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고창의 운곡습지 한쪽에 만들어놓은 작은 연못. 운곡습지는 영광원전의 발전용수 공급을 위해 물을 막아 저수지를 만드는 과정에서 수몰된 마을과 논밭이 빠르게 자연으로 되돌아가 습지가 된 곳이다. 신록이 물드는 봄의 습지 풍경이 가장 아름답다지만, 겨울에도 나름의 정취가 있다. 전북 고창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 고창읍성이다. 읍성에서 내려다본 고창읍의 야경. 조명을 받은 느티나무가 불 켜진 전구처럼 화려하다. 전북의 생태관광지로 다듬어지고 있는 고창에도, 정읍에도 이름난 명소가 많다. 전북 정읍 솔티마을 뒤쪽의 고즈넉한 ‘솔티숲 옛길’에서 만난 수직의 편백나무숲. 전북 고창 운곡습지에 놓은 나무 덱 길. 습지 뒤편의 수피가 흰 것이 은사시나무다. 전북 고창 호암마을의 명상센터. 십자가 모양의 스테인드글라스 창으로 들어온 빛이 화려하다. ■ 고창 호암마을-정읍 솔티마을 ‘생태관광’
능선에 호랑이 바위 있는 ‘고창 호암마을’
반세기 전 한센병 환자 세 가족이 거주
1968년 20대 伊수녀가 정착해 환자들 품어
8개 마을 수몰되며 생성된 ‘운곡습지’
하얗게 빛나는 은사시나무 군락 등 압권 관광지는 어디를 가든 다 비슷비슷합니다. 케이블카나 구름다리, 집라인 등의 인프라는 물론이고 걷기, 캠핑 등 여행의 방식을 겨냥한 시설이나 감자 캐기, 떡메치기 등의 체험 프로그램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디서 성공했다 하면, 뒤이은 베끼기가 줄을 잇습니다. 관광지에 금방 식상해 하는 이유 중 하나가 너나없이 다 비슷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라북도가 긴 호흡으로 시도하고 있는 생태관광은 그런 점에서 눈여겨볼 만합니다. 전북은 지난 2015년부터 오는 2024년까지 10년 동안 1000억 원이 넘는 사업비를 들여 생태관광 육성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자연 생태자원과 마을 인문자원을 두루 갖춘 지역을 지원해 관광명소로 키우는 사업입니다. 단순히 자연 생태를 보전해 매력 있는 관광지로 바꾸는 차원을 넘어 마을의 지역 공동체를 복원하고, 지역사회의 지속 가능한 발전의 토대까지 마련한다는 게 궁극의 목적입니다. 생태관광사업을 통해 전북의 열두 개 지역에 다채로운 관광프로그램이 설계됐습니다. 사업이 반환점을 돌면서 올해부터 이들 지역의 생태여행 상품이 하나둘 선보이게 됩니다. 열두 개 지역 중 가장 먼저 여행상품을 준비하고 있는 정읍과 고창을 미리 둘러봤습니다. 전북 정읍 송죽마을의 ‘솔티 달빛 생태숲’과 전북 고창의 ‘운곡 람사르 습지 생태관광지’입니다. 두 곳 모두 천혜의 자연환경을 품고 있었지만, 못지않게 감동적이었던 건 마을을 이루고 사는 ‘사람들’ 이야기였습니다. 잘 지켜진 자연 생태가 감동적인 인문의 풍경과 어울리는 짝이 되는 것. 그것이야말로 전북의 생태관광이 가진 미덕인 듯했습니다. 지금부터 청량한 자연과 따스한 사람이 만들어내는, 온기 넘치는 여행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 솔티마을의 모시 밥상 이야기 어찌 된 셈인지 전북의 생태관광지에서는 자연보다는 ‘사람’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전북을 대표하는 생태관광지인 정읍의 솔티마을에서도, 고창의 호암마을에서도 자연보다는 ‘마을’이, 나무보다는 ‘사람’이 먼저였다. 