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여행] 보물 931호 태조 이성계의 어진이 봉안된 경기전. 풍남문
날 짜: 2013.9.29(흐림)
위 치: 전북 전주시 완산구 완산구 풍남동3가
전 화: 063-281-2790
조선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모신 곳으로
태종 10년(1410년)에 세우 졌으나 경기전은 정유재란 때 불탔으나
광해군 6년(1614년)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고 회랑을 두어 최고의 사당임을 나타냈다.
조선 왕조를 개국한 태조 어진이 봉안된 정전 기능과
품위에 기준한 엄격한 격식, 그리고 정전과 배례청 평면 조합 및 어방구조 등이 보물로서
문화재 가치를 인정받아 지난 2008년 12월 국가보물로 지정됐다.
경기전 입구에서부터 말에서 내리는 곳임을 표시한 하마비,
붉은 색칠을 한 홍살문, 외삼문, 내삼문 그리고 초상화를 모신 전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물의 구성은 본전·헌·익랑 들로
이루어져 있고 이를 내삼문과 외삼문으로 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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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살문과 외삼문,
외삼문은 내삼문과 같은 구조이나 첨각없이 바로 담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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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삼문,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치마 맞배구조이며
좌우에는 한 단 낮은 첨각이 각각 2칸씩 달려있고 내삼문과 첨각 사이에
작은 문을 설치하여 어진을 돌보는 관리가 출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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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 사당임을 감안할 때 신문(神門)이라고 호칭되며
홍살문 안쪽 내삼문 외삼문의 세 문을 통과할 땐 ‘동입서출’, 다시 말해 동쪽(오른쪽)으로
들어가 서쪽(왼쪽)으로 나가야 한다.
가운데는 태조의 혼령이 드나드는 ‘신도(神道)’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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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931호 태조 이성계 어진,
이 어진(御眞)은 조선 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를 그린 초상화다.
경주와 평양 등지에 모셨던 이성계의 어진은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버리고, 이곳 전주
경기전의 어진만 유일하게 남아 있다고 한다.
이 어진은 고종 9년(1872)에 기존의 낡은
어진을 태워 묻고, 서울 영희전에 있던 태조 어진을 본떠 새로 그린것 이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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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국정을 볼 때 차려입는 익선관을 쓰고
곤룡포를 입은 채 두 손을 가지런히 마주 잡고 의자에 앉아있는 태조의 정면 모습과.
얼굴과 옷 주름을 처리한 음영 기법이나 의자와 자리의 화려한 색채 그리고 어깨에 그린 용의 금박효과 등에서
어진이지만 높은 품격이 보인다.
한 왕조를 세운 인물의 위엄이 시대를 뛰어넘어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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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태실(胎室)은 조선 예종 대 왕의 태(胎)를
항아리에 담아 넣어둔 석실인데 왕가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그 태를 소중히
석실에 보관하였는데, 이를 태실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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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선조 11년(1578) 완주군 구이면 원덕리
태실마을 뒷산에 세웠다가 영조 10년(1734)에 다시 고쳐 세웠다고 한다.
1928년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태 항아리를 가져가면서 파괴되어 구이초등학교 부근에
있던 것을 1970년 이곳으로 옮겨 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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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전은 이제까지 입장료 없이 무료관람이었던 것을
금년 6월부터는 유료화 어른은 1,000원 청소년 700원 어린이가 500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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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비,
1413년(태종 13)에 최초로 종묘(宗廟)와
궐문(闕門) 앞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표목(標木)을 세워놓았는데,
이것이 후일 ‘대소 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 또는 ‘하마비(下馬碑)’라고 새긴
비석을 세우게 된 계기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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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왕장(王將)이나 성현, 또는 명사 ·고관의 출생지나
분묘 앞에 세워져 있는데, 이로 미루어보아 그들이 선열(先烈)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타고 가던 말에서 내렸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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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성은 지방행정의 중심지가 되는 고을을 둘러쌓았던 성을 말한다.
옛 전주 읍성의 남쪽 문으로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파괴된 것을 영조 10년(1734) 성곽과 성문을 다시 지으면서 명견루라 불렀다.
‘풍남문’이라는 이름은 영조 43년(1767)
화재로 탄 것을 관찰사 홍낙인이 영조 44년(1768) 다시 지으면서 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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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 때 도시계획으로 성곽과 성문이 철거되면서
풍남문도 많은 손상을 입었는데 지금 있는 문은 1978년부터 시작된 3년간의
보수공사로 옛 모습을 되찾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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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재에 사용된 조각 모양과 1층 가운데칸 기둥 위에
용머리를 조각해 놓은 점들은 장식과 기교를 많이 사용한 조선 후기 건축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옛 문루건축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문화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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