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자성리학(朱子性理學)
송나라 때 외래 사상인 불교에 대응하면서 재정립된 유교이다.
도학(道學), 송학(宋學), 주자학 등으로도 불린다. 현대에는 송명대에 출현한 신유학의 한 갈래로 여겨지기도 한다.
2. 배경
송나라 시대에 성리학, 나아가 신유학 일반이 출현한 배경 가운데 주된 요소로 꼽히는 점은 불교의 영향력 증대다.
선진 시대 유교는 형이상학적으로 그리 현란하지 않고 현실적인 학문 체계였다. 그러나 후한 말 을 시작으로 인도에서 전래된 불교는 이전까지 중국 사상계에선 주목받지 않았던 여러 형이상학적 논점들을 깊이 다룸으로써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일대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더불어 도교 역시 불교 유입 시점부터 재조명받기 시작했다.
당나라 말기에 이르러 불교나 도교가 많은 사회적 폐단을 일으킨다고 인식한 여러 유학자들은 불교나 도교 등에서 여러 형이상학적 요소를 차용함으로써 유교를 재해석하고, 이를 통해 오히려 불교나 도교 등을 극복하고자 하는 기획을 구상했다. 이는 송나라 시기 주돈이, 장재, 소옹, 정호, 정이 등으로 대표되는 여러 유학자들에 의해 구체화되었으며, 이를 집대성한 주희의 가르침은 이후 "성리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다른 한편 당대 중국의 정치 상황 등 외적인 요소에 주목을 하는 시각도 있다. 이를테면 전한 이래 중국인들이 받아들인 북중국 중심주의가 금의 북중국 정복에 의해 깨지자, 남송의 성리학자들은 '이'와 '기'를 분리하여 정신적인 측면과 명분을 강조하는 '이'를 중심으로 발전시켰다는 것. 이를 국가 단위의 논리로 발전시킴으로써 '지정학적인 중심과 정신적인 구심점은 다를 수도 있다'는 프로파간다 전략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송나라의 관료제와 문치주의의 영향에 문화가 크게 발전한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성리학이 발전했다고 보기도 한다.
3. 조선에서
조선은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강력하게 받아들인 대표적 나라 가운데 하나다. 조선 초 유학자들이 주희에 열광한 큰 이유 중 하나는 주희의 불교에 대한 집요하고도 근본적인 비판 때문이다. 주희의 '귀신론'의 핵심 중 하나는 '세상의 모든 것은 설명될 수 있으나, 다만 사람들이 어리석어 그 원리를 깨치지 못했기 때문에 귀신이나 초자연적인 존재의 조화로 여긴다'는 것이었다. 즉 도교나 불교의 존립 기반인 내세, 영혼, 환생과 같은 증명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단호한 부정을 골자로 하는 것이다. 이는 정도전의 불씨잡변 등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후 조선 성리학사에서 주목받는 면모 중 대표적인 것은 "이기론" 등 형이상학적인 부분이다. 이를테면 이기불분(理氣不分)과 이선기후(理先氣後)가 공존하는 등 주희의 성리학에서 나타나는 이상한 면모를 두고, 이이는 이기불분을 강조해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承一途說)로 나타났고, 이황은 이선기후을 강조해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제안한 것이 유명하다.
