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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시한 혜수, 날 만나 깊어졌고… 가녀린 연수,도회적 이미지 더했죠
메이크업 아티스트 代母… 30주년 맞은 이경민
이 스물한 살 여대생은 무작정 분칠부터 하는 법이 없었다. 유명 모델이나 연예인을 처음 만나 바로 화장을 해줘야 하는 자리에서도 허둥대지 않고 이렇게 묻곤 했다. "죄송하지만 잠시만 제가 얼굴을 먼저 살펴봐도 될까요." 국내 메이크업 아티스트계의 대모(代母)로 불리는 이경민(51)은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리면서 몸에 밴 버릇"이라고 했다. "아그리파나 비너스를 그릴 때도 오래 봐야 스케치가 되잖아요. 화장이란 건 심지어 사람 얼굴에 하는 건데 어떻게 다짜고짜 바로 그립니까."
이경민이 메이크업 일을 시작한 지 올해로 30년이 됐다. '분장사'로 불리던 직업을 '메이크업 아티스트'라는 신(新)직종으로 격상시켰고, 최지우·김혜수·이영애·고소영·오연수·유호정·신애라·엄정화 같은 대한민국 톱스타의 얼굴을 환하게 꾸며준 주인공이기도 하다. 지난 7일 서울 청담동 사무실에서 만난 이경민에게 "벌써 30년이다"고 했더니 그는 "휴" 하고 낮은 숨을 쉬었다. "세월이 30초짜리 광고처럼 흘러갔네요" 스물한 살짜리 미대생, 광고계를 홀리다 이경민은 성신여대 서양화과 83학번이다. 학교 동기들 사이에선 '소개팅 화장을 부탁하면 미용실 원장님보다 예쁘게 해주는 친구'로 유명했다. 1985년 친구 오빠가 "너 그 솜씨로 학비 좀 벌어봐라"고 했다. 충무로 광고 제작사에 소개를 시켜주겠다는 얘기였다. 용돈을 벌 생각으로 간 곳에서 이씨는 신인 모델들의 프로필 사진용 메이크업부터 시작했다. 일주일쯤 했더니 제작사에서 전화가 왔다. "모델들이 너만 찾는다. 광고 카탈로그 메이크업도 해볼래?" 몇 달 뒤 이경민은 아예 TV CF 광고 메이크업까지 하게 됐다. 삼성세탁기를 광고했던 탤런트 김창숙씨 얼굴도 그때 처음 만져봤다고 했다. ―화장을 배운 적이 없었을 텐데. "어릴 때부터 오래 그림을 그렸고 미대를 갔으니 기본 바탕이 없진 않았던 것 같다. 게다가 엄마는 1960년대에도 회사를 다녔던 워킹우먼이었다. 매일 아침마다 엄마가 출근 준비를 하면서 화장하는 걸 보고 자랐다. 그걸 그대로 보고 기억해뒀다가 초등학교 때부터 집에 놀러 온 친구 얼굴에 화장을 해주곤 했다. 아빠 면도칼 들고 친구 눈썹을 가늘게 깎아줬다가 그 집 엄마에게 엄청 혼난 적도 있다. 대학교 때도 화장 이상하게 한 친구를 보면 못 참고 꼭 불러세우곤 했다. '얘, 내가 다시 화장 좀 고쳐줘도 되니?' 이러면서." ―그래도 광고 메이크업은 다른 영역 아닌가. "1980년대 중후반엔 뭐든지 센 게 유행했다. 패션도 '어깨 뽕'이 든 옷이 대세였고 메이크업은 무척 두꺼웠다. 그런데 난 그게 별로였다. 그래서 단점만 잘 가리고 장점은 최대한 드러내려고 했다. 가령 얼굴이 비대칭인 모델은 대칭처럼 보이게 했고, 얼굴이 예쁜데 이마 라인이 울퉁불퉁한 배우는 아이섀도 같은 걸로 이마를 정리했다. 피부는 그저 맑게 표현했다. 그런데 그게 뜻밖에 터진 거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끝나자 TV 광고가 2~3배가량 늘어났다. 이경민의 주가(株價)도 덩달아 뛰어올랐다. 1987년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졌지만 쉴 틈이 없었다. 밥 먹을 시간 잘 시간도 없이 광고 촬영이 밀려들었다. 보통 경기 남양주 불암세트장 등에서 촬영을 했는데, 며칠 밤 내내 먼지 쌓인 소파에서 눈 붙이며 일할 때도 많았다. 홍콩 배우 주윤발과 제주도에서 '밀키스'라는 음료 광고를 찍었던 것도 그 무렵이다. ―외국인 촬영은 처음이었나 보다. "게다가 남자! (웃음) 제주도 해안도로 촬영장에서 주윤발을 보고 깜짝 놀랐다. 뚜껑 없는 자동차에 기대서서 씩 웃는데, 그렇게 잘생긴 남자는 처음 본 거다. 너무 긴장해서 나도 모르게 화장을 한 데 또 하고 또 했다." 1990년을 넘어서면서 이경민은 1년의 절반 이상을 해외로 돌며 광고 촬영을 다녔다. 가령 탤런트 박주미와 뉴질랜드까지 가서 '드봉' 화장품 광고를 찍고, 바로 프랑스 파리로 날아가서 사진가 구본창, 모델 박선영과 함께 사진집을 찍는 식이었다. 이경민은 "일정이 겹칠 때는 공항에 내려서 촬영했던 옷을 사무실로 보내고 다른 옷을 받아 다시 외국으로 나갈 정도였다"고 했다.
