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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방서예[1793]一然스님시-黃龍寺九層塔(황룡사구층탑)
삼국유사에서 일연스님이 지은 시에서도
황룡사 구층목탑의 호국의지는 잘표현되어 있다.
黃龍寺九層塔(황룡사구층탑)
一然스님
鬼拱神扶壓帝京 (귀공신부압제경)
귀신들의 도움 받아 서울 땅을 진압하고
輝煌金碧動飛甍 (휘황금벽동비맹) 甍=용마루맹.
휘황찬란한 색깔 속에 용마루는 나는 듯
登臨何啻九韓伏 (등임하시구한복) 啻=뿐 시.
올라보니 어찌 변방 나라 복종으로만 그치랴
始覺乾坤特地平 (시각건곤특지평)
비로소 온 천하의 태평한 이유 알겠네
황룡사구층탑은 불력(佛力)으로 이웃나라의 침략을 막아
나라를 지킨다는 뜻에서 세운 것으로 1층은 일본,
2층은 중화(中華), 3층은 오월(吳越),
4층은 탁라(托羅), 5층은 응유(鷹遊), 6층은 말갈(靺鞨), 7층은
단국(丹國), 8층은 여적(女狄), 9층은 예맥(濊貊)에 대항하는 것을 상징한다.
아홉 개의 층은 모두 신라 변방의 나라들을 가리켰고
탑을 세움으로써 이웃의 침해를 누를 수 있었다고 한다.
삼국유사(三國遺事)권제3
皇龍寺九層塔-원문-번역
新羅第二十七善德王卽位五年, 貞觀十年丙申, 慈藏法師西學, 乃於五臺感文殊授法,
[詳見本傳.], 文殊又云 “汝國王, 是天竺刹利種, 王*<豫,預>受佛記, 故別有因緣,
不同東夷共工之族, 然以山川崎嶮, 故人性麤悖, 多信邪見, 而時或天神降禍,
然有多聞比丘, 在於國中, 是以君臣安泰, 萬庶和平矣.”
신라 제27대 선덕왕 즉위 5년 정관 10년 병신(636)에 자장법사가
중국으로 유학하여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의 수법(授法)을 감응해 얻었는데
-자세한 것은 본전에 나타나 있다.- 문수보살은 또 말했다.
"너희 국왕은 바로 천축의 찰리종(인도의 크샤트리아 계급)의 왕으로
이미 불기(佛記)를 받았으므로 따로 인연이 있어
동이공공(東夷共工-중국강화지방에 살았던 종족, 여기서는 동이가 야만이라는 뜻)의
종족과는 같지 않다. 그러나 산천이 험하기 때문에 성품이 추솔하고 패려하여
사견(邪見)을 많이 믿는다. 그런 까닭에 간혹 천신이 내리기도 하나,
다문비구(多聞比丘-법문을 많이 들어 알고 있는 비구)가 나라 안에 있기 때문에
君臣이 편안하고 만백성이 화평하다."
言已不現. 藏知是大聖變化, 泣血而退. 經由中國*<大,太>和池邊, 忽有神人出問
“胡爲至此?” 藏答曰 “求菩提故.” 神人禮拜, 又問 “汝國有何留難?” 藏曰
“我國北連靺鞨, 南接倭人, 麗濟二國, 迭犯封陲, 隣寇縱橫, 是爲民梗.” 神人云
“今汝國, 以女爲王, 有德而無威, 故隣國謀之, 宜速歸本國.”
말을 끝내자 이내 사라졌다. 자장은 이것이 대성의 변화인줄 알고
슬피 울면서 물러갔다. 법사가 중국 대화지 옆을 지나는데 문득 신인이 나타나 물었다.
"무엇 하러 이곳에 오셨소?"
"보리(불타에 이르는 길)를 구하려 합니다."
자장이 대답하자 신인은 그에게 절한 다음 또 묻는다.
"그대의 나라에 무슨 이려운 일이라도 있소?"
"우리 나라는 북으로 말갈에 연하고 남으로는 왜국에 인접되었고,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가 번갈아 국경을 범하는 등 이웃의 침입이
종횡으로 심합니다. 이것이 백성들의 걱정입니다."
"지금 그대의 나라는 여자가 왕위에 있으니 덕은 있지만 위엄이 없소.
그렇기 때문에 이웃나라에서 침략을 도모하는 것이니 그
대는 속히 고국으로 돌아가시오."
