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 가해 12월31일 금요일 [(녹)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수도회] 종말의 표지이신 예수님의 영원한 말씀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다니 7,2ㄴ-14
† 복음 루카 21,29-33
◈ 오늘의 묵상
다니엘 예언자는 사자 같은 짐승, 곰처럼 생긴 짐승, 표범처럼 생긴
짐승, 커다란 쇠 이빨을 가진 짐승을 환시로 보며 박해자들의
무시무시한 권력과 폭정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을
몸서리치게 하는 폭력이 영원하지 않으며 하느님의 심판을 받게 됨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언자는 백만이 시중들고 억만이 모시는
하느님께서 법정을 열어 악인들을 단죄하시고 영원히 통치하시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구름을 타고 나타나는 사람의 아들’은
하느님의 왕국을 상속하는 하느님의 온 백성을 상징합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수석 사제들과 최고 의회 앞에서 다니엘의
예언을 상기시키며 당신의 신적 기원을 알려 주십니다(마태 26,64).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전능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아 계시며, 구름을
타고 영광스럽게 심판하러 오실 구세주이심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 잎이 무성하듯이 구원의 때가 무르익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시작과 마침은 하느님의 창조 계획과 섭리
안에서 진행됩니다. 우리의 인생도 주님의 계획과 섭리 안에서
펼쳐지고 완성됩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 안에 살아 있으며 삶의 구심점이
됩니다. 그분의 말씀은 헛되이 사라지지 않으며 우리 안에 열매를
맺습니다. 신앙인은 자신의 삶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며 하느님의
발자취를 발견하는 사람입니다. 믿는 이들의 삶 속에서는 선하고
올바른 주님의 말씀이 자라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다가올 하느님 나라를 생각하며 살아야
2017년 가해 12월1일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제1독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났다.>
○ 다니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7,2ㄴ-14
복음
"너희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29-33
걷다”라는 단어를 설명해 보십시오. 국어사전에서는 “다리를 움직여
바닥에서 발을 번갈아 떼어 옮기다.”라고 말하고 있지만,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무릎을 거의 90도로 들어 올리면서 들어 올린 발을 70Cm 정도 앞으로
내뻗고 서서히 지면으로 내려놓아서 땅을 디딘다. 그 다음에는 반대쪽
발을 들어서 동일하게 행한다.”
어떻습니까? 제대로 설명이 된 것 같지요? 그러나 가장 잘 설명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걷는 모습을 직접 보여 주는 것입니다.
제가 군대에 입대한 뒤에 경험했던 것이 생각납니다. 지금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제가 군대에 갔을 때 외워야 할 것이 참으로 많더군요.
그런데 군대용어가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어렵게 설명된
글을 이해하기 위해 선임병은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더군요. 그제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말보다 행동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의 삶 안에서 말보다 행동의 실천이 더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지혜로운 현자를 찾아가서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워낙
지혜롭다고 널리 알려진 분이기 때문에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
것으로 기대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 현자가 이 분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을까요? 여러 좋은 말씀을 해주셨지만 자신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았기에 크게 실망을 했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좋은
말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이 문제를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직접
자신의 몸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행동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당연한 진리를 보지
못합니다. 그보다는 요행이나 운에 의해서 별 노력 없이 이루어지는
것을 더 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도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말만
하시지 않습니다. 그 말과 함께 직접 행동하면서 사랑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역시 그 사랑의 모범을 따라 직접
행동할 것을 명령하시지요. 이것이 당연히 해야 할 우리의 의무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사람들은 모든 나무들이 잎이 돋자마자 여름이
가까이 온 줄을 알게 되는 것처럼 당연히 언젠가는 다가올 하느님
나라를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고 하시지요. 그렇다면 이 나라를 생각만
하면 될까요? 그냥 막연하게 들어가고 싶다는 소망만 간직하면 될까요?
아닙니다. 당연히 하느님 나라가 온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이 안에
들어갈 수 있는 모습으로 생활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천국을 살짝 엿보는 일이다(카렌 선드).
자캐오가 올라갔다는 무화과나무.
가치 있는 삶에 대해....
등산을 할 때, 오르막을 오르면서 풍경을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어느 정도 높은 곳에 올라가고 나서 뒤를 돌아봤을 때, 올라올
때는 보이지 않았던 놀라운 광경들을 볼 수가 있는 것이지요.
우리의 삶도 이러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렵고 힘든 삶의 길을
오를 때에는 그 과정에서 좋은 것들을 발견하기 쉽지 않습니다. 오르는
데에만 온 힘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느
정도 높은 곳이라 할 수 있는 안정된 상태가 되었을 때 분명히 바라볼
수가 있습니다. 그 힘든 과정 안에서도 좋고 아름다운 것들이 있다는
것을 말이지요.
