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어야 산다.”
"어서 수산에 있는 유다 사람들을 한 곳에 모으시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게 하십시오. 사흘 동안은 밤낮 먹지도 마시지도 말게 하십시오. 나와 내 시녀들도 그렇게 금식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고 난 다음에는, 법을 어기고서라도, 내가 임금님께 나아가겠습니다. 그러다가 죽으면 죽으렵니다." (에스더 4:16)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대신하여 자기 몸을 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갈2:20)
얼마 전 “엣지 오브 투모로우”(내일이 오기 전의 경계)라는 톰 크루즈가 주연한 영화를 보았습니다. 이 영화는 오늘에서 탈출하기 위한 방법으로 죽음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가까운 미래, 미믹이라 불리는 외계 종족의 침략으로 인류는 멸망 위기를 맞습니다. 장교 빌 케이지는 자살 작전이나 다름없는 작전에 훈련이나 장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로 배정되고 전투에 참여 하자마자 죽음을 맞게 됩니다. 하지만 미믹의 피를 뒤집어쓰면서 죽던 그 순간부터 불가능한 일이 일어납니다. 다시 끔찍한 날이 시작된 시간에 다시 깨어나 다시 전투에 참여하게 되고 다시 죽었다가 또 살아나서 또다시 전투에 참여하게 됩니다. 외계인과의 접촉으로 같은 시간대를 반복해서 경험하게 되는 다시 말해 하루를 리셋하는 능력을 지니게 됩니다. 항상 죽음 앞에서 망설이지만 죽음으로 미래를 반복적으로 경험하게 되고 결국은 인류를 구원한다는, “죽음으로 세상을 구원한다.”는 내용입니다.
모든 것은 죽습니다.
인생은 출생과 어느 정도의 성장 후에는 죽음을 향해 갑니다. 죽음을 면하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은 있지만 죽음을 면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불노초를 구하던 진시황도, 100세 시대라고 하며 120세를 살자는 요즘도 결국은 죽음을 맞이합니다. 인간의 생노병사와 같이 국가도 흥망성쇠를, 음악·건축 등도 시대에 따라 달라집니다. 어떤 것도 처음 모습 그대로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얼마 전 르웰린 보간리라는 분의 책에서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지구의 기후가 흔히 급작스럽게 변한다는 사실은 대다수 과학자들이 동의하는 점이다. 그러나 IPCC(기후변화에 대한 정부간 협의체) 제 5차 보고서(2013)는 기후변화의 양성 피드백, 특히 “핵 재앙을 능가할 시한폭탄”으로 불리는 영구동토층의 메탄가스 방출을 계산하지 않은 채 결론을 내렸다. 이미 영구동토층이 녹기 시작하여 이산화탄소 보다 온실효과가 20배가 넘는 메탄이 방출되고 있는 현실에서, “21세기말까지 영구동토층 감소 면적이 최소 37%에서 최대 81%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으면서도, “영구동토층의 해빙 효과는 불확실성이 있다.”며 예측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보고서는 21세기 말에는 세계평균기온이 1986~2005년 대비 섭씨 1도~3.7도 상승할 것으로 예상했다. 세계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2000~2011년 연평균 3.1%씩 증가하여 IPCC의 최악의 시나리오(2.5% 상승)보다 더욱 악화되고 있다. 그러나 2010년 이후 메탄가스의 기하급수적인 방출로 인한 양성 피드백을 계산한 연구들(UNEP,2010;Malcolm Light, 2012;Nafeez Ahmed, 2013 ; Nick Breeze,2013;Guy NcPherison,2013)에 따르면, 2040년을 전후로 섭씨 4도 상승하여 “여섯 번째 대멸종”이 거의 끝나며 인류 대부분도 죽게 될 것으로 예상한다. 21세기 말까지 섭씨 5도 상승하고, 메탄 방출로 인해 6도 추가 상승할 것으로 예상한다. 미국과 영국의 안보 전문가들조차 인류문명이 63~75년을 넘기지 못할 것으로 전망한다.
