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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15. 묵상글 (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 함께하지 않는 것이 고통인 사랑.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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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15.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9.15 03:00
- 함께하지 않는 것이 고통인 사랑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가 서 있었다.”
모든 거룩한 사랑은 고통을 함께하지 못하는 것이 고통이다.
사랑이 크면 클수록 고통을 함께하지 못하는 것이 고통이다.
그러므로 이기적이고 작은 사랑은 자기밖에 사랑할 수 없고,
다른 이의 고통에 조금도 함께할 수 없다.
이는 성모 마리아의 통고를 묵상하며 든 생각의 요약입니다.
고통과 관련하여 생각할 때 인간이 어떻게 그리 다를 수 있는지 신기할 뿐입니다.
사람들 가운데는 남의 고통에 함께하지 않음은 물론
남을 고통스럽게 하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심지어 남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에서 희열을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떻게 같은 인간인데 그럴 수 있습니까?
남을 괴롭게 하면서 전혀 괴롭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면 미워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미움 없이도 악한 짓을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있다면 자기를 위한 사랑밖에 없기에
미움 없이도 자기 이익을 위해 악한 짓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사랑이 얼마나 위대합니까?
그러니 사랑이 얼마나 신비합니까?
그럴 이유가 없는데도 저 멀리 가자 지구에서 이스라엘의 만행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의 고통에 함께하고 아프리카의 고통에 함께합니다.
사랑은 진정 모든 것을 함께합니다.
기쁨도 슬픔도, 괴로움도 즐거움도 다 함께합니다.
조금도 함께하지 않는 것은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또 모든 것을 함께할 뿐 아니라 모든 사람과 함께합니다.
사랑이 크면 클수록 모든 사람의 모든 고통과 기쁨에 함께합니다.
오늘 통고 축일을 지내시는 성모님이 그러하십니다.
아드님의 모든 고통에 그리고 인류의 모든 고통에 아드님과 함께 아파하십니다.
오늘 묵상은 이것으로 갈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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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15.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순종과 비움, 겸손을 배워가는 ‘배움의 여정’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신 예수님”
“동정 성모 마리아님, 복되시나이다.
당신은 주님의 십자가 아래서,
죽음없이 순교의 월계관을 받으셨나이다.”(복음 환호송)
9월 순교자 성월, 중심부에 자리한 어제의 성 십자가 현양 축일과 오늘 9월15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축일이 순교자 성월을 지내는 우리에게 큰 위로와 힘을 줍니다. 기념일이지만 저는 축일로 부르고 싶습니다. 인생고해같은 현실 한복판 중심에 위치한 아드님과 성모 마리아 축일입니다. 어제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즈카르야 노래 후렴과 마리아의 노래 후렴이 같았고 참 은혜로웠습니다.
“오 십자가의 승리, 십자가의 기묘한 표시요, 우리를 하늘 나라로 개선케 하소서.”
이 구절을 대하는 순간 강론에 한 마디를 추가했습니다. ‘성 십자가의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천하무적, 백전백승의 영적승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저녁성무일도시 찬미가 세 번째 연도 오늘 복음을 연상케 하며 영적승리를 노래합니다.
“십자가 곁에 서신 성모님이여, 이세상 하직할때 우리영혼이,
천국의 영원복락 얻게 하시고, 승리의 기쁨 함께 받게 하소서.”
성 십자가의 예수님과 고통의 성모 마리아께서 함께 하심으로 9월 순교자 성월은 물론 언제나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잠시 고통의 성모 마리아 신심에 관한 역사를 살펴봅니다.
‘슬픔의 성모에 대한 신심은 중세 시대에 번성했습니다. 14세기 이래 널리 알려진 성모님의 일곱까지 슬픔, 성모칠고입니다. 즉 1.시므온의 예언, 2.이집트로의 피신, 3.아기 예수님을 사흘 동안 잃어 버리심, 4.갈보리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심, 5.예수님의 십자가형과 죽음, 6.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님, 7.예수님이 무덤에 안치되심.
우리는 마리아의 고통을 기억함으로써 성모님이 얼마나 아드님의 구원역사에 가까이 계셨는지 깨닫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의 첫 번째이자 가장 가까운 제자였습니다. 고통의 성모를 기리는 축일은 1667년 처음으로 세르비테 수도회에 승인되었고, 교황 비오 7세는 이 축일을 로마 전례력에 포함시킴으로써 1814년 라틴교회 전체로 확대됩니다. 1908년 교황 비오 10세는 이 축일을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다음 날인 오늘 9월15일로 옮깁니다.’
성모님께 슬픔의 절정은 <십자가의 길>에서 오늘 복음 장면과 일치를 이루는 ‘12처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과 ‘13처의 주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 품에 안으신 장면일 것입니다. 여기서 즉시 떠오르는 “피에타의 성모님”이며,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조각입니다. 오늘 십자가의 예수님 발치에 서있던 성모님께 대한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말씀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십자가 아래 성모 마리아는 믿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자기비움(self-emptying)’의 충격적 신비를 나눈다. 아마도 이것은 인류역사에서 가장 깊은 믿음의 케노시스(kenosis;비움)일 것이다.”
십자가상의 아드님과 똑같이 자기비움의 절정을 체험하신 성모 마리아로부터 배우는 ‘비움의 영성’입니다. 비움과 관련되는 오늘 히브리서의 말씀도 은혜롭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순수한 우리말 둘은 ‘섬기다’와 ‘배우다’입니다. 역시 값싼 은총은 없음을 깨닫습니다. 저절로 완전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일상에서 겪는 모든 크고 작은 모든 고난을 순종을, 비움을, 겸손을 배우는 계기로 삼음으로 영적성장과 성숙을, 영적 승리의 삶을 이루자는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 삶은 배움의 여정, 비움의 여정, 순종의 여정, 겸손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어려움을 겪는 분들에게 드리는 충고는 상처의 아픔에 머물 것이 아니라 즉시 배움의 계기, 비움의 계기로 삼아 공부했다 생각하고 통과하라는 것이요, 바로 이런 개방성, 신축성, 유연성을 지니는 것이 삶의 지혜요 영적승리의 길이라 충고하곤 합니다. 오늘 복음은 믿는 우리들의 삶의 자리를, 신원을 알려 줍니다. 성모 마리아와 함께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바로 거기가 우리 삶의 자리입니다.
여기 애제자가 상징하는 바, 예수님을, 교회를 사랑하는 신자들인 우리들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교회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이런 애제자들이 교회의 심장처럼 자리잡고 있어 비로소 살아 있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활동가들만 가득하고 예수님과 교회를 사랑하는 관상가 애제자들이 없는 교회는 얼마 못가 시들어 죽어 버릴 것입니다.
주님은 성모 마리아께 우리를 가리키며 말씀하십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 주님은 애제자들인 우리에게 성모 마리아를 가리키며 말씀하십니다.
“이 분이 네 어머니시다.”
매일 미사때 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우리 삶의 자리를, 마리아 성모님의 자녀들임을 확인합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 은총이 우리 모두 순종의 여정, 비움의 여정, 배움의 여정에 충실함으로 날로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 주님을 닮아가게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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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15.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그런데 ‘고통이 기념해야 할 일일까요?’ 어쩌면, 고통은 저주요 재앙일 것입니다. 만약, 사랑이 없는 고통이라면, 말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고통, 사랑으로 생기는 고통, 사랑하기에 받는 고통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참된 기쁨을 배우게 하고,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줍니다. 마치 우리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새 생명으로 건너감이듯이, 바로 그 죽음을 통하여 생명으로 넘어가듯이, 사랑에서 피어난 고통은 고통이 아니라 기쁨으로 건너감이요, 바로 그 고통을 통하여 기쁨으로 넘어감입니다. 우리는 바로 어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현양’을 통해서 그 신비를 보았습니다.
성모님의 고통은 예수님과 함께 벌어집니다. 예수님께서 매 맞으시면, 성모님도 매 맞으시고,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는 성모님의 “통고, 통애”(compassio)를 말합니다. 곧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의 고통에 함께 “참여”(participatio)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아파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아파하는 것에 참여하신 사랑입니다.
이를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 <교회헌장>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마리아께서는 당신 외아드님과 함께 심한 고통을 당하셨고,
아드님의 제사를 모성애로써 함께 바치셨으며
당신이 낳으신 희생자의 봉헌을 사랑으로 동의하셨다.”(교회헌장 58항)
또 바오로 6세 교종의 문헌 <마리아 공경>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마리아는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원의 신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계시며,
야훼의 고난 받는 종의 어머니로서 고통을 당하셨다."(마리아 공경 7)
오늘 <복음>은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처참해진 모습을 애끓는 마음으로 지켜보는 장면과 예수님께서 모친 마리아를 사도 요한에게 부탁하시는 장면입니다. 아들의 죽음과 함께 있는 성모님의 이 광경은 인간적인 고통과 신앙적인 굳셈이 함께 연출되면서, 그지없이 비장하면서도 동시에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가 고통과 아버지께 대한 믿음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듯이, 십자가 밑에 서 계시는 성모님의 모습에서도 고통과 믿음이 동시에 드러납니다. 이토록, 성모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고통과 죽음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시면서, 나아가 동의만하고 의탁만 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성원하면서 예수님의 고통과 믿음에 완전한 일치를 이루시고,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깊이 참여하십니다.
