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독특함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사용하는 언어에서, 구불구불 집까지 이어진 정겨운 ‘올레’에서, 중산간 자락을 봉긋봉긋 수놓은 오름들에서, 신구간이라 불리우는 낯선 이사풍습 등에서 사람들은 새삼스레 ‘제주가 자기와 사는 곳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화산활동은 제주의 모든 것을 ‘이질적’으로 만들어 버렸다. 특히 화산회토는 제주의 농경문화를 육지의 그것과 판이하게 다르게 만들었다. 그것을 증거하는 것들이 바로 제주인들이 사용했던 농기구다. 척박한 토양을 제대로 경영하기 위해선 그 환경을 적절히 이용할 줄 아는, 그에 맞게 적응된 농기구가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제주도민속자연사박물관의 김동섭 박사(민속학)는 제주의 특성이 잘 나타난 농기구로 남테와 오줌허벅, 거름착, 골갱이, 섬피 등을 예로 들었다.
김 박사는 “남테는 타지역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제주적 특성이 가장 잘 드러난 농기구”라며
“여름 농사(주로 조농사)때 좁씨를 뿌린 후 씨앗이 흙에 잘 묻히고 흙이 단단하도록 다져 주는 데 사용한 것으로 ‘채경’, ‘채경고리’, ‘몸통’, ‘발굽’으로 이루어졌다”고 설명했다.
통나무에 말발굽처럼 나무 말뚝을 구경 6cm, 길이 10cm로 만들어, 길이로 8~9개씩 엇갈리도록 6~7줄을 박아 만든 것이다. 쉽게 말하면 ‘인공 말발굽’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원래는 여러마리의 말떼가 흙을 밟아주는 것이 정석인데, 말이 귀하다 보니 아예 말발굽을 만들어 쓰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말이나 남테를 이용해 흙을 다져주면 수확이 훨씬 좋았다고 한다.
“이렇게 하면 바람에 날리는 흙을 막아 주고 점성이 없는 화산회토라 습기를 잘 보관할 수 없었던 토양의 한계를 어느정도 지켜낼 수 있었으며, 밭을 파헤쳐 종자를 파먹던 새들까지 막아주었기 때문에 아주 유용했다”
대부분의 농기구가 그렇지만 현재 남테는 일반 농가에선 전혀 사용하지 않고 있으며 박물관에서나 구경할 수 있는 희귀 민속자료가 돼 버렸다.
물허벅은 알지만 오줌허벅은 모른다?
이름 그대로 오줌허벅은 거름으로 사용할 ‘오줌’을 담아 옮기는 데 사용하였던 도구다. 집집마다 준비해 두고 이용하던 필수품이어서 서로 빌리지도 빌려주지도 않았던 것중의 하나였다고 김 박사는 덧붙인다.
식수를 담아 운반하던 낡은 ‘물허벅’을 주로 활용했으며 간혹이긴 하지만 구워 내는 과정에서 변형돼 허벅으로 사용할 수 없는 것이 이용되기도 했다.
거름착은 ' 거름망탱이'라고도 한다.
별도로 만들어 쓰기보다는 곡식을 보관하거나 옮기기 위해 썼던 ‘멕’이 헐면 이것을 이용했다. 주로 ‘쇠왕(외양간)’의 거름이나 돗거름을 밖으로 내거나 담아 옮기는 데 사용했다. 산듸짚, 신서란, 나록짚이나 미(억새의 속잎)를 엮어서 만든 원통형(圓筒形)의 것이 주로 쓰였다. 제주에선 척박한 토양을 기름지게 하기 위한 거름주기 작업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는데 물허벅이나 거름착 역시 이런 이유로 생겨난 문화적 산물이다.
‘섬비, 끄실캐, 끄서귀, 끄실피’라고도 불리우는 ‘섬피’ 역시 과거 제주에선 쉽게 볼 수 있었던 농기구중 하나다.
“제주의 여름, 어디서든 쉽게 구할 수 있었던 꽝꽝나무 가지를 이용해 즉석에서 만들어 이용하다 용도가 다하면 그 자리서 해체해 버렸다”
씨를 뿌리고 난 후 흙이 골고루 덮어지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대형 빗자루 정도가 아닐까. 전체적으로 긴 삼각형 모양이고 양어깨에 매고 끌 수 있도록 끈을 달았다. 골고루 흙이 잘 덮어지게 하는 것이 목적이므로 묵직한 돌을 얹어 이용하기도 했다. 보통 한 사람이 어깨에 매고 끌었는데 이랑을 따라 끌거나 이랑을 가로질러 끌었다.
제주에선 보통 ‘?갱이’로 불리는 농기구. 육지에서 호미라 불리는 것의 제주적변형으로 밭에 나는 잡초를 매는 데 썼다.
“제주의 밭농사는 밭갈이를 하고 씨를 뿌리고 씨가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흙을 덮어 밟아 주고 거기에다 거름을 주면 파종이 마무리된다. 그 다음은 최대의 수확을 위해 생산력을 높이는 노력이 필요한 때인데 바로 ‘검질매기’작업이다”
검길매기 작업은 주로 여성의 몫이다. 계속해서 올라오는 잡초를 매고 또 매고 하는 잡초와의 지겨운 전쟁을 매해 여성들은 치러야 했다. 더욱이 제주는 해양성 기후로 온난 다습하다. 그래서 다른 지역보다 더 심한 잡초와의 전쟁을 매해 치러야 했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흙 위로 솟아오른 잡초 뿐만 아니라 그 근원인 뿌리를 완전히 뽑아내야 가능하다. ?갱이는 바로 이럴때 큰 힘을 발휘한다. 육지의 호미와 달리 땅 깊은 곳 뿌리를 들어 낼 수 있도록 날이 길고 가늘게 변형됐기 때문이다.
“현대화, 산업화의 거센 바람은 주곡경작(主穀耕作)의 전통적 농경형태를 사라지게 했으며 동시에 제주인들의 전통적인 삶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는 자료마저 잃어버릴 위기에 처하게 만들었다”
박물관에서 볼 수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사진자료 한 장 남아 있지 않은 민속자료도 수두룩하다는 김 박사의 일갈이다.
제주도에 정착한지 이제 19년. 그 세월동안 김 박사는 제주 오일장과 갈옷, 마을제, 돌하르방, 민속주 등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연구와 자료수집을 거듭했다. 제주사람보다 더 제주를 잘아는 그인데도 아직도 연구해야할 분야가 더 남아 있다니...
그에게 제주의 민속자료는 학문적 연구의 대상으로만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제주의 뿌리, 제주의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고서는 제주의 미래로 대변되는 국제자유도시는 허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민속자료의 수집과 보존을 강조하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고 세대가 바뀌면 당시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던 각종 생활도구는 우리의 생활에서 뿐만 아니라 기억으로부터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민속자료의 수집과 문화재 지정은 그래서 미룰수 없는 중요한 과제다.
제주도민속자연사박물관 문의:(064)722-24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