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대학교 일반전형 식물생산산림과학부군. 불합격.
2005년, 2월 1일. 그해 가장 추운 겨울날이었다.
인터넷 창에 나타난 이 반갑지 않은 글자들은,
이번 해에 수능을 한번 더 보라는, 그러한 받아들이기 힘든 의미를 나에게 전달해주었다.
재수다.
수능을 한번 더 봐야한다.
현역 때 죽어도 하기 싫다던 재수를 결국 하게 되었다.
440대 초반의 점수로는 역시 무리였던 것일까.
수능 전날 그 미칠듯한 초조함에 한번 더 떨어야 할 것이고, 수번의 모의고사를 다시 한번 봐야한다.
기출문제도 다시 풀어봐야 하고, 교과서도 처음부터 다시 봐야한다.
11월 17일 이후로 공부와는 인연을 끊었었기 때문에, 머리는 완전히 굳어있었다.
불규칙적인 생활 패턴에 완전히 익숙해져 있어서 몸 또한 많이 망가진 상태였었다.
타락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불합격 발표가 난 다음날, 강남대성학원에 유시험을 보러갔지만 당연하게도 떨어지고 말았다.
결국 2차 모집 때, 노량진 대성학원 무시험전형으로 넣어서 대성학원 자연4반으로 배정되게 되었다.
2월 17일에 개강을 시작으로,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초반 학원 생활은 암울, 그 자체였다.
80명정도 되는 학생들을 좁디 좁은 교실에 몰아넣었는데, 뒤에 있는 사람은 앞으로 나가기가 힘들 정도였다.
대화도 웃음도 없었다.
서로의 눈에는 재수생의 패배의식이 묻어 있었다.
점심시간의 화장실은 엄청난 인파가 모여들어서, 발 디딜 틈도 없었다.
정말 내가 왜 이렇게 살고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약 1달간은 정말 암울하게 보냈다. 재수는 쉽게 결심해서는 안된다.
정말 많은 눈물을 참아야 하고, 수많은 아픔들은 마음 속으로 삭히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재수를 통해서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
사회에서, 나를 보호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
인생은 고독한 것이고 혼자라는 것. 인내와 끈기.
3월 2일. 눈이 많이 내리던 날에, 나는 학원에 지각을 했다.
그리고 같은 날, 서울대학교의 입학식이 있었다.
천국과 지옥처럼 그렇게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상황에서, 나는 이를 악물며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으며 치열하게 공부를 해나갔다.
다음은 3월 6일에 썼던 일기의 전문이다.
----------------------------------------------
죄수생의 하루는 바쁘게 시작됩니다.
아침 7시 50분까지 교실로 들어가야 하므로,
이곳 등촌동에서는 6시 20분 정도에는 일어나야 합니다.
터질듯이 무거운 가방을 메고, 한손에는 도시락통을 든,
이 키 작은 학생은 의심할 바 없이 죄수생입니다.
지하철에서 내릴 때, 저를 쳐다보는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집니다.
-마치, 제가 재수생이라는 것을 서로 확인하듯이, 다같이 뚫어져라 쳐다봅니다-
한 반의 인원은 80명입니다.
3학년 때 교실보다 약간 더 큰 이 교실에 어떻게 80명이 들어가서 수업을 받는지..
신기할 따름입니다.
책상은 다닥다닥 붙어있어 뒤쪽에서 앞으로 나가기도 힘들 정도입니다.
쉬는 시간에는 돌아다닐 수가 없어,
쉬고 싶을 때에는 그냥 책상에 앉아 멍하니 앞을 바라보거나 잠을 자야 합니다.
노량진의 , 시멘트와 철골로 둘러싸인 햇빛도 잘 들어오지 않는 이 건물에서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 저는, 저희는 공부만 하고 지냅니다. 말할 친구도 없습니다.
재수를 시작하면서 사회를 깨달았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만약 제가 대학에 떨어지지 않고, 턱걸이로 붙었더라면, 군대갔다오고, 졸업할 때가 되서야 겨우 깨달을 수 있을텐데 말입니다.
사회는 무섭습니다.
아무도 이 어린 청년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오지 않습니다.
돈이 없으면 몇시간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부모님 곁을 떠나면 , 고등학교를 갖 졸업한 저는 살아갈 방도가 없습니다.
학원에서는 항상 배가 고픕니다.
이곳은 전쟁터이고, 난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을 몸이 아나 봅니다.
집에서 싸온 도시락은 어찌나 맛있던지...
재수를 처음 시작할 때, 이것은 인간이 할 짓이 못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너무 괴롭고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 재수를 통해서 참..배우는 것이 많습니다.
대학을 제가 만약 합격했더라면, 수능이 끝난 후 나태했던 그 모습 그대로 대학에 지니고 갔을것입니다.
하지만 재수를 함으로써 다시 원래의 서형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좀더 겸손한 태도로, 인내심을 가지고 다시 시작을 할 수 있었습니다.
수능이 끝나고 잃어버렸던 저의 열정도 되찾았습니다.
화장실 갈적과 나올적 마음이 다르다는 말이 있듯이, 사람은 자신이 힘들었던 시기가 다 지나면 그때의 생생한 열망을 잊기 쉽습니다.
어느정도 그 느낌을 피상적으로 상기시킬 수는 있어도, 그 느낌을 다시 완전히 느끼란 너무나도 어려운 일입니다.
전 다시 공부를 시작함으로 인해서 고등학교 때 느꼈던 그 감정들, 열정과 꿈들을 다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공부법, 인생의 목표들, 두발자유화 등....
공부를 하다보면 고등학교 때의 추억이 떠올라 혼자 싱긋 웃어봅니다.
고등학교 시절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시절 같습니다.
시련이 와도 그 추억이 있으므로 모 시인의 시구처럼 희망처럼 그날을 기다리며 견딜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 마음속으로 이렇게 노래가사를 읊조리며 다시 펜을 잡습니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생이여...."
-------------------------------------------------------
3월 중순이 되고,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반 친구들과 하나 둘씩 말문이 트이기 시작했다.