죽어야 사는 길
하나님께서 인간을 흙으로 지으신 후 생기를 불어 넣어 주심으로 창조하시고 “심히 좋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심히 좋았던 그 인간은 뱀의 꼬임과 먹음직도 보암직도 한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써 건널 수 없는 죄의 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죄는 과녁에서 벗어남(하르마티아), 빚을 지고 갚지 않는 것(오페일레마), 미끄러져 넘어짐(파랍토마), 탈선(파라바시스), 불법을 행함(아노미아)을 말합니다. 그 죄로 인해 하나님과 분리 되었고 자연과 경쟁해야 하며 사람 간에 다툼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단절과 분리를 해결하고자 예수님께서 산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셨다가 죽음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길어야 100년을 넘길 수 없는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연 파괴와 사람 간의 단절은 계속 되고 있으며 부활의 영광은 기대하면서 십자가는 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한국 교회 개신교인의 수가 1천만이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 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500만이라는 이야기가 들립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300만까지 줄어 들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그것은 성직매매가 공공연하여 이젠 교회마다 단가를 매겨야 한다는 자조석인 이야기가 나올 정돕니다. 또한 교회가 공교회가 아니라 개인화, 사유화 되어 있고 세상을 섬기고 경건함으로 이끌어야 하는데 오히려 세상의 병폐를 답습해가는 교회의 모습 때문이지 어떤 역사의 흐름이나 흥망성쇠의 진리 때문이 아닙니다. 즉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교회에서 목사가 죽어지고 교인이 죽어져야 하는데 오히려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의 가슴 속에 잘 살기 위한 기복적인 신앙만 남고 십자가는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욕망과 죄에 사로잡혀 하나님, 인간, 자연과 단절된 아담과 하와처럼 이 시대와 인류 또한 예수와 함께 죽어야 비로써 사는 십자가에 달리신 것처럼 스스로를 못 박고 회개함으로 부활하신 예수와 동행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들 가운데 그리스 사람이 몇 있었는데, 그들은 갈릴리와 벳새다 출신인 빌립에게로 가서 "선생님, 우리가 예수를 뵙고 싶습니다."하고 청하였다. 빌립은 안드레에게로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은 예수께 그 말을 전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자기의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생에 이르도록 그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나를 섬기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있는 곳에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나의 아버지께서 그를 높여 주실 것이다." (요한복음 12:20~26)는 말씀처럼 죽어야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살아서 죽는다는 것은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대신하여 자기 몸을 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갈2:20)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은 정욕과 욕망과 함께 자기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삶을 얻었으니 우리는 성령이 인도해 주심을 따라 살아갑시다.”(갈 5:24)
교회가 살기 위해서는 교회의 구성원인 목사와 교인 모두 죽어져야 합니다. 죽어야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아라비아인의 수수께끼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늙은 아버지가 자기 유산을 세 아들에게 물려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물려줄 수 있는 유산이라곤 낙타 18마리뿐이었습니다. 아버지는 18마리 중에서 자신이 제일 사랑했던 한 마리는 끝까지 자신이 갖고 나머지 17마리를 자녀들에게 물려줄 생각이었는데, 그 나라의 법에 따르면 제일 큰아들은 1/2, 둘째는 1/3. 그리고 막내는 1/9을 주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17마리의 낙타를 어떻게 그런 비율로 나눌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수수께끼를 어떻게 풀 수 있을까요? 수학적으로는 아무리 계산해도 답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수수께끼의 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당신이 제일 사랑해서 끝까지 갖고 있으려고 했던 그 한 마리를 내 놓고, 17마리 수에 합하여 전체를 18마리로 만들어서 계산하고 분배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큰아들은 9마리를 둘째 아들은 6마리를, 그리고 막내는 2마리를 물려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 있는 것은, 이렇게 다 분배하고 나면 1마리가 남게 됩니다. 그때 아버지는 자기가 사랑하는 그 낙타를 그대로 가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아버지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그 낙타를 먼저 갖고 나서 나머지를 분배하려고 하면,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한 마리를 내어놓고, 분배하고 나면, 자기의 것을 그대로 차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수수께끼는 우리들에게 하나의 놀라운 교훈을 줍니다. 인생의 많은 문제는 자기의 것을 내놓지 않고 고집할 때 얽히게 되지만, 자신을 희생하려고만 하면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죽어야 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보통 죽음이라는 것은 이 세상을 떠나는 숨이 멈추고 흙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종교가 그렇듯이 기독교의 신앙에서는 인간의 모든 고통과 불행, 허무의 극복을 죽음 이후의 천국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죽은 후의 천국뿐이 아니라 지금 현재의 천국을 누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은 후의 천국은 약속이고 지금의 천국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어느 날 홍수가 나서 물이 많이 불었는데 수영할 줄 모르는 사람 하나가 빠져 허우적거리면서 살려 달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수영을 잘하는 구조대원 두 사람이 그 쪽으로 헤엄쳐 갔습니다. 그런데 건질 생각은 하지 않고 가까이 다가간 채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물에 빠진 그 사람은 죽는다고 야단입니다. 그러다가 이윽고 기진맥진해서 더 버둥거리지 않습니다. 두 구조대원은 그제야 손을 써서 그 사람을 건져냅니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왜 빨리 건지지 않고 기다렸느냐고 물으니 그들은 ”저 사람이 힘이 남아 있어서 버둥거릴 때에 손을 잡았다가는 내 목까지 끌어안아서 둘 다 죽게 됩니다. 살겠다는 생각을 아주 버리고 손을 들어야 안심을 하고 건져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 살겠다는 생각을 아주 버리고 손을 드는 것을 말합니다.
