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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굿뉴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고통 속에 기쁨이 있고, 기쁨 속에 고통이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네 인생의 대 주제인 고통과 기쁨에 대해서 가르치고 계십니다. 고통을 극복하기 위한 정확한 해결책을 주시지는 않지만, 고통이 얼마나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인지를 강조하십니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 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성모 성월을 맞아 성모님께서 겪으셨던 고통과 기쁨을 생각하니 예수님 말씀이 크게 수긍이 됩니다.
성모님의 생애는 기적같은 사건들로 가득합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고, 동정으로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고, 베틀레헴에 큰 별이 뜨고, 그 먼 곳에서 온 동방박사들이 방문하고, 요셉이 피하라는 꿈을 꾸고,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피신을 갑니다. 기적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보면, 마리아의 생애는 고통으로 가득합니다. 파혼당할 위기를 겨우 넘기고, 출산 때 방 한 칸 못 구하고, 헤로데 학살을 피해 난민이 되고, 다양한 예수님의 돌출 행동이나 발언으로 상처 입고, 마침내 아들이 십자가 위에서 죽는 것을 직접 목격합니다.
성모님 고통의 절정이라면 아무래도 성 금요일 오후 골고타 언덕 아래 서 계셨던 고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장면에 대해서 교부들과 역대 교황님들께서 동일한 강조를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실 때, 마리아께서도 십자가 아래서 영적 고통을 겪고 죽으심으로써, 둘째 아들, 곧 당신께서 사랑하시던 제자와 그리고 또 다른 아들인 우리 교회를 영적으로 출산하셨다. 마리아의 고통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유다교 학자 데이비드 플루서의 가르침이 큰 감동을 줍니다.
“마리아는 교회의 상징이자 이스라엘 민족의 상징이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될 점이 한 가지 있다. 고통의 어머니 마리아는 구름 위에 떠 있던 신화적인 인물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이 지상의 구체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고통의 어머니(Mater Dolorosa)는 신학적 개념이나 산물이 아니라, 온 몸으로 고통을 겪었던 인물이다. 그러나 고통 속에서도 충만한 기쁨에 고무되어, 혹독한 고통에 꺾이지 않았던 한 실제 인물이다.”
참 아름다운 표현입니다. 고통 속에서도 충만한 기쁨에 고무되어! 우리도 이 세상 살아가면서 숱한 고통으로 인해 슬퍼하고 좌절하지만, 우리가 누리는 기쁨이 충만하다면 그까짓 고통 아무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그것을 당신 전 생애를 통해 우리에게 잘 보여주셨다고 생각합니다. 따지고 보니 고통 속에 기쁨이 있고, 기쁨 속에 고통이 있습니다. 기쁜 고통의 배경에는 고통에 대한 의미 추구 작업이 있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참 기쁨을 알면 진리에 도달한 것이다
"여자가 해산할 때에는 진통이 닥쳐 근심에 싸인다. 그러나 아기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 때문에 그 고통을 더 이상 기억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요한 16,21-22)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십자가 죽음 앞에서 두려움에 떠는 제자들에게 아주 원초적이고도 강력한 비유를 들려주신다. 바로 해산하는 여인의 진통이다. 세상 사람들은 고통을 무조건 피하고 제거해야 할 최악의 질병으로 여긴다.
진통제가 없으면 단 하루도 견디지 못하는 것이 현대인의 나약함이다. 하지만 신앙인은 고통을 맹목적으로 피하는 사람이 아니다. 신앙인은 이 고통이 과연 무엇을 낳는지, 그 찢어지는 진통 끝에 어떤 생명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정확히 아는 사람이다. 참된 기쁨은 고통이 소멸할 때 오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뚫고 쏟아져 나오는 새 생명의 첫 울음소리를 듣는 순간에 완성된다.
이 위대한 생명 잉태의 역설을 온몸으로 증명하고 떠난 현대의 위대한 성녀가 있다. 1962년에 선종한 이탈리아의 소아과 의사이자 네 아이의 어머니였던 성 잔나 베레타 몰라(Gianna Beretta Molla)의 이야기다.
