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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l Smith - Just the two of us.swf
박지성은 1981년 2월 25일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났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부모의 태몽은 ‘용꿈’이었다지만 정작 산고 끝에 태어난 건 작고 허약한 사내 아이였다. 자라면서 다섯 번이나 경기를 일으켜 부모를 놀라게 했을 정도로 몸이 약했던 소년은 늘 부모의 근심거리였다. 결국 부모는 ‘하나만이라도 잘 키우자’고 뜻을 모은 뒤 아이를 더 갖기보다는 이미 낳은 외아들에게 온갖 정성을 쏟기로 다짐한다.
조용하고 숫기 없는 아이로만 알던 박지성이었지만 유독 공을 찰 때만큼은 달랐다. 작은 덩치에 조용한 성격은 여전했지만 공만 잡으면 눈빛이 달라졌다. 남들이 볼 때만 그런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다른 일에는 자신이 없던 어린 지성은 공을 잡고 다른 아이들의 틈을 요리조리 빠져나가 슛을 날릴 때만큼은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단다.
축구는 하면 할수록 빠져드는 놀이였다. 점점 축구가 좋아지는 걸 느꼈고, 좋아하면 할수록 실력도 늘었다. 그러다보니 이제 골목에서 공 차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박지성이 부모 앞에서 폭탄 선언을 한 건 열 살이던 초등학교 3학년 때다. 어느 날, 저녁상이 차려진 자리에서 부모님을 향해 외쳤다. “축구선수가 되고 싶습니다”.
박지성의 부모는 놀랍고 당황스러웠다. 하나뿐인 아들이 축구를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몸이 약한 아이에게 고된 훈련과 치열한 선수 생활은 너무 힘든 길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아들이 공무원이 되어 평범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기를 바랐던 부모는 난데없이 저녁 밥을 먹다말고 ‘축구선수가 되고 싶다’고 선언한 아들의 결연한 눈빛에 쉽게 고개를 끄덕여 답할 수 없었다.
“한번 시작하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네 입으로 그만두겠다는 말은 하지 말아라.” 그 말 덕분인지, 박지성은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축구를 그만두고 싶다’는 말을 입에 올려본 적이 없었다. 아들의 책임감 있는 모습에 아버지 박성종씨는 직장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아들 뒷바라지에 나섰다.
박지성이 다니던 산남초등학교는 그가 축구부에 들어간 지 겨우 1년 만에 축구부 해체를 결정하게 된다. 갑작스런 축구부 해체는 어린 박지성에게 큰 좌절로 다가왔다. 그러나 축구부는 해체됐지만, 공차기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겨울 방학내내 텅 빈 학교 운동장에서 홀로 공을 찼다. 공을 차는 순간이 가장 행복한 건 축구부의 존재와는 무관한 ‘본능’ 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산남초등학교 축구부의 이상영 감독이 손을 내밀었다. 4학년 중에 ‘내가 공을 좀 차는 축에 속했다’고 술회한 박지성의 말처럼 이 감독에게도 박지성은 꼭 필요한 선수였던 것이다. “아직도 축구선수가 되고 싶으냐”는 이 감독의 물음에 깊이 생각할 틈도 없이 고개를 끄덕인 박지성은 이 감독과 함께 인근 세류초등학교 축구부로 적을 옮겼다.
새 학교인 세류초등학교는 집에서 버스로 30분 거리였다. 아직 어린 나이였던 박지성은 고된 훈련과 통학에 지쳐 귀가 뒤 곧장 녹초가 돼 쓰러져 잠들기 일쑤였다. 부모의 안타까운 조바심 속에도 포기를 모르던 박지성은 피로에 허덕이며 버틴 6개월이 지나자 학교 기숙사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고 약간의 여유를 얻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때부터 축구에 더욱 집중할 수 있게 된 박지성은 본격적으로 실력을 키워나가기 시작한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6학년이 된 박지성은 등번호 7번을 달고 팀 내 에이스 로 활약했다. 여전히 어린 나이였지만 어느덧 선수 경력 4년 차가 된 박지성은 주장 완장까지 차고 나니 책임감과 자부심으로 축구에 더욱 몰입하기 시작했다.
세류초등학교는 지역 내에서 이른바 ‘축구 명문 학교’로 알려지기는 했어도 아직 전국 대회에서 단 한 번도 수상권에 올라본 적이 없는 팀이었다. 하지만 ‘캡틴 지성’의 활약은 눈부셨고, 덕분에 세류초등학교는 1992년 금석배 전국초등학교대회에서 사상 첫 전국 대회 준우승 을 차지하게 된다. 물론, 준수한 기량으로 팀 준우승의 일등공신이 된 박지성은 우수선수상을 수상 하며 미래의 가능성을 공인받는다. 1년 내내 팀을 성공적으로 이끈 박지성은 그 해 말 수많은 국가대표 선수들을 배출하며 ‘스타 등용문’으로 알려진 ‘차범근 어린이 축구상’ 까지 받는다. 그러나 이때 받은 차범근 축구상은 박지성에게 단순한 ‘칭찬’의 의미 이상이었다. 박지성은 훗날 “가장 잊을 수 없는 상이다. 스타(차범근)를 만난다는 생각에 너무 떨렸다”며 당시의 소감을 회고한 적 있다.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박지성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차범근 축구상을 받은 뒤 수원의 축구 명문수성중학교에서 입단 제의가 들어왔지만, 부모님은 안용중학교로 진학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고민하던 박지성은 부모님의 뜻에 따라 안용중학교로 진학 했다. 이때 등번호 13번을 달고 뛰기 시작한 박지성은 초등학교 시절과 마찬가지로 ‘덩치는 작았지만 순발력이 뛰어난’ 자신의 장점을 십분 발휘했다. 공격형 미드필더에 처진 공격수 역할까지 소화하며 팀을 이끈 박지성은 약팀으로 분류되던 안용중학교를 도내 정상권 팀으로 변모시켰다.
