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꽃들이 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신록의 산기운이 범람한다.
올해는 한 그루 매화나무가 피었다 질 때까지 제대로 지켜보았다.
몇 년 동안 ‘별나무-매화’ 모델을 찾아다녔는데, 운 좋게도 산비탈 무덤가의 녹차밭에서 100년 가까이 된 매화나무를 발견했다.
이 매화나무를 틈 날 때마다 찾아갔다.
꽃이 다 피기를 기다렸다가 초저녁에 다시 가보았다.
기상청 예보와 달리 밤 9시부터 매화꽃 위로 별빛이 쏟아져 내렸다.
그 전날에는 밤새 쾌청할 것이란 예보만 믿고 서울에서 내려온 <별 헤는 밤> 특집 다큐멘터리 방송 팀과 밤을 꼬박 지새웠지만, 초저녁에 겨우 단 두 시간만 별빛을 보여 주었다.
봄밤에는 기류 변화가 자주 일어나 먼 대륙에서부터 오는 구름이 아니어도 안개와 구름이 내륙에서 곧바로 생기기 때문에 기상청 예보가 자주 빗나간다.
이날 밤도 흐리다는 예보 때문에 다큐 팀은 철수하고 나 또한 하룻밤 쉬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이 맑아지기 시작했다.
포기하다 별을 마주친 밤은 더 황홀했다.
지난 4년 동안 매화꽃 위로 쏟아지는 별을 담아왔지만 단연 최고의 날이었다.
역시 하늘이 응답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고목의 매화나무 아래서 새벽 3시30분까지 쪼그려 앉아 있었다.
스틸 컷을 찍는 몇 시간을 제외하고 타임 랩스로 장장 123분 동안 227장의 사진을 찍어 봤다.
그러니까 매화꽃에 내리는 이 별 궤적은 저마다 227개의 별들이 모여 하나의 선을 만든 것이다.
밤의 매화꽃 위로 쏟아지는 별들의 발자국이 저마다 다른 빛깔로 장엄했다.
밤새 별을 보는 동안 30년 전의 기억들이 몰려왔다.
스물다섯 살 무렵 나의 청춘기에는 지하 700m의 막장에서 석탄을 캤다.
대학을 휴학하고 스스로 들어간 막장 후산부였다.
8시간 동안 9t의 삽질을 하면서도 석탄을 운석이라 생각하며 버텼다.
중생대 백악기의 나무와 숲을 다시 만나듯이 지하 막장에서 별을 캐는 심정으로 청춘의 한 시절을 보냈다.
인간은 우주의 시간에 지배를 받는다. 밥도, 잠도, 일도, 사랑도 절대 벗어나지 못한다.
해와 달과 별의 지배를 받으며 지수화풍地水火風과 시공時空 그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인간이 존재한다.
그런데 자연의 일부인 인간들이 교만하다 못해 우주 자연의 시간을 지배하려 한다.
그야말로 망상이자 미몽이 아닌가.
비로소 봄날다워진 봄날
지난 3월 22일 서울동부구치소에 갔다. 모범 여성재소자들과 함께하는 강연 때문이었다.
공교롭게도 바로 그날 밤 늦게나 다음날 새벽 바로 그곳에 이명박 전 대통령이 구속 수감될 예정이었다.
국가적인 불행이지만, 적시된 죄목을 차치하고도 ‘한반도 대운하’라는 허명으로 4대강 등 온 국토에 저지른 만행은 어찌할 것인가.
2008년부터 한반도 대운하 반대 ‘생명의 강을 모시는 순례’와 노고단에서 임진각까지의 오체투지 순례, 그 고행의 날들이 떠오른다.
10년 동안 순례단 총괄팀장으로 미력을 보탰지만 4대강을 파헤치는 것을 끝내 다 막지 못하고 그 후유증으로 결핵성 늑막염으로 쓰러진 세월이었다.
어찌됐든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고마운 일도 있다.
몸이 아프면서 키 낮은 야생화를 알게 되고, 전국의 야생화를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무너진 건강을 완전히 회복했으니 말이다.
춘래불사춘이 아니라, 비로소 봄날이 봄날다워졌다.
공교롭게도 그가 구속 수감되는 바로 그곳은 지난해 6월 성동구치소에서 이전한 동부구치소는 엘리베이터가 운행되는 최신식 아파트형 구치소였다.
최순실, 김기춘씨 등이 수감된 곳인데, 다른 것은 몰라도 구치소 운이 좋다고나 할까.
전언에 따르면 최순실은 초기와 달리 ‘멘붕’ 상태라고 했다.
강연을 마치고 겹겹의 출입문을 열고 나오자 어느새 취재기자와 중계차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한참동안 망설였다. 구속되는 그를 보고 갈 것인가, 그냥 지나칠 것인가.
미리 온 기자들에게 슬쩍 물어보니 ‘영장 떨어지고 수감되려면 밤늦게나 새벽이 될 것’ 이라고 했다.
문득 휴대폰을 켜고 모바일 데이터를 연결했다.