그녀는 넷째 아이를 임신한 지 두 달째 되던 날, 자궁에 거대한 종양이 생겼다는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받았다. 의사들은 그녀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즉각 자궁을 적출하거나 아기를 지우고 수술을 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그것이 고통을 피하고 생존을 도모하는 세상의 합리적인 법칙이었다. 하지만 잔나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의사 선생님, 제 목숨을 구하려 아기를 죽일 수는 없습니다. 제 고통은 제가 짊어질 테니,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아이의 생명만은 살려주십시오."
임신 기간 내내 종양이 자라면서 자궁을 짓누르는 극한의 진통이 그녀의 몸을 찢어놓았다. 그녀는 뼈를 깎는 고통 속에서도 기도하며 끝내 만삭을 채웠고, 건강하고 아름다운 딸 잔나 에마누엘라를 낳았다. 하지만 출산 직후, 감염에 의한 패혈증성 복막염이 찾아와 그녀를 죽음의 문턱으로 몰아넣었다.
그녀의 임종을 지켜본 남편 피에트로 몰라의 증언에 따르면, 그녀는 염증과 고열 때문에 그토록 목숨 걸고 살려낸 아기를 직접 품에 제대로 안아보지도 못했을 만큼 비참한 육체적 고통 속에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임종의 순간, 그녀의 얼굴에는 후회나 절망의 그늘이 단 1퍼센트도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예수님,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끊임없이 속삭이며, 자신의 목숨과 맞바꿔 세상에 태어난 새 생명에 대한 환희 속에서 세상 어떤 권력자도 갖지 못한 눈부신 미소를 지으며 평온하게 눈을 감았다. (출처: 피에트로 몰라, 『성 잔나 베레타 몰라의 생애』)
어떻게 죽어가는 끔찍한 고통 속에서 이토록 찬란하게 미소 지을 수 있을까? 내 육신이 부서지는 고통을 완벽하게 압도해버리는 '새 생명 탄생의 기쁨'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자연계의 생명체들 역시 기존의 낡은 자아를 부수고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기 위해 필연적으로 고통을 겪어야만 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저명한 정신과 의사이자 랍비인 에이브러햄 트워스키(Abraham Twerski)가 제시한 '랍스터의 성장' 법칙을 보라.
랍스터는 연약하고 부드러운 속살을 가지고 있지만, 아주 단단한 껍질에 둘러싸여 있다. 문제는 랍스터의 속살은 계속 자라는데 껍질은 절대 늘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랍스터가 성장할수록 낡은 껍질은 몸을 잔인하게 짓누르기 시작한다. 랍스터는 껍질 안에서 엄청난 압박감과 숨이 막히는 극한의 고통(진통)을 느낀다.
이 죽을 것 같은 고통의 신호가 오면, 랍스터는 바위 밑으로 들어가 자신을 지켜주던 낡은 껍질을 찢고 밖으로 빠져나오는 피나는 산고를 겪는다. 껍질을 벗은 순간 가장 연약하고 위험한 상태가 되지만, 이 고통스러운 찢어짐의 과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자신을 품을 수 있는 더 크고 단단한 새로운 껍질, 즉 '새 생명'으로 탄생하게 된다. 랍스터는 평생 이 해산의 진통을 반복하며 거대한 생명체로 자라난다.
트워스키 박사는 뼈 있는 농담을 던진다. "만약 랍스터에게 인간의 의사가 있었다면, 랍스터는 압박감과 고통을 느낄 때마다 신경안정제나 진통제를 처방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고통을 피한 대가로 영원히 낡은 껍질 속에 갇혀 죽어갔겠지요."
