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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4)
신비로운 평안
요 14:33 / 김이봉 목사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한복음 14장 27절>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16장 33절>
1. 한국인의 인사법은 유대인의 인사와 비슷합니다.
유대인들은‘샬롬’이라는 인사를 주고받습니다.
‘샬롬’은‘평안 하십니까’라는 뜻입니다.
우리도 인사를 할 때 먼저 평안을 묻습니다.
‘다 평안하시지요?’라고 평안을 인사말로 사용합니다.
그만큼 인간 삶에서 평안이 중요하기 때문인 줄 압니다.
또 거꾸로 생각하면, 그만큼 평안하지 못하게 사는 것이 우리들의 생활이란 말도 됩니다.
그래서 만날 때 마다‘평안하시지요?’그런 인사들을 나누는 줄 압니다.
평안하지 못하면 모든 것이 다 귀찮습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평안이 없으면 불행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평안이 돈에서부터 오는 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삶의 기본 생활을 유지하려면 돈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돈이 모든 평안함의 유일한 원천은 아니란 말입니다.
가난한 중에도 평안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면, 그것이 바로 입증되는 일입니다.
평안하려면 건강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것도 옳은 말입니다.
그래서 모두 건강하려고 무척 노력들을 합니다.
건강 중에도 육체적 건강이 있는가 하면, 정신적 건강도 있습니다.
육체는 멀쩡하지만, 마음에 병이 들면 평안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평안은 무엇인가 모자람이 없을 때 평안하다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것도 옳은 말입니다.
모든 결핍에서부터 해방되고, 생각하는 대로 다할 수 있을 때 그것을 평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평안을 어디에서 구하려고 하느냐? 에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물질적 번영에서 구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현재의 모습이란 말입니다.
2.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한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는 다르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믿는 성도들이 추구해야 할 평안은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법을 그대로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믿는 성도들이 유념해야 할 평안은 무엇입니까?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이 무엇이며, 주님이 주려는 평안은 무엇인가?
이것만 알면 될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무엇입니까?
바로 위에서 말한 대로 돈, 건강, 소유 등이 있겠지요.
그저 많은 것 가지고 있으면, 그것으로 평안한 줄 압니다.
마치 어리석은 부자의 경우에서와 같이, 소출이 넉넉하니 더 큰 창고를 지어서 곡식을 가득 가득 채워 놓고는 ‘내 영혼아, 평안이 쉬고 먹고 마시고 즐기자’라고 했다는 그런 식의 생각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그런 평안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의 말씀은‘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또 말씀하기를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는 말씀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평안은 주님과 무관한 물질 안에서, 건강 안에서, 소유 안에서 평안을 누리려고 하지만, 성도들의 평안은 그게 아닙니다.
그래서 세상이 주는 평안과 다르다고 하였습니다.
네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한다는 말, 깊이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이 주는 평안은 환난과 시련의 파도가 일어나는 삶의 한 복판에서 누릴 수 있는 평안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이 주는 평안과 다른 점입니다.
고난이 없어진 상태에서 누리는 평안이 아니라, 고난 중에서 얻어지는 평안이란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비로운 평안이다.
고난 중에 있을 때 사람들은 걱정과 불안에 싸여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약한 인간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고난 중에서 평안을 누린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그래서 신앙이 약한 자들이나, 아예 무 신앙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예수 믿는 사람들은 미친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한테 미치지 않고야, 어떻게 고난 중에서 평안을 누린다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이것을 <신비로운 평안>이란 말입니다.
주님의 이어지는 말씀을 경청해야 합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였습니다.
3. 고난 중에 있을 때 움츠러들지 말고 담대하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걱정 근심의 포로가 되기 쉽습니다.
걱정 근심으로 영과 육이 쇠해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담대하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속에서는 하나님께 간구하라는 뜻이 있습니다.
고난으로 인하여 신앙인에게는 도리어 하나님 앞에 더욱 가까이 나아가게 됩니다. 기도가 진지해집니다.
그런 기도 속에 응답 이상의 더 중요한 다른 목적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과 인격적 교제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과 대화하는 동안 하나님을 향해 시선이 열리게 되고, 하나님 앞에 눈물을 쏟아내는 간구를 통해 그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이것이 신비로운 평안입니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가 이루어지게 되면 세상이 주는 평안보다 더 깊은 신비로운 평안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 경험을 한 사람들이기에 우리 주변에서 극한 가난 가운데서도 찬송을 잃지 않고, 견디기 어려운 핍박과 조롱 속에서도 도리어 감사의 기도를 하게 됩니다.
찬송가 408장에서도 보면,
‘나 어느 곳에 있든지 늘 맘이 편하다.
주 예수 주신 평안함, 늘 충만하도다.
(후렴) 나의 맘속이 늘 평안해, 나의 맘속이 늘 평안해,
악한 죄 파도가 많으나, 나의 맘속이 늘 평안해’라고 했습니다.