반 친구들은 서로서로 알게되고 친해지면서 반 분위기는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학원과도 친숙해졌다. 자율적인 자습 분위기와 뛰어난 선생님들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대성학원에서는, 모의고사를 본 후에, 문이과로 나눠서, 학원 전체 1등부터 100등까지의 이름과 출신고등학교를 게시판에 붙였다.
이를 흔히 빌보드라고 부르는데, 학생들은 빌보드에 붙는 것을 굉장한 영광으로 생각했다.
이는 학생들 서로간의 공부 욕구를 더 높여주었다.
학원 생활에 익숙해진 어느 하루는, 친한 친구 한명과 야간 자율학습을 안하고, 피시방에서 스타를 했다.
피시방에서 정신없이 3시간 정도 게임을 한 뒤에, 친구와 헤어지고 나와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길에서, 겉잡을 수 없는 후회가 밀려왔다.
몸에서는 피시방에서 밴 담배냄새가 났고, 오늘 학원에서 선생님께서 내준 숙제들이 생각이 났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살다가는 삼수를 할지도 모른다. 재수도 이정도로 끔찍한데 삼수는 더할 것이다.
집으로 가는 버스안에서, 나는 속으로 펑펑 울었다.
담배냄새가 나는 옷과 함께 나는 그렇게 헛되이 보낸 그날 하루를 후회했다.
집에 도착해서 샤워를 한 후, 난 굳은 결심을 했다. 고3 때처럼 공부한다면, 성공할 수 없다. 똑같은 절차를 밟을 것이고, 결과는 제자리가 되거나 약간 상승할 것이다.
진정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지금같이 공부해선 안된다. 재수를 하는 동안에 나는 인내를 배워야 한다.
4월달까지 단 한번도 야간 자율학습 (야자) 를 빼먹지 않고 모두 하기로 결심했다.
걸핏하면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집으로 가곤 했던 고3때의 나를 생각해보면, 이는 대단한 결심이었다.
몇일동안은 별 문제없이 그 결심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날, 아침에 머리를 감고 말리지 않은 탓인지, 감기에 걸렸다.
감기는 고3 때도 나를 가장 괴롭혔던 것 중에 하나였다.
수업시간에는 너무나도 아팠지만 그냥 오기로 버텨내었다.
야자가 시작된 후에는 증상이 더욱 심각해졌다. 콧물이 자꾸 흘러서 코가 헐고 쓰라렸다. 머리에서는 열이 났다. 너무나도 괴로웠다. 약을 먹었으나 상태는 전혀 호전되지 않았다.
머리가 아펐다. 몸은 정말 지칠대로 지쳤다. 어리석고 감상적이었던, 어린청년의 생각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 때, 집에가는 것은 나와의 싸움에서 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집에 가게되면 삼수다. 빈 자습실로 가서 책상위에 그냥 쓰러져 버렸다.
언젠간 이렇게 약을 먹고, 먼지쌓인 교실에서 아픈 채로 버티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오겠지.. 언젠가는..
열이 나기 시작했다. 몸은 펄펄 끓는 듯했다.
난 내 자신과 싸웠다. 고독의 끝에서 혼자 나는 싸웠다. 여기서 지면 나는 끝장이다.
하면서 그렇게 나는 잠이 들었다.
긴 시간이 흘렀다고 느끼면서 잠에서 깨어났을 때에는, 30분 정도가 지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 몸은 홀가분했다. 방금 전에 그렇게 나를 괴롭혔던 열들은 언제 있었냐는 듯이 사라졌다.
기분좋은 땀이 나를 적셔주고 있었다.
그 날을 고비로, 나는 4월달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야간자율학습을 나왔다.
수능 공부를 할 때, 이렇게 자신을 절제하는 규칙을 만들고, 그것을 지켜나가는 것은 상당한 도움이 된다.
이 기간 동안의 공부로, 모의고사 성적이 급상승 했다는 말을 할 것이라는 것을, 눈치빠른 사람들은 이미 예상을 했을 것이다.
3월달의 대성 월례고사 때의 성적은 노량진 대성 이과 2800명 정도중에서 350등 정도였지만, 4월 모의고사 때는 150등 정도를 했다.
특히나 수학 100, 영어100, 과학탐구 180점을 맞으므로, 수외과 성적으로 학원 전체에서 16등을 하고, 전국에서는 300등 안에 들 수 있었다.
재수하는 동안에, 나는 나의 공부법에 원칙을 세웠다.
첫째로 '반복', 둘째로 '집중'.
그 두가지를 원칙으로,
학원 수업시간에 배우는 교재를 반복하고(반복), 학원 수업시간의 내용을 철저히 복습하면서, 그 때 배운 내용들 만이라도 모두 흡수하겠다는 것(집중)이 나의 생각이었다.
다방면의 책에 손을 뻐쳐서 공부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한가지의 책을 배우더라도, 집중해서 제대로 흡수하겠다는 것이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습득했던 공부법이 '원칙주의' 공부법이었다면, 재수하는 동안에 깨달은 공부법은 '실전주의' 공부법이었다. (두 가지 공부법은 완전히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정도의 교집합과 연관성은 가지고 있다.)
난 고등학교 시절에 공부법에 관한 책을 30권 이상 읽었고, 공부법 강의도 거의 다 찾아서 보았다.
그것에서 쌓은 데이타베이스와 내가 시행착오를 통해 얻은 경험들, 그리고 주위 친구들의 공부하는 법을 참고해서 2월 말부터, 내가 깨달은 공부법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바른공부법'을 써 나갔다.
토요일 밤에 장장 6시간에 걸쳐서 쉬지 않고 써서 바른공부법 초판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난 그 공부법을 주말마다 그것을 수정해나가고 추가해나갔다.
그렇게 해서 4월 초에 어느정도 틀이 잡혔다.
그리 대단한 공부법은 아니라고 생각했고, 그냥 나의 공부법을 정리할 수 있어서, 나 자신이 만족했다.