인간이 십자가의 진통을 피하려 세상의 마취제에 숨는 것과 같다. 고통은 우리를 파괴하는 질병이 아니라, 우리 영혼이 낡은 자아의 껍질을 찢고 하느님의 자녀라는 '새 생명'으로 탄생할 때가 되었음을 알리는 거룩한 신호인 것이다. (출처: 에이브러햄 트워스키, 『Growing Each Day』)
그렇다면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고 용서하느라 겪는 그 억울함과 상처의 기억들은 어떻게 기쁨으로 변환되는 것일까? 예수님의 말씀처럼 "아기를 낳으면 그 고통을 더 이상 기억하지 못하는" 이 신비를 뇌과학에서는 옥시토신(Oxytocin)이라는 호르몬으로 완벽하게 설명한다. 여성이 해산할 때 겪는 뼈가 벌어지는 통증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고의 고통 중 하나다. 정상적인 뇌라면 이 끔찍한 트라우마를 평생 기억하며 다시는 임신을 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러나 피투성이가 된 아기를 낳아 가슴에 품는 바로 그 순간, 산모의 뇌에서는 사랑과 결속의 호르몬인 옥시토신이 평소의 수십 배로 폭발적으로 분비된다. 이 옥시토신은 산모의 뇌를 문자 그대로 포맷해 버린다. 고통의 끔찍한 기억 자체를 하얗게 덮어버리고, 그 자리를 아기를 향한 절대적인 맹목의 사랑과 환희로 가득 채워 넣는다.
성령은 바로 우리 영혼에 쏟아지는 '영적 옥시토신'이다. 우리가 주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 자존심을 꺾고, 미운 이웃을 용서하기 위해 피눈물을 흘리며 십자가의 진통을 견뎌낼 때,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 영혼에 성령을 폭포수처럼 쏟아부어 주신다.
이 성령의 옥시토신이 뇌를 덮치는 순간, 내가 세상에서 겪었던 억울함, 모욕, 배신의 상처라는 십자가의 트라우마는 완벽하게 삭제된다. 그리고 오직 내가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났으며, 내 희생을 통해 이웃의 영혼을 하느님께 낳아주었다는 압도적인 기쁨만이 내 영혼을 온전히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복음의 결론으로 우리에게 이렇게 웅장한 도장을 찍어주신다.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요한 16,22)
이 결코 빼앗기지 않는 기쁨의 원리는 현대 IT 공학의 핵심 기술인 블록체인(Blockchain) 시스템과 정확히 일치한다. 세상 사람들이 그토록 추구하는 기쁨, 즉 돈, 권력, 건강, 인기는 내 지갑 속에 든 현찰이나 특정 회사의 중앙 서버에 저장된 데이터와 같다. 도둑이 지갑을 훔쳐 가거나, 해커가 서버를 털어버리거나, 주식 시장이 폭락하면(사기, 파산, 질병) 그 기쁨은 하룻밤 사이에 공중으로 증발해버린다. 세상의 기쁨은 누군가가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빼앗아 갈 수 있는, 해킹에 절대적으로 취약한 저급한 시스템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의 산고를 뚫고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기쁨과 자존감은 차원이 다르다. 내가 우주 창조주의 고귀한 상속자이며, 십자가의 진통을 통해 이웃의 영혼 속에 하느님을 낳은 거룩한 어머니가 되었다는 이 영광스러운 팩트는 도대체 어디에 기록되어 있을까? 내 통장이나 얄팍한 기억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느님의 장부와 수천억 명의 천사들, 그리고 천국의 모든 성인의 장부에 실시간으로 분산되어 완벽하게 저장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영적 블록체인 기술이다.
사탄이 아무리 내 삶의 통장을 해킹하여 내 돈과 건강을 털어가려 덤벼들어도, 천국 전체에 분산 저장된 나의 고귀한 정체성(하느님의 자녀)과 그로 인한 기쁨의 기록은 결코 위조하거나 삭제할 수 없다. 해킹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완벽한 보안 시스템이기에, 세상 그 어떤 마귀나 불행도 이 기쁨을 내게서 빼앗을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일까? 기쁨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당신이 말씀하시려는 것의 목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해산의 고통, 곧 십자가의 영광을 깨달았다면 더는 물을 것이 없어진다. 교부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시편 강해』에서 이렇게 일갈했다.
