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을 깨뜨려버릴 수 있다면 무엇인들 보지 못하랴”
거울은 있는 그대로를 비춰줄 뿐이다
거울은 분석하고 취사선택하지 않는다
그런데 거울에 비친 영상들이 진짜일까
진짜를 보려면 거울마저도 깨뜨려야 한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잘 살펴봐야 한다!
남전 보원(南泉普願, 748~834)선사는 마조 도일(馬祖道一)선사의 법제자이며 조주선사의 스승이시다. 조주스님에게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의 가르침을 설파하셨다. 또 동당과 서당의 스님들이 고양이의 소유권으로 시끄럽게 하자, “누구라도 적절한 말을 한마디 한다면 이 고양이를 살려 주겠다”고 하였으나 아무도 답을 하지 못하자 바로 칼로 고양이를 두 동강 내었다는 선사이시다.
백장 열반(百丈 涅槃)화상은 마조선사의 법제자인 백장 회해(百丈懷海, 720~814)선사의 제자인 백장 유정(百丈惟政)화상이다. 회해선사의 뒤를 이어 백장산의 제2대 책임을 맡았던 뛰어난 제자였으며, 황벽선사 등도 존경했던 분이다. <열반경>에 정통하였기에 흔히 열반화상으로 존칭되었다. 정확한 전기는 전하지 않는다.
➲ 본칙 원문
擧 南泉參百丈涅槃和尙 丈問 從上諸聖還有不爲人說底法麽 泉云 有 丈云 作麽生是不爲人說底法 泉云 不是心不是佛不是物 丈云 說了也 泉云 某甲只恁麽 和尙作麽生 丈云 我又不是大善知識 爭知有說不說 泉云 某甲不會 丈云 我太煞爲儞說了也
남전(南泉) ‘남천’으로 읽으면 안 됨.
참(參) 보통은 아랫사람이 어른을 찾아뵙고 가르침을 청한다는 뜻으로 쓰이지만, 여기에서는 방문하였다고 풀이하는 것이 좋음.
자마생(作麽生) ‘어떤 것’이라는 뜻. ‘작마생’으로 발음하지 않고 ‘자마생’으로 읽는 것이 관행임.
태쇄(太煞) 매우, 심히.
➲ 본칙
이런 얘기가 있다.
남전스님이 백장 열반화상을 방문하였는데, 백장스님이 물었다.
“예로부터 모든 성인이 오히려 사람들을 위해 설명하지 못한 진리가 있습니까?”
남전스님이 답하였다.
“있습니다.”
백장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사람들을 위해 설명하지 못한 진리입니까?”
남전스님이 답하였다.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며, 사물도 아닙니다.”
백장스님이 물었다. “다 말씀하신 것입니까?”
남전스님이 말하였다.
“저는 다만 이렇습니다만 스님께서는 어떠합니까?”
백장스님이 답하였다.
“나 또한 대선지식이 아니거니 어찌 설명할 수 있었는지 설명할 수 없었는지를 알겠습니까?”
남전스님이 말하였다.
“저는 모르겠습니다.”
백장스님이 말하였다.
“내가 스님에게 너무 많이 말했습니다.”
➲ 강설
열반화상을 방문한 남전스님은 아마도 스승 마조선사로부터 인정을 받은 후 자기의 소견을 거침없이 펼치는 단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을 간파한 열반스님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모든 성인이 설명할 수 없었던 진리가 있을까요?”
여기에 대해 남전스님은 자신만만하게 답하였다.
“그것은 마음도 부처도 사물도 아닙니다.”
이건 이미 모든 성인이 다 밝혔던 내용이다.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그래서 열반화상은 바로 몰아쳤다.
“다 말한 것입니까?”
아마도 이 물음을 받는 순간 남전스님은 오싹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실수를 정확히 안다면 얼마든지 만회할 수도 있는 법이다.
남전스님은 바로 공격 자세를 취했다.
“그럼 스님은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열반화상께서 얼마나 능수능란한지를 보여주는 대목이 전개된다.
“나야 뛰어난 사람도 아닌데 어찌 그런 것을 알겠습니까?”
이번에는 남전스님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는다. 다시 열반화상을 몰아붙였다.
“저는 스님의 말씀을 모르겠는데요.”
이쯤 되면 열반화상도 남전스님을 인정할 수밖에 없겠다. 그래서 손을 거두어 버린다. 번개와 같이 빠른 솜씨다.
“그러고 보니 나도 참 말을 너무 많이 했습니다.”
청나라 라빙(羅聘, 1733~99)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 한산습득도. 당신은 이런 친구가 될 수 있는가?
➲ 송 원문
祖佛從來不爲人 衲僧今古競頭走
明鏡當臺列像殊 一一面南看北斗
斗柄垂 無處討 拈得鼻孔失却口
조불(祖佛) 조사님과 부처님.
불위인(不爲人) 본칙의 불위인설(不爲人說). 사람들에게 설하지 않은 것.
납승(衲僧) 누더기를 입은 스님. 수행자.
두병(斗柄) 북두칠성을 국자 모양으로 보았을 때 그 자루가 되는 자리에 있는 세 개의 별.
무처토(無處討) 찾을 곳이 없음. 찾을 수 없음.
비공(鼻孔) 본래면목, 실상(實相).
➲ 송
부처님 조사님이 이제껏 설명하지 못했는데,
수행자들 예나 지금이나 앞 다투어 내닫누나.
➲ 강설
꿀맛은 꿀을 먹은 사람만 안다. 꿀을 먹어 보지 못한 이에게는 어떤 설명으로도 그 맛을 전해줄 수가 없다. 깨달음의 경지가 말로 전해질 수만 있다면야 어느 누가 목숨을 걸고 수행하겠는가. 그렇지만 수행자들 또한 그 자리에 이를 때까진 이런 분석 저런 짐작으로 부질없는 논쟁을 일삼으며 밖에서 그 경지를 찾으려 내닫는다.
➲ 송
밝은 거울 대에 걸리면 차례로 형상 다른데,
모두가 남쪽을 향해서 북두칠성을 보는구나.
➲ 강설
거울은 있는 그대로를 비춰줄 뿐이다. 거울은 분석하고 취사선택하지 않는다. 소가 지나가면 소를 비춰 보이고, 말이 지나가면 말을 비춰 보일 뿐이다. 그러나 그 거울이 엎어져 있다면 그 무엇도 비춰 보일 수 없다.
그런데 거울에 비친 영상들이 진짜일까? 진짜를 보려면 거울마저도 깨뜨려 버려야 한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잘 살펴봐야 한다. 만약 거울을 깨뜨릴 수 없다면 남쪽을 향해서 절대로 북두칠성을 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거울을 깨뜨려버릴 수 있다면 어디를 향하건 그 무엇인들 보지 못하랴.
➲ 송
북두 자루가 기우니, 찾을 곳 없도다.
콧구멍을 잡으니 입을 잃게 되는구나.
➲ 강설
북두칠성 찾는 것도 어두운 밤에나 하는 일이다. 날이 밝은 뒤에는 그 누구도 북두칠성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찾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콧구멍을 낚아채 확연히 깨달았다면 더 이상 떠들 필요가 없다. 그거야말로 부질없는 짓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서로 통한 사람이라면 눈빛만으로도 모든 말을 대신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