성공적인 중학 시절을 마친 뒤, 박지성은 수원공고에 진학했다. 축구 명문이 아닌 수원공고를 택한 건 막 프로 선수 생활을 마치고 지도자로 나선 이학종 감독 때문이었다. 국가대표팀을 거쳐 J리그 생활도 경험한 선수가 은퇴하자마자 고등학교 감독으로 부임하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이 선택은 박지성의 축구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주관이 뚜렷했습니다. 오직 축구공만 가지고 놀았어요. 축구선수로 성공하겠다는 각오가 대단했죠”
- 수원공고 이학종 감독
고등학생치고는 왜소한 체격이 기존 지도자들의 눈에는 맞지 않다는 주위의 탐탁치 않은 시선에도 불구하고 박지성을 영입해 그의 단점을 극복 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덕분에 박지성은 수원공고 진학 이후 1년 가까이 기술훈련을 배제한 채 체력과 작은 체격을 보완하는 훈련에 중점적으로 매달렸다. 동시에 학원축구에서 소홀히 여기기 쉬운 기본기를 닦는 훈련에도 매진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정평이 나 있던 박지성의 ‘융통성 없는’ 성실함은 그의 단점을 쇄신하겠다는 이 감독의 목표를 생각보다 빠르게 달성시켜주었다. 단순하면서도 지루한 기본기 훈련을 단 하루도 거르지 않았던 박지성의 성실함은 이후 그가 유럽 무대에 진출한 뒤에도 성공적으로 적응하고, 팀에 안착할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왜소한 체격은 여전히 그의 약점으로 지목됐다. 보다 못한 박지성의 아버지는 아들의 몸집을 불리기 위해 방방곡곡 돌아다니며 개구리를 잡아 즙을 내 먹였다. 이처럼 ‘개구리 포획 작전’에 나선 가족들의 노력 덕일까. 박지성의 체격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입학할 무렵, 158cm에 불과했던 키가 2학년이 되자 170cm를 넘어선 것이다.
“이학종 감독님과 함께 훈련하면서 축구가 몸이 아닌 머리로 하는 종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 박지성
1년 간의 체력 훈련과 향상된 체격 조건 덕에 2학년부터는 자연스럽게 기술훈련에 힘을 쏟게 됐다. 현역에서 은퇴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학종 감독은 선수들과 직접 몸을 부딪히며 연습 경기에 나섰다. 박지성은 이 과정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고 덕분에 상대의 움직임을 정확히 예측하고 수비수를 피해 절묘한 패스를 찔러 넣어주는 등 보다 다양한 플레이에 능숙한 선수로 성장했다. 6개월 만에 박지성이 주전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를 꿰찬 것은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1998년 겨울,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박지성에게는 그 어느 때 보다 짙은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K-리그 진출을 원했던 박지성에게 어떤 프로 구단도 손짓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수원의 2군 팀에 들어가기 위해 테스트를 받았지만 통과하지 못했고, 서울과 지방의 대학 팀에서는 그의 왜소한 체격을 이유로 영입 거부 의사를 전해왔다. 그렇게 낙담하고 있을때, 희소식이 들려왔다. 신입생 10명을 뽑을 예정이던 명지대에서 이학종 감독에게 선수 자리 하나가 비었다는 연락을 전한 것이다. 소식을 들은 이 감독은 명지대를 이끌던 김희태 감독에게 박지성을 강력 추천하고 나섰다, “두고 보면 알겠지만 크게 될 선수입니다. 2년 뒤에는 제가 고마우실 지도 모릅니다”라는 것이 이학종 감독의 추천사였다. 김희태 감독은 이를 받아들였고 천신만고 끝에 박지성은 명지대 축구부의 신입생 10명 중 마지막 멤버로 팀에 합류한다.
‘내가 그렇게 못난 놈인가’ 라는 실망감에 자책도 했다. 하지만 열패감을 되뇌이기에 그는 아직 젊었고 이내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났다. 절치부심하며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 입증하겠다는 오기를 품은 박지성은 겨울 내내 뜨거운 담금질로 훈련을 거듭했다.
“올림픽 대표팀에 선발되면서부터 내 인생의 모든 행운이 시작됐다”
- 박지성
김 감독은 지구력은 물론이고 탄탄한 기초체력을 갖춘 박지성에게서 애초 생각보다 큰 가능성을 보게 된다. 그는 훗날 “지성이를 가르쳐 본 지도자는 모두 그를 좋아할 것”이라며 박지성을 높이 평가했다. 김 감독은 이어 18세의 박지성을 연습게임에서 계속 주전으로 출전시켰다. 고교 시절의 혹독하고 성실했던 훈련 덕에 단번에 주전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셈이다.
그 때 마침 허정무 감독이 이끌던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대표팀이 전지훈련 차 울산으로 내려왔다. 울산에서 조우하게 된 명지대 축구부와 올림픽 대표팀은 연습경기를 가지게 됐는데 이미 김희태 감독의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던 박지성은 올림픽 대표팀과의 연습경기에도 선발로 출전했다. 그리고 이 연습경기는 이후 박지성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는 계기가 됐다. 박지성은 왼쪽 윙백으로 출전해 평소 선망의 눈길로 바라만 보던 박진섭, 김도균 같은 선수들을 상대했다. 이 경기에서 박지성은 자신이 여전히 ‘체력’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부족한 점만 잔뜩 찾아낸 본인과는 달리 허정무 감독은 박지성의 뛰어난 체력과 경기를 지능적으로 풀어갈 줄 아는 능력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1999년 이른 봄, 박지성은 생각지도 않던 올림픽 대표팀 소집연락 을 받는다. 만 18세, 아직 청소년 대표로도 한번 뛰지 못했던 무명의 박지성은 그렇게 첫 태극마크를 가슴에 달게 된다.
