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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화폐역사(貨幣歷史)
미개사회에서의 인간은 자급자족의 생활을 영위해 왔으나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잉여물의 축적이 가능해짐으로써 타종족의 잉여물과의 물물교환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초기의 물물교환 형태에서는 원시적인 강제교환·침묵교환 등을 볼 수 있다. 물물교환이 더욱 성행해지자 서로가 원하는 재화의 종류·품질·분량, 또는 운반상의 불편을 덜기 위하여 교환에 매개물이 필요하게 되었다. 여기서 원시화폐의 성립을 보게 되는데, 교환매개물로는 중국의 조가비·포백(布帛), 에티오피아의 소금, 남아프리카의 가축, 시베리아의 모피, 뉴펀들랜드의 건조대구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화폐의 생성(生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실용적인 재화가 화폐로 사용되었다는 실용기원설(實用起原說), C.멩거가 말하는 자주 쓰이는, 즉 시장유통성이 있는 상품이 화폐가 되었다고 하는 설, B.라움의 종교적인 것에 그 기원을 찾는 종교기원설, 장식품의 가치에 그 기원을 찾는 장식기원설 등이 있는데, 이들은 화폐가 강제적·실용적인 면에서 만들어졌다는 것 이외에도 생활 속에서 저절로 이용되고 생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리고 원시화폐는 오늘날의 화폐와 똑같은 기능을 가지면서, 동시에 종교적·의례적(儀禮的)·장식적인 기능을 가졌다는 데에 그 특색이 있다. 그 후 금속이 이용되기 시작하면서 금속화폐로 발전하였다.
A.스미스에 의하면, 초기의 금속화폐는 각인(刻印)도 주조도 되지 않은 조잡한 막대기 모양의 것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형량(衡量)과 시금(試金)이 번잡하였다. 그래서 국가가 금속화폐에 각인을 할 필요가 생겼다 하여 여기서 주조화폐의 기원을 찾고 있다. 당초에는 틀림없이 양목(量目)과 품위를 보증하기 위하여 주조를 하였을 것이다. 주조화폐는 물품화폐의 흔적을 지닌 채 점차 발달하여 화폐의 필요조건인 등질성(等質性)·분할성·보존성·내구성 등의 특성을 갖추게 되었다.
서양의 화폐
엘렉트론 화폐(금·은의 합금)
BC 7세기에 그리스의 리디아 왕국에서 만들어진 엘렉트론 화폐(금·은의 합금)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 된 화폐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BC 7세기에 아이기나에서 만들어진 은화가 있다. 그리하여 BC 5∼6세기에는 화폐가 각 도시국가에서 유통하기에 이르렀다. 이들 화폐는 올림포스의 신(神)들이 새겨져 그리스 미술의 감각이 엿보이는데, 특히 뛰어난 것은 화폐의 앞면에 여신(女神) 아테네의 머리를, 뒷면에는 올빼미와 올리브의 그림이 각인(刻印)되어 있는 4드라크마(Tetra drachma)짜리 은화이다.
이 화폐들은 BC 4세기경 마케도니아로 들어가, 알렉산드로스대왕에 의하여 헬레니즘 시대에는 왕을 상징하는 화폐가 되어 국가통일의 수단으로 이용되었으며, 그 후 오리엔트·인도에도 전해졌다. 로마에서는 BC 340년 전후, 아스(as)를 단위로 한 대형 청동화(靑銅貨)가 주조되었고, BC 269년에는 데나리우스 은화가 주조되었다. 이 화폐의 앞면에는 로마의 여신과 그 밖의 제신(諸神) 또는 인물이, 뒷면에는 종교적·역사적 사건을 나타내는 그림이 새겨져 있다. 그 후 BC 1세기부터 아우레우스 금화가 활발히 만들어졌으며, 주로 당시의 정치가 두상(頭像)이 새겨졌는데, 이 때에 이미 금화가 유통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네로 시대에 이르러 재정의 궁핍으로 여러 차례 개주(改鑄)되면서 그 때마다 질이 나쁜 화폐가 유통되어, 화폐제도는 혼란에 빠졌다.