4월 5일, 식목일날에, 오르비(www.orbi7.com) 학습동에 공부법을 올렸다.
공부법을 올리게 된 직접적 이유는, 내가 겪은 시행착오의 길을 사람들이 걷지 않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르비에는 나보다 뛰어난 사람들도 많기에, 바른 공부법이 많은 반대에 부딪혀 비추천을 받고 삭제되지 않을까 걱정을 했다.
그러나 정말 도움을 주고 싶어서 올린 글이기 때문에, 도움을 받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만족이라는 생각에 그냥 올렸다.
샤워를 하고와서 반응을 살피기 위해 글을 보니, 리플은 30개가 넘게 있었고 추천수는 10이 넘게 올라가 있었다.
불과 20분 남짓한 시간에 생긴 일이었다. 예상 외의 폭발적인 반응이었다.
계속 그것을 지켜보면 공부를 못할 것 같아서, 옷을 갈아입고 학원으로 향했다.
학원에서 자습을 하는 중에도 내 신경은 온통 온라인글에 쏠려있었지만 말이다.
집에 와서 글을 보니, 나도 놀랄 정도의 반응이었다. 리플수는 100개를 훌쩍 넘어있었으며, 추천수 또한 80이 넘어 있었다.
그 글은 오르비 최초로 게시된 당일날 특별학습동으로 이동한 글이 되었다.
내 아이디(로보트)에 수십통의 쪽지가 왔고, 그 쪽지에 답변을 하느라 장장 1시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쪽지를 보내면서, 내가 이렇게 조언을 해줄 자격이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글은 내가 마치 대학생인 것처럼 썼기 때문에, 사람들은 내가 재수생인지 몰랐다.
다른 사람들처럼 나약하고, 불안감에 떠는 존재인데...
그래도 내 입장에서, 최대한 해줄 수 있는 조언은 모두 해 주었다.
답장을 받고 감사하는 사람들의 글을 보고 뿌듯함을 느끼면서, 재수시작 처음으로 행복한 잠을 잘 수 있었다.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쪽지 또는 이메일이 왔고, 그에 대해 정성껏 답변해 주었다.
5월달이 되고, 반 친구들과 거의 다 친해지게 되면서, 다른 아이들과 함께 나도 조금씩 풀어지기 시작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염색을 했고, 친구들과 종종 노래방에도 갔다.
반 친구들끼리 모여서 축구도 했다.
그래도 계속해서 공부의 끈은 놓지 않고, 일정한 공부량은 어느정도 해나갔다. 공부만 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많이 놀지도 않으면서, 적당히 삶을 유지해나간 시간이었다.
6월이 되고, 옆자리에 앉은 한 여자애와 친해졌다. 성격도 좋고, 얼굴도 이쁜 친구였다.
서로 말문이 트이기 시작하고 급속도로 친해지기 시작했다. 얘기를 하고 있으면 그냥 좋았다.
주로 내가 그 친구를 놀리면서 얘기를 했다.
그리고
그렇게 놀렸던 것이 그 친구에게 정말 큰 상처가 되었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지만 말이다.
학원에 가는 것이 행복했고, 생각만 해도 좋았다.
어쩌면, 사랑이었을지도 모른다.
재수생활의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 버렸긴 했지만 말이다.
공부는 뒷전이었다. 집중은 되지 않았다.
6월 한달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지냈는지 모르는 기간이었다.
6월 모의고사 성적은 바닥을 기었다는 표현이 적절할듯 싶다.
KICE시험도, 대성모의고사도 성적이 그리 좋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후 내가 그 친구에게 상처를 많이 주었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그뒤로 나는 말을 걸지 않았다.
진정으로 미안한 마음이 있었고, 지금은 공부를 해야할 때라는 마음도 섞여있었기 때문이다.
7월부터 다시 마음을 잡고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학원 정문에는 '7,8월이 승패를 좌우한다'는 플랜카드가 걸려 있었다.
7월달까지는 수능의 기본을 쌓는 기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난 2월부터 복습하고 반복해온 학원교재를, 1학기가 끝나는 7월에 최종적으로 정리를 시작했다.
'대성초이스' 수1,수2 문제집은 다 합해서 7번 정도를 다시 보았다.
풀 때도 그냥 기계적으로 풀지 않았고, 어떤 원리를 이용하고, 어떤 단원과 복합적으로 연결이 되는지 관찰하며 풀어나갔다.
계산실수로라도 틀린 문제는 무조건 틀린 문제로 간주하고 반성을 많이 했다.
지겹진 않았다. 볼 때마다 새롭게 느껴졌다. 공부에서 재미를 찾은 것이다.
이런 과정속에서 쌓은 밑바탕은 수능에서 큰 도움이 되어 주었다.
최상위권으로 가는 길에 특별함은 없다.
우리가 알고있는 평범함, 즉 우직한 공부 노력, 반복이 바로 최상위권으로 가는 길이다.
고통이 동반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자신이 목표한 바를 이루려면 어느정도 이상의 고통은 감수해야 한다.
인생의 무지개를 보기 위해서는 비를 맞아야 한다.
영어와 언어는 매일 지문을 보고 분석해보았다.
급하게 많은 문제를 풀려하지 않았고, 지문을 분석하는 능력을 키워나갔다.
난 학원 수업을 그냥 듣지 않았다. 완벽히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다.
대충 듣는 수업은 아무것도 없었다. 앉아서 졸더라도 잠은 절대로 일부러 자지 않았다.
학원 수업이 끝나고 자습시간이 되면, 의무적으로, 그날 배웠던 것을 꼼꼼히 복습했다.
배웠던 것은 이미 아는 것이라서 지겹게 느껴졌었만, 인내심을 가지고 복습을 했다.
그리고 주말이 되면 1주일간 배운 내용을 다시한번 복습을 했다.
복습과 숙제, 어느정도의 예습을 끝내고 남는 시간에는, 내 나름대로의 계획을 실행해 나갔다.
이 나름대로의 계획이란, 예전에 배웠던 것을 반복학습하는 것이다.