올림픽 대표로 선발되며 승승장구하던 박지성에게 이듬해인 2000년 5월 또 다른 낭보가 찾아왔다. 박지성은 19세의 나이, 대학생의 신분으로는 처음으로 교토 퍼플상가에 입단해 J리그 진출을 이뤄냈다. 이미 그 때 박지성은 이천수, 최태욱과 함께 ‘한국 축구를 이끌 10대 기대주’ 로 손꼽히며 최연소 국가대표로 뽑혔고, 19세 이하 청소년 대표팀과 올림픽 대표팀, 그리고 국가 대표팀까지 모두 세 개의 대표팀에서 활약하며 국제경험을 차곡차곡 쌓아가던 참이었다. 이런 각 대표팀에서의 활약상이 반영된 덕분인지, 박지성은 당시로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교토와 1년 계약 을 맺었다. 당시 교토는 시즌 시작 전에 이미 3명의 브라질 용병들을 영입했지만, 강등권인 16위로 전반기 를 마친 상태였다. 그리고 팀을 위기에서 구해 줄 구세주로 박지성 을 선택했다.
“박지성 군은 가능성이 충분한 선수다. 두뇌 회전이 빠르고 운동량도 많다. 그리고 미드필드 어느 곳에서든 뛸 수 있다. 교토에서도 잘 해 주리라고 믿는다.”
- 기무라, 당시 교토 퍼플상가 강화부장
박지성에게 찾아온 성공이 모두 행운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의 말대로 공평하게 주어진 기회를 누군가는 잡고, 다른 누군가는 못 잡는 차이는 ‘준비 돼 있는지 여부’에 달려있는 것이다. 어쩌면 지독히도 융통성 없이 모든 것에 그저 성실함으로 임했던, ‘항상 준비하고’ 있었던 그였기에 이런 천재일우의 기회가 성공으로 연결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을 앞두고 가진 허정무 감독의 인터뷰는 이러한 대목을 재차 증명해준다. 당시 허 감독은 “지난해 박지성의 선발을 두고 명지대 김희태 감독과 친하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냐는 눈총을 받기도 했는데 그의 능력과 발전가능성을 한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고 밝혔다. 올림픽 팀의 다른 주전 선수들보다 2살이나 어린 박지성을 허정무 감독이 얼마나 믿고, 아꼈는지 알 수 있다. 허정무 감독은 박지성을 2000년 4월 국가대표로도 선발하며 두터운 신임을 드러냈다. 김희태 감독도 허정무 감독의 그런 결정을 “지성이는 하루하루가 다른 선수” 라는 말로 변호하고 나섰다. 허감독은 올림픽 팀에서 박지성을 수비형 미드필더와 왼쪽 윙백, 오른쪽 윙어 등 다양한 포지션 에서 활용했다. 그렇게 수비부터 공격까지, 여러 포지션에서 뛰어 본 경험은 박지성에게 큰 자산이 되었다.
“지성이를 가르쳐 본 지도자는 모두 그를 좋아할 것이다. 지성이는 하루하루가 다른 선수다”
- 김희태, 전 명지대학교 감독
170cm, 60kg이던 체격조건이 키는 6cm나 더 컸고, 몸무게도 10kg 이상 늘어나게 된 것이다. 볼을 다루는 센스와 넓은 시야에 체격까지 갖추게 된 그는 올림픽 팀의 수비형 미드필더로 주전자리를 굳히게 된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대표팀에는 김상식 외에 홍명보, 김도훈이 와일드카드로 뽑혀 합류했으며 이동국과 설기현, 이영표, 고종수까지 모두 포진해 있었다. 본선진출 과정도 순조로웠고, 멤버들 중 상당수가 이미 국가 대표팀에서 뛴 경험도 가지고 있어 사상 최초의 8강 진입이라는 목표는 충분히 달성 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올림픽팀은 출국 전 아프리카의 강호 나이지리아와 가진 두 차례의 평가전에서 모두 5-1의 스코어로 승리하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자, 현실은 달랐다. 본선 B조에 한국과 함께 배정된 스페인, 모로코, 칠레 중 한국은 가장 까다로운 상대인 스페인과 첫 경기를 치러야 했다. 또 호주에 도착하자마자 수비의 대들보로 팀을 이끌 것으로 기대됐던 홍명보가 허벅지 부상으로 아예 팀에서 빠지게 된 점은 크나큰 악재였다. 한국은 2승 1패의 좋은 성적을 거뒀음에도 불구하고 골 득실에서 밀려 8강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박지성이 시드니 올림픽에서 보여 준 활약은 수치상으로 두드러지는 것은 아니었다. 첫 경기인스페인전에선 팀 전체의 부진과 함께 제 실력을 보여주지 못하기도 했다. 그러나 모로코전과 칠레전에서는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며 중원을 장악하는 데 최고의 수훈갑으로 활약했다. 상대의 공격이 끊어지고, 우리의 공격이 시작되는 곳에는 어김없이 박지성이 있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은 박지성이 경험한 첫 국제대회였고, 19세로 아직 어렸던 그에게는 실패로 인한 절망감 보다는 좋은 교훈을 얻는 계기가 됐다. 박지성은 ‘무적함대’ 스페인과 직접 맞서 싸우며 유럽선수들의 기술과 힘 그리고 뛰어난 경기 조율능력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예 ‘이기지 못할 상대’로 생각되지도 않았다. 박지성은 한국이 충분한 경험만 얻는다면, 스페인도 이길 수 있을 거란 생각과 함께 희망을 가졌다. 그리고 2년 뒤인 2002년, 월드컵 4강에서 스페인을 만나 그 희망을 현실로 바꿨다.
