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 피어 매실 맺고 / 정경자
3월의 때 아닌 폭설로 인해 귀한 설중매를 보게 되었다. 우아한 자태에 잔설이 앉아 바람에 흔들리니 사군자 중에 매화그림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비경이다.
가지에 흐드러지도록 피는 벚꽃이 화려하게 치장한 무희라면 우듬지에 적당한 여백을 두고 드문드문 피는 매화는 고아한 매력의 귀부인이라 하겠다. 온갖 만물이 혹한에 몸을 움츠리는 시기에 홀로 꽃을 피워 절제된 향을 머금은 그 절개는 또 얼마나 가상한가.
돌아가신 아버지가 해마다 매실을 선물로 보내주신 지도 서너 해가 되었다.
병세가 오랫동안 호전되지 않자, 아버지는 다급하셨는지 화장 대신 갑자기 산소 이야기를 끄집어내셨다. 계획에도 없던 땅을 사들이고 관리하기엔 가족들의 형편에 버거운 일이었고 시간적인 여유도 없어보였다. 더더구나 장남의 늘품은 누나인 내가 봐도 믿을 수가 없어 당신만의 괜한 과욕이다 싶었다.
그 해 겨울, 추위도 아랑곳없이 아버지는 풍수 보는 지관을 앞세운 채 뻔질나게 출타하시더니 마침내 고향 근처의 자그만 산을 샀다고 통보를 하셨다. 가까운 묘목시장도 마다하고 먼 시골장터까지 가서 아버지가 직접 구해온 튼실한 매화와 가시오가피 묘목을 심기 위해 온 가족이 모인 것은 이듬해 청명절이었다.
소나무가 병풍처럼 둘러싸고 맑은 계곡이 옆으로 흐르는 산세는 아담하고 포근했다. 풍수의 ‘풍’자도 모르는 문외한이 보아도 아버지가 탐내실만한 땅이었다. 아버지는 꼭두새벽부터 나와서 포크 레인과 덤프트럭, 인부까지 동원해서 등산로 정비를 하고 계셨다. 밭으로 쓸 땅을 트랙터로 갈아엎고 뒤따르던 포크 레인이 구덩이를 팠다. 식구들이 차례대로 묘목을 심었다. 세상이 좋아져 기계의 힘을 빌리니 한나절 만에 야산에는 밭고랑이 생기고 묘목이 나란히 서서 제법 농장다운 티가 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당신이 누울 자리를 손볼 차례였다. 주변의 웃자란 솔가지를 쳐내고 땅을 돋우고 다지는 일에 아버지가 꼼꼼하게 지시를 내렸지만 내 마음은 공연히 불편했다. 원래 자식들이 알아서 해야 할 일이었지만 아직 어리고 세상물정 모르는 탓에 무엇 하나 제대로 할까 싶은 아버지의 염려가 전해져 왔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지반공사가 흡족한 듯 인부들과 함께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셨지만 나는 가슴을 치고 올라오는 뜨거운 것을 억누르느라 애를 썼다. 아버지가 강건한 체력으로 땅을 사서 농사를 짓겠다하셨던들 가슴이 그렇게 녹아내렸을까.
그렇게 급하게 공사를 서두르셨던 이유를 아버지는 혼자 짐작하고 계셨는지도 모를 일이다. 뭇사람들이 우려하던 아홉수를 넘기지 못하고 아버지는 결국 그해 가을, 그 땅으로 돌아가 누우시고 말았으니.
장례를 마치고 위폐를 밀양의 작은 절에 모셨다. 그곳은 집안의 길일을 잡고 흉사에 기도를 보태주시던 주지스님과 함께 그 인연이 삼십 년도 더 된 각별한 곳이었다.
49제의 초제를 지내고 절집 뒤꼍에서 아버지의 유품을 태웠다. 어머니는 막대기로 유품을 뒤적이면서 이렇게 골고루 태워야 아버지도 홀가분하게 저승으로 떠난다고 하셨다. 평소 대수롭잖게 보아왔던 낡은 지갑, 점퍼, 구두가 처음으로 아버지의 분신처럼 여겨지는 순간이었다. 불구덩이에 어룽거리는 임자 잃은 물건의 최후도 비장하기는 사람의 마지막과 같았다.