솔리두스 금화
그 후 콘스탄티우스 황제 시대에 솔리두스 금화가 주조되어 화폐제도의 개혁이 추진되었다. 이 화폐는 매우 질이 좋아, 유럽의 중세기까지 통용되었다. 프랑크 왕국에서는 카롤링거왕조 시대에 피핀과 카를 대제(大帝)에 의한 화폐제도의 개혁이 이루어져, 중세 유럽에 있어서의 전형적인 화폐제도가 확립되었다. 그 후 십자군의 영향으로 오리엔트로부터 금이 들어오게 되어 13세기에는 금화가 주조되었다. 그 중에서도 1252년에 피렌체제(製)인 플로린(Florin) 금화는 유명하여 각국 금화의 모델이 되었다. 16세기로 들어와서는 신대륙으로부터 대량의 은이 유입되어 금은비가(金銀比價)에 큰 변동을 가져옴으로써 물가는 급등하고(가격혁명) 화폐제도도 크게 변화하였으며, 특히 에스파냐의 페소화(貨)가 유력한 국제통화로 등장하였다. 또, 영국에서는 16세기 중엽의 에드워드 6세 때에 로마의 화폐제도를 본떠서 화폐에 가격을 표시한 실링·펜스·페니화(貨)가 주조되었다.
근세의 절대주의국가는 모두가 화폐의 주조권을 봉건영주로부터 중앙집권국의 수중으로 이관시켜 통일적 화폐제도를 시행하였다. 주조기술에 있어서도 대략 17세기 이후로는 기계에 의한 대량주조가 가능하게 되었다. 근대화폐의 특징은,
① 산업혁명의 결과 기계주조에 의한 균일한 화폐가 만들어졌다는 점
②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걸쳐서 마르크·프랑·리라·페세타 등 현재도 사용되고 있는 화폐단위가 출현하였다는 점
③ 19세기 중엽부터 지폐가 주화와 함께 널리 통용하게 되었고 환거래도 성행하게 되었다는 점
④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에 걸쳐서 금본위제도가 각국에서 채용되어 화폐금융제도의 세계적 통일의 기반이 형성되었다는 점 등으로 요약되며, 이러한 특징을 갖춘 근대화폐의 정형은 영국의 그것이다.
1257년 헨리 3세가 주조한 페니 금화는 영국 최초의 자국화폐이며, 14세기 북유럽의 무역융성 등을 배경으로 1392년에 설립된 금장회사(金匠會社) 발행의 금은보관증 골드스미스 노트(goldsmith note)는 영국 최초의 태환권이었다. 16세기에는 왕실재정의 핍박으로 인한 화폐개주가 있어 유통계가 혼란하였으나, T.그레셤의 건의에 따라 화폐의 품질이 개선되었다. 1694년 잉글랜드은행이 창립되어 은행권의 발행이 인정되었고, 그 후 산업혁명이나 해외진출에 의한 경제발전을 기초로 하여 1816년에는 각국보다 앞서 금본위제도를 채택하였으나 1931년의 금융공황 이후 금본위제를 포기하였다.
그린백(greenback)
미국은 1785년 달러를 화폐단위로 정식 채용하고, 92년의 화폐주조법으로 금은복본위제를 채택하였는데, 금은비가(金銀比價) 등의 결함이 있었기 때문에 주로 은행권이 유통하게 되었다. 남북전쟁 중에 정부지폐 그린백(greenback)이 발행되었는데, 전후 1875년에는 정화태환복귀법(正貨兌換復歸法)을 제정, 1900년에는 금본위제를 정식 채용하였다. 또, 13년의 연방준비법에 의하여 연방준비권을 발행, 신축성 있는 통화공급을 하였다. 제1·2차세계대전 중에는 금본위제가 정지되었다가 전후에는 부활하였다. 현재는 금괴본위제(金塊本位制)를 형식적으로 취하고 있으나 태환(兌換)은 정지되어 있다.