"딱 맞는 말이다. 1980년대 말엔 충무로 광고제작사 계단 밑에 6.6㎡짜리 방을 전전세로 얻어서 스튜디오를 꾸렸는데, 1990년대 초에 갤러리아 백화점 건너편에 다시 전전세로 19.8㎡짜리 스튜디오를 냈다. 1995년엔 내가 메이크업을 해줬던 신애라가 차인표와 결혼했는데, 사람들이 그때부터 '우리 딸도 신애라처럼 화장 좀 해달라'고 찾아오기 시작했다. 도저히 시간이 안 난다고 거절해도 손편지 쓰고 가는 사람, 꽃이나 떡을 두고 가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배우 이미지 변신을 도와준 것도 이 무렵이다. 작은 입술이 콤플렉스여서 입술을 자꾸 크게 그리던 김혜수의 화장을 자연스럽게 고쳐줬고, 가녀린 오연수에겐 강하고 단단한 이미지를 찾아줬다. 최지우의 첫 광고도 내가 했는데 상큼하고 청순한 이미지를 그때 각인시켰다." 보통 사람들의 美를 완성하다 이경민이 연예인 아닌 평범한 고객의 화장을 맡기 시작한 건 1996년쯤부터다. 한 엄마가 딸의 손을 잡고 찾아와서 "제발 우리 딸 결혼식을 도와달라"고 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예비신부는 얼굴 뼈가 계속 자라는 일종의 거인증을 앓고 있었다. 이경민은 광고 촬영 일정을 옮기고 그 예비신부의 화장을 맡았다. ―메이크업이 쉽지 않았겠다. "내가 아는 모든 지식을 총동원한 작업이었다. 결혼식 날 달라진 신부의 얼굴을 보고 엄마가 기뻐서 눈물을 흘리는 걸 보니 참 뿌듯했다." ―그때 일반인 고객들도 받기 시작한 건가. "연예인 화장을 해줄 때와는 또 다른 세상이었다. 결혼식과 같이 일생에 몇 번 없는 이벤트를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기고 싶어하는 이들이 물어물어 찾아왔고, 화장을 해주면 다들 진심으로 기뻐했다. 나중엔 혼자 메이크업을 해주는 것만으로는 한계를 느껴서 2001년 '영 페이스'라는 책도 냈다. 보고 따라 하기 쉽도록 화장 전후(前後) 사진을 실었는데, 고소영·이영애·김혜수·최지우·오연수가 돈 한 푼 안 받고 모델을 해줬다. 요즘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2003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미스 유럽 선발대회에서 동양인 최초로 메이크업 메인 디렉터를 맡은 적도 있다. "처음엔 낯선 동양 여자가 오니까 아무도 내게 메이크업을 안 받으려고 했다. 한 명을 어렵게 구슬려 화장해서 내보냈는데, 그걸 보고 그제야 다들 내 앞에 줄을 서더라. 한 시간 동안 8명인가 메이크업을 해서 내보냈다. 다들 10등 안에 들었다." ―나중엔 화장품도 냈다. "1990년대만 해도 일본 화장품은 유명한 게 꽤 있었는데, 한국 화장품은 별로 없었다. 약이 올라서 7개국 OEM 회사를 찾아다니면서 '비디비치'란 제품을 만들었다. 매출액도 랑콤·메이크업 포레버 같은 세계적인 메이크업 로드숍에 뒤지지 않았지만 대기업 마케팅 공세를 이길 길이 없었다." 비디비치는 2012년 신세계 인터내셔널에 인수됐다. ―위기 때 남편이 큰 힘이 됐다고 들었다. "난 돈 관리를 정말 못한다. 보다 못한 남편이 재무 관리를 맡아줬다. 힘들 때마다 남편은 '네가 고생해서 번 돈 한 푼도 안 쓰고 여기 다 모아놨다'면서 통장을 쫙 꺼내 보여주곤 했다. 화장품 만드는 것도 남편 덕에 시작했다. '자, 경민아. 이만큼 모았으니까 이제 네가 하고 싶은 걸 해봐'라고 하더라." ―수많은 광고를 찍고 쇼를 했다. 그래도 미련이 있나. "전혀. 위로는 패티김·김혜자·유지인 선생님 메이크업까지 다 해봤고, 펜디·비비안웨스트우드 같은 큰 쇼도 모두 연출해봤으니 아쉬울 게 없다. 맨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때 엄마는 '왜 기껏 미대 가서 그런 일을 하려고 하느냐'고 말리셨다. 졸업할 때 교수님께 '메이크업한다'고 말하기 민망해서 인사도 못 갔다. 그렇지만 이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이 분야는 내가 개척한 것이니, 끝까지 즐겁게 가보겠다고. 앞으론 더 넓고 크게 걷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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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하늘나라 원문보기 글쓴이: 하늘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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