"성인들이 흘린 눈물은 기쁨을 잉태하는 거룩한 씨앗이다. 십자가의 찢어지는 진통 없이 부활의 기쁨만을 훔치려는 자는, 생명 없는 허수아비로 영원히 시들어갈 것이다." (출처: 성 아우구스티누스, 『시편 강해』).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요한 16,20-23: 그 기쁨은 아무도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제자들에게 산모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다. 아이를 낳는 순간 어머니는 큰 고통을 겪지만, 새 생명을 품에 안을 때 그 고통은 잊고 기쁨만 남게 된다. 제자들도 마찬가지다. 스승을 잃는 슬픔은 깊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만나게 될 때 그 슬픔은 영원히 빼앗기지 않을 기쁨으로 변할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구절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너희의 슬픔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그리고 너희의 기쁨은 그 누구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In Ioannis Evangelium Tractatus 101, 요한 16,20-22 의역) 아우구스티노는 이 기쁨이 단순히 감정적 즐거움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과의 친교에서 오는 영원한 기쁨이라고 강조한다. 세상의 기쁨은 변하지만,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역시 고통이 단순히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낳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주님께서는 ‘고통이 지나간 뒤에 기쁨이 올 것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 고통 자체가 기쁨으로 변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Homiliae in Ioannem 79, 요한 16,20 의역) 즉, 십자가의 고통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총 안에서 부활의 기쁨으로 변모하는 것이다.
교회는 이 진리를 성인들의 삶에서 확인한다. 성인들의 축일은 ‘죽음의 날’이 아니라 ‘천상 탄일(誕日)’로 불린다. 성 치프리아노는 이렇게 말한다. “그날은 ‘탄일’이라 불리는데, 이는 우리가 죽음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생명으로 태어나기 때문이다.”(Epistulae 58 의역) 우리가 겪는 고통과 희생은 단순히 우리를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새로운 생명, 곧 하느님의 생명으로 태어나게 하는 산통(産痛)과도 같다. 교리서도 이렇게 가르친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통을 받는 것은 그분의 구원 활동에 동참하는 것이며, 이는 새 생명을 낳는 은총의 통로가 된다.”(1521항 요약)
우리 삶에도 수많은 고통이 있다. 그러나 그 고통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그것은 단순한 아픔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낳는 통로가 된다. 십자가의 어둠 속에서 부활의 빛을 기다린 제자들처럼, 우리도 그분께서 약속하신 기쁨을 희망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세상이 줄 수도, 빼앗을 수도 없는 기쁨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오늘 이렇게 기도하자. “주님, 저희의 고통을 부활의 기쁨으로 변화시켜 주시고, 그 기쁨을 영원히 지켜주소서.”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대니얼 카니먼 박사의 인상 깊은 말이 있습니다. 우리 결정의 대부분은 가슴이 내린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싶었습니다. 결정은 원래 머리로 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카너먼 박사는 머리는 가슴이 이미 내린 결정을 뒤따라가며, “그래, 이건 이래서 좋은 선택이었어.”라고 합리화하는 역할을 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볼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혹시 ‘이런 상황에서는 슬퍼야 해, 이런 상황에서는 웃어야 해.’라면서 머리로 생각할까요? 아닙니다. 어느 순간 공감하면서 마음이 움직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감동을 계속 머리로 떠올릴 수 있도록 합니다. 즉, 머리가 분석하기 전에 마음이 먼저 반응함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이 먼저 움직일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머리가 먼저인 것처럼 판단합니다. 생각을 곰곰이 하면 늦게 됩니다. 그래서 ‘장고 끝에 악수 둔다.’라는 말도 있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의 모든 말씀과 행적은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게 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과 행적을 머리로 계속 떠올리면서 스스로 판단합니다. 마음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계산하면서 행동하려고 합니다. 과연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따를 수 있을까요?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주님 말씀에 집중하면서, 우리 역시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세상은 자신들이 승리했다고 착각하며 기뻐할 것입니다. 반면 제자들은 스승을 잃은 절망과 두려움 속에서 깊은 애통에 빠지게 됩니다. 모두 마음이 아닌 머리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근심 대신 기쁨을 주겠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근심이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슬픔과 기쁨이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십자가 사건이 부활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는 가장 위대한 기쁨의 원천으로 변화된다는 것을 이야기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산모의 해산 고통을 말씀하십니다.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해 반드시 겪어야 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가 새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한 진통이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다시 보게 되면’이라고 하지 않고, 주어를 바꿔서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이라고 하십니다. 구원의 주도권이 철저히 주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노력보다 더 큰 것은 주님의 사랑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마음을 충분히 흔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우리도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이 크게 기뻐하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사랑은 우리를 강하게 하고 우리가 계속 나아가도록 만든다(조나 레러)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05.15.금.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
하느님 안에
뿌리내린 기쁨은
그 누구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세상이 줄 수도 없고
세상이 빼앗을 수도 없는
참된 기쁨입니다.