이렇듯 16세기에 성립된 조선 성리학의 성립은 남송의 주자뿐만 아니라 북송의 소옹(召雍)과 장재(張載)의 성리학의 영향도 적지 않고, 명대의 나흠순(羅欽順)의 학문과 양명학 또한 영향을 준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더불어 임진왜란 이후 강항 등을 통하여 조선 성리학은 후지와라 세이카 등으로부터 시작되는 에도 막부의 성리학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4. 내용
4.1. 이기론
성리학의 중요한 포인트는 심(心, 마음)의 두 측면인 성(性, 본성)과 정(情, 감정)을 각각 리(理)와 기(氣)로 규정하는 것. 그리고 리와 기라는 개념을 사람의 마음만이 아니라 현실의 사물과 현상 등에도 대입한다. 기가 우주를 이루고 있는 것이고, 리는 기의 구성 원리인 것. 비유하자면 물리학자들이 연구하는 물질과 에너지를 합쳐 '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고, 그 물질들이 서로 조응하는 현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과학 법칙이 '리'라고 하겠다. 이기론을 사람에 적용해서, 인간의 (기)질의 상이함이 사람들의 개성을 만들고, 타고난 본성인 '리'가 만인이 따라야 할 보편적 도덕 원리(인의예지)를 형성한다고 보는 것이다. 다만 기질의 차이에 따라 만물에 열등함과 우수함이 나뉘게 된다고 파악하는데, 이 점이 인간끼리 혹은 인간과 동물 사이의 차별을 정당화시키는 측면이 있다(다만 이게 모든 성리학 학파에서 동의한 것은 아니다. 게다가 전근대 시기에서는 둘 다 당연한 것이었고, 지금도 인간과 동물의 차별은 정당하다고 여겨진다.).
4.2. 수양론
성리학의 학문적 실천방법은 거경궁리(居敬窮理)와 격물치지(格物致知)가 있다. 거경궁리를 거경과 궁리로 따로 해석해 보면 거경은 궁리를 임할 떄의 마음에 자세를 뜻하며 궁리는 만물의 이치를 터득하는 것이다. 격물치지는 사물에 대하여 깊이 연구하여(격물) 지식을 넓히는 것(치지)이다. 이는 이는 인간의 기질을 우수하게 하기 위한 학문적 수행이라고 볼 수 있다.
4.3. 내세관
따라서 주자의 사상은 철학적인 바탕에 기반을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현세적이고 세속적인 목표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주희가 동시대인들에게 심지어 조상의 영혼을 모시지 않는 후레자식이라는 비판을 받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 때문에 주희가 조상에 대한 제사에 대해서만 타협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해석하는 것이 중론이다. 타협했다고는 해도 주자는 조상이 '귀신'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차례나 제사를 지낼때 조상의 영혼이 밥먹으러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제사를 위해 자손이 모임으로서 흩어져있던 조상의 기가 일시적으로 모이는 것으로 간접적으로 설명한다. 귀신을 모시는 게 목적이 아니라 자손들이 모여서 조상을 기리는 행위 자체가 본질인 것이다.
5. 오해?
5.1. 성리학은 형식에 과도하게 집착한다?
흔히 성리학(주자학)에서 과도하게 형식에 집착한다고 비난받는 부분은 사실 성리학 체계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주자가 살아있던 당시의 관혼상제의 문제였다. 송대의 가례(家禮)가 과도하게 경직되어 만들어진 허례허식을 타파하고 현실적인 예법을 보급하려는 것이 주자가 편찬한 주자가례의 의도였다. 물론 이런 주자가례조차 조선 시대에는 비현실적이고 무의미해졌기 때문에 이이를 비롯한 많은 조선의 학자들이 주자가례를 재해석하고 당대에 맞는 예법을 보급시키려 노력했다.
5.2. 지배 권력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다?
충효(忠孝)를 이용해 백성을 국가 권력에 예속시키는 일도, 성리학에서 비로소 나타난게 아니라 한나라 때부터 나타나는 유서 깊은 이데올로기일 뿐이었다. 마치 성리학이 충효 사상을 가르치는 도덕 선생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군주에 대한 일방적인 충성보다도 오히려 역성 혁명을 긍정하기까지 하는 것이 주희 시대의 신유학적 정치 관점이었다. 한 왕조 이후 천 년 이상 철저하게 이단으로 취급되던 맹자를 다시 주요 경전에 포함시킨 것도 주희의 업적이다. 권력자의 입장에서 '맹자'를 읽기가 매우 껄끄러웠는데, 걸핏하면 정치를 제대로 못하고 인성이 글러먹은 왕은 물러나야 한다는 이야기가 튀어 나오기 때문이다.