매일매일의 수업내용을 복습을 하면서 나가더라도, 사람의 뇌는 시간이 지나면 옛날에 공부했던 부분을 망각해버리기 때문에, 다시한번 공부를 해둬야 그 부분을 기억할 수 있다.
학원 1학기가 끝나고 방학이 시작되었다.
고작해야 10일정도밖에 되지 않는 기간이었지만, 막판에 힘을 내기 위하여 몸을 재충전하기에는 적당한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이 기간 동안에는 편안히 공부했다. 평균 6시간정도 자습을 한 것 같다.
나머지 시간에는 친구들과 노래방을 가거나, 장기를 두거나, 책을 읽었다.
2005년 사상 최고기온을 기록한 날에 축구도 했었다.
그 때, 친구관계가 얽혀서 고민도 많이 했었다.
누구나 대인관계에 관한 고민은 했을 것이다. 난 나에게 문제점이 있는 것을 알고, 고쳐나가기 위해 노력했다.
그 10일동안은 재수생활 중, 가장 인간적으로 살았던 기간같다.
그리고 개학을 하고 학원 2학기 수업이 시작되었다.
개강날에는 고려대학교 수시모집 시험을 보러 갔다.
언어논술(요약)과 수리논술은 주말마다 틈틈히 수업을 통해서 준비를 해왔으며, 글쓰기에도 어느정도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합격은 장담하지 못하더라도 실력발휘를 할 것이라고 믿었다.
150:1 이라는 어마어마한 경쟁률이었으니, 사실 합격은 애시당초 힘들었다.
하지만 시험시간 동안에 나는 정말 '원없이' 쓰고싶은 말을 썼다.
최선을 다한 시험이었고, 떨어졌지만 후회는 없었다. 좋은 경험이었다.
사실 합격에 대해 조금 기대를 해서, 타격이 어느정도는 있었지만 말이다.
8월 월례고사 때에는 58등을 해서 빌보드에 올라보기도 했다.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만족을 했다.
정신없는 8월달을 흘려보내고, 9월달이 되니 다들 마음을 잡고 제대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주말에 학원에 오면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작년 학교에 있었을 때는, 이맘때쯤 친구들끼리 서로 친해져서 툭하면 놀러 나가고 했었지만,
학원 사람들은 인생의 쓴 맛을 보아서 그러는지 몰라도 열심히 공부를 했다.
나 또한 한번 실패를 해봤으므로, 이 기간에는 정말 열심히 공부를 했다.
9월 KICE 모의평가 시험을 보고, 수능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직접적으로 감을 잡을 수 있었다.
KICE문제는 역시 좋았고, 지금까지 본 모의고사 문제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생각하지도 못했던 부분에서 연결 포인트를 잡아서 복합문제를 내고, 기발한 발상의 신유형 문제도 많았다.
특히나 언어영역 문제는 논리가 딱딱 맞아 떨어졌고, 모든 문제에 대한 근거가 있었다.
그러나 묻는 내용은 철저히 고등학교 과정 내에서 출제되었고, 일반 수능 문제집에서 찾을 수 있는 익숙한 문제유형들도 많았다.
수능은 알 수 없는 낯선 시험이 아니라, 그렇게 특별하지도 않은 시험임을 알 수 있었다.
8월부터 9월까지는 문제들을 풀어나갔다.
'공부'를 한다는 측면에서 보다는,
'맞추는 연습'을 한다는 표현이 적절할 듯 싶다.
나는 유난히 실수를 많이했기 때문이다.
모의고사를 조사해보면, 틀리는 문제의 80% 이상이 실수였다.
사실, 실수라는 표현은 옳지 못한 것 같다. '착각'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듯 하다.
그 실수들을 분석해본 결과, 내가 기본내용을 잘못 공부했해서 틀렸거나, 글자를 잘못 읽거나 부주의해서 틀렸다는 것을 알게되었기 때문이다.
정말 실수가 실력이었다.
문제들을 풀면서, 아는 것이라도 확실히 맞추는 연습을 해나갔다. 그러면서 점점 틀리는 문제수는 줄어나갔다.
9월달 이후로의 시간은 정말 후회없이 보냈다.
앞으로 수능때까지 남은 시간이 별로없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수능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는 지금밖에 없고, 이 시간을 후회없이 보내고 싶다'
난 모든 찰나를 헛되이 보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컴퓨터는 필요할 때를 제외하곤 거의하지 않았고, 학원에 다녀오면 취약점이었던 영어듣기를 했다.
매일을 규칙적으로 살았다. 자율학습은 단 하루도 빼먹지 않았다.
그러던 중, 10월 모의고사 전날 감기에 걸렸다.
10월 모의고사 때는 콧물과 휴지의 기억밖에 남지 않는다.
문제가 나를 풀었는지, 내가 문제를 풀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당연히 성적은 만족스럽지 못했다.
불안했다.
수능도 이렇게 되면 어떻하나....
그러나 결국 신경을 쓰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단지 컨디션 때문이라 생각했다.
모의고사 성적은 한편으로는 신경을 써야하고, 한편으로는 신경을 쓰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다.
전자는, 모의고사를 잘 보지 못한 이유가 현재까지의 자신의 나태함 때문이라면 , 이를 채찍의 방편으로 여기라는 뜻이다.
후자는, 모의고사 성적 때문에 자신의 계획을 자꾸 바꾸어 나가지 말라는 말이다.
중간에 계획을 관두면 시작하지 않은 것보다도 못한다.
모의고사가 잘 나왔다고 해서 자만하지 말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사실,
7월달까지 나의 물리성적은 30점대 초반이었다.
수학 또한 80점을 웃돌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난 나를 믿고, 모의고사에 연연하지 않고
계속해서 계획을 실행해나가서 수능에서 성공할 수 있었다.
10월달 부터는 실전연습을 해나갔다.
반에서 친한 누나와 같이 시간을 재면서 실전모의고사를 풀어나갔다.