하느님 안에 머무는
사랑의 기쁨은
세상의 힘으로는
결코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하느님 안에 머무는 사람만이
빼앗기지 않는 기쁨에 이릅니다.
사라지지 않는
생명의 기쁨입니다.
존재 자체가
사랑받고 있다는
깊은 깨달음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참된 기쁨은
세상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뜻 안에서
우리의 삶을
바로 세웁니다.
모든 순간을
하느님께 맡기는
기쁨입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믿음 안에서
자라나는
기쁨입니다.
하느님의 사람답게
살아가려는 그 기쁨을
끝까지 잃지 않는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빼앗기지 않는
기쁨의 길에서
그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으로
살아가는 기쁨의
오늘입니다.
※카톡 신부님 - 굿뉴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사도18,9-18 요한15,9-17
위대한 스승들
“영원한 스승이고 주님이자 친구이신 예수님”
노인은 많아도 어른은 없고 선생은 많아도 스승은 없다 하는데 오늘은 선생조차 사라진 시대 같습니다. 오늘 옛 현자의 가르침이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참된 스승은 제자를 통해 다시 배운다. 고전의 가르침을 통해 제자와 함께 자란다.”<다산>
비단 스승이 아니라도 평생 겸손한 배움의 자세로 살아가는 평생학인의 삶은 참 아름답습니다.
“옛 것을 익혀 새것을 알게 되니 스승은 할만하다.”<논어>
삶의 스승이 되고자 노력하는 삶도 참 아름답습니다.
오늘은 스승의 날이자 성군이라 일컫는 위대한 스승 세종대왕 제629돌 탄신일로 법정 국가기념일입니다. 세종대왕 평전 표지의 소개 글만 봐도 그가 얼마나 시공을 초월한 지혜로운 스승인지 잘 드러납니다.
“세종은 비굴한 사대주의자도 아니고 배타적 민족주의자도 아니다. 국제주의와 민족주의를 배합시킨 그 중간에 자리잡고 있는, 다시 말해 우리의 민족적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국제사회와 개방적인 자세로 교류하여 공동번영을 꿈꾼 이상주의자이면서 현실주의자, 바로 그 자리에 그는 우뚝 서있다.”
그대로 오늘날에 통하는 위대한 스승의 모습입니다. 성군 세종대왕의 평전을 보면 그가 얼마나 백성을 사랑했는지, 또 다방면에 걸친 불가사의의 천재인지 경탄을 금치 못합니다. 사도행전의 바오로 사도 역시 믿은 이들에게는 예수님을 그대로 닮은 불세출의 스승입니다. 얼마나 예수님이 제자 바오로를 사랑했는지 선교 방향을 환시 중에 제시하고 격려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잠자코 있지 말고 계속 말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어 해치지 못할 것이다.”
