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용산구에 위치한 백범김구기념관은 독립운동가인 백범 김구 선생을 기리고자 건립한 곳이다.
이 곳에는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아주 작은 물건이 있다.
바로 김구 선생이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품고 있던 회중 시계이다.
겉보기엔 그저 평범해 보이는 시계에는 과연 어떤 사연이 숨어있는 것일까.
백범김구기념관 전시실 한 켠에 나란히 놓어있는 낡은 회중시계 2개.
회중시계는 양복주머니에 넣고 휴대하는 소형 시계다. 조선 말 서구 문물이 유입되면서 유행하기 시작한 회중시계.
당시 신지식인이라면 회중시계 하나쯤 갖는 것은 큰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회중시계 중 하나는1972년에 이미 보물로 지정됐고, 또 하나는 2009년에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특별한 가치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것이면서 동시에 두 사람의 것이기도 한 회중시계.
대체 이 시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해 홍구공원에서 폭탄이 터졌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공원에서 당당하게 일본군에게 붙잡힌 이는 바로 윤봉길.
그의 나이 스물다섯이었다. 윤봉길 의사의 유품으로 남은 회중시계. 사실 이 시계는 김구 선생의 것이었다.
김구 선생과 윤봉길 의사가 서로 맞바꾼 회중시계 이야기는 <백범일지>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선생님, 어제 선서식 후에 6원을 주고 산 시계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니 저하고 바꿉시다. 제 시계는 앞으로 한 시간 밖에 쓸 데가 없으니까요.”
홍구공원으로 떠나기 직전 김구 선생과 윤봉길 의사의 마지막 대화였다.
그리고 맞바꾼 회중시계.
나라를 위한 마음 하나로 서로를 굳게 믿었던 그들.
윤봉길 의사가 시계를 산 이유도 분초를 정확히 따져 거사를 실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윤봉길 의사의 유품이면서 동시에 김구 선생의 유품이기도 한 회중시계. 여기엔 두 애국자의 가슴 먹먹한 사연이 담겨 있다.
녹음이 짙게 드리운 효창공원.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도심 속 쉼터다. 여기에 우리나라 독립의 넋이 고고하게 잠들어 있다.
바로 백범 김구 선생과 윤봉길 의사.
1949년 6월 경교장에서 김구 선생이 서거했다.
윤봉길 의사가 독립을 염원하며 스물다섯 생을 마친지 꼬박 17년 만이었다.
그가 마지막까지 품고 있었던 물건 하나.
바로 윤봉길 의사와 맞바꾼 회중시계였다.
광복 직후 김구 선생은 윤봉길 의사 생가를 찾아 그와 맞바꾼 시계를 보여드리며 고개 숙여 인사했다.
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윤봉길 의사의 어머니.
김구 선생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회중시계를 도로 품에 넣었다.
그리고 생애 마지막 날까지 늘 곁에 두었던 시계
이 시계엔 아들을 나라에 바친 어머니의 아픔과 그것을 지켜보는 김구 선생의 미안함이 함께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조국의 독립을 꿈꾸었던 두 마음.
그리고 하나의 시계.
그 고귀한 뜻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