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의 고독에 대해서는 막스 삐까르는 『침묵의 세계』에서 이렇게 적었다.
고독의 길을 따라 걸었던 성인(聖人)들은 그들 자신의 주관적인 고독이 아닌 풍경의 침묵을 응시하며 장대한 자연의 고독을 누렸다. 그들 자신의 내면적인 고독은 장대한 자연의 고독의 사소한 일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고독은 현대인의 주관적 고독처럼 정서적 긴장과 욕구불만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장대한 자연의 고독 속에서 더욱 위대한 정신의 세계를 추구했으며 침묵 속에서 그 길을 걸어나갔다.
풍경의 고독을 일상화시켜버리는 선은 자연의 장대한 침묵 속에 공존하는 무상과 영원마저도 초극해버리고 마침내는 인간 역시 자연 본연의 침묵과 고독으로 더불어 둘이 아닌 것을 일러준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느 가을 한 노승과 제자가 숲길을 가고 있었다. 가을산의 스산한 바람이 낙엽의 소나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제자는 물었다.
“저 시들어 떨어지는 가을 낙엽과 같이 사람의 줄기며 낙엽도 조만간 땅에 떨어져 뒹굴게 되겠지요. 그때는 무엇이 남아 있게 되겠습니까?”
노승이 말했다.
“음, 그때야말로 눈부신 황금빛 가을바람이 불어올 때지.”
수십 번의 가을을 숲속에서 보낸 노승은 이제 깊은 가을이 만들어내는 침묵과 고독조차도 풍화되어버린 무상과 영원의 풍경을 내면에서 완성해버린 것이다. 노승은 오랜 고행과 침묵으로 목소리마저 쉬고 갈라져버린 시인이었다. 노승은 낙엽의 소나기 속에 서서 조용히 노래했다.
광활한 가을들판에 차가운 바람이 불고
먼 하늘에는 성근 비가 지나가는구나
그대여 보지 못하는가
소림에 오래 앉아 돌아가지 못한 나그네가
웅이산 한 떨기 숲에 조용히
기대어 서 있는 것을
세상의 수많은 일상이 차에 실려 다니는 이즈음 우리는 걷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길을 걷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풍경의 고독을 잊어버린 것이다. 수령 수백년생의 전나무들이 그들만의 우주를 이루고 있다. 저 나무들은 아주 작은 씨앗에서 어린 나무로 자라나고 마침내 저렇게 장대한 숲의 바다를 이룬 것이다. 저 나무들은 수백 년간 월정사를 드나드는 나그네들이 오고 가는 모습과 삶에 대한 인간들의 정열이 얼마나 허망하게 사그라드는지를 묵묵히 바라보았을 것이다. 인세의 영고성쇠를 무심히 바라보는 자연 앞에서 우리는 더 큰 침묵을 배워야 함을 실감하게 된다. 저 나무들은 소세계(小世界)의 영악함을 배우고 성공주의자가 되어버린 사람들에게 오대산의 겨울바람이 되어 인생은 조만간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안 될 가혹한 채권자와도 같은 것임을 나직하게 일러줄 것이다.
저녁예불을 알리는 대종소리를 들으며 월정사에 도착했다. 나는 큰 법당 적광전(寂光殿) 한 켠에 서서 예불을 하면서 법당 앞 팔각구층 석탑의 탑두에 매달린 작은 종들이 쩔그렁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저 작은 종소리는 수백 년간 계속 쉬지 않고 울렸을 것이다. 바람 부는 날이면 더욱 애잔한 금속성으로 이 도량을 흔들었으리라. 아아, 수백 년간 바람에 울리고 있는 종소리라니! 그 밤 내내 수백 년간 바람에 울리고 있는 종소리는 저 멀리 중앙아시아의 돈황 천불동의 어느 기슭에서 울리는 캐러밴의 방울소리인 듯, 잊고 있었던 환청이 되살아났다.
산중의 아침 햇살은 눈이 시리다. 나는 월정사 뒤켠의 소롯길 가에 있는 부도전으로 걸어간다. 20여기의 크고 작은 부도들이 조용히 자리잡고 있는 이 부도전은 내게는 언제나 평화의 뜰이었다. 짙푸른 이끼가 덮이고 비바람에 씻긴 부도들을 바라보면서 ‘아, 그들의 고뇌와 깨달음이 마침내 저 작은 부도로만 남아 무언의 법문을 설하고 있구나’라는 상념에 잠기게 되는 것이다. 이 부도들은 일생을 한결같이 마음의 눈을 열고 삶의 질서와 영혼의 깊이를 다듬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심법(心法)의 회랑을 통과해 버린 구도자들의 사리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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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오래된 부도일수록 그 규모는 소박하고 오랜 풍우에 당호 석자조차 마멸되어 마침내는 누구의 부도인지조차 알 수 없게 된 부도들도 있다. 이러한 부도들이야말로 삶과 죽음의 비밀을 깨달아버린 사람들의 지순한 망각을 상징하는 묘비인 것이다.
망각은 언제나 그렇듯이 어떠한 의미체계나 기억보다도 훨씬 아름다운 법이다. 허기진 마음은 언제나 기억을 갈구하지만 더 이상 기억이 필요 없는 기억 부재의 삶도 있는 것이다. 모든 기억의 종식을 선언한 저 부도들이야말로 모든 허식과 명리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니르바나의 길을 향해 묵묵히 걸어간 구도자들의 신화적인 생애를 침묵으로 보여주는, 우리나라 절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 절은 항상 망각을 가르치는 곳이었다.
사찰의 역사가 아무리 오래 되고 부유한 절이라고 할지라도 짙푸른 이끼가 덮이고 오랜 풍우에 얼마간 마멸된 부도들이 없는 절은 수행의 고독과 침묵이 없는 절이다. 그래서 삶의 나이테가 늘어나게 되면서 점점 고궁이나 공원과 마찬가지일 뿐인 그런 절에 발길이 가지 않게 되는 것이다.
나의 1박2일간의 입산은 희찬 스님이 거니시던 그 전나무숲길을 걸어 나와 진부에서 막국수 한 그릇을 사먹는 것으로 끝났다.
나는 휠덜린의 『히페리온』 한 구절을 기억해내려고 애를 쓰면서 서울행 버스에 올랐다.
이기심으로 얼룩진 인간들끼리의 일들은 잊도록 하라. 그리고 온갖 번민과 슬픔으로 가득 차서 갈구하는 마음이여, 돌아가라! 그대의 근원인 자연으로. 방황이 없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그 품으로.
*. 이 글은 일지(一指)스님의 산문집 '월정사의 전나무숲길(1994년, 문학동네)'에 실려 있습니다.
첫댓글 이련님 정말 오랜만입니다. 좋은 글과 멋진 사진 잘 보았습니다.
예, 선생님께서도 잘 지내시지요? 뭐가 그리 바쁜지 마음처럼 자주 들르지 못하네요. 송구스럽습니다. 가끔씩 흔적 남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자주 들르지 못해도 늘 건강 잘 챙기면 좋겠습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