음료수 내기를 했는데, 먹을 것이 걸려있으니 긴장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시간이 다되면, 서로 바꿔서 채점하면서,
이긴 사람은 승리자의 기쁨을 누렸고 진 사람은 패배의 쓰라림을 느꼈다.
그러한 실전 연습의 과정에서, 시험 집중력을 키워나갔다.
학생들은 시험을 보게 되면, 저절로 집중을 하게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수능시험같은 중요한 시험 때에도, 집중을 제대로 못하는 학생들은 많다.
시험 집중력 또한 연습을 통해서 키워나가야 한다.
서로 모의고사를 푸는 것은, 정말 좋은 추억이 된 것 같다.
그 누나와는 지금도 절친한 사이로 지내고 있다.
수능이 가까워지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인간은 누구나 불안해한다. 전국1등이라고 해서 불안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단지 불안의 정도가 개인마다 조금씩 다를 뿐이지, 수능이 가까워지면 다들 불안해한다.
나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실전모의고사를 풀어서 점수가 약간 삐끗하더라도 난 불안해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내면적인 나는 한없이 나약한 존재에 불과했다.
그 불안감을 이겨내기 위해서 난 자기암시를 걸었다.
'난 수능을 잘본다'
'난 할 수 있다'
'이번엔 잘본다'
'난 실전에 강한 사람이다'
이러한 어구를 일기장에 매일 써나갔고, 틈틈히 쉬는 시간마다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그러면서 불안감은 서서히 내 마음에서 멀어졌고,
자신감이란 것이 내 마음속 한켠에 자리잡을 수 있었다.
11월 모의고사 또한 성적이 그리 좋지 않았다.
하지만 절대 절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성적은 남은 기간동안 나를 견고하게 다뤄준 '죽비'가 되었다.
시험이 2주정도 남은 어느날, 학원의 언어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시험 못본 것을 자책하지 말아라. 앞으로 2주는 너희들의 모든 것이 달린 시간이다.
남은 2주는 목숨을 걸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목숨을 걸고 싸워라."
이 말에 나는 크게 감명을 받았다.
어쩌면 이번 수능에서 고득점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이 선생님 덕분일지도 모른다.
사실 남은 2주는 다들 어느정도 공부가 되었다고 생각해서, 해이해지기 쉬운 때이다.
친구들은 많이 친해져서 서로 대화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이제는 컨디션 관리할 때라고 하면서 공부에는 손을 놓는 친구들도 몇몇 있었다.
시험을 보러 집으로 내려가는 친구들도 있었다. (대성학원에는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들이 상당히 많다.)
하지만,
난 이 때 마지막 정리에 박차를 가했다. 1분의 시간도 헛되이 보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마지막 정리는, 이상하게도 정리를 하면 할수록 모르는 것들 투성이였다.
이 부분을 하면 저 부분이 모르는 것 같고, 그 부분을 공부하면 다시 모르는 것이 생겨났다.
주로 주말에는 교과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 쭉 보았다.
역시 세부적인 부분에서 놓치고 있던 것들이 많았다.
평일에는 모의고사를 풀어나가면서,
내가 틀렸거나, 풀면서 애매했던 문제들을 확인하고,
그 해당단원에 찾아가서 다시 확인을 했다.
마지막 2주는 그렇게 정말 정신없이 공부를 했다.
컨디션 관리는 특별히 안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원래 해오던대로 하는 것이 컨디션 관리라 생각한다.
괜히 특별하게 잠을 더 자는 것은 생활 리듬을 깨버릴 수 있다.
수능 날짜가 다가오더라도, 그냥 난 평상시의 흐름을 유지하고 공부를 해나갔다.
주말에도 하루종일 학원에서 자습을 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는 중, 수능이 다음날로 다가왔다.
11.22. 화요일
6시 30분 정도에 잠에서 깨어났다.
일단 영어의 감을 살리기 위해,
9월 모의평가 외국어 영역 지문을 다시보았다.
모의평가 지문은 역시 Introduction, Topic, Support가 명확히 구분되어 있었다.
수능은 이렇게 출제되는구나....하는 마인드를 다시한번 깨달을 수 있는 기회였다.
문제가 깔끔하고 좋았다. 답이 딱딱 맞아 떨어졌다. 애매한 문제는 없었다.
10시부터 학교에서 수험표 발급이 있기에 9시 50분정도에 학교로 나갔다.
그곳에서 반가운 얼굴들을 보았다.
1년만에 본 친구들이었다.
고등학교 시절의 소중한 친구들-
그리고나서 깨달은것 하나. 다들 늙어있었다.
그들의 노화를 슬퍼하며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나 또한 늙어있었다.
아아, 젊음은 거기 남아있어라.
망가진 피부와 하며 언발란스한 나의 헤어스타일
(사실, 수능보기 몇일전에 앞머리가 자꾸 신경쓰여서 앞머리만 잘랐다.)
1년간의 재수생활은 모두에게 힘겨웠던 것이다.
수험표를 발급받는, 진로상담실로 가보니 그곳은 n수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단, n은 2이상의 자연수이다. )
그 많은 인파속에서 힘들게 수험표 교환권을 내고 가까스로 수험표와 수능지침안내서를 받을 수 있었다.
그 수능 수험표가 나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했다.
작년과 똑같은 모양의, 사진만 바뀐 수험표. 바뀐것이 없었다.
더이상 익숙해지면 안되는데...이것이 마지막이길 바랬다.
학교는 대일고로 배정되었다. 대일고라면 우리집 바로 옆이라서 좋아했다. 이제 내일이다.
내일이면 수능준비도 끝인 것이다.
내일 수능이 끝나면, TV도 마음껏 볼 수 있고 잠도 마음껏 잘 수 있다.
더이상 좁디좁은 강의실에 앉아서 졸음을 참으며 필기를 해나갈 필요도 없다.
예비소집을 끝내고 와서 작년 언어영역 문제를 풀어봤다. 문제들이 논리가 있고 답이 딱딱 떨어졌다.