새삼 영원한 참 스승인 파스카 예수님의 면모를 봅니다. 믿는 이들의 생명은 하느님 손안에 있으니 말 그대로 인명은 재천입니다. 새벽에 본 멋진 노년의 삶의 세 조건, “active-interest-enjoy, 활동-관심-즐김” 역시 배움의 여정에 좋은 참고가 됩니다.
오늘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공주수도생활의 아버지라 일컫는 성 파코미오 아빠스 기념미사를 봉헌하며, 제 사랑하는 후배이자 전임 원장이었던 파코미오 수사의 영명축일이기도 합니다. 이미 어제 축일 선물로 강론을 보냈고 각오를 새로이 하는 아름다운 답신도 받았습니다.
“축일 축하 감사드립니다. 부족한 저를 아름다운 강론의 향기로 북돋아 주시고 격려해 주시니 큰 힘이 됩니다. 신부님의 기도와 강복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안식년 동안 빨간 앵두처럼 기쁘게 익어 돌아오겠습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
“왕의 독수리”란 이름 뜻대로 성 파코미오 아빠스 역시 수도승들뿐 아니라 믿는 이들에게 위대한 스승이었습다. 은수적인 수덕생활이 보장되면서도 상부상조하는 사도행전 2장 42절에 기반한 ‘코이노니아’ 공동체적 이상적 수도생활을 실현시킨 그의 전성기 때 수도원에 속한 수도자들은 무려 약 5000명에 달했다니 그의 리더십이 얼마나 탁월했는지 짐작이 됩니다. 파코미오 수도생활은 수세기 동안 이집트에서 확산되어 1000년까지 지속되며 그의 규칙과 영성은 서방 수도생활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는 수도생활을 이끄는 가장 기본적인 규칙서로 성서를 강조했으며, 교회내의 어떠한 카리스마나 수도생활도 성서와 성전에 기초한 교회의 보편정신 안에서만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수도생활은 교회의 정통성을 옹호했고, 영성적인 요소와 더불어 성사적 생활과 전례에 충실한 수도영성이었습니다. 한결같이 수도생활의 위대한 스승들은 성서의 사람들이자 교회의 사람들이요 예수님의 사람들임을 봅니다.
예수님을 그대로 닮은 레오14세 교황 역시 종파를 초월한 훌륭한 스승입니다. 어제 로마의 사피엔자 대학교를 방문해 주신 “참 평화의 장인들이 되십시오”라는 제하의 내용도 참 풍부하고 유익했습니다. 시대의 스승다운 레오 14세 교황의 처방이었습니다.
1.젊은이들과 진리의 탐구
2.성 아우구스티노는 큰 과오를 범했으나, 결코 지혜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았다.
3.우리는 ‘알고리즘(an algorithm)’이 아니다.
4.우리 자신이 되기(Becoming ourselves).
5.우리는 어떤 세상을 남길 것인가?
6.군사적 소모와 재무장에 대한 경고
7.‘전멸의 소용돌이’(a spiral of annihilation)에 대한 경고
8.피조물 보호
9.믿는 이들의 통찰
10.애덕의 형태로서의 가르침
11.새로운 교육적 동맹
저 또한 훌륭한 스승을 꿈꾸다 수도원에 들어왔기에 지금도 환갑이 넘은 초등학교 제자들의 방문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10년전 제자가 정성껏 써서 액자에 넣어준 <스승의 은혜> 노래 가사가 생각납니다. 매해 5월이면 방문해 불러주는 노래입니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 지네.