藏問 “歸鄕, 將何爲利益乎?” 神曰 “*皇(黃)龍寺護法龍, 是吾長子, 受梵王之命,
來護是寺, 歸本國, 成九層塔於寺中, 隣國降伏, 九韓來貢, 王祚永安矣. 建塔之後,
設八關會, 赦罪人, 則外賊不能爲害. 更爲我, 於京畿南岸, 置一精廬, 共資予福,
予亦報之德矣.” 言已, 遂奉*王(玉)獻之, 忽隱不現.
[寺中記云 於終南山圓香禪師處, 受建塔因由.]
이에 자장이 물었다.
"그럼 고국에 돌아가서 이익 되는 일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황룡사의 호법용은 바로 나의 큰아들이오. 범왕의 명령을 받고
그 절에 가서 보호하고 있으니, 고국에 돌아가거든 절 안에 9층탑을 세우시오.
그러면 이웃 나라들은 항복할 것이고, 9韓이 와서 조공하여 왕업이 길이
편안할 것이오. 탑을 세우고 나거든 팔관회를 열고 죄인을 용서하면
외적이 해치지 못할 것이오. 또한 나를 위해 경기 남 쪽 언덕에
절 한 채를 짓고 내 복을 빌어주면 나도 또한 그 은덕을 보답하리다."
말을 마치자 드디어 옥을 바친 후 이내 사라지더니 나타나지 않았다.
-사중기에 이르기를 종남산 원향선사에게서 탑을 세워야
하는 까닭을 들었다고 했다.-
貞觀十七年癸卯十六日, 將唐帝所賜經像袈裟幣帛而還國. 以建塔之事聞於上, 善德王議於群臣, 群臣曰: “請工匠於百濟, 然後方可.” 乃以寶帛, 請於百濟, 匠名阿非知, 受命而來, 經營木石, 伊*于(干)龍春[一*<云,作>龍樹.]幹蠱, 率小匠二百人. 初立刹*(柱)之日, 匠夢本國百濟滅亡之狀, 匠內心疑停手, 忽大地震動, 晦冥之中, 有一老僧一壯士, 自金殿門出, 乃立其柱, 僧與壯士, 皆隱不現, 匠於是改悔, 畢成其塔.
정관 17년 계묘(643) 16일에 자장법사는 당나라 황제가 준 불경, 불상, 가사, 폐백 등을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와서 탑을 세울 일을 임금에게 아뢰었다. 선덕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일을 의논하자 신하들은 말한다.
"工匠을 백제에서 청해야 할 것입니다."
이에 보물과 비단을 가지고 백제로 가 청하게 했다. 이리하여 아비지라는 공장이 명을 받고 왔다. 나무와 돌을 재고 이간 용춘-혹은 용수라 한다-이 그 역사를 주관했다. 거느린 小匠이 2백 명이나 되었다. 이에 마음속에 의심이 난 공장이 일을 멈추자, 문득 천지가 진동하며 어두워지더니 노승 한사람과 장사 한 사람이 금전문으로부터 나와서 그 기둥을 세우고는 사라졌다. 그러자 공장은 곧 자신을 후회하고 그 탑을 완성시켰다.
刹柱記云 鐵盤已上, 高四十二尺, 已下, 一百八十三尺. 慈藏以五臺所授舍利百粒, 分安於*(柱)中, 幷通度寺戒壇及大和寺塔, 以副池龍之請. [大和寺在阿曲縣南, 今蔚州. 亦藏師所創也.] 樹塔之後, 天地開泰, 三韓爲一, 豈非塔之靈蔭乎! 後高麗王將謀伐羅, 乃曰 “新羅有三寶, 不可犯也, 何謂也?” “皇龍丈六, 幷九層塔, 與眞平王天賜玉帶.” 遂寢其謀. 周有九鼎, 楚人不敢北窺, 此之類也. 讚曰 鬼拱神扶壓帝京, 輝煌金碧動飛甍. 登臨何啻九韓伏, 始覺乾坤特地平.
찰주기엔 이렇게 적혔다. '철반(鐵盤) 이상의 높이가 42척, 철반 이하는 183척이다.' 자장이 오대산에서 가져온 사리 1백알을 탑 기둥 속과 통도사 계단(스님이 戒를 받는 단)과 또 대화사 탑에 나누어 모셨다. 이는 용의 청에 따른 것이었다.-대화사는 아곡현 남쪽에 있는데 지금의 울주 땅이며 그 절은 또한 자장법사가 세운 것이다.- 탑을 세우고 나니 천지가 형통하고 삼한이 통일되었으니, 어찌 탑의 영감이 아니겠는가. 그 후 고구려왕이 신라를 치려고 계획을 세우다 말했다.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어 침범할 수 없다고 하니 이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 인가?"