성모님과 함께 오늘 우리도 <본기도>에서는 이렇게 바칩니다.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당신 아드님 곁에 서서, 성모님도 십자가의 고통을 함께 나누게 하셨으니, 저희도 그리스도와 함께 수난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에도 참여하게 하소서."
하오니 어머니, 고통 속에서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고통을 통하여 기도하고, 고통과 함께 기도하게 하소서.
고통 안에서도 희망하고, 고통 안에서 믿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는 그분의 어머니께서 서 계셨습니다.”(요한 19,25)
어머니!
당신과 함께 십자가 밑에 있게 하소서.
믿음으로 서 있게 하소서.
십자가 밑이 저의 자리가 되게 하시고,
당신과 함께 아들의 남은 고통에 참여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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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15.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머니는 2020년 9월 10일에 하느님의 품으로 떠났습니다. 올해는 5년이 되는 해입니다. 어머니는 강인한 분이셨지만 그 강인함은 고통 속에서 단련되었습니다. 어머니는 배움에 대한 갈망이 있었습니다. 어머니 시대에는 배울 기회가 적었던 분들이 많았습니다. 어머니는 자녀를 키운 후에 ‘야학’에서 글을 배웠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기뻐하였고, 제게도 가끔 카드를 써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배움이 많았던 배우자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배움이 많았던 배우자인 아버지는 경제적인 능력이 없었습니다. 격동의 시대에 아버지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고, 그런 사람은 기존의 질서에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의 ‘꿈’을 받아들였고, 홀로 가족을 돌보았습니다. 쌀가게, 마트, 밥장사, 가사도우미도 하였습니다. 어머니의 사랑과 강인함이 열매 맺어서 저는 성직자가 되었고, 동생은 수도자가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성모님처럼 사랑하는 아들을 먼저 떠나보내야 하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신앙으로 삶의 십자가와 고통을 받아들인 어머니는 평생 사랑했던 아버지가 있는 하느님의 나라로 떠났습니다.
어제는 십자가 현양 축일, 오늘은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십자가는 원래 치욕과 모욕의 상징이었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구원과 부활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인들에게는 어리석음, 유대인들에게는 걸림돌이었지만, 신앙인들에게는 하느님의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역사를 보면, 교회가 십자가를 외면하고 세상의 권력과 재물에 기대었을 때, 언제나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이 없듯, 십자가 없는 교회는 물가에 세워진 집과 같아 시련이 오면 무너집니다. 성모님은 그 십자가를 가슴에 품으셨습니다. 아들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모습을, 십자가에 매달린 모습을, 숨을 거두고 품에 안긴 모습을 다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모님을 공경합니다.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아들의 길을 끝까지 함께 걸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분이 당신의 어머니십니다.’ 사랑을 받던 제자는 이제 성모님을 자신의 집에 모셨다고 성서는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고통의 바다에 떠 있는 작은 배와 같습니다.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의 아픔과 갈등, 고통과 절망을 함께 나눌 수 있을 때, 우리는 힘들지만, 고통의 바다를 건널 수 있을 것입니다. 조국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고인들의 유해가 그리운 조국으로 돌아오듯이, 하느님을 믿으며 충실하게 살았던 모든 이들은 천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는 것이 신앙인들의 희망입니다. 우리가 신앙 안에서 함께 기도하면서 함께 나누면서 살아가면 우리는 고통의 바다를 건너, 희망의 항구에 도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 저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수난 하신 동정 마리아를 기념하며,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게 하소서. 숨겨진 그물에서 저희를 빼내소서. 당신은 저희 피신처이옵니다. 제 목숨을 당신 손에 맡기오니, 진실하신 하느님, 저를 구원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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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15.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렌즈는 어떤 것인가요?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9월 14일 일요일- 서른일곱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기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감사하는 법을 어떻게 배우시겠습니까?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팟캐스트 바라보는 법을 배우기 (Learning How to See)에서 브라이언 맥라렌은 세상을 뚜렷하게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렌즈 몇 가지에 대해 설명합니다:
안경을 쓰는 사람은 누구나 검안사의 사무실에 있어 본 경험이 있을 겁니다. 거기에서 기계 뒤에 앉아, 검안사가 여러 렌즈를 하나씩 바꿔가며 잘못된 시력을 교정하는 데 적합한 처방을 받게 됩니다. 이 과정을 통해 가장 정확한 시력 교정 렌즈를 찾게 되는 거죠. '찰칵' 하는 소리가 나고, 의사는 “이게 더 잘 보이시나요?”라고 묻습니다. 다시 '찰칵' 하는 소리가 납니다. "더 잘 보이시나요? 아니면 덜 잘 보이시나요?" 다시 '찰칵' 하는 소리가 납니다. "지금은 어떠십니까?"...
어떤 렌즈들은 더 잘 보이게 해 주고, 다른 렌즈들은 덜 잘 보이게 해 줍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우리 내면의 시야를 더 흐리게 하는 세 개의 렌즈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는 권위주의의 렌즈입니다. 권위주의의 렌즈를 통해 우리는 모든 사람을 바라보며 그들이 '나'와 같은 적을 공유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독재자나 강력한 지도자에게 충성하는지를 판단하게 됩니다. 권위주의는 언제나 우리의 시력을 감소시킵니다.
다른 렌즈는 희생 염소의 렌즈입니다. 이 렌즈를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단결시키고 우리의 공격성과 수치심을 다른 집단의 사람들에게 투사하여 그들을 적대시함으로써 우리 자신에 대해 더 나은 느낌을 갖게 됩니다. 희생 염소의 렌즈도 우리 시력의 명확성을 감소시키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인종이나 종교, 정당, 이념, 혹은 국가를 기반으로 하는 우월의식을 갖게 됩니다.
또다른 렌즈는 광고와 정치적 견해, 선전, 그리고 소셜 미디어의 알고리즘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을광고와 정치적 견해, 선전, 그리고 소셜 미디어의 알고리즘 같은 것을 통해 서로를 바라보는 법을 바꾸는 데 수천만 달러의 돈을 허비합니다.
우리는 모두 삶을 살아가면서 권위주의와 희생 염소, 우월의식과 같은 왜곡된 인식의 렌즈들에 의해 우리 내면의 시야가 흐려지는 힘든 상황을 계속 직면하게 됩니다. [1]
퀘이커 작곡가인 캐리 뉴커머(Carrie Newcomer)는 어떤 렌즈를 택하여 세상을 바라보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고 자신을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수양을 한다고 하면서 그녀의 수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해 줍니다:
작곡가요 시인으로서의 제 삶이 저에게 매일, 매 순간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깊이 숙고해 보라고 요청하더군요...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주의 깊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무심코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태도를 말합니다. 그런 다음 어떤 특정한 영(정신)으로 우리가 바라보는 것이 무언지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저에게는 그것이 어떤 특정한 사랑의 영입니다. 저는 이것이 하나의 수양이기에 더 많이 수양하면 할수록 더 많이 보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더 많이 볼수록 더 많이 사랑으로 보게 되고요....
제가 사랑하는 중대한 것들은 이러합니다: 저는 제 남편을 사랑합니다. 저는 제 딸을 사랑합니다. 저는 정의를 사랑합니다. 저는 자비를 사랑합니다.... 저는 이렇게 중대한 것들을 많이 사랑하지만, 또한 제 삶은 영광스러우면서도 자그만 사랑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삶의 의미가 크고 거창한 것뿐 아니라, 작은 순간들 속에도 깃들어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눈으로 바라볼 때, 제 일상은 경이로움으로 가득 찹니다. ... 저는 블루베리를 사랑하고, 라일락 향을 사랑하고, 어린아이들이 길을 건널 때 서로 손을 잡아주는 아름다운 모습도 사랑합니다....
작은 순간과 작은 것들을 사랑으로 바라본다고 해서 언제나 기쁨이 충만한 것은 아닙니다. ... 그러니까 기쁜 것이든 슬픈 것이든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어떤 상황이라도 '내'가 여기에 있을 것이고, '내'가 지금 현존할 것이며, '내'가 사랑으로 현존할 것이라고 마음먹으면, 그것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사랑과 보살핌은 풍부했지만, 은총에 대해서는 이해가 부족하고 율법적 기준과 규칙이 매우 엄격한 "사랑의 율법주의"라고 하는 문화에서 자랐습니다. 그래서 저는 늘 그런 기준과 규칙에 미치지 못할까봐 두렵고 무서웠습니다. 몇 년 전부터 저는 은총을 향한 저의 여정, 있는 그대로의 참으로 기쁜 소식(복음)으로 향하는 저의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리처드 신부님의 매일 묵상, 특히 비-이원론적 사고에 대한 그분의 이해와 설명이 저의 이 영적 여정에 큰 축복이 되고 있습니다.
—Barry W.
References
[1] Adapted from Brian McLaren and Carmen Acevedo Butcher, cohosts, Learning How to See, podcast, season 8, ep. 7, “Seeing with the Help of a Soul-Optometrist with Sister Simone Campbell,” June 12, 2025. Available as MP3 audio download and PDF transcript.
[2] Adapted from Learning How to See, podcast, season 8, ep. 4, “Seeing (and Loving) the Divine in the Everyday with Carrie Newcomer,” May 22, 2025. Available as MP3 audio download and PDF transcript.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Sankhadeep Barman, untitled (detail), 2019,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저 사람은 꽃 앞에 멈춰 서서, 경외심을 가지고 그 아름다움에 머무릅니다. 꽃의 조용한 아름다움에 압도당하며, 그것에 자신을 맡기기를 선택하는 것이고 꽃을 바라보며 그들과 함께 현존하는 수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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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15.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사랑은 절대 외로울 수 없습니다!