참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 주신 스승은 마음의 어버이시다
아아 고마워라 스승의 사랑, 아아 보답하리 스승의 은혜”
<말로 다 할 수 없는 선생님 은혜에 깊은 감사드립니다. 신우초등학교 1회 6-1반 임혜정, 2016년 5월씀>
바로 여기 해당되는 유일한 스승은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하며 자주 불러보는 노래입니다. 영원한 스승이자 주님이요 도반이자 친구인 예수님입니다. 참 스승인 예수님의 참 좋은 선물이, 믿는 이들의 신분증인 파스카의 기쁨입니다. 세상 어떤 스승도 이런 기쁨을 선물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한결같은 기쁨입니다. 바로 성인들은 고통중에도 언제나 주님이 주신 이런 내적 충만한 기쁨중에 살았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지금 너희는 근심에 싸여 있지만,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은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이런 기쁨은 진통의 고통 후에 이은 출산의 기쁨 같은 것입니다. 눈물로 씨부리던 이들이 기쁨으로 수확하듯 결코 값싼 기쁨은 아닙니다. 이미 우리를 통해 실현된 영원한 파스카의 기쁨, 신록의 기쁨입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이 우리를 치유하고 위로하는, 향기로운 빛을 발하는 이런 참기쁨입니다. 바로 스승이자 친구이자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 은총이 참 기쁨이요, 찬미와 감사로 겸손히 응답하는 우리들입니다. 아멘.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16,22ㄷ)
'나를 죽이자!'
오늘 복음(요한16,20-23ㄱ)은 '이별의 슬픔과 재회의 기쁨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 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16,20)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다 잊어버린다."(요한16,21)
'예수님의 때(kairos)'가 되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별의 슬픔'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다시 '재회의 기쁨'을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과 기쁨에 비유해서 말씀하십니다.
문맥상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별과 재회'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가 믿고 있는 '믿음의 본질'이자, 또한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살아야 할 '삶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부활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 부활은 이제와 영원히 죽지 않는 부활입니다.
부활은 죽음 너머에 있습니다. 때문에 이제와 영원한 부활을 참으로 원한다면,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반드시 죽음의 길, 고통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저절로 주어지는 꽁짜 부활은 없습니다. 고진감래 라는 사자성어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죽음이 다해야 부활이 찾아옵니다.
'교만'을 죽여야 합니다.
'탐욕'을 죽여야 합니다.
'인색'을 죽여야 합니다.
'시기(질투)'를 죽여야 합니다.
'분노'를 죽여야 합니다.
'음색'을 죽여야 합니다.
'게으름(나태)'을 죽여야 합니다.
이 죽음에는 고통과 아픔이 따릅니다.
하지만 고통과 아픔 뒤에 이제와 영원한 부활이 있습니다.
나를 죽입시다!
내 안에 있는 육의 열매들을 죽입시다!
그래서 그 너머에 있는 부활과 참평화의 기쁨을 함께 누립시다!
(~1마카12,4)
복음말씀
제1독서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18,9-18
바오로가 코린토에 있을 때,
9 어느 날 밤 주님께서는 환시 속에서 그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잠자코 있지 말고 계속 말하여라.
10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어 해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기 때문이다.”
11 그리하여 바오로는 일 년 육 개월 동안 그곳에 자리를 잡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12 그러나 갈리오가 아카이아 지방 총독으로 있을 때,
유다인들이 합심하여 들고일어나 바오로를 재판정으로 끌고 가서,
13 “이자는 법에 어긋나는 방식으로
하느님을 섬기라고 사람들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4 바오로가 입을 열려고 하는데 갈리오가 유다인들에게 말하였다.
“유다인 여러분, 무슨 범죄나 악행이라면 여러분의 고발을 당연히 들어 주겠소.
15 그러나 말이라든지 명칭이라든지 여러분의 율법과 관련된 시비라면,
스스로 알아서 처리하시오. 나는 그런 일에 재판관이 되고 싶지 않소.”
16 그러고 나서 그들을 재판정에서 몰아내었다.
17 그러자 모두 회당장 소스테네스를 붙잡아 재판정 앞에서 매질하였다.
그러나 갈리오는 그 일에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았다.
18 바오로는 한동안 그곳에 더 머물렀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프리스킬라와 아퀼라와 함께 배를 타고 시리아로 갔다.
바오로는 서원한 일이 있었으므로, 떠나기 전에 켕크레애에서 머리를 깎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6,20-23ㄱ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21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22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23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