"황룡사 장육존상과 9층탑, 그리고 진평왕의 천사옥대입니다." 이 말을 듣고 고구려왕은 그 계획을 그만두었다. 주나라에 구정(九鼎)이 있는 까닭에 초나라에서 감히 주나라를 엿보지 못했다고 하니, 이와 같은 따위일 것이다.
기리어 읊는다.
귀신이 부축한 듯 제경(帝京)을 누르니, 휘황한 금색으로 처마가 움직이네.
이곳에 올라 어찌 구한의 항복만을 보랴, 건곤이 특히 편안한 것 깨닫기 시작했네.
又海東名賢安弘撰東都成立記云 新*<羅,罹>第二十七代, 女王爲主, 雖有道無威, 九韓侵勞, 若龍宮南*皇(黃)龍寺, 建九層塔, 則隣國之災可鎭. 第一層日本, 第二層中華, 第三層吳越, 第四層*托羅, 第五層鷹遊, 第六層靺鞨, 第七層丹國, 第八層女*狄(眞), 第九層穢貊.
또 해동의 명현 안홍이 지은 동도성립기에는 이런 말이 있다.
"신라 제 27대 여왕이 임금이 되니 비록 도는 있으되 위엄이 없으므로 구한이 침범하게 되었다. 만일 대궐 남쪽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면 이웃 나라가 쳐들어오는 재앙을 진압할 수 있을 것이라 하여 탑을 세웠다. 1층은 일본, 2층은 중화, 3층은 오월, 4 층은 탁라, 5층은 응유 ,6층은 말갈, 7층은 거란, 8층은 여진, 9층은 예맥을 진압시킨다."
又按國史及寺中古記, 眞興王癸酉創寺後, 善德王代貞觀十九年乙巳, 塔初成, 三十二孝昭王卽位七年, 聖曆元年戊戌六月, 霹靂, [寺中古記云聖德王代, 誤也. 聖德王代, 無戊戌.], 第*<二(三)>十三聖德王代庚申歲, 重成, 四十八景文王代戊子六月, 第二霹靂, 同代第三重修, 至本朝光宗卽位五年癸丑十月, 第三霹靂, 現(顯)宗十三年辛酉, 第四重成, 又靖宗二年乙亥, 第四霹靂, 又文宗甲辰年, 第五重成, 又*<憲(獻)>宗末年乙亥, 第五霹靂, 肅宗丙子, 第六重成, 又高宗十六年戊戌冬月, 西山兵火, 塔寺丈六殿宇皆災.
또 국사 및 사중고기를 살펴보면 이렇게 되어 있다.
'진흥왕 14년 계유(553)에 황룡사를 처음 세운 후 선덕왕 때인 정관 19년 을사(6 45)에 탑이 마침내 이루어졌다. 32대 효소왕이 즉위한 7년 성력 원년 무술(698)6월에 벼락을 맞았다.-절의 고기에서 성덕왕 때라 한 것은 잘못이다. 성덕왕 때는 무술년이 없었다.- 제33대 성덕왕 경신(720)에 다시 이를 세웠으나 48대 경문왕 무자(868 ) 6월에 두 번째 벼락을 맞았으며, 그 임금 때에 세 번째로 중수하였다. 본조 고려 광종의 즉위 5년 계축(953) 10월에는 세 번째 벼락을 맞았고, 현종 13년 신유(1021)에 네 번째 중수했다. 또 정종 2년 을해(1035)에 네 번째 벼락을 맞았는데, 이것을 문종 갑진(1064)에 다섯 번째 중수했다. 또 현종 말년 을해(1095)에 다섯 번째 벼락을 맞으므로 숙종 원년 병자(1096)에 여섯 번째로 중수했는데, 또 고종 16년(고종 25년이 맞다) 무술(1238) 겨울에 몽고의 병화로 탑과 장육존상과 절의 전우(殿宇)가 모두 재앙을 입었다.'
마패 2009. 2. 12. 18:18
http://blog.daum.net/tourcodi/8126736
현존하고 있다면 세계 최고 최대의 목조건축물로 우리나라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였을 구층목탑이 있었던 경북
경주시 구황동 320-1번지에 위치하고 사적제6호로 지정된 황룡사지(皇龍寺址)는 553년(진흥왕 14) 월성(月
城)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지으려고 할 때 황룡이 나타나자 그곳에다 황룡사라는 절을 지었다고 한다.
