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閔妃暗殺> ⑪-4
창덕궁에서 장호원까지, 민비의 도주경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윤효정(尹孝定)의 『風雲韓末秘史(풍운한말비사)』, 이선근(李瑄根)의 『韓末最近世史(한말최근세사)』 와 『한국현대사(1)』에 게재된 신석호(申奭鎬)의 「구식군인의 반란=임오군란」이란 제목의 논문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길을 밟았다.
창경궁을 피해나간 민비는, 왕궁에서 가까운 안국동 윤태준(尹泰駿)의 집에 몸을 숨겼다. 윤태준은 왕세자의 경호 직이다. 밤을 기다려 이 집을 나온 민비는 동쪽으로 나가 동대문을 나서서 북쪽인 정능 방면에서 일박했다. 이튿날, 민응식과 윤재익(尹濟翼)이 따른 일행은 한강 지류인 중랑천(中浪川)을 건너, 다시 동쪽으로 나아가 망우리 고개를 넘어, 한강본류로 향했다. 이 무렵 민비를 체포하기 위한 수사망은 서울전역으로 확대되고 있었으나, 일행이 도착한 한강선착장인 광나루에는 감시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여기에서, 배삯 흥정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가마 안에서 듣고 있던 민비는, 말없이 금반지를 빼서 지면에 떨어뜨렸다. 민응식이 이것을 주어서 뱃사공에게 건네고, 흥정은 금세 끝났다고 한다.
일행은 한강을 상류로 거슬러 올라, 팔당호 부근 두물머리에서 본류인 남한강으로 나아가 양평에서 상륙하고, 여기에서 일박했다. 이튿날 다시 상류로 올라가, 경기도 여주의 민영위(閔泳緯)의 집에 숨었다. 여기서 며칠을 지났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머지않아 남쪽인 충청북도 장호원에 있는 민응식의 집으로 가서, 마지막까지 여기를 은거 처로 했다.
1986년(소화61년) 12월, 나는 장호원을 찾았는데, 그 전에 도주 2일째인 민비가 건넜다는 중랑천으로 갔다.
민비는 정릉에서 중랑천으로 어떤 길을 통했는지 모르지만, 나는 경복궁 앞에서 차를 타고 동쪽으로 약 10km 쯤 달려, 중랑교에 서서 냇물을 바라봤다. 민비 시대에는, 이 부근 일대에 「숲이 욱어진 지역」으로 쓰여 있으나, 지금은 민가가 빽빽이 들어서, 천변 제방에 살풍경한 입목들이 보일뿐, 옛날의 숲을 생각할 수 있는 풍경은 아니다. 중랑천 수량은 적었으며, 넓은 강가 모래밭의 조약돌이 겨울 햇볕에 무디게 빛나고 있었다. 민비가 어떤 다리를 건넜는지도 불명이지만, 내가 선 중랑교에서 하류로 내려가면 다시 장안교(長安橋), 군자교(君子橋) 등이 있다. 민비가 숨어있던 장호원은,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국도3호선을 타고, 이천 도예 촌을 지나 약 120km쯤 되는, 경기도와 충청북도의 경계에 있는 읍의 이름이다. 인구는 약 5만이다. 상가가 즐비한 시가지 중심을 벗어나서, 녹색의 구능 지대를 지나, 작고 높은 언덕의 경사를 오르니, 벽돌로 지은 당당한 매괴(玫瑰) 천주교 성당이 나타난다. 매괴란 「장미꽃」을 말한다. 정면 입구를 향해서 오른쪽에, 이 성당의 창립자 카뮤⦁ 브이용 신부의 상이 서있다. 브이용 신부는 조선 이름을 임신부(任神父)라 하고, 1893년, 일청전쟁 발발 전년에 모국 프랑스로부터 조선으로 건너왔다. 인천에 상륙한 24세의 브이용 신부는 대지에 입 맞추고, 이 나라의 포교에 생애를 바칠 것을 하느님께 맹세했다고 한다.