박지성은 2001년 1월, 거스 히딩크 감독이 부임하고 가진 첫 번째 대표팀 소집 훈련부터 2002년 한일 월드컵 본선 무대까지 500여 일 간 줄곧 대표팀과 함께 했다. 이천수 합류 전까지 대표팀의 막내였던 박지성은 본선 개막 직전까지 거의 주목 받지 못하는 선수였다. 누구보다도 히딩크호에서 꾸준한 부름을 받고 있었지만, 그때까지 누구도 그의 진가를 알지 못했다. 박지성은 히딩크의 계획 안에 있었다.
“히딩크 감독님은 내 속에 숨어 있던 잠재력을 현실로 끌어내 주셨다”
- 박지성
히딩크 감독은 울산에서의 첫 번째 소집 훈련 당시 꽁꽁 얼어있던 강동 구장 그라운드에서 몸을 사리지 않고 상대의 볼을 향해 달려들던 박지성을 보고 “정신력 하나는 좋네” 라는 혼잣말을 던졌다. 박지성은 대표팀과 함께한 시간 동안 누구에게도 가차없이 불호령을 내리던 히딩크 감독이 자신에게만은 단 한번도 꾸중을 한 적이 없다고 회고한다.
박지성은 2001년 1월 24일 홍콩과의 칼스버그컵 경기를 시작으로 터키와의 월드컵 3/4위전 경기까지 히딩크 감독이 치른 총 38차례 A매치 중 26경기에 출전했고, 대부분이 풀타임 출전이었다. 특히 실전 대비 무대인2001년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3경기에 풀타임으로 출전한 몇 안 되는 선수이며. 2002년 북중미 골드컵대회에서도 발목 부상으로 쓰러지기 전까지 주전으로 뛰었다. 부상과 소속팀 문제로 차출이 되지 못한 시기를 제외하면 박지성은 처음부터 히딩크 감독에게 중용 받고 있었다. 히딩크 감독은 그의 자서전을 통해서도 일찌감치 박지성에 대해 기대를 걸고 있었음을 밝혔다. 2001년 4월 이집트에서 치른 LG컵을 통해 박지성은 히딩크 감독으로부터 확실한 눈도장을 받았다.
“완벽한(complete) 선수다. 처음엔 체격도 작고 약해 보여 그리 기대하지 않았는데, 회복력도 좋고 체력과 볼 감각까지 갖췄다. 수비 위주의 플레이에서 공격을 맡겼는데도 훌륭하게 소화해냈다. 경기 후 언론과 인터뷰에서도 박지성을 칭찬했다. 사실 나는 특정 선수를 칭찬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하지만 박지성은 오늘 활약뿐 아니라 그간 팀 훈련에서 성실하게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 거스 히딩크
히딩크 감독이 포백 전형을 시험하면서 그는 오른쪽 측면 미드필더 포지션을 맡아 새로운 가능성을 열기 시작했다. 그리고 본선 개막을 2개월 밖에 남겨두지 않았던 2002년 4월, 중국과의 평가전에서 박지성은 스리톱 공격진의 오른쪽 윙포워드로 선발 출전했다.
“박지성은 최전방과 미드필더 라인 사이에서 교묘하게 움직이며 상대를 괴롭힐 줄 아는 선수다”
- 거스 히딩크
모든 이들이 박지성의 진가를 알아보기 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히딩크 감독은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프랑스 등 유럽의 열강을 상대로 본선 조별리그 일정처럼 평가전을 마련했다. 2002년 5월 16일 스코틀랜드와의 경기에서 거둔 4-1 승리는 아직까지도 내용과 결과 면에서 가장 화려했던 경기로 기억된다. 박지성은 황선홍, 이천수와 스리톱으로 선발 출전했고, 상대 측면을 공략하며 대량 득점의 숨은 주역으로 활약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대회 개막을 5일 앞둔 5월 26일, 수원에서 치른 프랑스와의 경기가 하이라이트였다. 1년 전 0-5의 참패를 허용했던 프랑스를 상대로 한국은 180도 달라진 팀으로 거듭나 있었다. 그리고 박지성은 누구보다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프랑스는 전반 13분 만에 티에리 앙리의 크로스 패스를 다비트레제게가 밀어 넣으며 앞서갔지만 한국은 전반 26분과 전반 41분에 박지성과 설기현이 연속 골을 터트리며 리드를 잡았다. 결국 후반전에 크리스토프 뒤가리와 프랑크 르뵈프가 골을 터트려 프랑스가 3-2 승리를 거뒀지만, 이 날 경기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박지성의 득점 장면이었다. 중원에서 김남일이 길게 찔러준 패스를 페널티 박스 전방에서 이어받은 박지성은 마르셀 데사이와 릴리앙 튀랑이라는 유럽 최고의 수비수들 사이에서 깔끔하게 볼을 트래핑 한 뒤 파비앵 바르테스 골키퍼가 손 쓸 수 없는 골문 구석으로 득점을 성공 시켰다. 이젠 모두가 박지성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스물 한 살에 불과한 박지성이 너무 침착하게 골을 넣자 경기장은 완전히 뒤집어졌다”
-거스 히딩크
밀레니엄 특급’으로 불리던 이천수와 폭발적인 스피드를 자랑하는 차두리는 박지성의 백업 요원으로 밀려났고, 이동국은 대표팀 최종 엔트리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박지성은 황선홍, 설기현과 함께 대표팀의 주전 공격수로 월드컵 본선에 나섰고, 폴란드 전에서 역사적인 월드컵 첫 승을 함께 했다. 미국과의 조별리그 2차전 경기에서 부상으로 38분 만에 교체 당하며 큰 활약을 보이지 못했지만 16강 여부를 결정 짓는 ‘강호’ 포르투갈과의 일전을 통해 다시 한번 해결사로서의 면모를 발휘한다.
