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로 기병은 일반 보병보다 몇 배의 힘을 가집니다. 예로부터 기병 10기는 보병 100명을 상대한다고 셈을 하곤 했습니다.(병법서 육도 참고)
그래서 일반 보병보다 더 높은 대우를 받곤 했습니다.
1. 몽골 기병
최강 기병을 뽑으라면 역시 몽골 기병을 뽑을 수 있습니다. 몽골 기병의 기동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매일 80km를 갈 수 있었던 몽골 기병에 비해 유럽의 기병들은 단순 행군만 해서도 40km도 가지 못했습니다.
키만 큰 유럽의 말들과 비교하면 몽골 말은 왜소하면서 튼튼하고 빠릅니다. 피부도 두텁고 턹은 굵으며 참을성도 강해 영하 40도의 혹한도 견뎌 냅니다.
또한 몽골인들은 그 민족 특성상 대부분의 병사들이 말을 잘 타고 활 솜씨에도 일가견을 보입니다.
특히 파르티안 샷이라고 하는 이 샷은 적을 유인하면서 등을 돌리거나 말에 매달려 화살을 쏘는 신기에 가까운 기술을 썼습니다.
기병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동성과 화력을 갖춘 몽골 기병은 명실공히 역사상 최강의 기병입니다.
▲ 상상도
2. 고구려 개마무사
삼국시대에도 고구려, 가야에 개마무사라고 불리는 강력한 중장기병이 존재했습니다. 이들은 온 몸에 총 70kg에 달하는 중장비로 무장하였습니다.
유목 민족의 후예로 일찍부터 기마병을 운용했던 고구려로써는 주변에 산재하여 자신들에게 복종하지않는 또다른 유목 민족들의 경기병에 대한 효과적인 대비책으로 영토였던 요동 지역에서 생산되었던 많은 양의 우수한 철을 바탕으로 자연적으로 중장기병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의 경우 서양이나 가야의 개마무사와는 다르게 가죽 갑옷 위에 사각 모양의 철조각을 연달아 덧씌운 판갑을 써서 어느 정도의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었고, 말 역시 판갑으로 된 덮개를 씌워 돌격시 적의 화살이나 투석에 의한 부상을 막아주었습니다.
무기로는 대개 장창 혹은 화극으로 주된 무장을 하고 보조 무장으로 환두대도와 단검, 그리고 던지는 용도로 수리검 등으로 알려진 형태의 작은 단검 등을 소지하였으며 유목 민족의 후예였던만큼 말 위에서 사용하기 위해 단궁이라는 개조된 활도 썼습니다.
이 개마무사는 광개토왕의 대외 팽창 정책의 주력이 되어 강력하고 거대한 제국의 건설을 가능하게 한 최강 기병 중 하나입니다.
3. 후사르
1503년~1775년에 존속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의 정예 기병부대입니다.
독특한 장식과 전장에서의 활약상으로 인해 후세에 길이 회자되는 기병 가운데 하나입니다. 파이크 방진을 붕괴하기 위해 5m의 대형 랜스와 날개 장식을 달고 있는데 서유럽과 동유럽의 특징이 혼합된 독특한 양식의 기병이었습니다.
스웨덴, 오스만 제국, 합스부르크 왕조, 모스크바 대공국과의 전쟁에서 대활약했습니다.
1514년 9월 8일 폴란드와 러시아가 겨룬 오르샤 전투에서는 1만에서 3만여명의 기병대가 약 8만명의 러시아군 중 1만명에서 3만여명을 전사시키고 5천여명을 포로로 사로잡은 적도 있습니다.
특히 1605년 스웨덴과의 키르홀름 전투에서는 12,000명의 스웨덴군을 2,500명의 윙드 후사르가 돌격으로 스웨덴군의 전열을 패배시킨 적도 있습니다.
이 전투에서 스웨덴군은 대략 60%~80%가 전사했습니다. 말 그대로 학살.