계절적으로 황량한 겨울이어서 그랬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 선의로 가득한 마을 주민들의 호의와 소외된 이웃에 대한 사랑, 어려웠던 시절을 되돌아보게 하는 이야기가 묻어있어서 그랬다. 먼저 전북 정읍의 솔티마을 얘기부터.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먼저 받은 건 밥상이었다. 마을 부녀회원들이 마을회관에 ‘생태 밥상’이라며 정성껏 차려준 밥상에서 인상적이었던 건 모시 잎을 넣어 지었다는 ‘모시밥’이었다. 식사를 마치자 주민들은 짐짓 자랑처럼 모시떡을 내왔다. 솔티마을에서 받은 밥상처럼 솔티마을 공동체 중심에는 모시가 있다. 솔티마을 대부분의 농가가 모시농사를 지어 먹고 산다. 모시야말로 약을 치지도, 김을 매지도 않아도 돼 농사일이 힘에 부치는 노인들에게는 안성맞춤인 작물이다. 모시는 풀을 베어다 껍질을 벗겨내 천으로 짜기도 하고, 잎을 따서 떡에 넣기도 하는데 솔티마을에서 재배하는 모시는 전량 떡으로 빚어진다. 마을 주민들은 언제부터 모시농사를 했던 것일까. 주민에게 물었더니 쭈뼛거리다가 ‘오래전부터…’라며 얼버무렸다. ‘오래됐다’고 해야 알아준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구체적으로 언제부터냐’고 거듭해 질문을 던진 뒤에야 ‘본격적으로 모시농사를 한 건 15년쯤 됐다’고 털어놓았다. 그러고는 마을에 있는 떡집 ‘솔티애떡’ 얘기를 꺼냈다. 이 떡집이야말로 지금의 솔티마을을 있게 한 일등공신이다. 그 이야기를 하자면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 떡집이 마을의 중심이 되다 1978년 겨울. 솔티애떡 대표 김용철(56) 씨가 까까머리 중학생 때의 일이다. 소년은 당숙의 손을 잡고 서울로 올라갔다. 영등포역에서 내려 맡겨진 곳은 신도림동 골목시장의 한 떡방앗간이었다. 그는 떡집에서 허드렛일을 했다. 찬물에 쌀을 씻어 돌을 고르고, 밤잠도 못 자고 새벽까지 떡을 쪄야 하는 고된 노동이었다. 소년의 상경은 일자리나 돈벌이가 아니라 ‘입하나 덜기 위한’ 것이었다. 끼니조차 잇기 어려운 가난 속에서 5형제 중 장남이었던 그가 먼저 집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먹여주고 재워주기만 하면 황송해서 일했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렇게 그는 서울의 떡집을 옮겨 다니며 잔뼈가 굵었다. 배운 거라고는 떡 만드는 일밖에 없었으니 먹고 살자면 전력을 다해야 했다. 그렇게 스물일곱의 나이에 독립해 떡집을 개업했다. 그 무렵에는 이른바 ‘무작정 상경’이 줄을 이었다. 가장 먼저 서울에서 자리 잡은 이가 어떤 직업이었는가에 따라 마을청년들의 직업이 결정됐다. 이를테면 서울에서 택시 운전을 해서 자리를 잡은 이가 있으면 그 마을의 젊은이들은 죄다 택시운전사가 되는 식이었다. 김 씨가 떡집으로 자리를 잡자 뒤이어 4명의 동생이 차례로 상경해 7∼8년 일을 배운 뒤 떡집을 차려 자리를 잡았다. 둘째는 서울 화곡동에서, 셋째는 봉천동에서, 넷째는 경기 광명시에서, 다섯째는 광주 양동에서 떡집을 했다. 마을청년들도 마찬가지였다. 지금도 솔티마을 주민의 자녀 중 60% 정도가 외지에서 떡집 일을 한다. 모시농사 짓는 정읍 솔티 마을
쫀득한 모시떡 빚고 맛 보러 관광객 몰려
마을 뒤론 내장산 자락까지 3가지 코스 옛길
風葬 복원한 ‘초빈’… 명상숲·생태놀이터 눈길
생태관광 하이라이트는 ‘월영습지’