요한 복음의 예수님 십자가에 대한 서술은 상당히 짧습니다. 게다가 그 내용이 십자가에 달려 고통을 받으시며 돌아가시는 예수님보다는 십자가 곁에 서 있던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예수님을 다른 두 사람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짧게 서술한 다음, 부지불식간에 예언자가 된 빌라도에 대해 말합니다. "부지불식간에"라고 말한 이유는 빌라도가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써서 붙인 명패(죄명)가 진리라는 것을 알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요?!
사실 십자가형은 정말로 비인간적이고 반인륜적인 사형 제도로서 죄인을 공개적으로 처형함으로써 이 처형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살벌하고도 잔인한 경고를 주는 처형입니다. 로마 황제의 신성(?) 앞에 아무도 감히 도전하지 말라는 경고인 것이지요!!
그러니까 빌라도가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달아 놓은 명패는 그가 예수님을 정말로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인정한 내용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형 언도 죄목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죄목을 당시 사람들이 다 인식할 수 있도록 세 가지 언어로 쓰게 한 것입니다....
하지만 빌라도가 어떻게든 그것이 진리인 줄은 모른 채 그 명패를 걸어 놓으라고 명했기에 그는, 카야파처럼(요한 11,49-52), 부지불식간에 예언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요한 복음 저자는 복음의 역설에 대해 심오한 이해를 하고 있었던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궁극적인 선은 악까지도 그 선이 이루어지게끔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악과 어둠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선과 사랑에 더 시선을 두는 삶을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다음에 그 명패에 대해 불평을 하는 수석 사제들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님의 옷을 나누어 가지는 군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참 의아스럽지 않나요?! 이런 이야기가 참혹하고 잔혹한 한 사람의 죽음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의 마음에서 나올 수 있는 말과 행동일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이 부분도 하느님의 모상을 창조된 우리가 깊이 성찰해 볼 부분입니다.
그러고 나서 십자가 곁에 서 있던 사람들에 대한 언급이 나오고, 예수님의 어머니와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제자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나오는데, 이 부분이 바로 오늘 우리가 듣는 복음 말씀입니다.
그런데 요한 복음 저자가 성모님의 이름과 요한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그저 "그분의 어머니"와 "그분이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참된 제자직의 상징적인 인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두 사람은 새로운 사랑의 공동체를 대표하는 인물들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유언으로써 이 새로운 사랑의 공동체를 우리 서로서로에게 맡겨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은 고립되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사랑은 절대 외로울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랑은 우리가 물리적으로 '홀로'일지라도 어떻게든 함께함을 늘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 바로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두 마디 말씀을 하시고 돌아가십니다. "목마르다!" 그리고 "다 이루어졌다!"(요한 19,28; 30).
노리치의 율리안나 성녀는 자기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적은 [하느님 사랑의 계시]에서 이 예수님의 목마름이 단순히 육체적인 목마름을 훨씬 넘어선 영적인 사랑의 목마름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이 목마름은 물에 대한 목마름이 아니라 인류와 하나 되고자 하시는 그분의 영적인 목마름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입니다. 율리안나 성녀는 그 책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목마름은 인간을 당신께로 끌어들이고자 하시는 목마름입니다. ... 그런데 그리스도의 이 영적인 목마름은 언젠가 최종적으로 충족될 날이 올 것입니다. 그 날은 최후 심판의 날(하느님의 최종적인 자비가 이루어는 지는 때), 즉 구원받을 모든 영혼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기쁨과 일치를 이루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목마름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전히 구원받을 사람들이 이 세상에 있고, 또 앞으로도 계속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완전히, 충만하게 펼쳐지는 날까지 말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우리 인간에 대한 사랑은 끝없이 기다리고 갈망하는 사랑인 것입니다."
율리안나 성녀는 그리스도의 고통이 바로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겪는 고통은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계속 치유되면서도 또 여전히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고통을 받으시는 그런 아이러니한 그 무엇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우리의 논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마음에 새기고자 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겪는 어두움과 불확실성의 상황 속에서도 희망과 사랑을 견지할 수 있는 강력한 사랑의 원천이 될 것입니다!
우리 존재 안에는 고통 속에서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온전히 품어 주시는 어머니 하느님의 사랑이 늘 깊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늘 상기하고자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이 사랑을 시시각각 상기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고립될 수도, 외로울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 사랑으로 인해 이미 '나'는 '우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고통의 성모님을 우리가 기리는 이유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모님은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 안에서 이 고통을 가장 심오한 사랑으로 받아들이며 사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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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15.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때에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요한 19,25)
군사들의 행동과 대비되는 예수님의 행동
군사들은 예수님께 이런 짓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매달려 계시면서도 당신 어머니를 이 제자에게 맡기심으로써, 목숨이 다할 때까지 모든 방법으로 부모를 보살피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전에 마리아가 때에 맞지 않는 행동을 했을 때, “여인이여,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요한 2,4),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 12,48)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당신께서 어머니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보여 주시며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어머니를 맡기십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설교 22 우리의 신성과 하느님의 신성
하느님이 된다는 것은 낳는다는 뜻이다
내 계명은 이렇습니다. 내가 그대들을 사랑한 것처럼 그대들도 서로 사랑하시오(요한 15,12).
엑카르트는 또 다른 기회에 이러한 하느님 이해를 되풀이한다. “하느님의 가장 높은 목표는 낳음이다. 그분은 우리 안에서 자신의 아들을 낳지 않으면 결코 만족하지 않는다. " 하느님은 언제나 자신의 아들을 낳는다. 이와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느님의 양자로 끊임없이 태어난다. “하느님은 끊임없이 자신의 아들을 낳는다. 나는 그분이 나를 그분의 아들로서 , 똑같은 아들로서 낳는다고 말하겠다." 낳음은 단지 닮기만 하는 것보다 훨씬 깊고 친숙하다. 닮음이 아니라 낳음을 통해서만 우리는 일체를 통합하는 신성과 하나가 된다. ”필립보는 이렇게 말했다. ‘주님,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저희가 흡족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 라는 말에는 닮음이 아니라 ‘낳음’이라는 뜻이 들어 있으며. 하나라는 뜻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 하나 속에서 닮음은 소리를 죽일 수밖에 없으며, 존재를 소망하는 모든 것이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낳음은 고요하다. 하지만 닮기만 하는 것은 상을 받아들이는 것이기에 시끄럽기 그지없다.
우리는 끊임없이 태어나고 새로 나는 하느님의 자녀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이 말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더없이 후하다는 뜻이다. 우리는 신적인 포도나무의 줄기로서만, 또는 뿌리로서만, 혹은 열매로서만 받아들여진 것이 아니다. 우리는 낳음을 본질적인 속성으로 하는 신적인 포도나무의 줄기와 뿌리와 열매를 모두 지닌 자들이다. 우리가 실로 하느님의 아들딸이라면, 또한 우리는 낳는 자이자 창조자이기도 한 것이다. 왜냐하면 낳음이야말로 아버지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엑카르트는 “선을 타고난 사람, 곧 하느님 안에서 태어난 선한 사람은 신성의 모든 속성을 알아챈다”고 말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신성의 본질이 낳음이라면, 그리고 하느님이 아무것도 감추지 않고 우리에게 신성을 베풀었다면, 우리의 신성 역시 우리가 아버지처럼, 아들처럼, 어머니처럼. 딸처럼 창조자가 되기를 요구할 것이다. 아버지는 낳고, 아이는 태어난다. 우리의 참된 본질은 태어남아고, 낳음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택함 받은 우리의 본성이다. 아버지의 발언은 낳음이고, 아들의 경청은 태어남이다. 아버지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응답 - 우리의 경청 - 은 우리의 태어남이다. 우리는 충만한 인성과 충만한 신성 속에서 끝없이 태어난다 – 누구도 이 열매를 알지 못한다. 하느님만이 알 따름이다. 이처럼 신적인 포도나무에서 어떤 열매가 나올 것인지 어느 누가 말할 수 있으랴?(469)
✝️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 디비나)의 날✝️
루카 15,1-10
되찾은 양의 비유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되찾은 은전의 비유
또 어떤 부인이 은전 열 닢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닢을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 안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지 않느냐?
그러다가 그것을 찾으면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은전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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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15.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에 나왔던 노래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는 어느 자매님을 만났습니다. 그 노래의 제목을 물어보니, 그룹 다섯 손가락의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이라는 노래라고 답하십니다. 1985년에 이 노래가 발표되었을 때, 엄청난 인기였습니다. 그런데 자매님께서는 이 노래의 가사처럼, 지금의 배우자인 형제님으로부터 매주 수요일에는 빨간 장미를 받은 것입니다.
결혼으로 이끌어 주었던 노래, 남편의 낭만적인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이 노래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이 노래 가사가 남의 이야기가 아닌 자기 이야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남편과 싸우게 되었을 때, 이 노래를 듣고 화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렵고 힘들 때, 이 노래를 들으면 저절로 미소가 생각하면서 다시 힘을 낼 수 있었습니다.