쉽지 않은 우리의 삶입니다. 그러나 정상에 올랐을 때의 기쁨으로
힘들게 산을 오르는 것처럼, 우리 삶의 정상 안에서 누릴 기쁨을 떠올려
보십시오. 충분히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신부님들과 좋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종말의 표지이신 예수님의 영원한 말씀 -
기 경호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12월1일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루카 21,29-33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루카 21,33)
종말의 표지이신 예수님의 영원한 말씀
팔레스티나에는 봄과 가을이 없어 나무에 잎이 돋우면 여름이 이미
다가온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21,31) 성전파괴와 같은 큰 재난이 발생하면 하느님 나라가 다가올
줄 알아차리라는 것입니다(21,29-31).
예수께서 언급하신 ‘이러한 일들’은 직접적으로는 종말의 표지인
재난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넓게 보면 예수께서 하신 하느님 나라의
선포 말씀과 치유와 구마 행위를 아우르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 자신이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드러내는 표지인 셈입니다. 그렇게
종말은 시간의 끝에 다가오는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 앞에 있음이
종말의 순간입니다.
우리는 알 수 없는 때에 생의 마지막을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사랑이신 하느님을 알아차리고 그분의
개입을 사랑의 메시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이 바로
예수님의 손을 잡아야 할지 제멋대로 말하고 행동할지 선택해야 하는
종말의 갈림길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미 종말의 표지로 오시어 매순간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무화과나무가 소리 없이 자라나 우리에게 풍요로운
생명과 그늘과 열매를 선사하듯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잔잔한 손길로
우리를 키우시고 돌보십니다. 이 사랑은 일상의 작은 움직임과 변화
가운데서도 끊임없이 주어집니다. 주님의 사랑의 손길을 민감하게
알아차리는 것이 바로 영적 감수성입니다. 이런 감각으로 미소한 변화
속에서도 주님을 끊임없이 바라보며 따라야겠습니다.
고통과 시련과 슬픔이 다가올 때에도 하느님 나라에 더욱 가까이 서
있음을 믿어야겠지요. 그 모든 사건과 내가 겪는 일과 느낌들 안에
감춰진 하느님의 얼굴을 발견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그리하여 외롭고
슬플 때, 무시당할 때라도 사랑이신 주님의 손을 잡고 견뎌내야 할
것입니다. 괴로움과 불안, 근심걱정의 숲을 헤치고 나에게 달려오시는
주님을 희망 속에 기다려야겠습니다.
매순간이 그렇게 종말의 때입니다. 따라서 이미 오신 종말의 표지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날마다 죽음으로써 주님을 만나는 복된 우리였으면
합니다. 작은 것 하나도 의미 없는 것이 없으며 절망의 터널 저 끝에는
어김없이 희망이신 주님이 기다리고 계심을 믿어야겠습니다. 나아가
말없이 자라 열매맺는 무화과나무처럼 생명을 싹틔우는 하느님의
부드러움을 배웠으면 합니다.
오늘도 하늘과 땅, 모든 것이 사라지더라도 종말의 표지이신 주님의
말씀만은 영원하리라는 믿음 속에, 삶의 어떤 순간에도 흔들림 없이
주님의 뜻을 실행하도록 힘썼으면 합니다. 매순간은 종말의 때이자
구원의 때임을 기억하며 최선을 다짐하는 오늘입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원] 항상 깨어있는 삶 / 조욱현 토마스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12월1일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복음: 루카 21,29-33: 나무에 잎이 돋으면 여름이 다가온 것을 알듯이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파멸과 세상의 종말에 대한 무서운 말씀을
하시면서 그 시기가 언제인지 미리 알아서 대비하라고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다.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아라. 잎이 돋자마자, 너희는
그것을 보고 여름이 이미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29-31절)하시고 예루살렘의 파멸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때를 미리 알아서 대비하라 하신다.
즉 이 말씀은 우리가 많이 들어온 말씀으로 마지막 때가 언제인지
모르니 항상 깨어있으라는 말씀이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 말씀을 들은 그 세대가 가기 전, 70년에 파괴되었지만, 예수님의
재림은 즉 성서가 말하는 세상의 종말은 아직 오지 않고 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 시기의 징표는 알 수 있으나 그 날은 하늘의 천사들도,
사람의 아들도 모르고 하늘에 계신 성부만이 아신다고 하였다.