송나라 때는 군주의 전제 정치가 약화된 시기였으며 왕안석의 신법을 비롯한 여러 개혁안들이 나타날 수 있는 시민 계층이 형성된 시기였던 것이 이같은 진보적 관점을 태동시켰다고 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몽골의 칩입과 반달리즘을 통해 성리학적 질서는 중국에서 완전히 파괴되었고, 이후 유교가 다시 자리 잡는 것은 명나라 이후이다. 물론 남송 대의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내용이 아니라 실천과 의지를 중요시하는 자기 개발서 비슷한 관점이 명대의 주류가 되었지만...
또한 성리학이 신분제도 강화를 옹호하고 지배층의 수탈을 정당화한다는 오해도 있는데 이는 왜란과 호란 후에 생긴 사회혼란으로 부터 자신들의 기득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성리학을 변질적으로 해석하여 생긴 부작용이지 성리학이 피지배층에 대한 수탈과 지배층의 횡포를 정당화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는 당시 성리학을 교조적으로 받아들이고 성리학을 악용한 지배층 잘못이 크다.
6. 의의
주자의 정치론은 오히려 서양의 계몽주의에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도 있다. 동양의 사상이 유럽에 소개된 것이 17세기 이후인데, 가톨릭 선교사들이 동양 선교를 위해 정보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고전을 라틴어로 번역한 것이 나름대로 지성인들 사이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고 한다. 만주족 출신 황제를 모시느라 무척 어용화된 유학의 관점에서 소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서양에 소개될 때는 이상적인 계몽 군주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고 감탄을 샀다고 한다. 하지만 이건 단순히 유럽 계몽주의자들이 당시 유럽의 현실을 비판하기 위해서 실제와는 상관없는 이상화된 유교와 중국을 내세웠을 뿐이다. 즉 그 시기 유행했던 '고귀한 야만인' 담론일 뿐이다.
한편 불교의 폐단을 극복하고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려는 개혁적 열망은, 성리학을 도입하여 불교적 세계관을 몰아내는 지식인들의 거대 프로젝트로 결론이 내려지고 군부의 쿠데타와 협력하여 조선 왕조가 세워지게 되는 기초를 놓았다. 조선 초기의 성리학자들의 논의는 구 고려 왕조 시대의 종교적 생활 방식을 타파하는데 있었다. 성리학이 윤리적, 경제적 생활 이념으로 완전히 체화된 것은 퇴계와 율곡이 등장한 16세기 후반이었다.
중국에서는 일단 명 중기부터 양명학이 인기를 끌었다. 다만, 명 멸망 이후에는 일단 사상계에서 명나라 멸망은 양명학 때문이라는 보수적 경향, 그리고 청나라의 문자의 옥 크리 등으로 인해 유학 연구가 시망이 되었다.
하지만 성리학이 내내 주류였던 조선뿐만 아니라, 청나라에서나 에도 막부에서도 정부의 공식 이념 및 주류를 차지한 사상 체계는 성리학이었고, 그 위상은 축소된 바가 없었다. 일본 성리학은 에도 막부 시절 발달되었고, 한국에서 임진왜란 때 포로로 끌려간 강항이 큰 영향을 주었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에도 막부는 대놓고 양명학을 탄압했다.
결론적으로, 성리학은 송나라에서 창시되었으나 조선에서 재발견되고 발전되었다. 혹은 또 다른 학문으로 재탄생된다. 이이와 이황의 추종자들은 이이와 이황이 성리학을 집대성했다고 보는데, 이건 순수하게 한국 유학의 관점에서 그렇다는 이야기고 우주론까지 나가는 개념은 원래 주희의 성리학에는 없던 개념이다. 때문에 해동 성리학이나 조선 성리학으로 별도로 분류할 필요까지 있다.
첫댓글 백성의 삶과는 별 상관없는 기년상과 삼년상, 국가의 존망이 걸린 문제를 오랑케 어쩌고 저쩌고 하다고 백성들만 죽어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성을 버리고 도망간 선조, 조선의 붕당정치, 세도정치,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조선시대를 보면서 성리학이 누구를 위한 학문인지 생각하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