성 마키리우스에게 제자가 묻습니다. “세상에 대하여 죽는다는 말들을 하는데 그게 무슨 뜻입니까?” 성자는 아주 실질적으로 가르쳤습니다.
“너는 오늘 밤에 저 공동묘지에 가서 무덤 속에 있는 사람들 보고 ‘이 나쁜 놈들아, 이 위선자들아, 이 부자 놈들아, 이 천하에 고약한 놈들아’하고 욕이란 욕은 있는 대로 다하고 돌아오너라.”
제자는 성자가 시키는 대로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를 보고 성자가 묻습니다. “어떻더냐?” 제자가 보고합니다. “아무 반응도 없던데요.”, “그렇더냐? 그러면 내일 아침에 다시 가서 이번에는 칭찬을 해 보아라. ‘ 아, 훌륭하고 위대한 분들이여’하고.” 제자는 아침이 되자 다시 묘지로 가서 성자가 시키는 대로 무덤들을 향하여 잔뜩 칭찬의 소리를 늘어놓고 돌아왔습니다. “이번에는 어떻더냐? 성자가 묻습니다.” 역시 아무 반응이 없습니다.“
비로써 성자는 말합니다. “그게 바로 죽었다는 것이다.” 욕을 들어도, 칭찬을 받아도 평정심을 지킬 수 있는 바로 그러한 진짜 죽는 것을 말합니다.
죽어야 사는 성도의 삶
첫째, 가수 하덕규의 “가시나무 새”라는 노래의 가사 가운데 이런 귀절이 나오지요.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우리들의 것들로 가득 채워져 하나님의 것이 우리 속에 존재할 수 없는 바로 그 나를 버리는 것입니다. 어둠과 슬픔 가득한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둘째, 숨어 있던 내가 하나님 앞으로 나와야 합니다. 범죄 한 후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두려워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죽어진다는 것은 바로 숨으려고 하는 나를 하나님 앞으로 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 말씀처럼 빛으로 나와 새 사람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에스더는 자기 민족을 사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이라는 긍지도 있었습니다. 그럼으로 민족의 위기상황에 목숨을 걸고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한 것입니다. 이 시대에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을 사랑해야 합니다.
넷째, 자기가 할 일을 알고 그것을 위해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행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의 말씀처럼 자신의 사명을 알아야 하며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아야 합니다.
다섯째, "어서 수산에 있는 유다 사람들을 한 곳에 모으시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게 하십시오. 사흘 동안은 밤낮 먹지도 마시지도 말게 하십시오. 나와 내 시녀들도 그렇게 금식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고 난 다음에는, 법을 어기고서라도, 내가 임금님께 나아가겠습니다. 그러다가 죽으면 죽으렵니다." (에스더 4:16)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민족을 위해 나선 에스더는 자신의 신분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가장 먼저 한 것은 기도입니다. 혼자 기도한 것도 아니고 유다의 백성과 시녀들까지 합심하여 기도했습니다.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여 목숨을 건 것입니다.
현실에서 죽는 삶에서 부활의 신비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