성경 말씀도 그렇지 않을까요? 성경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가득합니다. 그 사랑의 말씀이 나의 이야기가 된다면 어떨까요? 나에게 힘을 주시고, 지혜를 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삶 안에서 깨달을 수 있다면 성경을 멀리할 수가 없게 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지금을 사는 힘을 얻으며, 행복 안에 머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십자가 길을 함께하신 성모님의 고통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성모님의 고통이 가장 컸던 사랑하는 아들의 십자가 죽음을 직접 봐야 하는 그 순간을 복음에서는 보여줍니다. 이 십자가 옆에서는 몇몇 여인들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함께 서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함께했던 제자들은 도망간 상황에서 이 몇 명만이 예수님 곁을 지킨 것입니다.
그들이 이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가장 수치스럽고 잔인한 형벌이었는데도, 더군다나 당시에는 ‘나무에 매달린 자는 누구나 저주받은 자’라고 알려져 있었기에 그 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쉽지 않은 상황일 것입니다. 바로 주님에게서 사랑을 가득 얻은 기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성모님께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라고 하시고, 제자에게는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단순히 임종 직전 아들을 잃은 어머니를 제자가 모시라는 도덕적 배려가 아닙니다. 그보다 성모님을 교회의 어머니를 우리에게 넘겨주신 것입니다. 이를 성모님께서 받아들이기가 쉬웠을까요?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배반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 과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철저하게 의지하신 성모님이시기에 이런 고통의 상황에서도 주님의 뜻을 따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십자가 앞에서 도망가지 않고 함께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을까요? 신앙의 고통과 십자가 앞에서 끝까지 머물 수 있을까요? 가장 큰 고통을 겪으신 성모님께서 우리의 어머니가 되셔서 힘을 주십니다. 우리도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그 곁에 머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명언: 행운은 타인을 행복하게 해 주려는 노력의 부산물이다(태평어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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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15.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윤식 [big-llight]
■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그 고뇌에서도 늘 새기신 성모님 /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은 예수님 십자가의 길을 함께하신
성모님 고통을 기억하는 날이다.
자식의 아픔은 어머니에게 더 크게 다가오는 법,
시메온은 성모님의 그 고통을 이렇게 예언하였다.
“이 아기는 많은 이를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래서 당신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이의 마음이 드러날 것입니다.”
성모님의 이 고통을 묵상하고 기억하는 신심은 오래전부터 널리 퍼졌고
1688년 인노첸시오 11세 교황 때 이 기념일이 정해졌다.
1908년 비오 10세 교황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다음 날인 9월 15일로 옮겨 예수님 십자가 고통과 연계하였다.
이는 예수님 십자가 고통과 결합된 성모님의 인생이,
우리가 깨달아야 할 십자가 의미를 더 명료하게 해 주기 때문일 게다.
‘군사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나서,
그분의 옷을 가져다가 네 몫으로 나누어 저마다 한몫씩 차지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이것은 찢지 말고 누구 차지가 될지 제비를 뽑자.” 하고 말하였다.
“그들이 제 옷을 저희끼리 나누어 가지고 제 속옷을 놓고서는 제비를 뽑았습니다.” 하신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예수님 십자가 곁에는 성모님과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 마리아 막달레나가 있었다.
그분께서는 당신 어머니와 그 곁의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 제자에게 말씀하셨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그때부터 그는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의 발아래 어머니 마리아께서 서 계신다.
비통한 모습의 어머니께 그분께서는 위로를 보내신다.
죽어 가는 아드님을 바라보고 계신 어머니께,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당신 어머니께 따뜻한 위로를 보내신다.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 예수입니다.”
이를 들으시는 순간 어머니의 가슴은 찢어질 듯 아프셨을 게다.
사실 예언자 시메온의 말대로 ‘영혼이 칼에 꿰찔리신’
성모님의 생애는 고통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성모님은 이를 새기셨다.
흔히 사랑하는 님은 앞산에 묻고,
사랑하는 자식은 가슴에 묻는 것이 동서고금을 통해 전해지는 부모 마음이라나.
이렇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성모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며 내 형제들이냐?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어머니요 형제들이다.”라고 하신
옛날 예수님의 그 한마디 말씀이 안긴 온갖 고통이, 한순간에 사라지셨을 것이리라.
성모님께서는 예수님과 함께 인간이 겪는 이 고통의 의미를 가장 깊이 깨달으신 분이시다.
당신 인생에서 고통으로 다가온 수많은 순간들을
인간 존재의 숙명으로 받아들이시고 하느님의 뜻에 맡기셨다.
이처럼 성모님께서는 전 생애를 고난으로 가득하면서도 늘 새기시면서
마침내 이렇게 십자가 아래까지 오시면서 아드님과 함께 성부께 순종하셨다.
이렇게 순명의 길을 걸으셨기에 십자가의 고통을 넘어 부활의 빛을 만나실 수 있었고,
교회의 어머니가 되신 것이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다음날인 오늘,
우리는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을 지낸다.
성모님 삶에 대한 세부적인 기록은 성경 어디에도 소개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라는 삶을 사셨을 게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철저한 순명과 겸손으로 사셨으리라.
그 많은 반대 표징과 당신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그 고뇌에서도
끝내 오직 예수님 뒤만을 보시고 새기시면서.
성모님은 ‘우리 모두의 어머니’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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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15.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윤식 [big-llight]
■ 그 유명한 이방인인 백인대장의 신앙 고백에서 / 연중 제24주간 월요일
우리는 가끔 자신이 스스로 은총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착각할 수도.
하느님께 청하는 기도가 당연히 나에게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허나 그러한 판단 여부는 오로지 하느님께서 온전히 판단하실 게다.
그 척도는 믿음이다.
그 은총을 받을 근거는 우리가 이웃에게 베푼 선행으로 파악된단다.
우리 실천을 하늘의 천사들이 기억하고, 그곳의 보물 창고에 잘 보관하니까.
우리가 받을 은총은 믿음 안에서만 충분히 커지리라.
카파르나움의 백인대장 노예가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그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유다의 원로들을 그분께 보내어,
제발 오셔서 그를 살려 주십사고 청했다.
“그는 선생님께서 이 일을 해 주실 만한 이입니다.
그는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에게 회당도 지어 주었습니다.”
그 백인대장의 청은 ‘예수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고,
물론 당신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매인 사람입니다만 제게도 군사들이 있어서,
그들을 이리 가라 하면 가고 저리 오라 하면 또 옵니다.
이처럼 제 집의 노예에게도 언제나 예외는 없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에게 감탄하시며 말씀하셨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러한 믿음을 본 일이 없다.”
그래서 백인대장의 청으로 심부름 왔던 이가 돌아가 보니,
그 병들어 죽게 된 종은 이미 건강한 몸이 되어 있었단다.
자신의 종인 노예를 살려 달라고 하는
백인대장의 그 인품은 참으로 훌륭해 보인다.
자신의 아들이 아닌, 한낱 종을 위해 예수님께 부탁을 하는 저 백인대장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도 너무도 강했나보다.
정말 그의 믿음은 깊었었다.
그분께서 얼마나 거룩하신 분인지를 제대로 아는 이는,
감히 예수님을 직접 모실 자격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리라.
우리는 어떤가?
잘났기에 주님 이름 부르며, 그저 그분 몸 모시는 게 아니다.
여러 가지로 부족한 우리를 주님께서 초대해 주시니,
이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일 게다.
백인대장은 비록 그가 데리고 있는 종이지만,
그 딱한 처지를 십분 헤아릴 줄 아는 이방인이었다.
자신을 위해 일하는 종이었지만 생명의 존엄성을 아는 이방인이다.
그는 예수님을 비롯해 모든 이에게 정말 따뜻한 관심과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교회는 이 백인대장의 청원을 전례 안에서 바친다.
예수님께서는 노예의 병을 고쳐 달라고 간곡히 청하는 로마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신다.
그는 예수님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기에 유다인의 원로들을 예수님께 보내었다.
또한 자신이 밑에 있는 이에게 시키면 시킨 대로 하듯,
예수님께서도 굳이 직접 오실 필요 없이 한 말씀만 하시라고 하는 것처럼,
그는 배려와 겸손을 몸에 배인 아주 경건한 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라고 하시며 그를 칭찬하신다.
하느님께서는 공정하시다.
유다인, 이방인의 구별 없이 더 노력하는 이에게 더 큰 믿음을 상으로 담뿍 내리신다.
이 얼마나 정성어린 신앙고백인가?
우리는 성체성사로 주님의 몸을 받아 모실 때마다,
인품을 두루 갖춘 그 백인대장을 본받자.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부름 받았다.
따라서 그 뜻에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
또한 자신을 낮추어 예수님 마음을 움직이도록 고백해야 할 게다.
‘주님, 제 안에 당신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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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추가 안내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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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15.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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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8&id=2116401&menu=4770
위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리스트에서 “서하”를 찿아 들어가세요.
늦게 올라오거나 다음날 또는 게재 아니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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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15.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그분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서 있습니다.
여인이라는 단어를 우리는
요한복음에서 두 번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활동을 시작하신 카나 이야기와
활동을 마무리하시는 십자가 이야기에
이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으로 예수님의 활동 시작부터 끝까지
성모님께서 함께하셨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표징으로 당신을 드러내실 때나
죽음으로 고통스러우실 때나
항상 함께하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도
카나에서부터 지금까지 함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겉으로 드러난 화려한 모습뿐만 아니라
고통의 순간에도 함께하는 것임을
요한은 몸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성모님과 요한은
예수님의 고통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온 생애를 함께 걸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이 영원한 생명이라는 단어로
하느님과의 일치를 표현한다면
성모님과 요한은 이미 이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새로운 가족, 새로운 모자 관계로 표현됩니다.
