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노동자들이 정리해고 또는 다른 이유로 고통을 받아왔습니다. 대부분 기업의 이익이라는 명분 아래 기본권이 철저히 무시된 결과입니다. 그에 항의하는 노동자들의 요구는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습니다.
실직한 노동자들의 삶은 처참해집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이 사회의 경제시스템입니다.
이런 사회 속에서 살아야 하는 우리들은, 아프리카 사바나 지역의 건기 중의 점점 닳아 없어지는 개울 주변의 동물들과 같은 삶입니다. 누가 마지막 남은 물 한방울을 먹고 살아남을까?
우리의 삶이 이렇게 고통스러운 것은, 자본주의라는 경제 시스템 때문입니다. 물론, 대기업이라는 경제주체가 저지른 죄악은 눈앞에 보이듯이 대단히 악랄하고 구체적이죠.
그런데, 우리의 삶이 이토록 절박한 이유가, 오로지 그들 때문일까요? 자본주의라는 냉엄한 현실을 현실을 만드는데는 오로지 그들의 의도대로였을까요?
이런 경제적 시스템 속에서 대부분의 인민들은 여기에 순응하면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저 또한 가능하면 벗어나려는 시도는 하고 있지만, 어쩔 수 없이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노동조합이라는 보호막을 잘 이용한다면, 현실은 달라지지 않을까요?
현재, 한국의 노동조합은 오로지 임금과 일자리에만 머믈러 있습니다. 자본과 국가에 대한 저항은 거기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원인이 현재의 민주노총과 이번 한진 사태에서 보여준 한진지회의 모습입니다.
만약, 실직을 당해도 다른 돌파구가 있는 삶이 있다면? 그런 것들의 대책을 노동조합이 준비하고 있다면?
노동자이자 소비자입니다. 대기업은 많은 수의 사람들을 노동자로 고용도 하지만, 또 그런 사람들이 대기업의 소비자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딜레마가 있는 겁니다. 대기업의 노동자는 대기업이 주도하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한치도 벗어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들의 모든 소비활동은 이 사회의 모든 악순환의 고리 속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겁니다.
더욱 알기 쉽게 얘기 한다면, 스스로 이런 악순환의 경제시스템 자본주의 사회를 어쩔 수 없이 돕고 있다는 거죠. 그래서 자신의 무덤을 스스로 파게 된 겁니다.
노동조합이 진정으로 그것이 되기 위해서는, 조합원의 노후와 소비 형태까지 책임지는 협동조합의 형태를 띠어야 합니다. (녹색평론 119호의 박승옥씨 글을 참조하세요)
그렇지 않고서는, 지금까지 처럼 이렇게 무지막지 하게 자본과 국가를 향해 대책없는 투쟁을 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백척간두의 마음으로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싸우는 겁니다. 왜 자꾸 지는 게임들을 하시는 지.
우리의 삶은 우리가 책임져야 합니다. 그들에게 우리의 삶을 맡길 수는 없습니다. 지금은, 그들에게 우리의 삶 전체를 통채로 내던지고 있는 꼴입니다.
그 삶이 우리 것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들만의 경제시스템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세기말적인 악순환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에서 벗어난 우리들만의 세계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여유를 가지고 그들과의 투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노동조합이 협동조합이 되는 길 뿐입니다.
그것이 유일한 희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