중국의 화폐
의비전(蟻鼻錢)
중국에서는 오랜 옛날부터 조가비·곡물·가축·직물·농구(農具) 등의 물품화폐가 사용되었다. 은(殷)·주(周) 시대에는 청동기문명이 발달하여, 어화(魚貨)·포화(布貨)·도화(刀貨) 등의 주조화폐가 나타났다. 어화는 양식으로서 중요한 건어(乾魚)를, 포화는 농기구인 괭이나 쟁기를, 도화는 가정용품인 작은 칼을 원형으로 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그 밖에 사람의 얼굴 모양을 한 의비전(蟻鼻錢) 등이 있다. 의비전은 귀면(鬼面)을 닮기도 한 데서 귀면전이라고도 불렀다.
사주전(私鑄錢)
진(秦)의 시황제는 종래의 포화·도화 등의 사용을 금지하고, 원형방공(圓形方孔)의 주화를 채택, 화폐의 통일을 이루었다. 한(漢)에 이르러 사주전(私鑄錢)의 유통과 진나라 때 주화의 이용불편을 이유로, 가벼운 유협전(楡莢錢:콩깍지 모양)을 주조했기 때문에 물가가 등귀하여 경제는 혼란에 빠졌다. 한에서 수(隋)에 이르기까지는 화폐제도의 혼란기였다. 그러나 수많은 개주(改鑄)의 되풀이 속에서도 오수전(五銖錢)이 가장 많이 유통했기 때문에 이 시기를 오수전 시대라 부르고 있다. 수에서는 종래의 구전(舊錢)을 폐지하고 새 오수전을 주조하여 화폐의 통일을 꾀하였다.
개원통보(開元通寶)
당(唐)의 고조(高祖)는 개원통보(開元通寶:開通元寶라고도 한다)를 주조하였다. 그 후 도주(盜鑄)·위조(僞造)가 많아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건봉천보(乾封泉寶)·건원중보(乾元重寶)·대력원보(大曆元寶)·건중통보(建中通寶) 등의 개주(改鑄)를 하였다. 송(宋)의 태조(太祖)는 당의 화폐제도를 본떠, 구리를 소재로 한 송통원보(宋通元寶)를 주조하여 화폐의 통일을 꾀하였다. 태종(太宗) 시대에 태평통보(太平通寶)·순화원보(淳化元寶)가 주조된 이래로, 개원(改元) 때마다 새 화폐를 주조하여 연호(年號)를 각인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이 시대에는 무역이 활발하여 해외로의 유출도 많아서 교역국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 무렵 교자(交子)·회자(會子)라 부르는 태환지폐(兌換紙幣)가 유통되었는데, 태환준비도 없이 발행되었기 때문에 화폐가치는 하락하고 마침내 불환지폐(不換紙幣)로 탈락하고 말았다.
금(金)·원(元)에 걸쳐서는 정륭원보(正隆元寶)·대정통보(大定通寶)·태화통보(泰和通寶)·원정통보(元貞通寶)·대덕원보(大德元寶) 등 주로 동전이 주조되었다. 명(明)의 태조(太祖)는 대중통보(大中通寶)·홍무통보(洪武通寶)를, 그리고 성조(成祖)는 영락통보(永樂通寶)를 주조했는데, 이 시기는 지폐와 통보전(通寶錢)의 병존시대였다. 또, 중국에서는 명말(明末)부터 무역이 더욱 성해져서 멕시코 은(銀), 에스파냐 은 등이 유입하여 양은(洋銀)의 사용이 많아졌다. 이 시기까지는 주조된 동전이 주로 사용되고, 금·은 등은 칭량화폐(稱量貨幣)의 형태로 사용되고 있었다.