기쁠 때, 행복할 때
누군가과 함께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화려한 모습에는 함께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고통에 함께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 고통이 고스란히 나에게 전해져서
몸으로 그 고통을 겪지 않아도
마음으로 그 고통을 똑같이 겪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고통의 순간에 함께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이 아니면 가능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그 고통 속에 머물 수 있는 힘을 주기 때문에
그 고통을 함께 나눌 수 있게 도와줍니다.
십자가 위에서 성모님과 요한의 사랑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그 사랑을 우리에게도 주십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 고통의 순간에도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 사랑이 있기에
우리는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갈 수 있습니다.
삶의 고통 속에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는
오늘이기를 기도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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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15.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요한 19,25-27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어제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을 기념한 우리는, 오늘 성모님께서 아들 예수가 못 박힌 십자가 아래에서 받으신 고통을 기억합니다. 성모님께서는 그 고통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셨지요. 우리가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는 건 성모님의 그런 모습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전적으로 순명하여 아드님께서 겪으신 고통마저 기꺼이 당신 것으로 끌어 안으시는 모습, 그 모습이 주님을 어떻게 따라야 할지 몰라 방황하는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분명히 가리키고 있는 겁니다.
‘기쁨을 나누면 두 배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절반이 된다’고 하지요. 그래서인지 기쁨의 자리에 참여하기는 쉽지만, 슬픔의 자리에 동참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 점에서 내가 어떤 자리에 함께 하는가에 따라 상대방을 향한 내 사랑이 얼마나 진심인지가 드러나게 됩니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의 ‘경사’(慶事)에는 바쁘거나 사정이 있어서 참여하지 못하더라도, 그의 ‘조사’(弔事)에는 어떻게든 시간을 내어서 무조건 참석하려고 하지요. 그러나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약하면 그의 경사에는 함께 하다가도, 그가 조사를 당하면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버립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분께서 군중들로부터 환호를 받으며 인기를 누리실 때에는 앞장서서 그분과 함께 다니다가, 그분께서 반대자들의 손아귀에 붙잡혀 모욕과 고통을 당하실 때에는 자기 안위만 챙기며 뿔뿔이 흩어져 버린 겁니다.
하지만 성모님은 아들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셨습니다. 모두가 예수님을 버리고 떠난 빈 자리를 묵묵히 지키셨습니다. 그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세상을 떠나시는 마지막 순간에도 끝까지 그 곁에 계셨습니다. 그 시간은 성모님께 너무나 고통스럽고 가혹한 시간이었지요. 사랑하는 아들이 수난을 겪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그 고통을 내가 대신 받았으면 좋겠는데, 그게 안된다면 최소한 함께 나눠받기라도 하면 좋겠는데 그저 옆에서 지켜보는 것 밖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그런 지경에 이르게 한 하느님을 원망하고 저주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성모님은 그 ‘무력의 고통’마저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따르셨습니다. 그리고 그 순명의 결과 성모님께서 겪으신 괴로움과 슬픔은 그저 개인적인 고통에 머무르지 않고, 하느님을 위해 그리고 모두를 위해 당신을 기꺼이 희생하는 ‘수난’의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의 곁에 서 있던 ‘사랑하시는 제자’, 즉 요한은 “이 분이 네 어머니시다”라는 예수님 말씀에 순명하여 성모님을 자기 집에 모셨다고 합니다. 그런 요한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고통의 성모님’을 마음 속에 모시고 살아가도록 이끌지요. 고통의 성모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은 누군가를 이해하고 용서하며 품어안는 고통을 기꺼이 감당합니다. 고통 없는 사랑은 없음을,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예수님 말씀을 따르려면 사랑에 따르는 고통마저 기꺼이 받아들여야 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온전히 내 안에 품어안기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그 노력이 주님을 따르는 내 사랑을 완전하게 만들어 줄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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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 1. ================================================
♣복음말씀의 향기♣ No4347
9월15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연중 제 24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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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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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서울대교구 김정일 안드레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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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고통 속에서도 충만한 기쁨에 고무되셨던 성모님!>
교회 전통 안에 성모 칠고에 대한 묵상 관습이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전례 안에도 고통의 성모님의 생애를 기억하는 기념일이 제정되어 있습니다. 바로 오늘입니다.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왜 우리는 성모님의 고통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일까 생각해봅니다. 그분께서 겪으셨던 고통은 우리가 겪는 고통과는 결을 달리하는 고통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냥 고통이 다가오니 어쩔 수 없이 겪는 고통이 아니라 의미로 충만한 고통, 목적성이 뚜렷한 고통, 결국 기쁨으로 충만한 고통이었습니다
성모님의 생애는 기적같은 사건들로 가득합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고, 동정으로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고, 베틀레헴에 큰 별이 뜨고, 그 먼 곳에서 온 동방박사들이 방문하고, 요셉이 피하라는 꿈을 꾸고,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피신을 갑니다. 기적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보면, 마리아의 생애는 고통으로 가득합니다. 파혼당할 위기를 겨우 넘기고, 출산 때 방 한 칸 못 구하고, 헤로데 학살을 피해 난민이 되고, 다양한 예수님의 돌출 행동이나 발언으로 상처 입고, 마침내 아들이 십자가 위에서 죽는 것을 직접 목격합니다.
성모님 고통의 절정이라면 아무래도 성 금요일 오후 골고타 언덕 아래 서 계셨던 고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장면에 대해서 교부들과 역대 교황님들께서 동일한 강조를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실 때, 마리아께서도 십자가 아래서 영적 고통을 겪고 죽으심으로써 둘째 아들, 곧 당신께서 사랑하시던 제자와 그리고 또 다른 아들인 우리 교회를 영적으로 출산하셨다. 마리아의 고통을 결코 헛되지 않고 결실을 맺었다.”
유다교 학자 데이비드 플루서의 성모님에 대한 생각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마리아는 교회의 상징이자 이스라엘 민족의 상징이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될 점이 한 가지 있다. 고통의 어머니 마리아는 구름 위에 떠 있던 신화적인 인물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이 지상의 구체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고통의 어머니(Mater Dolorosa)는 신학적 개념이나 산물이 아니라, 온 몸으로 고통을 겪었던 인물이다. 그러나 고통 속에서도 충만한 기쁨에 고무되어, 혹독한 고통에 꺾이지 않았던 한 실제 인물이다.”
교회의 어머니, 고통받은 이들의 위로자시여,
우리 사목활동의 기쁨과 고통 속에서
이제 당신께 믿음으로 다가드나이다.
자애로운 눈으로 저희를 굽어보시고
두 팔 벌려 저희를 안아주소서.
사도들의 여왕, 죄인들의 피난처시여,
당신께서는 저희가 마주하고 있는
인간적인 한계, 영적인 실패, 내침받고 외로운
저희의 슬픔을 아시니
당신의 부드러운 손길로
저희의 상처를 쓰다듬어주소서.
(성모님의 고통과 예수님의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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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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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통에 보상을 주는 대상을 정하는 법>
영화 ‘아문센’(2019)은 남극점에 세계 최초로 도달하게 된 아문센의 남극 탐험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탐험 정신이 뛰어났던 그는 누구도 가보지 못한 북극 탐험에 대한 꿈을 꿉니다. 한창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을 즈음 북극에 처음으로 도달한 사람이 생겨납니다.
하지만 그는 자포자기할 수 없었습니다. 꿈을 이루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선원들을 속이고 남극으로 향합니다. 물론 이 이야기를 들은 선원들은 놀랍니다. 아문센은 “남극점이 아니면 죽음을….”이란 정신으로 타인의 희생을 모른척합니다. 각자 살아남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과정에서 동료를 그냥 내버려 두기도 하고 유럽인들이 혐오하는 일인 개를 잡아먹는 일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영국의 스콧이 이끄는 탐험대보다 먼저 남극에 깃발을 꽂습니다. 영국은 그들의 비인간적인 탐험 과정을 대서특필하며 아문센의 업적을 깎아내렸지만 아문센은 자신의 나라 노르웨이에서는 영웅이 됩니다.
이 영화를 보며 ‘아문센만 고통을 감내하며 목적지로 나아가는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문센만이 아닐 것입니다. 인생은 고통을 통해 무언가를 얻으려는 여정입니다. 한 명도 이 여정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원하든 원하진 않든 고통을 당해야만 합니다. 인생은 그래서 고통의 바다라고 불립니다.
우리가 받는 고통에는 반드시 보상이 따릅니다. 보상 없이 당하는 고통은 없습니다. 다만 그 고통에 대한 보상을 누구에게 받느냐를 정하는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아문센은 역사에 길이 남는 탐험가가 되기로 하였습니다. 그 의도로 어느 정도의 희생은 감수해야 했습니다.
아프리카의 밀림지대에 파견된 어느 병사가 있었습니다. 그가 소속되어 있던 부대는 밀림 한가운데서 적들에게 포위당해서 그 병사만 살고 전멸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모두 죽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6개월 뒤 그 병사는 혈혈단신으로 밀림을 헤쳐나와 구조되었습니다. 그를 발견했던 사람들은 그가 손에 꼭 쥐고 있던 지도를 보고 생각했습니다.