계단식 논이었던 곳 … 고요한 여행에 안성맞춤 # 마을의 분위기가 푸근한 이유 서울에서 떡집을 차려 남부럽지 않게 장사를 하던 김 씨는 돌연 2004년 고향 솔티마을로 내려왔다. 치매가 심해진 노모를 혼자 둘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아니었더라도 그는 언제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리라. 손찌검까지 당하며 일을 배우던 어린 시절, 자신의 처지가 서러워 흐느낄 때마다 늘 고향마을을 그렸다고 했으니 말이다. 김 씨뿐만 아니라 네 명의 동생들도 모두 1년 6개월에 걸쳐 객지에서의 일을 접고 고향 솔티마을로 돌아왔다. 고향으로 돌아온 형제들은 새로운 기회를 모색했다. 떡집을 차려 지역 특산물인 모시 잎을 넣은 모시떡을 만들었고, 온라인으로 떡 판매를 시작했다. 관광객을 상대로 한 떡 만들기 체험 등도 진행했다. 그렇게 솔티마을은 점점 밖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작은 시골마을 떡집 매출액이 한 해 5억 원이 넘는다거나, 떡 만들기 체험에 참가한 관광객이 연간 5000명이 넘는다는 숫자보다 더 놀라웠던 건, 떡집이 마을 노인들에게 매달 연금을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시 농사를 짓는 솔티마을 주민들은 판로 걱정이 없다. 모시 잎을 전량 떡집 ‘솔티애떡’에서 사들이기 때문이다. 한 해 40t이나 되는 모시 잎을 솔티마을 떡집이 다 쓰는 건 아니다. 쓰고 남은 절반 정도는 다른 떡집에 넘긴다. 마을 주민 대신 팔을 걷어붙이고 모시 잎을 팔아주는 셈이다. 솔티마을은 7년째 20년 이상 마을에서 거주한 80세를 넘긴 마을 주민들에게 매달 연금을 주고 있다. 연금은 김 씨가 주민들로부터 모시를 매입하는 과정에서 나온다. 김 씨가 주민들에게서 해마다 모시를 사면서 시세보다 ㎏당 300원을 얹어주고, 그 돈을 종잣돈으로 모아 마을연금 기금을 마련한 것이다. 지금 연금 혜택을 받고 있는 주민은 6명. 한 달에 10만 원씩 연 120만 원을 연금으로 받고 있다. 마을에서 이런 연금이 유지될 수 있다는 건 이웃 공동체가 살아있다는 증거다. 솔티마을의 분위기가 푸근하게 느껴지는 것도, 주민들의 인심이 후하게 느껴지는 것도 다 이런 배경 때문이리라. # 옛길·습지에서 겨울 박하 향을 맡다 솔티마을 얘기는 이쯤 하고, 이번에는 생태프로그램을 보자. 마을 뒤에는 ‘솔티숲’이라고 이름 붙여진 내장산국립공원 자락의 숲이 있다. 내장호 호반의 내장산조각공원에 나무 덱으로 만든 내장생태탐방마루길에서 출발해 솔티마을까지 이어지는 40분 남짓의 짧은 ‘솔티숲 옛길’을 걸었다. 옛길은 40분부터 1시간, 1시간 20분짜리까지 모두 3개 코스가 있다. 옛길에는 늘씬한 편백나무가 늘어선 구간도 있고, 짧은 대숲길도 있다. 시신을 묻지 않고 한동안 놓아두는 풍장(風葬)의 흔적을 복원한 ‘초빈’도 있고, 6·25전쟁 때 인민재판을 하던 자리도 있다. 동네 아이들이 모여 연을 날리던 자리에는 명상의 숲과 생태놀이터도 있다. 비록 눈길을 확 사로잡을 만한 풍경은 없지만, 고즈넉하게 걸으며 겨울 숲과 자연을 감상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솔티마을의 숲길 걷기나 생태체험은 ‘에코매니저’라고 부르는 마을 주민의 안내로 더욱 풍성해진다. 솔티마을에는 이 밖에도 갖가지 다양한 조류를 관람할 수 있는 작은 동물원도 있고, 꽃과 정원가꾸기를 체험하는 교육농장도 있다. 사실 솔티마을과 연계하는 생태관광의 ‘대표 선수’는 월영습지다. 내장산 자락의 고산 습지인 월영습지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산중의 계단식 논이었던 곳인데, 주민들이 떠난 뒤 자연으로 되돌아가면서 습지가 됐다. 모두 4개의 크고 작은 습지로 이뤄진 월영습지는 지난 2011년에야 발견됐다. 월영습지 대신 솔티숲 옛길을 걷기로 했던 것은 겨울에는 습지의 매력을 느낄 수 없으리란 생각 때문이었다. 