브이용 신부는 민비가 숨어있던 집인 민응식의 집터를 사들여서, 거기에 자그마한 성당을 지었는데, 그것은 1896년(명치29년), 민비가 죽은 다음해였다. 성당이 현재의 위치에 재건된 것은 1930년(소화5년)이며, 옛날 위치에는 지금 매괴 여자중⦁고등학교가 있다.
언덕 위 성당 앞뜰에 서니, 눈앞의 낮은 지역은 아득히 먼 저쪽까지 편안하고 한가로운 풍경이 펼쳐져 있고, 뒤쪽은 “梅山(매산)”의 이름 그대로 매화나무가 많다는 수풀이다. 민비에게, 이곳은 절호의 은신처였을 것이다. 사람 눈을 피하는 민비가 집밖에 나가, 그녀의 생가에서 바라보는 것과도 비슷한 전원풍경을 즐겼다고 생각할 수는 없으나, 비책을 꾸미는 거실은 매화나무 숲에 둘러싸여, 바깥세계와는 완전히 차단되어 있었을 것이다.
조선교구 제8대 교구장 무텔 주교는, “무텔문서”라고 불리는 방대한 자료를 남기고 있다. 거기에 정리된 각지 신부들로부터의 서간(書簡) 중에, 브이용 신부의 프랑스어 편지 125통도 있으며, 그는 민비 암살에 분격한 조선 민중이 노상에서 일본인에게 폭행을 가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써 남기고 있다.
서울로 돌아오는 귀로, 나는 또다시 갔던 그 길을 되돌아 차로 달렸다. 이것은 민비가 청국 군 병사들이 가마의 앞뒤를 호위하고. 개선장군과 같이 창덕궁으로 귀환했던 그 길이다. 지금은 완전히 포장된 쾌적한 국도이지만, 당시에는 비가 오면 질퍽거리는 자갈길이어서, 민비의 가마도 때로는 크게 흔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마음에도 두지 않았을 것이다. 군란으로 민씨 일족의 많은 주요인물이 피살되었다. 그들 일족의 세력 만회를 서둘러야 하지만.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민비의 머리는 언제나 바쁘게 회전하고 있었다고 상상된다.
창덕궁에 들어간 민비는 50일 만에 임금과 대면했다. 고종은 감격한 나머지 말도 없이, 그의 생명의 샘이라고 부르고 싶은 왕비의 맑디맑은 눈동자를 다만 바라볼 뿐이었다. 이날부터 고종은 언제나 지기의 시야 안에 민비가 있기를 바랐다. 그녀가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 좋은 것이다. 그 이상 그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것은 유아가 온몸으로 엄마의 비호와 애정을 바라는 모습과 닮아 있었다. 민비는 본래부터 의지가 강하고, 머리회전이 빠른 여성이었지만, 왕으로부터 자기존재를 전 인격적으로 인정받음으로써, 그의 자세는 점점 의연(毅然)해 졌으며, 능력은 배가되고, 미모는 더욱 빛났을 것이다.
고종은 민비 앞에서, 허세를 부리는 어리석은 일은 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들어내 보이는 것은 한 살 위의 왕비에게 응석을 부리는 좋은 기분과 이어져 있었다. 고종이 기가 약하고, 결단력이 없는 것을 얼버무려 넘기지 않고 보일 때마다, 민비의 그에 대한 가없고 사랑스러운 마음은 더해질 뿐이다.
그러나 민비는. 부왕(夫王/남편인 왕)과의 재회의 기쁨에 마음을 놀리고 있지 만은 않았다. 30대의 성숙한 여체를 왕의 애무에 맡기고 있을 때도, 닫친 그녀의 눈꺼풀 뒤에는, 군란 이래 벽지에 숨어 사는 동족의 얼굴이 떠오르고, 누구를 어떤 자리에 앉혀야 할까 하는 궁리를 중단한 적이 없다. 이때 민비에게 무엇보다 급무는, 세도정치를 다시 부흥시키는 것이었다. 지금은 이최응도, 민겸호도, 민창호도 없다. 하지만 새삼스럽게, 그들의 비명에 간 죽음을 탄해서 무슨 소용이 있나. 살아남은 민씨 일족을 모으고, 다시 동족 가운데서 인재를 찾아내어, 하루라도 빨리 강력한 정치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또 민비에게는 일청 양국인과의 친선외교라든가, 그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대책을 세워야 하는 중대한 임무도 있었다. 외국인을 주빈으로 하는 연회석에 왕비가 모습을 보이는 관례는 없으나, 그만큼 왕이나 중신들과의 사전협의는 중요했다.