“역시 그는 밀림의 지도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살아난 거야!” 하지만 그가 펼쳐 보인 종이에는 밀림의 지도가 아닌 영국의 지하철 지도였습니다. 그는 런던의 지하철 지도를 그리고 그것을 보면서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에게 그게 받는 고통에 대한 보상은 다시 런던으로 가서 일상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보상이 없다면 우리는 아주 작은 고통도 감내할 수 없습니다. 가지만 가미카제 특공대를 생각해봅시다. 그들의 고통은 나라로부터 주어지는 명예였습니다. 나라는 명예를 줄 테니 목숨을 바치는 고통을 감내하라고 부추겼습니다. 그렇게 많은 이들이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하지만 나라가 생명을 바친 고통에 대해 보상해 줄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나라는 창조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통에 대한 보상은 결국 “우리가 누구를 위해 고통을 당하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나 자신을 위해 고통을 당하면 그 보상은 나 자신이 주어야 합니다. 힘든 일이 끝나고 시원한 맥주 한 잔을 자신에게 돌려주고 또 그 일을 끝냈다는 만족감에 미소 짓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나라는 존재가 줄 수 있는 보상은 거기까지입니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살 수 없습니다. 결국엔 내가 하는 고통에 비해 충분한 보상이 오지 않는다고 여길 때는 그 보상이 걷잡을 수 없는 중독으로 빠집니다. 알코올 중독과 약물 중독 등의 모든 중독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결국엔 겪게 되는 입니다.
결국엔 결정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나를 위해 고통을 감내하며 살 것인지, 가족을 위해 그렇게 할 것인지, 나라를 위해 그렇게 할 것인지, 혹은 하느님을 위해 그렇게 할 것인지. 내가 누구를 위해 고통을 감내하느냐에 따라 그 보상이 달라집니다. 하지만 하느님으로부터 보상을 기대하는 것이 가장 좋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느님을 위해 살며 하느님 때문에 고통을 당하기를 결심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커다란 문제에 직면합니다. 진짜 하느님이 계신지를 우리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는 어떻게 해야 하느님을 위해 고통을 당하는지, 그 방법을 모르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계신지, 아닌지를 믿는 것은 그냥 ‘선택’입니다. 어차피 믿음은 모험입니다. 나를 위해 고통을 감내하든, 가족이나 나라를 위해 고통을 감내하며 살든 나의 결정이고 하나의 투자입니다. 다만 누군가를 위해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뿐입니다. 그러니 더 큰 보상을 기대하려면 더 큰 보상을 주실 수 있는 대상, 곧 하느님을 위해 고통을 감내하는 편이 좋을 수밖에 없습니다.
차 사고로 몸 55%에 3도 화상을 입고도 살아난 이지선 씨가 있습니다. 이지선 씨는 대학교 4학년 때 오빠와 차를 타고 신호대기를 하던 중 뒤에서 음주운전 뺑소니 차량에 사고를 당했습니다. 온몸에 화상을 입었고 의사도 포기한 상태였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사는 것이 더 큰 고통이었습니다. 40번의 수술을 해야 했으며, 진통제의 효과가 떨어지는 몇 시간 동안은 극도의 고통을 당해야 했고, 살이 오그라들어 눈과 입을 몇 달 동안 깜빡이거나 다물 수 없었습니다. 목의 살이 오그라들어 머리를 들어 하늘을 볼 수 없어서 목과 척추까지 휘어져야 했습니다.
이제 그녀는 정해야 합니다. 이 고통을 누구를 위한 것으로 만들지. 그리고 하느님을 위한 고통으로 삼기로 했습니다. 목사님이 그녀에게 “자매님은 반드시 살게 될 것이고, 또 세상에 희망을 전하는 큰일을 하게 될 것” 이라는 말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을 믿으니 자신이 당하는 지금의 고통이 하느님의 뜻을 자신의 고통으로 이루도록 허락한 것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억지로라도 그렇게 생각해야 했습니다. 손가락이 곪아 8개를 잘라내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울고 있는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더 많이 자르지 않아서 감사하지?” 이지선 씨는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감사를 찾으려고 했다.”라고 말합니다. 사고를 낸 사람의 차가 보험에 들어 있어서 감사했고, 몇 달 만에 눈을 깜빡거릴 수 있게 되었을 때 감사했고, 손가락으로 글을 쓰고 숟가락을 들 수 있는 것에 감사했으며, 환자복의 단추를 혼자 힘으로 끼울 수 있어서 감사했고, 문을 열 수 있어서 감사했으며, 무엇 보다 살아있다는 것에 대해 감사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지금은 매우 행복해서, ‘진심으로’ 과거의 예뻤던 얼굴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다고 당당히 말합니다.
오늘은 성모 마리아의 고통을 묵상하는 날입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위해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하느님을 위해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투자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죽이는 이들을 미워하지 않고 모든 고통을 감내하실 수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성모 마리아께서 어떠한 보상을 받으셨는지 눈으로 직접 보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렇더라도 아문센이나 가미카제 자살 특공대보다 덜 행복한 삶을 사셨다고 감히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도 그녀는 밝은 면을 보려 노력했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목사님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이라고 말해 준 것입니다. 이지선씨는 그것이 하느님에게서 들리는 음성처럼 느껴져 힘을 냈다고 합니다. 이것이 복음을 받아들인 이의 자세입니다. 복음을 지녔다면 절망이 그 사람을 짓누를 수 없습니다.
이지선 씨는 자신의 이런 마음이 ‘가난’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도 가진 것을 다 잃고 그렇게 가난해졌을 때도 자신에게 빛이 되는 복음을 가져야 합니다. 가진 것만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피조물에게 전할 복음이 꼭 있어야겠습니다.
나를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하느님을 위해서 내가 이런 고통을 받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의 대상은 모든 것을 그렇게 일어나게 해 주신 존재, 곧 하느님. 나의 고통의 보상을 주님께 받으려면 해야 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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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머니는 2020년 9월 10일에 하느님의 품으로 떠났습니다. 올해는 5년이 되는 해입니다. 어머니는 강인한 분이셨지만 그 강인함은 고통 속에서 단련되었습니다. 어머니는 배움에 대한 갈망이 있었습니다. 어머니 시대에는 배울 기회가 적었던 분들이 많았습니다. 어머니는 자녀를 키운 후에 ‘야학’에서 글을 배웠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기뻐하였고, 제게도 가끔 카드를 써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배움이 많았던 배우자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배움이 많았던 배우자인 아버지는 경제적인 능력이 없었습니다. 격동의 시대에 아버지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고, 그런 사람은 기존의 질서에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의 ‘꿈’을 받아들였고, 홀로 가족을 돌보았습니다. 쌀가게, 마트, 밥장사, 가사도우미도 하였습니다. 어머니의 사랑과 강인함이 열매 맺어서 저는 성직자가 되었고, 동생은 수도자가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성모님처럼 사랑하는 아들을 먼저 떠나보내야 하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신앙으로 삶의 십자가와 고통을 받아들인 어머니는 평생 사랑했던 아버지가 있는 하느님의 나라로 떠났습니다.
어제는 십자가 현양 축일, 오늘은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십자가는 원래 치욕과 모욕의 상징이었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구원과 부활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인들에게는 어리석음, 유대인들에게는 걸림돌이었지만, 신앙인들에게는 하느님의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역사를 보면, 교회가 십자가를 외면하고 세상의 권력과 재물에 기대었을 때, 언제나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이 없듯, 십자가 없는 교회는 물가에 세워진 집과 같아 시련이 오면 무너집니다. 성모님은 그 십자가를 가슴에 품으셨습니다. 아들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모습을, 십자가에 매달린 모습을, 숨을 거두고 품에 안긴 모습을 다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모님을 공경합니다.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아들의 길을 끝까지 함께 걸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분이 당신의 어머니십니다.’ 사랑을 받던 제자는 이제 성모님을 자신의 집에 모셨다고 성서는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고통의 바다에 떠 있는 작은 배와 같습니다.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의 아픔과 갈등, 고통과 절망을 함께 나눌 수 있을 때, 우리는 힘들지만, 고통의 바다를 건널 수 있을 것입니다. 조국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고인들의 유해가 그리운 조국으로 돌아오듯이, 하느님을 믿으며 충실하게 살았던 모든 이들은 천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는 것이 신앙인들의 희망입니다. 우리가 신앙 안에서 함께 기도하면서 함께 나누면서 살아가면 우리는 고통의 바다를 건너, 희망의 항구에 도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 저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수난 하신 동정 마리아를 기념하며,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게 하소서. 숨겨진 그물에서 저희를 빼내소서. 당신은 저희 피신처이옵니다. 제 목숨을 당신 손에 맡기오니, 진실하신 하느님, 저를 구원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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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바오로수도회 김태훈 리푸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이 막바지에 이르러 있습니다. 조금 뒤에는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라고 하시면서 숨을 거두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십자가 죽음이 죄의 용서를 위한 커다란 선물임에도 부족하다고 생각하셨는지, 이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소중한 분을 주시고자 합니다. 바로 당신의 어머니이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더 주고 싶어 애달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제자를 통하여 당신의 어머니를 우리 모두에게 어머니로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라시면서 당신 어머니께 따뜻한 사랑을 받으셨고, 우리도 그 어머니의 사랑을 받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어머니께서도 그분 말씀을 받아들이시어 우리를 모두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로 받아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여정에서 우리는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고 어머니의 모범 안에서 격려와 위로를 받습니다.