이 세상 종말이라고 하는 것은 하느님의 벌로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의 새로운 세계를 완성하시는 과정으로서의 죄 많은
인간들과 세상이 겪어야 하는 진통의 모습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결정적인 모습은 마태 25에서 말씀하시듯이 당신이 구원하신 온 세상을
성부께 바치는 날이며 당신을 따른 모든 이들과 함께 새로운 축복의
영원한 나라로 들어가는 구원의 완성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신경을 써서 걱정해야 할 것은 세상의 종말이
언제 올 것인가를 생각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나 개인의
죽음, 내 자신의 심판과 종말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어떻게 그
종말에 대비하여야 할 것인가를 더 걱정하고 염려해야 한다. 그 날이
언제 오더라도 그 날을 맞이할 수 있도록 우리는 지금의 이 순간을
하느님의 자녀로서 신앙인으로서 충실히 살아야 한다. 이것이
종말론적인 삶이다. 이것은 주님의 말씀대로 항상 깨어있는 삶이다.
그 때 그 날은 공포와 기쁨, 영광이 이 세상에 함께 있던 것을 분명하게
둘로 가르시는 때인데, 그것은 그 때만의 일이 아니라 지금의 삶의
태도와 계속 연결되어 있는 결과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래서
흥청대며 허송세월을 보낸다든지, 지금의 행동이 초래할 불행을 면하기
위해서는 그 때가 언제인지는 분명히 모르나 번갯불처럼 닥쳐올 것이기
때문에 지금부터 항상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신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33절)라고 하셨다. 그분의 말씀은 모두 이루어질 것이다. 그 말씀이
이제 우리의 삶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말씀을 구체적으로 살아야 한다.
말씀을 삶으로써 우리의 삶을 언제나 종말론적인 삶으로 이어가도록
항상 깨어있는 우리 되도록 노력하자. 이 깨어있는 삶이 우리를 항상
그분 안에 있게 하고 그분 안에서 진정한 기쁨과 평화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며 사는 모습일
것이다.
- 수원교구 상하 성모세 성당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서울]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2017년 가해 12월1일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너희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 루카 21,29-33
2017년 12월의 첫날입니다. 달력도 이제 한 장 남았습니다. 기업체도,
관공서도, 교회도, 우리들의 삶도 1년 결산을 할 때입니다. 세상의
평가기준은 지난 1년의 평균을 내는 것입니다. 12월 한 달 열심히 일을
했어도 지난 11개월의 삶이 부족했다면 좋은 결실을 맺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 평가가 나름 공정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평가기준은 세상의 것과는 조금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우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 넘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루가복음 15장의 돌아온 아들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회개하기만 하면, 하느님께로
돌아오기만 하면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으시고 우리를 받아
주십니다. 송아지를 잡고, 깨끗한 옷을 입혀주고, 잔치를 베풀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죄인은
예수님께 이렇게 청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가시면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 죄인의 지난날의 허물을 묻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당신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11개월 동안 부족한 삶을 살았을지 모릅니다. 남을
원망하고, 미워하면서 지냈을지 모릅니다. 해야 할 일을 소홀이하고
책임을 남에게 미루었을지 모릅니다. 욕심 때문에 친구를 속이고
상처를 주었을지도 모릅니다. 평균을 낸다고 하면은 도저히 만회하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12월 한 달만이라도 최선을 다한다면, 용서를 청하고 용서를 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지난 11개월의 잘못을 따지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도 잔치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신비이고, 이것이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세상의 모든 강물은 바다로 모이기 마련입니다. 바다는 그만큼 넓고
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다는 세상의
모든 강물보다 더 낮은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께로
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거처할 곳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우리의 모든
허물을 품어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강한 어둠도 작은 희망의
빛보다 약합니다.
저는 성가 28번을 좋아합니다. “불의가 세상을 덮쳐도 불신이 가득해도
우리는 주님만을 믿고서 살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들
가는가. 어둠에 쌓인 세상을 천주여 비추소서. 가난과 주림에 떨면서
원망에 지친 자와 괴로워 우는 자를 불쌍히 여기소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불행히 사는가. 어둠에 쌓인 세상을 천주여 비추소서.”
오늘 다니엘 예언자는 이야기 합니다.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다 지나가기 마련입니다. 오직
하느님의 나라만이 영원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같은 이야기를 하십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생명은 죽음이 있기 때문에 생명이라고 말을 합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다가올 죽음을 거부하거나, 두려워하기 보다는, 주어진 삶에
충실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을 찾아야 합니다. 하늘과 땅이 사라질지라도,
변하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을 찾아가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며, 그것은
죽음을 넘어서 가야 하는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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