더욱이 민비는, 군란으로 황폐해진 청덕궁의 수리와 복원에도, 빈틈없는 지시를 내렸다. 왕궁은 왕의 권위의 상징이며, 또한 그녀의 생활의 배경이었다. 담당관리에게만 맡겨 두지는 않는 것이다.
이 시기, 창덕궁에 막 귀환한 민비는, 그녀의 성격과 실력을 그대로 나타내는 행위로 주위를 놀라게 했다. 민씨 일족 중에서 대물이고, 왕세자빈의 아버지인 민태호에게 사형을 선고한 것이다. 형식적인 재판조차 없이, 민비가 직접 선고한 것이다.
왕의 이름으로 민비의 생존을 발표하고, 이어서 왕궁으로의 귀환---이라는 협의의 자리에서, 민태호는 이에 반대했다. 일청 양국군이 주둔 중에 있고, 왕비의 죽음을 믿는 대중은 아직 복상중이며, 대원군 납치사건 이래 한층 민심은 소연해진 때에 재빠른 왕비생존발표는 시기상조라는 의견이었다. 민씨 일족의 유력자인 민태호가 민비에게 다른 뜻을 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으며, 도리어 타당한 의견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이것을 안 민비는 격노했다.
민비는 무슨 일이든지 간에, 그녀의 의견이나 바라는 바에 거슬리는 자를 용서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민비에 있어서, 그녀의 의지는 전부 무비판으로 존중되어야 했다. 대원군 납치사건을 알았을 때, 그녀의 기쁨은 어느 정도 였을까! 민비는 대원군이 없는 서울로 일각이도 빨리 돌아가자고, 감정을 고조시키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민태호의 시기 상조론은, 그 갑자기 나온 말을 꺾는 것이었다.
그래서 민비가 직접 사형선고를 하게 되었다. 이때는 그렇다고는 하나 민씨 일족의 읍소에 따라서, 민태호의 처형은 실시되지 않았지만-----.
다음에 정사는 아니고, 야사에 남아있는 이야기다.----.
장호원을 목표로 도주 중인 민비가 가마에 탄체로 강변에서 배를 기다리고 있을 때, 마을의 아낙들이 가까이에 왕비가 있는 줄도 모르고, 서울에서 전해지는 군란의 무서운 소식을 서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소동이 일어난 것도 왕비 탓”이라고, 민비의 보통을 넘는 사치나 그 일족의 전횡을 매도했다. 뒷날 왕궁에 돌아온 민비는 이 마을 아낙들을 잡아들이게 하여 극형에 처했다고 한다.
가령 이것이 지어낸 이야기라 해도, 그 당시 사람들의 “민비에 대한 이미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있다.
민비는 사랑과 미움(愛憎)이 다 같이 격렬한 여성이었다. 그녀에게 거슬리는 자는 용서 없이 엄벌로 임하지만, 동시에 자기에게 힘껏 애써주는 자들의 공에는 후하게 갚는 것이 보통이었다. 민비를 등에 업고 소란한 창덕궁에서 탈출한 홍계훈도, 그녀를 숨겨준 장호원의 민응식도. 또 밀서를 품에 지니고 서울의 왕이 계시는 곳으로 뛴 이용익도 다 같이 놀랍게 출세했다. 그러나 민비는 그들을 등용함에 있어서 능력이나 인격을 문제시 하지 않고, 다만 그녀에 대한 공헌도만을 헤아렸다. 뒷날 세 사람 모두에게 비운이 닥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