오늘 복음의 장면은 더 깊은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성모님의 아드님은 예수님 한 분뿐이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성모님께 “이 사람도 어머니의 아들입니다.”라고 하시지 않고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19,26)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으로 예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제자, 곧 우리를 모두 당신과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세례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우리가 하나 되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로마 6,3-5 참조). 우리는 예수님과 하나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 됨은 예수님 말씀에서 알 수 있듯 성모님을 통해서도 이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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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9,25-27: 이분이 네 어머니이시다
오늘은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로,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다음 날에 지내는 이유는 마리아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음을,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깊이 참여하였음을 드러낸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구원사업에 있어서 협력자의 역할을 다하신 분이시다. 예수님을 잉태하고 출산에서부터 십자가 앞에까지 어머니로서 고통을 감수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셨다. 마리아는 자신의 삶을 항상 그 영혼을 찌를 것이라는(루카 2,35) 시메온 예언의 예리한 칼의 전망 속에서 사셨다. 이 칼은 십자가이며, 이미 파스카 축제 후에 성전에 남아있던 예수를 잃어버림에서 시작되었다.(루카 2,41-52) 마리아의 생애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은 십자가의 발 앞에서 예수의 외침을 들을 때였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태 27,46; 마르 15,34) 십자가 밑의 마리아의 고통은 아들의 고통과 일치한다. 아들의 외침은 당신이 전적으로 하느님과 인류 사이의 일치를 이루기 위해 당신을 온전히 바치신 사랑의 표현이며, 아버지께 대한 영원한 응답이다. 마리아는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 주어진, 아들이 자신의 버림받음으로 실현할 구원된 새로운 인류와 피조물의 가시적 표징으로 십자가 앞에 계시다.
그러나 예수는 이 승리에서 자신을 떼어놓으신다. 그분은 마리아를 더는 어머니로 보지 않는다. 그리고 마리아는 가장 소중한 보물,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첫 번 잉태의 결실인 아들에게서 떨어져야 한다. 지상에서의 예수의 마지막 행위는 실제로 마리아의 모성을 다른 아들, 인류를 대표하는 요한에게로 옮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요한 19,26-27) 마리아에게는 요한과 함께 십자가의 발 앞에 있음으로써 두 번째 잉태가 실현된다. 그녀의 고통 안에서 십자가를 통하여 쇄신되고 예수가 된 모든 사람의 어머니가 되었다. 그로써 마리아는 교회의 어머니이며, 우리의 어머니가 되신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로만 머물지 않고 새로운 공동체의 어머니가 되신다. 이것은 혈연관계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관계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5)라는 말씀의 확인이다. 자기 집에라는 표현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말한다.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모든 삶을 함께했다는 의미이다. 모셨다는 표현은 제자가 마리아에게 모든 것을 개방했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마리아와 제자 사이에 새롭게 맺은 가족관계의 의미를 알 수 있다. 이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 자신이 더욱 마리아의 삶을 본받고, 이 어머니의 고통을 우리도 함께하면서 하느님 아버지께 참된 제물을 바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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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십자가 곁에>
요한 19,25-27 (십자가에 못 박히시다)
그때에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십자가 곁에>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요한 19,25)
죽이는
십자가 곁에
너와 나 우리는
늘 새로 살림이다
가르는
십자가 곁에
너와 나 우리는
늘 새로 함께이다
절망적인
십자가 곁에
너와 나 우리는
늘 새로 희망이다
증오하는
십자가 곁에
너와 나 우리는
늘 새로 사랑이다
마지막인
십자가 곁에
너와 나 우리는
늘 새로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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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인은 성모님을 본받아 주님과 함께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요한 19,25-27)
1)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은, 성모님의 고통을 기억하고 묵상하는 날입니다. 성모님의 고통은, 처음에는 ‘메시아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또 ‘메시아를 보호하기 위해서’ 겪으신 고통이었고, 나중에는 신앙인으로서 ‘메시아와 함께’ 겪으신 고통입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실 때부터 그 고통을 감수하겠다고 각오하셨을 것입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찾아와서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할 때의 이야기를 겉으로만 보면, 일방적으로 통고한 일로 보이지만, 내용을 잘 보면, 천사는 인류 구원에 관한 하느님의 뜻과 계획을 설명한 다음에 성모님의 뜻을 물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루카 1,38) 여기서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라는 말은, 성모님이 응답하실 때까지 천사가 기다리고 있다가 응답을 듣고 나서 떠나갔음을 나타냅니다.
그렇게 성모님의 응답을 기다렸다는 것은, 그 전에 어떤 질문이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성모님의 응답이 “저는 바랍니다.”이기 때문에, 아마도 천사의 질문은 “너도 원하느냐?”였을 것입니다. <성모님의 응답의 뜻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저를 통해서 이루어지기를 저도 원합니다. 그래서 종이 주인에게 순종하듯이 주님의 뜻에 순종하겠습니다.”입니다.>
성모님께서는 그렇게 응답하실 때, 당신이 메시아의 어머니로서 겪어야 할 고통도 기꺼이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루카복음 2장에 기록되어 있는 ‘시메온의 예언’은 단순한 예언이 아니라, 성모님의 응답과 순종과 각오를 찬양하는 말로 해석됩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4-35)
<이 말에는, “당신은 극심한 고통을 겪겠지만,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주님의 뜻은 주님께서 계획하신 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헤로데를 피하여 급하게 피신해야만 했던 일과 피난살이도 감내해야 할 고통이었는데, 그 고통은 아기를 보호하기 위한 어머니의 고통이기도 하고, 메시아를 지켜 드리기 위한 신앙인의 고통이기도 합니다.
2)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서 계셨다는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고통을 ‘예수님과 함께’ 겪으셨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어쩌면 직접 겪으신 예수님의 고통보다 그 고통을 지켜보는 어머니의 고통이 더 컸을 텐데, 성모님께서는 어머니로서, 또 신앙인으로서 그 고통을 함께 겪으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십자가 수난과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믿고 계셨을 것이고, 언제 어떻게 이루어질지는 몰라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신다는 것도 믿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고통과 슬픔이 작아지는 것은 아니지만, 믿음은 고통과 슬픔에 굴복하지 않고 견딜 수 있는 힘을, 또 고통과 슬픔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줍니다.
3) 우리는 성모님에게서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을 배웁니다. <“사랑은, 함께 하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4) 신앙생활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생활이고,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신앙인이기 때문에, 또 신앙인으로서 겪는 고통은,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 건설에 참여하기 위해서’ 감수하는 고통입니다.
<신앙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고통들도 있고, 그런 고통은 그냥 피하거나 물리치는 것이 옳습니다.> 신앙인의 고통은 신앙인 혼자서 겪는 고통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겪는 고통입니다.
그리고 그 고통은 ‘자기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고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하기 전에 사실은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오셨고, 주님께서 먼저 우리와 함께 살고 계신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신앙인이 모든 것을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은, ‘주님께서 함께 계심’에 대한 응답입니다.
5) 베드로 사도는 ‘시련’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마지막 때에 나타날 준비가 되어 있는 구원을 얻도록,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힘으로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니 즐거워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며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1베드 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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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어머니의 고통을 거울 삼아>
성모님은 우리의 어머니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곁에 계신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들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습니다. 결국, 거룩하신 어머니 마리아는 이제 모든이의 구원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아들에 의해 모든이의 어머니가 되신 것입니다. 성모님은 이제 나의 어머니이십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는 시작부터 끝까지 많은 고통을 안고 사셨습니다. 천사를 통해 주님의 잉태를 예고 받지만, 그 자체가 고통입니다. 시대 상황으로 볼 때 결혼하지 않은 처녀가 잉태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주님의 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 달라’고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루카 1,38) 그리하여 한동안, 약혼한 요셉으로부터 간음한 여인이라고 오해를 받으셨습니다.(마태 1,19) 요셉이 남모르게 파혼 하려고 마음을 먹기까지 했습니다. 누우실 한 평 방이 없어서 마구간 말구유에서 해산을 했고(루카2,7) 또한 이집트로의 피난길에 나서야 했던 어머니이십니다.
율법에 따라 출산 후 40일 만에 정결례를 거행할 때가 되어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기를 봉헌하면서 시므온의 예언을 접하게 되었는데, “품에 안긴 아기가 많은 사람의 반대 받는 표징이 되어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루가2,34-35)이라는 고통의 예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의 실현을 30년 이상 기다리며 살아야 했습니다.
예루살렘 축제 때에는 예수를 잃고 사흘 만에 성전에서 찾았건만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라고 하여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며”(루카2,41-52) 그 구원의 때를 기다리셨습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술이 떨어진 사실을 알렸을 때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2,4)라고 외면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시며 평정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일찍 남편 요셉을 잃고 홀어머니로서 가정을 꾸려야 했거늘 아들도 집을 떠났습니다. 어떻게 보면 홀로 버려졌습니다.
어느 날 소문을 듣고 아들을 찾았으나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마르3,33-35). 라는 말을 흘려들어야 했습니다.
게쎄마니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시며 기도하는 아들을 지켜봐야 했고, 가시관을 쓰시고 채찍을 맞으시며 골고타 언덕을 오르시는 아들과 함께 십자가를 가슴에 묻어야 했습니다. 제자들과 새로운 자녀 관계를 맺어주며 죽음을 맞이하는 아들을 침묵 속에 받아들이고 끝내는 피에 엉긴 아들을 무릎에 눕혀야 했던 어머니이십니다.