569년 법당이 완성되었으며 솔거가 법당 벽에 노송을 그렸는데 날아가던 새가 살아있는 나무인줄 알고 나뭇
가지에 앉으려다가 부딪혀 떨어졌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574년에는 장륙존상(丈六尊像)을 만들어 안치하고, 584년(진평왕 6)에는 금당을 건립했다고 한다. 645년(선덕
여왕 14)에는 목탑을 세움으로서 조성에서 완성까지 100년 가까운 93년이 걸린 신라 최대의 국가사업이었다.
신라의 3가지 보물로 일컬어지는 천사옥대, 황룡사 9층목탑, 황룡사 장육존상 중 두가지가 황룡사에 있는 것
만 보아도 신라에서 국가사찰로서의 황룡사의 비중을 알수가 있다.
장륙존상의 조성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권3 황룡사장륙(皇龍寺丈六)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즉 인도
의 아소카 왕이 석가삼존불을 조조하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황금 3만 분과 황철 5만 7,000근, 석가
삼존의 모형을 배에 실어 바다로 띄우면서 인연이 있는 국토에서 장륙존상이 조성되기를 축원했는데 경주에
이르러 574년에 불상이 완성되었다한다.
<김제 금산사 미륵전 미륵장육상>
이때 장륙존상의 무게는 3만 5,007근으로 황금이 1만 198분이 들었고, 두 보살상은 철 1만 2,000근과 황금 1만
136분이 들었다고 한다. 이 황룡사장륙상은 이듬해 왕이 돌아갈 것을 미리 알고는 눈물을 발꿈치까지 흘려
땅을 1척이나 적셨다고 하는 설화가 전한다.
이 불상은 1238년 몽골 침입 때 완전히 소실되었기 때문에 그 모습은 알 수 없지만 두 다리와 신광(身光)을
꽂았던 구멍이 남아 있는 3개의 자연석 대좌로 보아 삼존불입상이었던 것으로 짐작되며 장륙상은 1장(丈)
6척(尺)이므로 보통 사람 키의 2배가 넘는 5m 정도의 거불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기록에서 인도의
아소카 왕이 상의 모본을 보냈다는 것은 믿을 수 없지만 황룡사금동상이 당시로서는 어느 정도 이국적인
불상양식을 반영한 모습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황룡사구층목탑은〈삼국유사〉권3 황룡사구층탑조와 〈찰주본기 刹柱本記〉에 의하면 당나라로 유학갔던 자장
율사가 “구층탑을 이룩하면 이웃 나라가 항복하여 구한이 와서 조공하고, 왕업이 길이 태평할 것이다“라고
선덕여왕께 청하여 구층탑을 짓게 되었다고 한다.
백제의 명공 아비지가 목재와 석재로써 건축하고, 용춘이 소장 200명을 거느리고 일을 주관했으며, 자장은
부처사리 100과 를 탑 속에 봉안해 645년에 탑을 완성했다.
기록에 의하면 황룡사구층목탑의 높이는 탑신부 약 65m, 상륜부 15m로 전체 82m에 달한다고 전해지는데
오늘 건축물로 비교해 보면 27층 아파트 높이 정도의 탑이 서라벌(경주)시내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었으니
그 모습은 얼마나 웅장했을지는 가히 짐작이 간다.
황룡사 9층목탑을 보고 지은 고려시대의 시를 보면 마치 눈으로 보는듯한 착각이 일정도로 황룡사구층목탑의
모습이 눈에 그려진다.
層梯繞欲飛空 (층제요욕비공) 층계 사다리 빙빙 둘러 허공에 나르는 듯
萬水千山一望通 (만수천산일망통) 수많은 하천과 산들이 한눈에 보이네
俯視東都何限戶 (부시동도하한호) 굽어보니 옛 도읍지의 수많은 집들이
蜂?蟻穴轉溟 (봉과의혈전명) 벌집 같고 개미굴 같아 아득하기만 하네
- 김극기(문장가), 김거사집에서-
황룡사구층탑은 불력(佛力)으로 이웃나라의 침략을 막아 나라를 지킨다는 뜻에서 세운 것으로 1층은 일본,
2층은 중화(中華), 3층은 오월(吳越), 4층은 탁라(托羅), 5층은 응유(鷹遊), 6층은 말갈(靺鞨), 7층은
단국(丹國), 8층은 여적(女狄), 9층은 예맥(濊貊)에 대항하는 것을 상징한다.
아홉 개의 층은 모두 신라 변방의 나라들을 가리켰고 탑을 세움으로써 이웃의 침해를 누를 수 있었다고 한다.
삼국유사에서 일연스님이 지은 시에서도 황룡사 구층목탑의 호국의지는 잘표현되어 있다.