제를 마친 뒤, 요사 채에 늦은 점심상이 들어왔지만 생각이 없어 동생과 함께 절집 마당을 서성거렸다.
“입맛은 없어도 밥을 먹어야 제대로 음복하는 거다.”
평소 말수도 적고 점잖은 주지스님이셨지만 그날은 식구들을 위로하느라 우스갯소리도 하시고 따라다니며 식사를 권하시는지라 별수 없이 수저를 들었다. 이름도 모르는 형형색색의 나물들의 향연이 밥상에 펼쳐졌지만 이젠 지하에서 수저조차 들 수 없는 아버지가 떠올라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이리저리 젓가락이 가다가 조그만 장아찌 한 조각을 입에 넣게 되었다. 그 새콤달콤하고 상큼한 것이 입안에 퍼지면서 갑자기 입맛을 돌게 했다. 무엇인지도 모르고 한 접시를 뚝딱 비우자 스님은 공양 간에 이야기해서 그것을 다시 상에 올렸다. 난생처음 먹어본 그것은 귀한 손님이 올 때만 내놓는다는 매실장아찌였다. 스님은 맛있게 먹고 힘내라고 그것을 싸서 돌아오는 차에 실어주기까지 하셨다. 산 사람은 이렇게 다시 삶의 의지를 되찾는가 보다.
선산에 심은 나무는 그동안 잊고 있었는데 서너 해전부터는 매화가 피고 난 뒤 마고자단추 같은 초록방울이 주렁주렁 열리기 시작했다. 오가피나무의 생육은 토질과 맞지 않았는지 다 말라죽고 매실나무만 남아 가뭄도 타지 않고 그 수확량이 해마다 늘어간다. 두 해는 집집마다 한 자루씩 돌아오더니 작년부터는 그 양이 조금 더 늘었다.
유월의 청매에 흰 눈 같은 설탕을 덮어 잠을 재운다. 백일 정도 재운 후 매실 청은 따로 걸러낸다. 씨앗을 도려낸 쫄깃한 과육을 묵은 고추장에 박아두었다가 김장김치가 떨어지는 이른 봄에 내면 식욕을 돋우는 훌륭한 찬이 된다. 엄동설한에 매화를 보는 맛이다.
옛날에 선비나 한량들은 매화의 기개를 흠모하여 한시라도 빨리 설중매를 보고자 매화 분(盆)을 온실로 들이거나 나무에 박피를 가했다고 한다. 그런 나무에서 열린 매실이 오히려 아녀자의 화병이나 부인병, 칼슘 흡수를 도와 피부미용에 좋은 약재가 되었다니 자연의 이치는 오묘하면서도 때로는 공평한 것 같다. 양반체통 때문에 생계는 나 몰라라 하고 오로지 글공부에만 전념했을 선비와 주색잡기에 빠진 방탕한 한량들의 뒤에는 말없이 눈물지었을 여인이 있었음은 불 보듯이 훤하다. 그 아녀자의 심신을 달래는 열매가 안채가 아닌 사랑채에서 사랑받으며 꽃피우고 열매를 맺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신의 섭리다.
매화가 피고 매실 맺는 것이 자연의 섭리라면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처럼 자식사랑도 거스를 수 없는 하늘의 이치다.
기어이 당신의 누울 자리 하나만큼은 보전해야겠다는 그 아집이 집안 형편에 넘치는 처사라고 못마땅했던 적도 꽤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아비 된 자로서 최선의 선택이었음을 차차 깨닫게 되었다. 집안을 든든하게 이끌고 갈 변변한 재목 하나 없음에 명당 비슷한 땅의 지기(地氣)를 빌려서라도 자식들이 발복하길 아버지는 끝까지 기원했을 것이다.
매화가 활짝 핀 것을 보니 아버지는 올해도 자식들에게 나누어 줄 매실을 빚으시는 모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