박지성은 전반 27분 현란한 중앙 돌파로 주앙 핀투의 거친 태클을 유도해 그를 퇴장시켰고, 후반 21분에는 이영표가 측면에서 특유의 드리블 돌파로 베투에게서 두 차례 경고를 이끌어내며 퇴장을 유도했다. 그리고 후반 25분, 왼쪽 측면에서 이어진 이영표의 크로스를 문전 우측에서 박지성이 가슴으로 깔끔하게 트래핑 했고, 수비수의 키를 넘기는 볼 터치에 이은 하프 발리슛으로 포르투갈의 골문을 열었다. 박지성의 이 골은 대회에서 가장 멋진 골 중 하나로 꼽혔고, 박지성과 히딩크의 포옹 장면 역시 잊을 수 없는 명장면으로 아직까지 축구팬들에게 생생히 기억되고 있다. 한국 축구 역사상 첫 16강은 박지성의 발 끝에서 쓰여졌고 많은 유럽 축구팬들도 박지성의 ‘기술력’에 대해 찬사를 보냈다.
박지성은 유럽 선수들과의 힘 겨루기와 기술 대결에서 전혀 뒤지지 않는 당찬 모습을 보였다. 당시 그는 21살에 불과했지만 그 누구보다 자신만만하게 경기에 임했다. 그리고 경기를 거듭할수록 눈에 띄게 발전하는 모습을 보였다. 히딩크 감독은 스페인과의 8강전 승부차기에 박지성을 다섯 명의 키커 중 하나로 내세웠고, 그는 침착하게 성공시켰다. 그리고 한국은 마침내 4강 신화의 위업을 썼다. 내친김에 결승 진출까지 노리던 한국은 독일과의 경기에서 결국 체력 소진과 부상 등으로 인한 전력 누수를 넘지 못했다. 발락의 골로 결국 독일이 브라질과 결승에서 맞붙게 됐고, 꿈만 같던 한국의 월드컵은 터키와의 3/4위전 경기를 통해 마무리됐다.
“지금도 나는 2002년 월드컵 결승전에서 브라질과 세계 최강을 다투었던 팀이 독일이 아닌 한국이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만큼 독일과의 경기는 아쉬웠고, 나의 자랑스러운 동료들은 잘 싸웠다”
-박지성
필드 플레이어 중 유일하게 한일 월드컵 본선 7경기를 다 소화한 것은 송종국이 유일하다. 하지만 박지성 역시 부상으로 미국전에 교체 아웃된 것을 제외하면 풀타임 기용되며 대표팀 부동의 공격수로 활약했다. 프랑스의 <르몽드>지는 대회를 결산하는 기사에서 “박지성이 세계 축구사에 그 이름을 남기게 됐다”고 전했다. 그리고 박지성은 이후 우리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유럽 축구계에 충격을 던지게 된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이 끝난 뒤 황선홍과 홍명보의 뒤를 이어 누가 국가 대표팀의 에이스가 될 것인지가 새로운 화두로 떠올랐다. 결론은 박지성이었다. 히딩크의 부름을 받아 PSV 에인트호벤으로 건너간 박지성은 한동안 어려운 시기를 겪기도 했으나, 04/05 시즌을 통해 유럽 축구의 중심부로 향했다. 2005년에 유럽 최고의 명문팀 중 하나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소속이 됐고 더욱 성장한 모습으로 2006년 독일 월드컵 본선 무대에 임했다. 그는 한국을 상대하는 모든 팀들의 집중 견제 대상이 됐다.
하지만 박지성의 해결사적 면모는 그대로였다. 토고와의 조별리그 1차전 경기에서 이천수의 프리킥 동점골상황에서 파울을 얻어낸 것이 박지성이며, 안정환의 결승골 상황에서 허슬 플레이로 수비수들을 달고 나가 공간을 열어준 것도 박지성이었다. 그리고 프랑스와의 2차전 경기에서 종료 직전에 극적인 동점골을 터트려 또 한번 ‘강팀 킬러 본능’을 발휘해 그 경기 최우수 선수로 선정됐다. 2010년 월드컵을 준비하는 한국 대표팀에서 박지성은 이름만으로도 상대 팀을 긴장시킬 수 있는 네임 밸류를 지닌 선수로 자리잡고 있다.
꿈만 같았던 2002년 한일 월드컵이 끝나고 거스 히딩크 감독은 모국 네덜란드의 명문클럽 PSV 에인트호벤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리고 히딩크 감독은 23명의 월드컵 영웅들 중 박지성을 자신의 동반자로 지목했다. 대회 기간 동안 인상적인 활약을 펼친 박지성은 사실 이미 유럽 클럽들의 관심을 받고 있었다. 2002년 말로 교토 퍼플 상가와의 계약이 끝나 이적에도 큰 무리가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박지성은 무명 시절 자신을 스카우트하고 지원해왔던 교토와의 인연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토 역시 계약 만료 시점이 다가오자 파격적인 제안을 해왔다. 박지성은 절충안을 찾았다. 2002시즌 잔여 기간을 교토에서 보내고 2002/2003시즌 후반기부터 에인트호벤에 합류하기로 한 것이다. 박지성은 다행히 2003년 1월 1일, 교토의 일왕배 대회 우승을 이끄는 골을 터트려 일본 생활에서 유종의 미를 거두며 네덜란드 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이영표도 2003년 1월에 박지성과 나란히 영입됐지만 그는 임대 후 완전 이적 옵션이 따라 붙었던 반면, 박지성은 3년 6개월의 장기 계약으로 입단과 함께 미래를 보장받았다.