鬼拱神扶壓帝京 (귀공신부압제경) 귀신들의 도움 받아 서울 땅을 진압하고
輝煌金碧動飛 ? (휘황금벽동비맹) 휘황찬란한 색깔 속에 용마루는 나는 듯
登臨何? 九韓伏 (등임하시구한복) 올라보니 어찌 변방 나라 복종으로만 그치랴
始覺乾坤特地平 (시각건곤특지평) 비로소 온 천하의 태평한 이유 알겠네
이 목탑은 718년(성덕왕 17)에 벼락을 맞아 불에 탄 이래 868, 872, 1012, 1022, 1064년에 각각 중수되었으나
1238년 몽골 침입으로 완전히 소실되었다.
백제 장인 아비지가 1360년전에 완공한 황룡사 구층목탑은 그기술과 과학적 원리가 아직 규명되지 못해서 현존
하는 기술로 지어진 목탑중 진천보탑사에 있는 52m 높이의 3층목탑이 유일한 실정이다.
진천 보탑사 3층목탑은 신영훈한옥문화원 원장, 조희환 도편수, 태창건축 박태수 소장, 심용식 소목장, 최교준
야철장, 이진형 조각장, 한석성 화사, 이화여대 조정현 교수, 김영일 가산건설회장 등 당대 최고의 장인들이
조성한 건축물이다.
경주시와 문화재연구소가 6년간 그비밀을 연구하여 2017년에는 황룡사 구층목탑을 복원한다고 하니 천년전의
우리조상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수가 있다.
<2007년 음각형태의 유리소재로 복원된 경주타워>
〈삼국유사〉 권4 황룡사종(皇龍寺鐘)조에 보면 754년(경덕왕 13) 구리 49만 7,581근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종을 만들었다고 하나 이 종도 역시 몽골 침입 때 없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황룡사지 부근에서 출토된 것으로 현재 얼굴 부분만 남아 있는 신라시대 금동보살상은(머리높이
8.3cm/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전체적으로 파손이 심하며 도금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머리에는 삼산관
(三山冠)을 쓰고 있고 얼굴은 둥글고 통통한 편으로 아래로 내려뜬 눈, 작게 표현된 입과 함께 미소를 띠고
있어 부드러운 인상을 느끼게 해준다. 특히 오른쪽 뺨에는 손가락을 댔던 흔적이 남아 있어 원래는 반가사유상
(半跏思惟像)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머리 뒷면에는 두광을 꽂았던 것으로 여겨지는 돌기가 나와 있다.
이 보살 머리에 보이는 삼산관 형태의 보관이나 양감 있고 미소를 띤 얼굴 표정 등은 국보 제83호 금동반가
사유상이나 경주 단석산신선사마애불상군의 반가상과 양식적으로 공통점이 발견되므로 그 제작연대는 7세기
전반으로 추정된다.
황룡사는 삼국시대에 가장 큰 규모의 절로 신라 불교수용 초기에 지은 흥륜사(興輪寺)와 함께 6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왕실사찰이었다.
황룡사에서는 자장, 원효 등 신라 최고의 고승들이 설법하고 진흥, 진평, 선덕, 헌강, 진성의 제왕이 친 히
설법을 듣던 곳이다.
황룡사는 고려 고종 25년에 몽고의 침입으로 모두 불타 없어져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있다. 늪지를 메워서
그 위에 지은 황룡사는 중문, 목탑, 금당, 강당이 남북으로 길게 배치된 1탑식 배치였다. 그러나 장육존상과
목탑 등이 조성된 후 금당 좌우에 작은 금당이 배치되는 1탑 3금당식으로 바뀌고, 탑의 좌우에 종루와 경루가
대칭을 이루어 배치되었다. 또 사방은 복도와 같은 회랑으로 둘러싸여, 독특한 가람배치를 보이고 있다.
1969년 7월 이곳 강당지를 발굴조사하여 금당, 강당, 탑지의 초석을 발굴했고, 1976년 3월 부터 8년간의 발굴
작업에서 독특한 가람배치인 일탑 삼금당식으로 밝혀졌으며, 금동불입상(높이 10㎝)을 비롯하여 풍탁(風鐸)
·금동귀걸이·동경(銅鏡)·와전(瓦塼)·치미(鴟尾 : 높이 182㎝) 등 4만여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기단을 비롯한 건물 하부구조는 확인되었으나 상부가구재는 정확히 고 증되지 않아 전체적인 복원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기단부만 복원하였다. 발굴된 터에서 나타난 사찰의 면적은 불국사의 8배나 될정도여서 황룡사가 얼마나
대단한 사찰이었는지 규모만 가지고도 알수가 있다.
[관련자료]
http://korean.visitkorea.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