그리고 과학탐구를 영역별로 모의고사를 한회씩 풀어봤다. 수능을 보는 것같이 집중해서 풀어봤다.
혹자는 수능 전에는 모의고사를 풀지 말라고 하는데, 이는 모의고사 점수에 영향을 받아 심리가 불안해질 것을 염려해서 한 말이다.
점수에 영향받지 않을 것이라면 풀어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 이후로 여태까지 배웠던 것들을 쭉 읽어보고, 정리노트도 읽어나갔다.
8시 반정도가 되니 봐야할 것을 모두 보게 되었다.
2006년 수능을 대비한 모든 준비가 끝났다. 그냥 침대에 앉아서 1시간을 보냈다.
뭔 생각을 했는지 나도 모르겠다.
그리고나서 경건히 몸을 씻고 잘 준비를 했다. 10시정도에 잠자리에 들었던것 같다.
그리고 11시 45분에 일어났다. 1시간 45분 낮잠(?)을 잔 셈이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안된다. 자야되는데.....
누워서 30분동안 자려고 노력했다. 눈은 말똥말똥 깨어있었다.
어머니께서 잠을 재우기 위해서 신경안정제와 포도주를 먹었다.
포도주를 먹으니 몸이 뜨거워졌다. 얼굴도 뜨거워졌다. 누가 포도주를 먹으면 잠이 잘 온다 했던가.
혈액순환이 너무 좋아져서 뇌혈압이 다 느껴질 정도였다.
몸이 완전 흥분이 되었고 잠은 안오지 미칠 지경이었다.
난 떨고 있었다.
별 생각을 다했다.
이러다가 잠 못보고 시험장에 가서 망치는것 아닌가. 삼수하는것 아닌가.
정말 많이참고 열심히 했는데,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리는 것인가.
난,
기도를 했다.
하느님.
전 이번 시험에 대비해 최선을 다해왔고
평생동안 이렇게 열심히 살아온적이 없습니다.
지난 1년간, 후회는 없었습니다.
제 능력 안에서는 최선을 다할테니
제 능력 밖의 일에 대해서는,...
저의 보통의 실력만 발휘하게 해줄
그러한 여건만 마련해주십시오.
부디 부탁합니다.
그 이상의 것은 바라지 않습니다.
한번만...
딱 한번만..
제발 이번만이라도
저의 기도를 들어주옵소서...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난 일생동안 가장 절실하고도 간절한
기도를 했다.
잠이 들었는지. 아니면 깬 상태였는지.
그러한 반 혼수상태로,
나는 생애에서 마지막이 될 수능날의 아침을 기다렸다.
11.23.수요일.
6시 반정도에 침대에서 일어났다.
잠을 푹 잔지는 못했지만, 정신은 맑았다.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대일고등학교로 걸어갔다.
산책 나가는 기분으로 뒤쪽 산길을 통해서 걸어갔다.
내가 재수하는 동안에 가장 고생하신 사람들은 바로 나의 가족들이었다.
정말 말 못할 마음고생이 심하셨을 것이다.
장남인 아들이 재수하면서 너무나도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는, 그러한 부모님의 마음은 어떠하실지.
그런 생각을 하며 걷는 중에 난 대일고 앞에 와 있었다.
시험을 잘보겠다는 굳은 의지를 부모님께 다지고, 난 그렇게 홀로 시험장으로 들어갔다.
인생은 고독하다.
결국은 혼자다.
인생은 결국 혼자인 것이다.
혼자 절정의 끝에서 싸워야 할 순간이 있다.
내가 결정해야할 그런 순간이 있다.
이번엔 아니다.
이번엔 잘본다.
반드시 잘본다.
운명은 정해져 있지 않다.
운명이란건 정해져 있지 않다.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은 인간이 만들어낸 철학적 개념일 뿐이다.
고로 미래는 없다. 현재만 있을 뿐이다.
현재만 있다.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1교시 종이 울리고 언어영역이 시작되었다.
듣기문제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지문들을 쭉 훑어보았다.
대부분 아는 지문이라서 그리 어려울 것 같지는 않았다.
문제를 풀어나가는데, 이상하게 너무 쉬웠다.
쉬우니 나는 오히려 불안해했다. 어려워야지 변별력이 있는데,.. 마지막에 2문제가 남았다.
답은 결정해놨는데 왠지 불안했다.
종료 1분을 남기고 2문제를 모두 고쳤는데, 결과적으로는 둘다 틀려버렸다.
그순간, 내 언어영역 백분위는 폭락한 것이다.
1교시가 끝나고 다들 쉬웠다는 소리를 했다.
"30분 남았다"
"이런적 처음이다"
초조했다.
2교시 수리영역.
9월 모의평가 때 수리가형과 나형의 표준점수 차이가 많이 났으므로, 가형은 더욱 어렵게 낼 것이라는 예상을 했었다.
다른 아이들은 쉬운 언어영역 때문에 조금 들떠있는 것 같았다.
수리영역을 한 7번쯤 풀어가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이건 내가 알던 수리영역이 아니었다. 어려웠다.
잠시 잘못 생각하면 완전 잘못된 방향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문제들이 많았다.
그와 동시에 난 이런 생각을 했다.
'재학생들은 죽었구나.'
주관식으로 넘어가니까 재수를 한 나도 난생 처음보는 문제들이 나왔다.
그래도 각 단원의 개념을 생각하며 차근차근 접근하니 풀렸다.
미분과 적분에서는 주관식 30번을 결국 못풀었다.
찍으려니까 참 암담했다. 12로 찍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정답은 11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문제가 정말로 아깝다. 좀더 침착했어야 하는건데........
수리영역이 끝나니 다들 죽을듯한 인상들이었다. 학생들이 밥을 먹지 못하고 있었다.
난 좌절을 해봤자 지금은 늦었다는 생각에, 일단 밥을 재빨리 먹고 잠부터 자기 위해서 자리에 누었다.
자려고 하는 도중에 계속 수리영역 문제가 생각나고 불안했다.
난 나를 믿었다.
"어려웠지만, 잘했을 것을 믿는다. 점수여, 부탁한다."