오른쪽 무릎 부상으로 고생했던 박지성은 홈 팬들로부터 야유를 받을 정도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 네덜란드 에레디비지에 입성 초기부터 거듭 무릎 통증을 느끼던 박지성은 히딩크 감독의 배려로 후반 교체 투입 등으로 경기 감각을 익히는데 주력했다. 하지만 도저히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던 3월 초, 정밀 검사 결과 무릎 연골의 일부가 찢어진 것을 확인했고, 결국 수술대에 올랐다. 회복과 재활까지는 6주의 시간이 걸렸고, 다시 그라운드에 섰을 때는 마음처럼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거구의 네덜란드 수비수들을 상대로 한 돌파 시도는 번번히 가로막혔고, 동료 선수들을 향한 패스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으며, 슈팅은 시도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즌 일정이 마무리 된 것이 차라리 다행이었다. 에인트호벤은 02/03 시즌에 리그 우승을 차지했지만 박지성은 우승 행사에서 함께 웃을 수 없었다.
03/04 시즌을 준비하던 프리시즌 기간에 박지성은 조금씩 자신감을 회복하고 있었다. 잉글랜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컵’대회 중 토트넘 홋스퍼와 가진 경기에서는 2002년 잉글랜드전을 연상케하는 깔끔한 헤딩골을 터트렸고, 오랜만에 고국을 찾아 치른 2003년 피스컵 코리아 대회에서는 득점왕과 MVP를 차지하며 우승을 이끌었다. 친숙한 경기장과 팬들의 환호 속에 박지성은 다시 기운을 차린 듯 했고, 동료 선수들도 박지성에게 마음을 열었다. 박지성은 아르연 로번과 데니스 로메달이라는 걸출한 윙어들이 포진한 상황에서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 포지션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다. 03/04 시즌이 개막되고 박지성은 히딩크 감독으로부터 처진 공격수에 가까운 역할로 주전 기회를 부여 받았다. 이 위치에서 박지성은 매끄럽고 안정된 볼 배급과 전방에서부터 적극적인 수비 가담을 통해 공격 줄기의 시발점 역할을 수행했다.
2003년 8월 23일 빌렘II와의 홈 개막전에서는 02/03 시즌의 아쉬움을 만회하는 최고의 플레이를 펼쳤다. 아약스와 에인트호벤, 페예노르트의 3강 체제로 굳혀진 네덜란드 리그지만, 빌렘II는 02/03 시즌에 에인트호벤 원정에서 1점 차로 아쉽게 패배했고, 홈에서는 무승부를 이끌어냈을 정도로 쉽지 않은 팀이었다. 하지만 에인트호벤은 이날 경기에서 6-1 대승을 거뒀다. 박지성은 이 과정에서 32분 로메달의 골을 매끈한 스루 패스로 도왔고, 39분에는 오른쪽 측면에서 날카로운 크로스 패스로 케즈만의 헤딩슛을 도왔다. 그리고 63분에는 직접 자신감 있는 중앙 돌파에 이은 슈팅으로 자신의 네덜란드 에레디비지에 무대 첫 골을 터트렸다.
하지만 박지성이 다시 골맛을 보기까지는 석달이 걸렸다. 박지성의 플레이는 홈 팬들의 성에 차지 못한 모습이었다. 02/03 시즌에는 부상과 컨디션 조절 등으로 풀타임 경기를 거의 소화하지 못했기에 실질적으로는 03/04 시즌이 그에게는 네덜란드 리그와 정면으로 맞닥뜨린 첫 시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즌 초 경기를 치르면서 박지성의 패스와 돌파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비로소 적응기를 거치며, 고민을 하고 있던 시간이었지만 에인트호벤 팬들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선발 명단 선수를 소개하는 시간에 박지성의 이름이 나오면 홈 팬들의 야유가 쏟아지기에 이르렀다. 경기 도중에도 박지성이 보이는 실수에 홈 팬들은 더욱 엄격한 자세를 취했다. 그라운드 위에서뿐 아니라 밖에서도 압박이 가해지자 박지성은 몸과 마음을 가눌 곳이 없었다. ‘언젠가 저 야유 소리를 나를 향한 환호로 바꾸어 놓겠다’는 다짐을 계속해도 그라운드를 빠져나올 때면 눈물이 맺혔다.
한편 박지성을 향한 거듭된 야유에 히딩크 감독은 박지성 지키기에 나섰다. 홈에서는 후반 교체 멤버로 투입시키고, 원정에 주로 선발로 출전 시키며 그의 심적 부담을 덜어주려 했다. 그리고 이런 히딩크 감독의 판단은 적중했다. 감각을 찾기 시작한 박지성은 2003년 11월 1일 NAC 브레다 원정에서 홀로 2골을 터트렸다. 박지성의 경기력은 점차 나아지고 있었다. 2004년 1월, 에인트호벤은 전반기 일정을 마치고 터키 전훈에 나섰다. 히딩크 감독은 박지성을 따로 불러 면담을 가졌다. 그는 J리그 3개 구단이 박지성 영입을 제의했으나 자신이 이를 모두 거절했다고 전했다. “넌 아직 포기하고 일본으로 돌아갈 때가 아니다. 틀림없이 PSV 에인트호벤에서 성공할 거야. 난 내 눈을 믿고 널 믿는다.” 부모님을 비롯한 주변인들이 박지성을 보는 시선은 안쓰러움 그 자체였다. ‘돌아가고 싶다면 돌아가도 좋다.’ 누구도 박지성에게 고된 유럽 무대 도전을 계속 강요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박지성 역시 홈 팬들에게 야유를 듣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가슴아파할 부모님에 대한 미안한 마음 을 외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박지성은 도전을 택했다.
