을 차례로 공연했는데
우리 귀에 익은 음악이 연주될 때는 스테이지에 사람들이 흥에 겨워 몰려가서 춤판을 벌이기도 했다.
우리 일행도 제자리에서였지만 손뼉도 쳐가며 분위기에 젖어드는 동안 크루즈 선박은 사이공 강을 빙 둘러 왔다.
강물에 비친 호치민 거리 불빛이 매우 화려했다.
낮에도 느낀 바였지만 호치민 건물들은 하늘 조망권에 신경을 많이 쓴 탓인지
높은 건물 외벽마다 야간 풍광을 미리 고민한 것이 뚜렷했다.
배에서 내려 빅버스(2층 버스)를 타고 호치민 시내 야경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아래 층에는 한 사람도 없었고 2층에만 50여 명이 앉을 수 있게 설계된 버스였는데,
가로수 가지와 잎새가 얼굴에 부딪힐 정도였고, 거리 간판의 오색찬란한 조명과 어우러지니 새로운 느낌이 들었다.
여정의 마지막은 전신 마사지 코스였다.
입구는 자그마했는데 2층은 꽤나 널찍해서 일행이 남녀로 구분되어 동시에 마사지를 받을 수 있었다.
일전에 받았던 마사지보다 훨씬 세세하고 여러 기구를 이용해서 경직된 근육이 풀렸으나
누구 하나 코를 고는 이가 없었다. 모두가 대만족으로 수고비를 지불했고,
나는 한 장 남겨두었던 원 달러를 더 얹어주었다.
오후 9시에 탄손누트 공항으로 이동해서 출국 수속을 해서 출발 시각 11시 30분까지 기다렸다.
이제 베트남에서 6박 8일을 마쳤고 서울 가는 비행기 안에서 1박을 거칠 것이니 길고도 짧은 7박 9일이 될 것이다.
그동안 일행을 가이드하며 수고한 분이 혹시 다음에 베트남에 다시 방문하거나 여생을 보내시려면
꼭 연락달라는 당부를 웃어넘겼다.
그가 보낸 베트남에서의 25년이 기대 이상이었는지는 별개로
나로서는 조금은 부족한채로 익숙하게 일상을 보낼 수 있는 선비의 고장, 영주와
변화막측한 내 나라 대한민국을 떠너 살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비행기는 떠날 때와 같은 베트남 항공이었는데 신기하게 협력사라며 대한항공에서 기내 안내방송을 하고 있었다.
졸다 깨다 하면서 기내식을 먹고 새벽 6시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피곤한 육신을 인천 공항은 싸늘하게 맞아주었고, 수화물을 찾는 동안 겨울옷으로 갈아입었다.
슬슬 종아리가 붓기 시작했다.
주관 여행사는 인천공항 근처에서 동태탕으로 아침 식사까지 준비해주었고,
쓰다 달다 할 것도 없이 마무리 커피도 한잔 마시며 전세버스를 타고 영주로 돌아왔다.
영원한 우리들의 리더는 떠날 때의 역순으로 각자의 집 근처까지 택배에 나섰고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인제 다시 국외여행을 나설 일이 있을 것 같지 않은데
꽃동산 로타리에서 집에 까지 캐리어를 끌고 오는 소리가 요란해서 남이 볼까 은근히 걱정됐어도
한낮인데도 추운 탓인지 거리에 인적은 끊겨 있었다.
대문 앞 우편함에는 이런저런 우편물 다섯 개가 쌓여 있었을 뿐
집은 무탈하게 우리 부부를 말없이 맞아 주었다.
-완-
첫댓글 6회로 나누려다가 급히 끝을 맺습니다.
여러분이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잠시 상하의 나라 단면을 짐작해보셨다면 다행이겠습니다.
선생님 여행 여정으로도 힘드셨을텐데, 여행기까지 여러 날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며칠 동안 읽는 내내 즐겁기도 했고, 함께 따라 나선 듯이 피곤합니다.~^^
여독이 빨리 풀리시길 바랍니다.
베트남 여행담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여행 정보와 여행자의 물결이 넘치는 시대지요.
나그네 정신을 놓친 채 인간과 인생을 사색하지 못했다면 그 여행은 어처구니가 없는 맷돌에 지나지 않을 겁니다. 여행을 제대로 하려면 무리 속에서 고독해야 만이 이런 여행기가 나온 다는 걸 알려주셨네요.삶의 방향을 제시해주고, 고정관념을 벗어나게 해주는 베트남여행! 독자를 데려다 주셔서 감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