평상시 데이터를 꺼놓고 휴대폰으로는 페이스북을 하지 않으니 뉴스와 기상청 위성사진을 보려면 다시 연결해야 했다.
오후 4시쯤의 뉴스 속보엔 아직 영장이 발부되지 않았다.
문득 남도의 기상예보를 보니 오랫동안 지켜봐온 그 매화나무 위로 별빛이 떠오를 태세였다.
순간, 매화꽃을 찾아오는 별빛을 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다닥 택시를 타고 남부터미널로 달려갔다.
고속버스를 타고 하동에 도착하니 밤 9시30분이었다.
집에 오자마자 카메라와 삼각대를 챙기고는 모터사이클을 타고 산비탈의 그 매화나무를 찾아갔다.
밤 10시50분쯤 도착하니 예상대로 매화꽃을 찾아온 별빛들이 구름을 벗어나 빛나기 시작했다.
카메라에 핫팩을 붙인 채 새벽까지 흥분을 누르지 못하고 ‘별나무-매화’ 사진을 찍었다.
수동조작하며 스틸 사진을 수십 번 찍어 마음에 드는 몇 장을 저장하고는 곧바로 타임 랩스로 421장을 더 찍었다.
올해는 봄꽃들이 좀 늦게 피더니 정신없이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다행히 하르르 하르르 한꺼번에 다 져버릴까봐 꽃샘추위마저 흰 눈을 데려와 설중매를 보여 주기도 했다.
꽃잎 위에 눈이 쌓이지는 않았지만 매화꽃과 먼 산의 흰 눈이 참으로 보기 힘든 풍경을 연출했다.
꽃샘추위가 가져다 준 귀한 선물이었다.
섬진강의 봄이 동시다발적이며 전방위적으로 올 때면 ‘청명이나 곡우가 돼야 봄이 온 줄 아는 사람은 이미 늦었다’는 사실을 되새긴다.
농부나 어부처럼 미리 봄을 살아야만 온몸 그대로 봄이기 때문이다.
‘그곳이 바로 이곳’이라는 것을, ‘우리는 날마다 가닿아야 할 그곳에 이미 도착하고 있다’는 것을 날마다 되새기는 것이다.
그렇다. 꽃 피는 사람 곁에 나도 가만히 꽃 한 송이 피우고 싶을 뿐이다.
지리산과 섬진강의 봄이 북상하자 나도 봄의 꽃길을 따라 올라갔다.
2박3일 동안 강원도 정선의 동강에 다녀왔다.
40년 가까이 미국에서 살아온 박학수 선생께 봄날의 우리나라 대표 토종꽃인 동강할미꽃, 그 다양한 꽃빛들을 보여주고 싶었다.
박 선생은 20대 후반에 포스코 1세대로 미국에 건너가 40년 가까이 살고 있다.
3년 전에 서울의 ‘아주 특별한 사진수업’을 이끄는 사진가 주기중 선배와 더불어 지리산에 출사 왔다가 처음 만났다.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말처럼 그날 이후부터 박 선생은 곧바로 터를 잡고 집까지 지었다.
하동군 악양의 평사리 부부송 앞에서 처음 만났는데, 바로 그 부부송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집을 지었다.
1년에 3번 정도 귀국하는데 몇 달 동안 머문다.
작은 모터사이클도 장만해 나와 함께 지리산과 섬진강을 누비기도 한다.
악양 땅에 지은 새 집에도 한껏 봄기운이 깃들었다.
박학수 선생과 함께한 꽃기행은 각별했다.
여행의 목적이 꽃빛이었으니 강원도의 벗들 누구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다.
박 선생은 동강할미꽃을 보자마자 “우리 조국에 이렇게 아름다운 꽃이 있었느냐”며 탄성을 내질렀다.
머나먼 길을 운전하면서도 온갖 배려를 해주신 박 선생이 너무 고맙다.
이튿날 동강 귤암리의 석회암 벼랑 ‘뼝대’ 위에 올라 동강할미꽃 사진을 찍고 있는데 차 한 대가 급정거하면서 “원규 형”하고 부르는 것이었다.
‘정선 커피 아저씨’ 김욱철-최영자 부부였다.
귤암리 축제장 부스에 들러 반갑게 음료수 한 잔 하고 사진가 조문호-정영신의 작품을 감상한 뒤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4년 만에 다시 본 동강할미꽃은 여여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동강할미꽃 몇 가족은 사라졌고, 이따금 탐심에 눈이 먼 진사들에게 수난을 당한 꽃들도 있었다.
변이종인 흰꽃의 개체수도 줄었다.
가파른 뼝대 위에서 제일 먼저 꽃을 피우는 동강할미꽃은 전쟁과 가부장제와 가난의 짐을 다 짊어진 여성들, 근현대사의 헌신과 희생을 강요당한 우리의 어머니, 할머니들이었다.
인내와 슬픔과 아픔의 빛깔이 이토록 환하다니!
강원도에서 돌아와 동강할미꽃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월간 <山> 4월호 표지사진이었다. 이 꽃은 4년 전에 2박3일 동안 야영하며 찍은 것이다.