나중에 월영습지에 가보고 나서야 그게 기우였음을 알게 됐다. 축구장 45개 크기의 거대한 산지습지에서는 겨울 숲 특유의 알싸한 박하 향이 느껴졌다. 발밑으로 서걱거리는 마른 낙엽을 디디며 아직 얼지 않은 습지의 웅덩이를 지나 고요한 숲을 거니는 맛이 훌륭했다. 신록과 녹음이 우거진 때의 습지의 경관이나 정취에는 어림도 없겠지만, 겨울에만 느낄 수 있는 정취가 따로 있었다. 겨울 습지를 잠깐 둘러보고 나니 다른 계절에 다시 이곳을 찾아야 하겠다는 다짐을 저절로 하게 됐다. # 한센마을 성당, 마을의 중심이 되다 이번에는 전북 고창 얘기다. 고창에는 ‘호암마을’이 두 개 있다. 하나는 ‘병 호(壺)’ 자를 쓰는 반암면의 호암마을이고, 다른 하나는 ‘호랑이 호(虎)’ 자를 쓰는 고창읍의 호암마을이다. 앞의 호암마을에는 강변에 술병 모양의 바위가 있어 이런 이름을 썼고, 뒤의 호암마을은 마을 뒷산에 호랑이 형상을 한 바위가 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고창에서 호암마을에 가자고 하면 십중팔구 병바위가 있는 반암면의 호암(壺巖)마을에 데려다준다. 그도 그럴 것이 병바위마을이 원조 호암마을이고, 뒤의 호암(虎巖)마을은 1990년대 들어서야 새로 붙인 이름이다. 이제부터 얘기하는 호암마을은 산자락 능선에 호랑이 바위가 있는 고창읍의 호암(虎巖)마을이다. 호암마을에는 48가구에 70명이 산다. 호암마을로 불리기 전 마을은 ‘동혜원’이라고 불렸다. 한센병 환자 세 가족이 만든 공동체로 시작한 마을이어서 수용시설 같은 이름이 붙여졌다. 동혜원의 중심에는 반세기가 넘도록 마을과 주민과 함께해온 성당이 있고, 그 성당을 지키는 푸른 눈의 수녀가 있다. 고창성당 동혜공소의 강칼라(78) 수녀다. 이탈리아에서 온 강 수녀는 1968년에 여기 호암마을에 정착해 지금까지 자그마치 51년을 살았다. 이탈리아 북부도시에서 열아홉에 수녀가 된 그는 아직 전쟁의 상흔이 남아있는 지구 반대편의 최빈국인 한국, 그것도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 사는 마을로의 파견에 기꺼이 손을 들어 자원했다. 꽃다운 스물다섯 나이의 여성에게 이게 어떻게 가능한 일일까. # 가장 낮은 곳에 임한 푸른 눈의 수녀 “일곱 살 때 라디오에서 한국 얘기를 처음 들었어요. 한국에서 전쟁이 났다는 뉴스였죠. 그때가 이탈리아도 2차대전의 소용돌이에서 막 빠져나왔을 때라 전쟁의 비극이 어떤 건지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어요. 어린 나이에도 한국 국민이 받을 전쟁의 고통에 측은해졌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강칼라 수녀가 호암마을에 오기 전 한국과의 인연이라고는 딱 하나 이것밖에 없었다고 했다. 고향 마을에서 ‘달로네 리디아’라는 이름으로 살았던 수녀는 호암마을에서 살면서 지금의 이름을 얻었다. 호암마을에서 만난 한센인이 자기 성을 써달라고 부탁해서 ‘강’ 씨 성을 얻었고, 신부로 살다 죽은 친오빠의 세례명 ‘카를라’를 이름으로 삼았다. 발음하다 보니 ‘강카를라’는 자연스레 ‘강칼라’가 됐다.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그는 거의 전 생애를 바쳤다. 이웃들마저 차갑게 외면했던 한센병 환자들을, 지구 반대편에서 온 수녀는 마음을 다해 돌봤다. 뭉그러진 손을 잡아주고, 넘어진 이들을 일으켜 세웠다. ‘성자(聖者)’라는 호칭에 조금도 모자라지 않는 삶이었다. 팔순을 코앞에 두고서도 그의 돌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동혜공소의 안내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수녀는 이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마을의 아픈 주민을 태우고 손수 운전해 광주의 병원을 다녀와야 한다고 했다. 