그 밖에 수 많은 전투에서 활약했으며 이 때문에 스웨덴은 윙드 후사르와 평지에서의 전투는 최대한 피했습니다.
그렇게 윙드 후사르는 폴란드 지배자로 유럽 전역에 그 이름을 널리 알렸으며, 우크라이나 헤트만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이끈 코사크 대봉기 당시 있었던 1651년의 베레스테츠코 전투에서는 14만의 코사크-타타르 연합군이 괴멸했습니다.
이 때 코사크-타타르 연합군의 피해는 전사 3만~7만. 그런데 폴란드 측의 피해는 700명 이였습니다.
4. 울란
중세 기사나 윙드 후사르의 뒤를 이은 창기병입니다. 폴란드와 접경을 이루며 투쟁을 벌였던 타타르 족나 터키에서 들어온 "용맹한 전사"를 의미하는 "오을란(oglan)"이라는 단어가 어원이라는 것이 정설이며, 체구가 작아도 발이 빠른 군마를 타고 갑옷은 입지 않고 차프카를 쓰고 대형 기병창으로 무장하고 돌진하는 병종이었습니다.
폴란드 분할 후 각국에서 용병으로 활약하면서 용맹성과 효용을 알렸고, 나폴레옹이 폴란드 독립을
약속하며 폴란드인 창기병 연대를 육성한 것이
대활약하면서 나폴레옹의 프랑스 대육군뿐 아니라
오스트리아나 프로이센등 폴란드를 분할한 각국도 이에 대항하여 폴란드인으로 구성된 울란 연대를 창설했으며, 나폴레옹 전쟁 이후 영국등 여러 나라로 확대, 전 유럽에 걸쳐 창기병을 부활시킵니다.
기본적인 역할은 아군의 포병/보병을 치러 들어오는 적 기병에 대한 요격이며, 검기병에 대해 우세한 창의 길이를 활용하여 정면에서 분쇄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나폴레옹의 폴란드 울란의 경우 정면 대결이라면 2배의 드라군이나 후사르, 흉갑기병과 대등한 전력을 과시했고, 워털루 전투에서는 영국 중기병대를 괴멸시키는 위용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5. 실라흐타르
무라트 1세 때 창설된 오스만 제국의 정규 기병대로
오스만 제국의 정예 보병 군단인 예니체리와 비교할만한 오스만 제국의 주력 기병 군단 시파히에서도 최정예 기병을 추스려 만든 실라흐타르입니다.
초기 모집 방식은 예니체리와 동일했습니다.
즉, 데브시르메 제도를 통해 점령지의 기독교 가정에서 남자 아이들을 징집해 25세까지 훈련시키고, 그 중 가장 성적이 좋은 자는 제국의 고위 관료로, 그 다음은 이 '카프쿨루 시파히'로, 나머지는 예니체리로 보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최정예 보병으로 알고 있는 예니체리보다
기본 베이스로 높은 무력을 지녔다는 것입니다.
카프쿨루 시파히는 총 6개 부대로 나누어 편성되어 있습니다. 이 가운데 실라흐타르는 레인저같은 특공대로, 오스만 제국군 중 가장 뛰어난 전사만이
이 부대에 속할 수 있었고, 다른 시파히들과는 달리 일반 병사들도 뛰어난 무술을 가지고 전공을 세웠다면 이 부대에 포함될 수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실적만 있으면 올라갈 수 있는 위치인 것.
단, 이 부대에 속하려면 어지간한 전공가지고는 택도 없었습니다.
또한 예니체리를 비롯한 보병들도 이 부대로 전입이 가능했는데 그를 위해서는 자살 임무를 수행하고 살아남으라는 말도 안되는 조건이 붙었습니다.
하지만 일단 전입하면 막대한 부와 명성을 누릴 수 있게 되기에 자살 임무 지원자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 부대의 지휘관인 실라흐타르 아아는 황제의 개인 무술 스승 겸 보좌관으로도 활동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