자녀는 부모를 땅에 묻고 부모는 자녀를 가슴에 묻는다고 합니다. 부활의 소식도 다른 사람을 통해 뒤늦게 알아야 했던 어머니는 인간적으로 보면 그야말로 고통에 묻혀버린 분이십니다.
성모님은 모든 것을 희생으로 바치셨습니다. 성모님께는 하느님이 당신의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뜻을 헤아리며 모든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겸손과 순명으로! 그리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셨습니다. 그래서 복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성모님을 거울삼아 자진하여 고통을 참아 받으며 주님께 온전히 희생을 바쳐야 하겠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생각은 언제나 성모님께서 울고 계시던 구세주의 십자가 곁에 머물도록 하십시오. 항상 성모님과 함께 울도록 하십시오”(교부 푀멘). 힘들고 어려울 때 한 번도 흔들리지 않으신 성모님을 기억하고, 성모님의 고통보다 더 큰 아픔을 겪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면 위로가 될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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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통고 신심은 14세기 초에 나타났으며 복음서에 근거하고 있다. 이 신심은 처음에 예수께서 올리브동산에서 피땀흘리시는 장면에서부터 수난 전체로 묵상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드러나게 되었는데 이것이 나중에는 성모 칠고로 발전되었다. 또한 '성모 칠고' 신심이 보편화되면서 점차 수많은 묵상과 기도문 그리고 시들이 쏟아져 나와 이 신심을 더욱 고취시켰다.
복음서에 근거를 둔 '성모 칠고'는 다음과 같다.
1.시메온의 예언 (루카 2,34-35)
2.이집트로 피난가심 (마태 2,13-21)
3.삼일 동안 예수님을 잃으심 (루카 2,41-50)
4.사형선고를 받은 아들을 따라 골고타에 오르심 (요한 19,1-17)
5.예수님,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죽으심 (요한 19,18-30)
6.예수님, 십자가에서 내리심 (요한 19,40-42)
7.예수님, 무덤에 묻히심 (요한 19, 40-42)
예수님의 수난이 곧 성모님의 고통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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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에 나왔던 노래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는 어느 자매님을 만났습니다. 그 노래의 제목을 물어보니, 그룹 다섯 손가락의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이라는 노래라고 답하십니다. 1985년에 이 노래가 발표되었을 때, 엄청난 인기였습니다. 그런데 자매님께서는 이 노래의 가사처럼, 지금의 배우자인 형제님으로부터 매주 수요일에는 빨간 장미를 받은 것입니다.
결혼으로 이끌어 주었던 노래, 남편의 낭만적인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이 노래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이 노래 가사가 남의 이야기가 아닌 자기 이야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남편과 싸우게 되었을 때, 이 노래를 듣고 화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렵고 힘들 때, 이 노래를 들으면 저절로 미소가 생각하면서 다시 힘을 낼 수 있었습니다.
성경 말씀도 그렇지 않을까요? 성경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가득합니다. 그 사랑의 말씀이 나의 이야기가 된다면 어떨까요? 나에게 힘을 주시고, 지혜를 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삶 안에서 깨달을 수 있다면 성경을 멀리할 수가 없게 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지금을 사는 힘을 얻으며, 행복 안에 머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십자가 길을 함께하신 성모님의 고통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성모님의 고통이 가장 컸던 사랑하는 아들의 십자가 죽음을 직접 봐야 하는 그 순간을 복음에서는 보여줍니다. 이 십자가 옆에서는 몇몇 여인들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함께 서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함께했던 제자들은 도망간 상황에서 이 몇 명만이 예수님 곁을 지킨 것입니다.
그들이 이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가장 수치스럽고 잔인한 형벌이었는데도, 더군다나 당시에는 ‘나무에 매달린 자는 누구나 저주받은 자’라고 알려져 있었기에 그 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쉽지 않은 상황일 것입니다. 바로 주님에게서 사랑을 가득 얻은 기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성모님께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라고 하시고, 제자에게는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단순히 임종 직전 아들을 잃은 어머니를 제자가 모시라는 도덕적 배려가 아닙니다. 그보다 성모님을 교회의 어머니를 우리에게 넘겨주신 것입니다. 이를 성모님께서 받아들이기가 쉬웠을까요?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배반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 과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철저하게 의지하신 성모님이시기에 이런 고통의 상황에서도 주님의 뜻을 따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십자가 앞에서 도망가지 않고 함께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을까요? 신앙의 고통과 십자가 앞에서 끝까지 머물 수 있을까요? 가장 큰 고통을 겪으신 성모님께서 우리의 어머니가 되셔서 힘을 주십니다. 우리도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그 곁에 머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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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사랑에서 피어난 고통은 기쁨으로 건너감입니다>
오늘은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그런데 ‘고통이 기념해야 할 일일까요?’ 어쩌면 고통은 저주요 재앙일 것입니다. 만약 사랑이 없는 고통이라면 말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고통, 사랑으로 생기는 고통, 사랑하기에 받는 고통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참된 기쁨을 배우게 하고,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줍니다.
마치 우리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새 생명으로 건너감이듯이, 바로 그 죽음을 통하여 생명으로 넘어가듯이, 사랑에서 피어난 고통은 고통이 아니라 기쁨으로 건너감이요, 바로 그 고통을 통하여 기쁨으로 넘어감입니다.
우리는 바로 어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현양’을 통해서 그 신비를 보았습니다. 성모님의 고통은 예수님과 함께 벌어집니다. 예수님께서 매 맞으시면 성모님도 매 맞으시고,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는 성모님의 '통고, 통애'(compassio)를 말합니다. 곧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의 고통에 함께 '참여'(participatio)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아파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아파하는 것에 참여하신 사랑입니다. 이를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 <교회헌장>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마리아께서는 당신 외아드님과 함께 심한 고통을 당하셨고, 아드님의 제사를 모성애로써 함께 바치셨으며, 당신이 낳으신 희생자의 봉헌을 사랑으로 동의하셨다.”(교회헌장 58항)
또 바오로 6세 교종의 문헌 <마리아 공경>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마리아는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원의 신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계시며, 야훼의 고난 받는 종의 어머니로서 고통을 당하셨다."(마리아 공경 7)
오늘 복음은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처참해진 모습을 애끓는 마음으로 지켜보는 장면과 예수님께서 모친 마리아를 사도 요한에게 부탁하시는 장면입니다.
아들의 죽음과 함께 있는 성모님의 이 광경은 인간적인 고통과 신앙적인 굳셈이 함께 연출되면서, 그지없이 비장하면서도 동시에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가 고통과 아버지께 대한 믿음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듯이, 십자가 밑에 서 계시는 성모님의 모습에서도 고통과 믿음이 동시에 드러납니다.
이토록 성모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고통과 죽음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시면서, 나아가 동의만하고 의탁만 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성원하면서, 예수님의 고통과 믿음에 완전한 일치를 이루시고,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깊이 참여하십니다.
성모님과 함께 오늘 우리도 <본기도>에서는 이렇게 바칩니다.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당신 아드님 곁에 서서, 성모님도 십자가의 고통을 함께 나누게 하셨으니, 저희도 그리스도와 함께 수난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에도 참여하게 하소서."
하오니 어머니,
고통 속에서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고통을 통하여 기도하고, 고통과 함께 기도하게 하소서. 고통 안에서도 희망하고, 고통 안에서 믿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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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는 그분의 어머니께서 서 계셨습니다.'(요한 19,25)
어머니!
당신과 함께 십자가 밑에 있게 하소서.
믿음으로 서 있게 하소서.
십자가 밑이 저의 자리가 되게 하시고,
당신과 함께 아들의 남은 고통에 참여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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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함께하지 않는 것이 고통인 사랑>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가 서 있었다.”
모든 거룩한 사랑은 고통을 함께하지 못하는 것이 고통이다. 사랑이 크면 클수록 고통을 함께하지 못하는 것이 고통이다. 그러므로 이기적이고 작은 사랑은 자기밖에 사랑할 수 없고, 다른 이의 고통에 조금도 함께할 수 없다.
이는 성모 마리아의 통고를 묵상하며 든 생각의 요약입니다.고통과 관련하여 생각할 때 인간이 어떻게 그리 다를 수 있는지 신기할 뿐입니다.
사람들 가운데는 남의 고통에 함께하지 않음은 물론
남을 고통스럽게 하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심지어 남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에서 희열을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떻게 같은 인간인데 그럴 수 있습니까? 남을 괴롭게 하면서 전혀 괴롭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면 미워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미움 없이도 악한 짓을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있다면 자기를 위한 사랑밖에 없기에 미움 없이도 자기 이익을 위해 악한 짓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사랑이 얼마나 위대합니까? 그러니 사랑이 얼마나 신비합니까?
그럴 이유가 없는데도 저 멀리 가자 지구에서 이스라엘의 만행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의 고통에 함께하고 아프리카의 고통에 함께합니다.
사랑은 진정 모든 것을 함께합니다. 기쁨도 슬픔도, 괴로움도 즐거움도 다 함께합니다. 조금도 함께하지 않는 것은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또 모든 것을 함께할 뿐 아니라 모든 사람과 함께합니다. 사랑이 크면 클수록 모든 사람의 모든 고통과 기쁨에 함께합니다.
오늘 통고 축일을 지내시는 성모님이 그러하십니다. 아드님의 모든 고통에 그리고 인류의 모든 고통에 아드님과 함께 아파하십니다.
오늘 묵상은 이것으로 갈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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