잠을 자진 못했지만, 그래도 힘을 재충전할 수 있었다.
3교시 외국어 영역은 듣기와 함께 시작되었다.
듣기.
1년동안 그렇게 연습해왔던 듣기.
작년 그 악몽의 여자성우가 생각이났다.
처음에 잘 나가다가, 9번정도를 가는데 긴장때문에 숫자계산 부분을 못들었다.
1550달런가 1400달런가
초조해졌다. 땀이 줄줄 흘렀다. 한문제에 대학이 몇개가 달려있는데........
하지만 그 순간 '그래. 이건 버리고 남은거나 잘하자' 라고 생각하고 다시 집중에 들어갔다.
듣기를 다하고 지문을 읽어나갔다.
9월 평가원과 체감난이도가 비슷했다. 그리 큰 차이는 없었다.
다 풀고 시간이 15분정도 남았다. 듣기 9번은 4번에 있는 것밖에 듣지 못했기에, 4번으로 찍었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이것은 정답이었다.
나이스.
무난하게 3교시가 끝났다.
이제 과탐만 보면 끝난다.
과탐만 보면 끝이다.
이제 수능이 끝나는 것이다.
쉬는 시간에 친구를 만났다.
어찌 그리 반가웠던지..
지난 재수생활을 회고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고생많았다.. "
웃으면서 서로 잘보라고 하면서 4교시 준비를 위해 시험장으로 들어갔다.
이젠 허리가 아파왔다.
정신력으로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하고 과학탐구를 풀어나갔다.
물리1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다 푸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수능 물리는 역시 계산은 하나도 없었다.
원리, 이해만 묻는 문제였다.
화학1은 거의 다 교과서의 소재가 나와서 놀랐다.
수능 2주전에 화1 교과서를 꼼꼼히 살펴본 것이 상당히 도움이 되었다.
마지막에 3점짜리 한 문제를 고쳤는데, 이는 보기좋게 틀려버렸다.
생물1은 정말 열심히 공부해뒀기에, 편하게 풀었다.
생식기 문제는 당황해서 잘 모르는 부분이라 틀렸지만 나머지는 다 맞출 수 있었다.
화학2는 문제집엔 없지만, 교과서에 있는 실험이나 소재같은 것들이 많이 나왔다.
난이도는 예상했던 대로 높았다. 역대 화2 문제중 난이도 최고가 아닐까 싶다.
마지막에 틀린 것을 발견했지만, 시간이 없어서 고치지 못했다.
그리고 그렇게 화학2 20번의 마킹을 끝냤을 때의 홀가분함과 해방감이란.
작년에 끝날 때 느낀 그 암울함과 대조되는 느낌이었다.
이제 끝났구나.....
학교를 나서는 길에서 친구들을 만났다.
너무 기뻐서 부둥켜 안았다.
태어나서 단 한번도, 이렇게 규칙적으로 생활한 적은 없었다.
태어나서 단 한번도, 이렇게 인내하면서 살아본 적도 없었다.
그 시간은 너무나도 길게 느껴졌고,
지나가는 중 만나는 사소한 모든 의미들은, 그 순간에 맞닿은 나에게는 너무나도 절실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남모르게 혼자 삭혀야 했던 정말 힘들었던 시간들은,
그 지나간 시간들은
이제 재수생의 비참한 현실로 각인되는 기억이 아닌 내 꿈을 위해 열심히 준비했던 추억으로 남겨진다.
"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있거라 "
그렇게 수능이 끝난 후,
원서는 인하대학교 의예과, 서울대 전기컴퓨터 공학부, 한림대학교 의예과, KAIST를 썼다.
결과를 놓고 보자면, 가군에 경희대학교 한의예과나 한양대학교 의예과를 넣었으면 합격할 수 있던 점수였다.
(두곳 다 점수가 예상처럼 그렇게 높지는 않았다)
하지만,
원래부터 목표는 서울대 전기공학부였기 때문에, 다른 곳은 위험하게 원서를 쓰지 않았다.
서울대학교 면접준비는 약 2주전부터 했다.
학원을 다니다가, 수업이 맞지 않아서 혼자 공부를 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지는 않았고, 도서관에 가서 하루 평균 3시간 정도 했다.
화학은 하이탑으로 공부를 했고, 수학은 심층면접 문제집을 사서 공부를 했다.
수학은 포항공대와 서울대의 기출문제를 중심으로 공부했다.
면접은 1월 18일에 있었다.
점수가 어느정도 남았기 때문에, 면접은 평균적으로만 봐도 붙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큰 부담은 없었다.
2006년 1월 18일 날이 밝았다.
오전은 화학, 오후는 수학이었다. 화학 순번은 마지막에서 세 번째였다.
같은 학원 친구들을 만나서, 인사를 하고 내 차례를 기다렸다.
자신의 차례가 되면, 목에 자신이 누군지를 알리는 목걸이(?)를 걸고, 1조부터 10조가 함께 나가서 면접을 봤다.
잠을 4시간밖에 자지 못했기 때문에, 잠을 보충하려고 1시간 정도 자리에 누워있었다.
긴장이 돼서 잠이 안오자, 그냥 집에서 갖고온 하이탑 3권을 봤다.
3시간 정도 기다린 다음에 내 차례가 왔다.
너무 오래 기다려서 긴장감이 거의 다 풀린 상태였지만, 목걸이를 걸고 자리에서 일어나니 갑자기 긴장이 되었다.
‘난 할 수 있다. 난 서울대학교에 합격한다.’하고 자기암시를 하면서 시험장으로 갔다.
시험장이 따로 마련되어있을줄 알았는데, 복도에 있는 책상에서 푸는 방식으로 되어 있어서 황당했다.
책상에 앉고 시험지를 받고, 시험지와 대면한 순간. 난 놀라 기절하는 줄 알았다.
화학 면접문제인데 ‘시’가 나와있었던 것이다. 무슨 언어영역도 아니고....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차분히 시를 읽어나가는 도중, 별 거 아닌 시라는 것을 깨달았다.