1912년의 민국혁명(民國革命) 후, 국민정부는 14년 국폐조례(國幣條例)에 의하여 은본위제를 채택하였다. 그러나 31년 만주사변(滿洲事變)부터 전시태세로 들어갔기 때문에 은본위제도는 실질적 운영이 곤란하게 되어, 36년 은본위제도를 폐지하였다. 공산당 정권 수립 후 인민은행이 설립되어 인민은행권이 중국 본토에서 유통하고, 타이완 영역 안에서는 타이완 은행권이 유통되고 있다.
인도의 화폐
인도 최고(最古)의 화폐는 각인화폐(刻印貨幣)로서 화폐 양면에 연꽃·수목 등 인도의 상징을 새긴 은화이다. BC 3세기경에는 그리스의 영향으로 화폐의 도안을 그리스풍(風)인 왕의 초상이나 올림포스 신들의 입상(立像), 또는 알파벳이나 카로슈티(Kharosthi) 문자로 각인하였다. 쿠샨왕조의 카니시카(Kaniska)왕 때에는 왕조의 전성기로 금화·은화가 주조되었다. 화폐의 도안도 주로 왕의 입상과 불상으로 바뀌어 당시의 카니시카왕의 권력을 상징하고 있다.
12세기가 되자 이슬람의 영향을 받아 한때 이슬람교 화폐가 유통되었으나, 이에 대한 반발도 있어 화폐제도는 문란하였다. 16세기의 무굴(Mughul)제국에 이르러 화폐제도의 개혁이 이루어졌으며, 루피 은화의 중량은 180그레인(약 11.7 g)으로 순은 175그레인을 함유하였다. 이 화폐제도는 무굴 제국 말기까지 유지되어, 19세기 전기 영국 동인도회사에 의한 화폐개혁 때까지 통용되었다. 또, 이 화폐제도는 오늘날의 인도 화폐제도의 기초가 되어 있다.
한국의 화폐
삼국시대인 490년(신라 소지왕 2)에 서울인 경주에 상설시장(常設市場)인 경시(京市)가 처음으로 개설되었으며 지방에도 향시(鄕市)가 있어, 교환경제가 이루어졌고, 교환의 매개물, 즉 물품화폐로서 생활필수품인 쌀·포백(布帛)이 주로 사용되었다. 당시 중국으로부터 수입된 중국의 화폐는 있었으나 유통되지는 않았고, 주로 중국과의 무역에서 결제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신라에서 금은(金銀)으로 전(錢)을 삼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칭량화폐(稱量貨幣)의 형태로 쓰이고 있었던 것 같다.
해동통보(海東通寶)
고려시대에는 996년(성종 15) 철전(鐵錢)인 건원중보(建元重寶)를 주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 후 1097년(숙종 2)에 주전관(鑄錢官)을 두고 유문전(有文錢)을 주조하여 관리들에게 분사(分賜), 시정(市井)에 유통을 권장하였다. 해동중보(海東重寶)·삼한통보(三韓通寶)·삼한중보(三韓重寶)·동국통보(東國通寶)·동국중보(東國重寶) 등이 그것이다. 1101년(숙종 6)에는 은병(銀甁) 모양의 은화도 주조되었으며, 1102년에는 보조화폐인 해동통보(海東通寶)가 주조되었다.