“전 제가 가진 능력의 절반도 아직 보여주지 못했어요. 일단 최선을 다해보고 싶어요. 내가 가진 기량을 전부 보여주었는데도 팬들이 야유를 하고 그라운드 위에서 통하지 않는다고 느끼면 그때는 돌아갈 수 있어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난 여기서 성공할 자신이 있어요. 반드시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해요”
-박지성
2004년 1월, 한 달 간의 휴식이 끝나고 박지성은 마침내 최고의 컨디션을 회복했다. 2002년에 세계를 놀라게 했던 치명적인 몸놀림이 네덜란드 무대 위에서 발현되기 시작됐다. 때마침 로번이 부상으로 자리를 비우면서 박지성에게 홈과 원정을 가리지 않고 기회가 주어지기 시작했다. 2월 28일 UEFA컵 페루지아전에서 인상적인 플레이를 펼치며 팬들이 야유를 거두게 만든 박지성은 3월 7일 위트레흐트 원정에서 교체 투입 10분 만에 시즌 4호 골을 기록했다. 이후 연이어 선발 출전 기회를 잡은 박지성은 4월 발바이크전과 5월 덴 하그전에서 골을 추가해 총 6득점으로 03/04 시즌을 마쳤다. 단순히 득점뿐 아니라 에인트호벤의 승리 행진 속에 박지성의 기여도는 날로 커져갔다. 비록 리그 우승은 아약스에게 내줬지만 04/05 시즌에 대한 기대감을 들게 한 마무리였다.
그러나 에인트호벤은 우려 속에 04/05 시즌을 맞았다. 팀 공격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닌 케즈만과 로번이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첼시로 동반 이적했고, 덴마크 대표 윙어 로메달도 잉글랜드 찰턴으로 떠나면서 공격진에 큰 공백이 생겼다. 명장 히딩크 감독은 얀 페네호르 오프 헤셀링크를 전방 원톱으로 세우고, 미국 대표 윙어 다마커스 비즐리를 영입해 박지성과 함께 스리톱 공격진을 구성했다. 바르셀로나로부터 네덜란드 대표팀의 베테랑 미드필더 필립 코퀴도 영입해 안정감을 더했다. 팀의 에이스 마르크 판 보멀이 건재하고, 수비진에 이영표가 한창 물오른 플레이를 과시하고 있었으며, 브라질에서 센터백 알렉스와 골키퍼 에우렐류 고메스가 가세했다. 공수에 걸친 균형감에 있어서는 리그 우승에 실패한 03/04 시즌에 비해 한층 강화된 모습이었다.
그리고 박지성은 히딩크가 리빌딩한 새로운 에인트호벤의 중심이었다. 등번호7번의 박지성은 오른쪽 측면에 포진했지만 중앙과 좌우 측면을 넘나들며 공격을 전개했다. 특유의 매끄러운 패스 전개와 전진 압박에 수비 가담 능력도 뛰어났다. 이제는 현란한 드리블 기술까지 과감히 시도했다. 상대 수비의 허를 찌르며 공간으로 돌아나가는 특유의 ‘지성턴’으로 압박을 허물었고, 페널티 박스로 근접한 뒤에는 이전보다 한층 날카로운 슈팅으로 골망을 갈랐다. 박지성과 함께 에인트호벤의 공격을 이끈 네덜란드의 대표적인 미드필더 마르크 판 보멀 역시 박지성의 성장에 엄지손가락을 꺼내 들었다.
“이제 박지성이 볼을 잡으면 뭔가 해줄 것이라고 팀 둥료들이 기대를 하고 있다. 나 역시 지성과 호흡이 잘맞아 기쁘다. 나의 베스트 11을 꼽는다면 오른쪽은 박지성이다”
- 마르크 판 보멀
2004년 8월 21일 AZ와의 홈 경기에서 시즌 첫 골을 터트린 박지성은 04/05 시즌에 리그에서만 28경기에 출전해 7골을 넣었고, 암스텔컵에서는 3경기에 나서 2골을 넣었다. 박지성은 빌렘II와의 결승전에서도 우승에 쐐기를 박는 골과 함께 대회 MVP에 선정됐다. 리그 우승과 FA컵 우승이라는 더블로 박지성은 이제 네덜란드 에레디비지에 최고의 선수 중 하나로 우뚝 섰다. 매 경기 나아지는 경기력 그리고 득점으로 박지성은 날이 갈수록 더해지는 자신감과 함께 성장했다. 어느새 에인트호벤 팬들에게서 박지성의 야유는 찾을 수 없었다. 에인트호벤 팬들은 평소 경기장에서 즐겨부르던 응원가인 영국 팝그룹 피그백(Pigbag)의 노래의 멜로디에 박지성의 이름을 붙여 그만을 위한 응원가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04/05 시즌의 진정한 하이라이트는 역시 UEFA 챔피언스리그의 4강 신화다. 히딩크와 박지성은 유럽 무대에서 또 한 번 세계를 놀라게 했다.
박지성은 레드스타 베오그라드와의 챔피언스리그 3차 예선전 첫 경기에서 골을 넣으며 32강 본선 진출에 기여했다. 잉글랜드의 아스널, 그리스의 파나시나이코스, 노르웨이의 로젠보리와 한 조에 속한 에인트호벤은 3승 1무 2패를 기록하며 아스널과 승점 동률로 2위를 차지해 16강 진출에 성공했다. 특히 아스널 원정에서 0-1 석패, 홈에서 1-1 무승부를 이루는 과정에서 박지성은 프리미어리그 선수들에게도 뒤지지 않는 체력과 기술을 과시해 호평을 받았다. 16강전과 8강전에서는 AS 모나코와 올림피크 리옹 등 프랑스 리그1 팀을 연이어 만났는데 이 4차례 경기에서 박지성은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특히 리옹 전에서는 코퀴의 골을 어시스트 하는 등 4강에 오르는 데 가장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쉴새 없는 움직임으로 공수 양면에 걸쳐 활약한 박지성의 플레이에 프랑스 방송 해설자들은 혀를 내둘렀다. “여러분 제가 공격에도 박, 미드필더에도 박, 수비에도 박 선수의 이름을 외치고 있는데 에인트호벤에 있는 박 선수는 한 명입니다! PSV에 마치 세 명의 박이 뛰고 있는 것 같군요.” 유럽 언론들은 박지성이 한 경기 동안 이동한 거리와 장소를 표로 만들어 게재하며 믿을 수 없는 활동력이라고 극찬했다. 2개의 심장, 3개의 폐를 지닌 선수라는 표현도 이때 생겨났다.