갈아신으며 벗어놓고 간, 뒤축이 낡을 대로 낡은 수녀의 슬리퍼를 바라보다 울컥했다. 이국의 푸른 눈의 수녀가 가장 낮은 곳에서 보낸 50여 년을, 우리가 어찌 짐작조차 할 수 있을까. 그저 마을에 남겨진 풍경이나 이야기로만 느낄 뿐이다. # 한겨울의 습지에서 나무의 심장 소리를 듣다 마을 전체가 큰 성당처럼 느껴지는 호암마을에는 피정의 집과 기도의 집 등 종교적인 공간들이 곳곳에 있고, 도자기체험이나 캠프파이어 등을 할 수 있는 시설도 다양하게 갖췄다. 마을에는 대숲도 있고, 꽃밭도 있다. 어려웠던 시절에 주민들이 해먹던 더덕 주먹밥을 비롯한 건강한 음식의 전통도 있다. 이런 매력 덕에 마을을 찾아오는 관광객들이 적지 않다. 격세지감. 한때는 다들 외면하던 한센병 환자촌 마을이 이제 외지인들이 줄지어 찾는 관광 명소가 된 것이다. 호암마을에서 꼭 보고와야 할 것이 마을 뒤쪽 언덕에 세워진 흙집 기도실 외벽에 기대 놓은 십자가다. 높이 2m쯤 되는 나무 십자가로 흰색이 칠해져 있다. 이 십자가는 무엇에 쓰던 것이었을까. 전직 대학교수 방부혁 호암마을 이장의 설명. “예전에 마을의 한센병 환자들이 이 십자가를 지고 뒷산을 오르내리며 기도를 했다고 해요.” 얼마나 간절했을까. 보나 마나 천형으로 일컬어졌던 한센병의 완치를 기원했을 것이었다. 소원이 이뤄지려면 그만큼 고통스러워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니 십자가를 지고 산을 오르내리며 자신을 얼마나 괴롭혔을까. 마을에서 또 한 곳, 명상센터도 빼놓지 말아야 할 곳이다. 대숲 사이에 굴을 파듯 들여놓은 건물인데,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한 십자가 창을 통해 들어온 볕이 외벽과 바닥에 화려한 색깔을 영롱하게 수놓는다. 호암마을과 엮어낸 생태관광 목적지는 인근의 운곡습지다. 운곡습지는 30여 년 전 전남 영광에 들어선 핵발전소 용수 공급을 위해 저수지를 만들면서 수몰된 마을의 묵은 논과 밭이 늪으로 천이(遷移)되며 원시의 숲을 이룬 곳이다. 수몰된 8개 마을 158가구의 집과 논과 밭이 습지가 됐다. 습지에는 나무 덱 탐방로가 놓여있다. 습지 한가운데로 뻗어있는 덱은 습지에서 1m가량 띄워 지어졌고, 바닥 나무판도 햇볕과 공기가 통하도록 작은 틈을 벌려놓았다. 덱의 폭은 80㎝로 교행이 불가능할 정도로 좁다. 난간의 높이도 허리춤을 넘어선다. 높은 난간과 좁은 덱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간섭을 줄이기 위한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경관에 집중하게 만드는 역할도 한다. 이곳의 매력은 충만한 생명력이다. 습지에서 인상 깊었던 건 잎을 다 떨군 채 하얗게 빛나는 은사시나무 군락이다. 겨울 추위가 매섭지 않아서인지 습지에는 아직 초록을 잃지 않은 식물들도 있었다. 고요한 습지의 숲에서 나무 둥치에 귀를 댔다. 겨울을 견디는 나무들의 심장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 에코매니저와 보타닉원정대 탄소발자국은 한국환경산업기술원이 낮은 탄소배출량을 유지하는 친환경 관광프로그램을 인증하는 제도로, 정읍의 솔티마을 생태체험 프로그램이 인증을 받았다. 에코매니저는 생태 가이드 역할을 맡은 주민을, 보타닉원정대는 프로그램에 참여한 관광객을 부르는 이름이다. 정읍·고창 = 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