1287년(충렬왕 13)부터는 은병전의 위조와 은·구리의 합주(合鑄)를 막기 위하여 쇄은(碎銀)을 화폐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1391년(공양왕 3)에는 송(宋)의 회자(會子)와 원(元)의 지원보초(至元寶)를 모방한 한국 최초의 지폐인 저화(楮貨)를 인조(印造), 통용하게 하였는데, 이것은 저지(楮紙) 표면에 화폐가치만을 표장(表章)한 것이었다. 저화에는 주지(注紙)와 상지(常紙)의 두 종류가 있었는데, 그 교환가치는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저화 1장에 쌀 한 되, 저화 40장에 정포(正布) 1필로 되어 있다. 《경국대전》에는 저화가 국폐(國幣)로 기록되어 있으나 속대전(續大典)에는 저화가 폐지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중엽에는 이 저화는 이미 자취를 감춘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시대에서는, 1401년(태종 1)에 저화가 인조(印造)되어 법화(法貨)로 지정되었으며, 23년(세종 5)에는 당(唐)나라의 개원통보(開元通寶)를 모방한 조선통보(朝鮮通寶)가 주조되었고, 64년(세조 9)에는 절폐(節幣)가 주조되었으나 일반적인 통용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조선통보(朝鮮通寶)
1633년(인조 11)에는 상평청(常平廳)을 통하여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 그 후 널리 통용되었다. 조정에서는 상평통보의 유통을 촉진하기 위하여 종래 현물에 국한하였던 조세(租稅) 중에서 대동미(大同米) 등 일부 공과(公課)의 전납(錢納)을 허용하면서 점차 그 통용이 확대되자, 78년(숙종 4) 이래 각도 감영(各道監營)에도 주전(鑄錢)을 명령 또는 허가함으로써 많은 양의 주화(鑄貨)가 시중에서 일반적으로 유통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이와 같은 통용을 더욱 촉진하기 위하여 조정은 다른 공과(公課)도 현물납부와 아울러 전납을 허용함으로써, 17세기 후반 이후부터는 화폐경제가 상당한 발전을 보았다. 그러나 그 후 관주전(官鑄錢)의 품질이 점차 조악해지면서 다량의 사주전(私鑄錢)이 출현·유통됨으로써 물가가 폭등하는 등 많은 폐해가 발생하였다.
1866년(고종 3) 대원군 집정 당시, 쇄국정책에 따른 군비확충(軍備擴充)과 경복궁(景福宮)의 조영을 위한 비용의 조달 및 재정의 궁핍을 타개하기 위하여 당백전(當百錢)을 주조, 강제 통용하게 하였다. 이것은 실질가치가 명목가치의 20분의 1도 못 되는 것이어서, ‘그레셤의 법칙’대로 양화(良貨)인 엽전은 점차 자취를 감추고 악화인 당백전만이 유통되어 물가가 폭등, 쌀 한 섬이 45냥(兩)까지 등귀하게 되자, 당초의 목적도 달성하지 못한 채 69년(고종 6) 당백전의 통용을 금지하고 무상으로 강제 회수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83년(고종 20)에는 강화조약 이래 누적된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하여 1전(錢)이 상평통보 엽전 5문(文)에 해당하는 당오전(當五錢)을 주조, 주로 경기·해서(海西)·호서(湖西) 지방에서 유통시켰는데, 당오전은 당백전보다도 더 조악한 악화로서, 역시 소기의 목적도 달성하지 못하고 물가만 폭등시켰으며, 그 후의 화폐제도를 더욱 문란하게 만들었다. 이보다 앞선 82년(고종 19)에는 최초의 서양식 화폐인 대동은전(大東銀錢)이 등장하었다. 한말(韓末)에 일본의 세력이 침투하면서 더욱 많은 사주전이 유통하였는데, 94년(고종 31) ‘신정화폐장정(新定貨幣章程)’의 발표와 함께 특히 백통화(白銅貨:백동전)을 남발한 것을 기화로 일본인들이 일부 한국인과 결탁하여 다량의 조악한 사주전 백동화를 위조(僞造)하고, 심지어 일본국 내에서 사사로이 주조하여 한국에 밀송하기까지 하였는데, 그 액수가 300만 환()에 달하였다고 한다.
1902년(광무 6) 한국의 중앙은행 구실을 한 일본의 제일은행의 제일은행권이 발행되었고, 1905년(광무 9) 일본인 재정고문 메가타 슈타로[目賀田種太郞]에 의한 화폐개혁에서 백통화는 갑·을·병 3종으로 분류, 갑종만을 정화(正貨)로서 인정하여 정리하였다. 그 후 1909년에 조선은행의 설립으로 조선은행권이 발행되어 일제에 유통되었고, 8·15광복 후에는 한국은행권이 발행되어 오늘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