석회암 벼랑 뼝대 위에 회양목과 ‘동강할배꽃’이라 불리는 동강사초 사이에 보랏빛 일가가 자리를 잡고 있다.
어느새 월간 <山>에 연재한 지 10여 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지리산 입산 20년 중에 10년을 함께해 온 셈이다.
‘미리 가보는 지리산둘레길 320km’부터 ‘지리산 사람들’과 ‘지리산 편지’ 그리고 ‘이원규의 산방한담’으로 이어져 왔다.
줄잡아도 200자 원고지 4,000여 장이 훨씬 넘고, 시 또한 100여 편 등이 넘을 터인데 아직 책 한 권 묶지 않았다.
살아남을 문장이 얼마나 될지 궁금할 뿐이다.
봄날엔 한 번쯤 누구나 그러하듯이
봄꽃은 먼 곳에도 피고 아주 가까운 곳에도 피어난다.
이른 아침 마당에 나와 보니 작은 텃밭에 배추꽃이 피어 있었다.
지난 초가을에 열댓 포기 배추를 심었는데 겨우내 한 포기씩 뽑아먹다가 세 포기를 그대로 두었다.
늦겨울 영하 15℃의 한파에 겉이 다 얼었지만 기특하게도 매화꽃이 피어나자 슬슬 봄동으로 몸을 바꾸는 것이었다.
같은 뿌리에 연하디 연한 봄동 잎이 새로 나더니 겹겹이 묵은 배춧잎을 거름삼아 장다리꽃처럼 순식간에 꽃대를 올리고는 그예 샛노란 나비들을 풀어놓았다.
사실 남도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다.
배추꽃이 매화와 벚꽃이 진 자리를 메우고 있다.
‘봄이 온다’가 현실화했으니 다시 ‘가을이 왔다’가 이루어질 때까지 한해살이가 아닌 다년생 배추를 그대로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봄비 내리는데, 어디 귀한 꽃만 꽃이랴?
모처럼 봄비 속에 산에 올랐다. 산돌배꽃을 보러갔다가 뜻밖에 금낭화 군락지를 만났다. 봄비와 산안개 속에서 활대처럼 휜 꽃대에 진분홍 복주머니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문득 ‘다 이루었다’는 말이 떠올랐다. 나 혼자 중얼거렸다 “봄꽃이여, 금낭화여, 이미 너는 그 자리에서 다 이루었다!”
봄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었다.
바람에도 결이 있다.
파도처럼 밀려오고 또 밀려오는 꽃바람, 진분홍 금낭아씨 마음을 휘저으며 지나간다.
바람을 읽는 일이 쉽지 않지만 산비탈에 주저앉아 바람의 행로를 들여다보았다.
금낭화 꽃빛들이 흔들리며, 뭉개지며 그 바람의 얼굴을 보여 준다.
모터사이클을 탈 때도 바람을 읽어야 한다.
코너를 돌 때 왼 바람은 왼쪽 어깨로 누르고, 오른 바람은 오른쪽 어깨로 누르며 탈출로를 바라본다.
바람에 기대는 것이다.
앞바람에는 고개를 숙이며 스로틀을 당기고 뒷바람에는 어깨를 펴고 돛단배처럼 나아간다.
산비탈의 금낭아씨들도 바람에 어깨를 맡겼다가 털어내고 다시 바람의 파도를 맞으며 봄날을 보내고 있다.
잠시 눕는다고 엎어지고 쓰러진 것은 아니다.
최백호의 노래 <그쟈>의 ‘봄날이 오며는 뭐하노 그쟈?’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릴 듯하지만, 일단 눈을 감고 봄바람에 흔들려 보는 것이다.
봄날엔 한 번쯤 누구나 다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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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다방
이원규
저 멀리 빛난다고 다 별빛은 아니었네
점촌역전 골목의 지하 다방
그녀의 청보라 스웨터엔 별들이 반짝거렸지
한 번 불붙으면 펄펄 뛰는 팔각 성냥갑
달달하게 녹기 전에는 날 세운 각설탕
오빠야, 나도 차 한 잔 마실게
옆자리 앉자마자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근데 얼굴이 캄캄한 오빠는 뭐 하는 사람?
나야 뭐, 지하 막장에서 벼, 별을 캐지
아, 죽어야만 2천만 원짜리 그 막장 꺼먹돼지!
그래 그래 별마담, 커피 두 잔 부탁해
철없는 시인이 되었다가 폐광하고
경제학 원론을 불태우던 그 시절
지하 1층 별다방에서 별똥별을 보고
지하 700미터 막장에서 운석을 캐냈지
밤마다 9톤의 별들에게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렸지
오후 4시에 팔팔 항목으로 들어가
자정 무렵 시커먼 포대자루로 기어 나오면
코피처럼 폐석처럼 쏟아지던 별빛들
세상도 나도 너무 밝아져 다 식어버렸네
지천명 넘어서야 밤의 지리산 형제봉
홀로 해발 1,100미터 산마루에 누워
아득하고 아득한 별빛들을 소환하네
아주 가까이 빛나던 것들은 모두 별빛이었지
첫댓글 사진과 좋은글 정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