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기도와 성사(聖事)]
제17장 하느님의 말씀 듣기와 읽기 개인적으로 또는 공적인 자리에서 듣게 되는 하느님의 말씀을 경건하게 받아들이십시오. 강론을 들을 때에도 항상 공경하는 마음으로 주의 깊게 듣고 그것이 그대에게 유익한 것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당신 마음에 간직하셨던’(루카 2,51 참조) 성모님처럼 하느님의 말씀이 헛되이 땅에 버려지지 않게 그대의 마음속에 이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강론 말씀을 경청하듯이, 주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신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유익한 신심 서적을 늘 지니고 다니십시오. 성 보나벤투라, 제르손, 카르투시오회의 수사 디오니시오, 블로시우스, 그레나다, 스텔라, 아리아스, 피넬라, 다폰테, 예수의 성녀 데레사의 책들과 라우렌시오 스쿠폴리의 ≪영적 전투≫, 성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 성 예로니모의 ≪서간≫ 등을 매일 경건한 마음으로 읽고, 그것들을 마치 그 성인들이 천국으로 가는 길을 가르쳐 주고 용기를 주고자 천국에서 그대에게 보내는 편지라고 여기십시오.
또한 그리스도교 생활의 본보기라고 할 수 있는 성인전을 애독하십시오. 그대가 놓인 상황에 따라 성인들의 언행을 본받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성인들의 언행을 완전히 따를 수는 없겠지만 어느 정도는 그대로 따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첫 은수자인 이집트의 바오로 성인을 본받아 영적 은둔을 할 수 있고,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절대적 청빈을 본받아 청빈을 실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실생활에 확실한 길잡이가 되는 성인전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의 성녀 데레사, 예수회의 첫 수도자들, 밀라노의 대주교였던 성 가롤로 보로메오, 성 루도비코, 성 베르나르도,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전기 등이 있습니다. 이 외에도 이집트의 성녀 마리아, 기둥 위에서 고행한 성 시메온, 제노바의 성녀 가타리나와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성녀 안젤라의 전기 등이 있는데, 이런 것들도 우리 마음에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일깨우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입니다.
제18장 성령의 감도 감도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원의와 의욕, 꾸짖음과 뉘우침, 광명과 지식을 가리킵니다.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강복하시고, 우리에게 선행을 하도록 권하시며,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그리워하게 하심으로써 선한 결심을 하게 만드십니다. 또한 우리를 영원한 행복으로 인도하시며 모든 행복에 대한 원의로 우리 마음을 불타게 하십니다. 아가서는 신랑이 신부의 문을 두드려(아가 5,2 참조), 잠을 깨우고, 없을 때에는 찾으며, 자기 꿀을 나누고(아가 5,1 참조), 자기 정원의 사과와 아름다운 꽃을 권하며(아가 2,3; 4,13; 4,16 참조), 그 귀에다 달콤한 노래를 들려주시는 분이 주님이심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아가서에는 남녀의 혼인 과정이 세 단계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에서는 남자가 여자에게 구혼하고, 두 번째 단계에서는 여자가 남자의 구혼에 호의를 갖고, 세 번째 단계에서는 남자의 구혼에 동의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큰 사랑을 이루려 하실 때, 우선 감도를 내리시고, 우리가 이를 기뻐하게 하시며, 끝으로 이에 동의하게 만드십니다. 죄를 범할 때에도 먼저 유혹이 있고 쾌락을 느낀 다음 마침내 죄에 동의하게 되듯이, 덕을 수행할 때에도 감도가 있고, 뒤이어 감도에 따른 기쁨이 주어지며, 마침내 감도에 동의하는 세 단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일생 동안 감도를 계속해서 받는다 해도 이를 기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느님께서는 결코 기뻐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회개하기를 기대하시어 40년 동안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들을 인도하셨으나 그들이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자 분노하시어 “이들은 내 안식처에 들지 못하리라.”(시편 94편 참조)라고 하셨습니다. 앞서 말한 혼인 과정의 예에서 남자가 오랫동안 사랑하는 여자에게 구혼하는데도 여자가 구혼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남자는 상처를 받을 것입니다.
감도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기 시작하는 첫걸음입니다. 물론 이 기쁨은 완전히 동의하는 것과는 다르지만 그분을 따르겠다는 의향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외적 감도라고도 할 수 있는 하느님의 말씀을 기쁘게 듣는 것만으로도 이미 좋은 징조가 시작된 것입니다. 내적 감도를 받고 기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에 더욱 맞는 것입니다. 아가서에서 여자가 “나의 연인이 문틈으로 손을 내밀자 내 가슴이 그이 때문에 두근거렸네.”(아가 5,4) 하고 노래하는 것이 바로 이 기쁨입니다. 남자도 사랑하는 여인이 마음으로 기뻐하는 것을 알면 틀림없이 만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완덕에 이르고자 한다면 반드시 우리가 동의해야 합니다. 비록 감도를 받고 기뻐한다 해도 이에 동의하지 않으면 그것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아가서에 나오는 여자는 사랑하는 사람의 소리를 듣고도 하찮은 핑계로 문을 늦게 열었습니다. 그러니 남자가 화가 나서 발길을 돌린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남자가 오랫동안 그 여자를 흠모했고 여자도 그 남자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지만, 끝내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남자는 처음에 거절당한 것보다 훨씬 더 큰 상처를 받을 것입니다.