에인트호벤의 4강 진출은 2002년 한일 월드컵의 4강에 비견될 만한 파급을 낳았다. 히딩크와 박지성 그리고 이영표의 성공은 유럽 언론들로부터 또 다시 주목 받았다. 그리고 ‘우승후보’ AC 밀란과의 준결승전은 박지성을 네덜란드 리그 최고의 선수에서 유럽 최고의 선수 중 하나로 발돋움시켰다. 밀라노 원정으로 치른 1차전 경기에서 에인트호벤은 비록 전반 종료 직전과 후반 종료 직전에 집중력 저하를 보이며 안드리 셉첸코와 욘 달 토마손에게 각각 골을 허용해 0-2로 패했지만 내용 면에서는 대등한 경기를 펼쳤다는 호평을 받았다. 특히 중원에서 밀란의 공격을 끊어내고 공격을 전개하며 쉴새 없이 뛰어다닌 박지성의 플레이는 가장 돋보였다. 마지막 마무리 슈팅 하나만이 아쉬웠다. 박지성을 상대한 ‘투쟁심이라면 일가견이 있는’ 밀란의 미드필더 젠나로 가투소도 혀를 내둘렀다.
“등번호 7번 한국인 박지성이 신경 쓰였다. 줄곧 뛰고 있기 때문에 모기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여기서 쫓아버리면 그는 다른 곳에서 나타난다. 언제나 달리고 있고, 돌파력도 있으며 항상 위험한 존재다. 어디서 그런 체력을 손에 넣었는지 물어보고 싶을 정도다. 정말 좋은 선수인 것 같고, 이탈리아의 어느 팀에서도 통할 수 있을 것 같은 선수다. 게다가 그는 ‘헌신’이라는 말의 진짜 의미를 이해하고 있는 얼마 안 되는 선수라고 생각한다. 나와 비슷한 타입이기에 좋아하는 선수다”
- 젠나로 가투소
네덜란드의 축구영웅 요한 크루이프 역시 에인트호벤의 1차전 경기 패배에도 불구하고 홈에서 치를 2차전에서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박지성이 그 중심이 될 것이라고 지목했다. “2차전에서 기적이 일어난다면 그 주인공은 박지성이 될 것이다.”
그리고 필립스 스타디온에서 펼쳐진 밀란과의 2차전 경기. 박지성은 놀랍게도, 아니 그가 늘 그래왔듯이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기대를 져버리지 않았다. 왼쪽 측면에 배치된 박지성은 전방 공격수 페네호르 오프 헤셀링크와 2대1 패스를 주고 받으며 페널티 박스를 파고 들었고, 파올로 말디니와 알레산드로 네스타, 야프 스탐이 버티고 있던 밀란의 수비진에서 깔끔한 왼발 슛으로 골망을 흔들었다. 그리고 팬들 앞으로 달려가 그 어느 때보다 격정적인 골 뒤풀이를 펼쳤다. 에인트호벤은 당시 미드필드진에 가투소와 안드레아 피를로, 클라렌스 세도르프와 카카, 셉첸코 등이 포진한 강력한 밀란을 상대로 앞선 경기를 펼치며 3-1 승리를 거뒀지만 원정 경기 다득점 원칙에 의해 아쉽게 결승행 티켓을 놓치고 말았다. 결국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주인공은 박지성이었다. 박지성은 그 해 UEFA 올해의 선수 후보 에 올랐고, 발롱도르 후보자 에도 올랐으며, 챔피언스리그 베스트11에 선정됐다. 에인트호벤의 많은 선수들이 04/05 시즌의 활약을 바탕으로 유럽 빅리그로 떠났지만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최고 명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한 박지성이 그 중 단연 최고였다. 에인트호벤의 주장 코퀴는 박지성이 향후 더 큰 성공을 이룰 것이라고 보장했다.
“박지성은 다양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필드 어디에서나 신출귀몰하고 경기 내내 뛰는 것을 멈추는 법이 없다. 프리미어리그는 매우 빠르지만 지금까지 박지성은 그 속도를 따라잡는 것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것이야말로 박지성의 핵심이다. 멈추지 않는 선수. 박지성은 공에 대한 투쟁심이 매우 강하고, 1대1 상황에서도 능숙해 여러 가지 포지션에서 뛸 수 있다. 패싱력도 있고 태클도 잘하고 슈팅도 좋다. 그야말로 모든 능력을 겸비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박지성이 대성공을 거두리라고 믿는다. 그가 떠난 PSV 에인트호벤은 마치 1.5명의 선수를 잃은 것 같다”
-필립 코퀴
원본 (위 글은 원본의 요약 정리본)
http://www.sportalkorea.com/newsplus/view_sub.php?gisa_uniq=2011020117201604
http://www.sportalkorea.com/newsplus/view_sub.php?gisa_uniq=2011020209165718
http://www.sportalkorea.com/newsplus/view_sub.php?gisa_uniq=2011020209484218
http://www.sportalkorea.com/newsplus/view_sub.php?gisa_uniq=2011020210045918
마지막으로 추천 영상 : http://cafe.daum.net/WorldcupLove/6gZ2/225111
첫댓글 잘읽었습니다 정말 감동이에요 밀란하고 2차전은 절대 못잊음ㅠㅠ
우와왕~ ㅠ+_ㅠ
아...감동적인 글....ㅠㅠ 잘 읽었어요...^^
정말 발롱도르 후보는 ㅎㄷㄷ
박지성과 동시대에 살았다는 사실..ㅜㅜ
님 잘 읽었어요~ㅠㅜ뭉클하네요 또ㅜㅜ사랑합니당♥
아... 눈물난다... 수고 많으셨어요 잘 읽었습니다~
저도 왜케 지성이형글만 읽으면 뭉클한지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