1번문제를 풀어나가니,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용어가 생소했다.
하지만 차근차근 문제를 풀어나가니 큰 어려움은 없었다.
5번 문제까지 막힘없이 잘 나가다가, 반응식을 완성시키는 대목에서 헷갈려서, 시간을 모두 소모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면접실로 들어갔다. 교수님의 질문에 대해서 나는 내가 푼 것은 최대한 빠르게 설명했다.
힌트를 얻고, 푸는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3분정도만에 내가 푼 모든 문제를 설명할 수 있었고, 5번문제는 교수님의 도움을 받아 풀 수 있었다.
6번문제는 시간이 모자라서 손도 대지 못했다.
아쉬웠다.
끝나고 나와보니, 시험을 잘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농생대에 지원한 누나에게 같이 밥을 먹자고 전화를 해보니, 이미 집에 가는 중이라고 했다.
묘한 실망감(?)을 느끼며 공대 식당에서 밥을 혼자 먹었다.
기독교 동아리 선배님께서 길을 안내해 주셔서 고마웠다.
밥은 혼자 먹고 , 못푼 문제는 자꾸 생각나고...머리가 복잡했다.
거의 좌절모드였다. 그러다가 주위 사람들이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화학 문제가 상당히 어려웠다는 것이었다. 다행이었다.
‘괜찮아. 평균정도는 봤겠지’ 하고 긍정적으로 다시 마음을 잡았다.
점심을 다 먹고, 학부모 대기실의 빈 자리에 가서 낮잠을 잤다.
옆에서 떠들어서 잠을 잘 수는 없었지만, 어느정도의 휴식은 취할 수 있었다.
수학 시간이 되자, 난 대기실로 이동했다.
전컴지원자 240명을 두 강의실에 나눴는데, 그 중에 여자는 4명밖에 없었다.
공대의 암울함이 절실하게 느껴졌다. 그 암울함을 더하는 것은, 나의 면접 순번이었다.
뒤에서 4번째였다.
1시부터 6시가 다 될 때까지 기다린 것 같다.
1시간 정도 기다리다 못해 옆 친구와 이야기를 나눴다.
옆 친구는 강남대성학원 출신이었고,
우리는 통하는 것이 많아서 재밌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얘기를 하면서 수학 기출문제를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그러면서 시간은 지나갔다.
내 차례가 왔다.
너무 오래 기다려서 지칠대로 지쳐있었지만 정신을 다시 가다듬었다.
시험장으로 가서 문제지를 받자마자 문제를 풀어나갔다.
1-1과 1-2는 익숙한 유형의 문제라서 쉽게 풀 수 있었다.
2번 문제는 작은 문제가 4번까지 있었는데, 상당히 어려웠다.
원 안에서 작은 원이 도는 문제였는데, 상당히 어려웠다.
2-1은 그 자취가 (cos^3x, sin^3x)인 것을 증명하라는 것이었다.
3x의 각으로 도는 것까지는 구했는데, 그 이상은 더 이상 어떻게 접근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10분이 지났음을 알리는 소리가 났다.
아..떨어지고 마는 것인가. 이대로는 안되는데.
2-1은 그냥 넘겨버렸다. 2-2부터 봤다.
곡선의 개형을 그리라는 문제였는데, 고등학교 1학년 때 얼핏 본것 같아서 생각나는 대로 그렸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것은 정답이었다. 2-3과 2-4는 대성학원 수학 조두식 선생님께서 한번 풀어주셨던 문제였다.
쉽게 풀 수 있었다. 그렇게 2-1을 풀지 못한 채 면접실로 향했다.
역시 빠른 속도로 내가 푼 문제를 설명을 했다.
교수님은 2-1을 다시한번 풀어보라고 하셨고, 1-1과 1-2에서 틀린 부분이 있다고 하셨다.
그 부분 외에서는 만족하게 설명한 듯 했다.
하지만 난 끝까지 그 못풀거나 틀린 부분의 답을 찾지 못했고, 제한시간이 다 돼서 나가야만 했다.
만족할 정도로 면접을 보진 못해서 마음이 찝찝하긴 했지만, 그래도 ‘평균정도는 봤겠지’ 하고 긍정적으로 생각을 했다.
오르비에 가서 사람들의 글을 읽어보니, 거의 다 상황이 나와 마찬가지였다.
2-1을 푼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시험 문제가 어려웠던 것이다.
내 점수가 165.94였는데, 이는 1배수 컷보다 약간 위의 점수로 추정된다.
면접을 중간 이상만 한다면 합격을 기대할만한 점수였다.
잘만 하면 합격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2월 2일. 서울대 발표날.
성당 사람들과 같이 피정의 집에 있었기 때문에, 핸드폰 사용은 금지되어 있었다.
저녁 5시 30분쯤, 몰래 아버지께 문자를 보내서 결과를 여쭤보았다.
30분이 지나도 답장이 오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있어도 온통 그 생각 뿐이었다.
떨어져서 전화가 안오는 걸까.
정말 떨어지고 만 것일까...면접 준비좀 열심히 할걸.
아버지는 얼마나 상심하실까.
그 30분간은 나에게 100만년처럼 느껴졌다.
100만년이 막 지났을 즈음,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어~ 축하해요~서울대생~"
아버지의 기쁨에 찬 목소리였다.
난 확실하냐며 아버지께 재차 여쭤봤고, 아버지께서는 확언의 대답을 해 주셨다.
너무 기뻤다. 날아갈듯이 기뻤다.
성당에 있는, 같은 고등학교 후배와 껴안고 합격의 기쁨을 나눴다.
하지만 그곳은 피정의 집이기 때문에, 남들 다 보이는 곳에서 소리를 지를 수도 없는 일.
합격의 기쁨은 잠시, 다시 조용해질 수밖에 없었다.
난 속에서 터져나오는 환호성을 억제하기에 바빴다.
3월 9일의 재수일기와 같은 구절로 글을 마무리하련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생이여"
출처-공신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