필로테아 님, 하느님께서 주신 감도를 하늘의 임금님께서 그대에게 청혼하려고 보내신 전갈로 알고 기쁘게 받아들이십시오. 평화로운 마음으로 그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대에게 감도를 베푸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드리며, 거룩한 감도를 받게 된 것을 기뻐하십시오. 사랑의 마음을 담아 이 감도에 확실하게 동의하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당신에 대한 그대의 애정을 기쁘게 여기실 것입니다. 그러나 중대하거나 특별한 것에 대한 감도는 그대의 영적 지도자에게 조언을 구하여 그것이 진정한 감도인지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귀는 사람들이 감도에 귀 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을 보면 거짓 감도를 보내 속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영적 지도자의 조언에 겸손하게 순종하면 마귀의 유혹에 빠질 위험이 없어질 것입니다. 일단 감도를 받으면 그 효과를 얻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감도받은 대로 실천하면 덕을 쌓을 수 있습니다.
감도를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실천하지 않으면 포도나무를 심고도 열매를 수확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아침 기도와 영적 은둔이 이를 실천하는 최상의 방법입니다. 특별한 경우에 적용할 일반적 원칙들을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심 생활 입문에서 발췌(2016년 4월 17일(백) 부활 제4주일, 성소 주일에 )
제1독서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 그 무렵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14 페르게에서 더 나아가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았다. 43 많은 유다인과 유다교로 개종하여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이 따라오자,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그들에게 이야기하며 하느님의 은총에 계속 충실하라고 권하였다. 44 그다음 안식일에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도시 사람들이 거의 다 모여들었다. 45 그 군중을 보고 유다인들은 시기심으로 가득 차 모독하는 말을 하며 바오로의 말을 반박하였다. 46 그러나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담대히 말하였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여러분에게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것을 배척하고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스스로 합당하지 못하다고 판단하니,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 47 사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땅끝까지 구원을 가져다주도록, 내가 너를 다른 민족들의 빛으로 세웠다.’” 48 다른 민족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주님의 말씀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정해진 사람들은 모두 믿게 되었다. 49 그리하여 주님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 50 그러나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귀부인들과 그 도시의 유지들을 선동하여,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박해하게 만들고 그 지방에서 그들을 내쫓았다. 51 그들은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리고 나서 이코니온으로 갔다. 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도행전 13,14.43-52)
제2독서 <어린양이 그들을 돌보시고, 생명의 샘으로 그들을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나 요한이 9 보니,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나온 그들은, 희고 긴 겉옷을 입고 손에는 야자나무 가지를 들고서 어좌 앞에 또 어린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 원로 가운데 하나가 14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 15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의 어좌 앞에 있고, 그분의 성전에서 밤낮으로 그분을 섬기고 있다. 어좌에 앉아 계신 분께서 그들을 덮는 천막이 되어 주실 것이다. 16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며, 해도 그 어떠한 열기도 그들에게 내리쬐지 않을 것이다. 17 어좌 한가운데에 계신 어린양이 목자처럼 그들을 돌보시고, 생명의 샘으로 그들을 이끌어 주실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요한 묵시록 7,9.14ㄴ-17)
복음 <나는 내 양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7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28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29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30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요한 10,27-30)
오늘의 묵상 성소는 ‘거룩한 부르심’이라는 뜻입니다. 이 성소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늘 사람들을 두 부류로 부르셨음을 알 수 있지요. 하나는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 충실하면서도 자신들 일상생활의 외적인 틀은 변하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 마르타, 라자로,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 같은 사람들이었지요. 그들은 주어진 자신들의 생활에 충실하면서도 예수님의 뜻과 사랑을 실천하였습니다. 이를 넓은 의미의 성소라 부릅니다. 또 하나는 자신들의 안정된 생활과 가족까지 다 버리고 완벽히 다른 생활을 택한 사람들이지요. 베드로, 야고보, 요한 같은 제자들입니다. 이를 좁은 의미의 성소라 부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 두 가지 길은 오늘날 우리 교회 안에도 계속 이어 내려오고 있습니다. 첫째 부류는 평신도로서, 둘째 부류는 성직자, 수도자로서 저마다 고유한 역할을 맡은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 뜻하는 성소는 좁은 의미의 성소를 말합니다. 특별히 사제직과 수도 생활로 부르심을 받는 것을 의미하지요. 따라서 성소 주일인 오늘은 사제직과 수도 생활에 투신하는 젊은이가 많아지도록 기도하는 날입니다. 아울러 사제들과 수도자들이 더욱 성화되도록 기도하고, 그들의 아픔과 고뇌를 이해하고, 또 함께 나누는 날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사제들과 수도자들이 자신들의 성소를 더욱 잘 가꿔 나갈 수 있도록 따스한 사랑과 기도가 더 필요합니다. -2016년 4월 17일(백) 부활 제4주일 (성소 주일) '매일미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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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