흉악한 죄악의 고통스러운 파도 속에서도 평안을 느낀다고 하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최후의 승리를 이미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세상에서는 고난을 당하지만,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하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 기독공보에 실린 기사를 읽으면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하나님 감사합니다’라는 큰 타이틀 밑에‘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청년 조엘 소넨버그’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내용인즉 Joel Sonnenberg 26세는 갓 태어난지 20개월이 되던 해 40톤 트럭과 승용차의 충돌로 화상을 입었는데 전신에 3도 이상의 화상을 입어 살아남을 수 있는 확률은 10%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부모님들의 간절한 신앙이 기도의 힘으로 하나님은 역사하여 다시 살게 하였고, 전 세계를 다니며, 절망 속에 있는 장애인들에게 희망의 꽃을 피우도록 희망의 전령사로 다니는데, 이번 국회 조찬기도회에 초대를 받아 간증하는 말을 듣고 모두 눈시울을 붉혔다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모님은 매우 지혜로운 사람이며, 내가 크리스천 가정에서 주일학교를 다닐 수 있었던 것이 매우 기뻤습니다.
하지만, 내가 그런 가정에서 교회에 출석했기 때문에 예수를 믿은 건 아닙니다.
가장 사랑하고 믿는 부모도 자신이 받는 수술을 대신 받을 수 없었고, 그래서 그가 잡을 수 있는 희망의 끈은 예수 밖에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나와 함께 고통을 느끼고 나와 함 께 누워 주신다는 것을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고, 나는 그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결국 18년 만에 가해자를 법정에서 만나서 용서하면서,‘한 사람을 증오하면서 살기보다 남은 삶을 지금에 처한 상황에 집중하면서 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말이 더욱 더 감명 깊었습니다.
“길이 있어 가는 것이 아니다, 내가 걸어감으로써 길이 생기는 것이다”는 말... 참으로 깊이 음미해야 할 말이라고 봅니다.
사람들은 길이 없다고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가노라면, 길이 생기는 것이란 말입니다.
주님은 그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신비로운 평안입니까!
우리 모두 금년 한해 동안 이러한 평안을 경험하는 성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평 안
요 14:27 / 문기태 목사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은 모두 마음 속에 일말의 불안감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심리학자들은 이 사회를 불안의 시대라고 일컫습니다. 특히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느 시대보다 더 많은 불안감을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성경은 사람들이 시달리는 다양한 형태의 두려움과 불안감에 침묵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우리들이 자주 시달리는 근심과 두려움을 극복하며 살 수 있는 해법을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중심으로 우리가 근심과 두려움에 눌리지 않고 행복하게 사는 길을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예수님이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릅니다.
평화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로마사람들이 말하는 평화입니다. 이것은 팍스라고 하는데, 영어로는 Peace라고 하는 평화입니다. 사람들은 평화는 힘으로 쟁취하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다른 나라보다 강해야 평화가 주어진다고 여깁니다. 다른 사람보다 강해야 평화가 임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로마는 강력한 군대를 양성하고 다른 나라를 정복하고 굴복시켰습니다. 오늘의 미국은 많은 돈을 들여 가공할만한 무기를 계속 개발하고 군사력을 과시합니다. 우리나라도 힘이 없어서 오천년 동안 침략을 당하고 보물을 약탈당하고 사람들이 능욕을 당하고 짓밟히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힘을 기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오늘 사람들이 출세하고 돈벌고 성공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도 불안함을 극복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출세하고 돈벌고 성공해야 거기에 평화가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 세상에서 잘되고 싸움에서 이기고 로마식으로 힘이 있어야 평화가 있다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평화를 찾습니다. 누구보다도 앞서고 제일 좋은 것을 가질 때 평화가 온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돈을 벌려고 안간 힘을 씁니다. 몸이 약하여져서 병들고 일찍 죽을까 불안해하며 건강을 챙기려고 지나치게 관심을 보입니다. 권력에 줄을 대려고, 무언가 힘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있으면 붙잡아 보려고 집착합니다.
그러나 평화는 그렇게 한다고 찾아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많은 것을 가지면 더 많은 근심이 있고 더 많은 불안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것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되면 될수록 더 불안하고 걱정이 많은 것이고 또 이 세상의 평화는 아침에 있다가도 저녁에 평화가 떠나갑니다. 늘 환경에 의해서 이 평화는 깨어지고 떠나가는 평화입니다. 영원한 평화가 아닙니다. 참 평안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참 평화는 성경에 기록된 히브리인들이 늘 찾았던, 히브리인들이 누리는 우리 성도들이 누렸던 살롬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이 주신 평화는 팍스가 아닙니다. 살롬은 힘을 길러 싸워서 빼앗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위로부터 주시는 은혜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 변화된 삶입니다. 하나님은 무기 없이, 힘 없이도 가장 힘있게 살아가는 이 평화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십니다. 여러분, 세상은 평화가 군사적인 힘으로 핵무기나 인간의 힘으로 평화가 주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 여파로 가정에서도 힘겨루기를 합니다. 부부간에도 관계가 깨어지고 가정의 평화가 깨어지는 것은 힘 때문에 깨어집니다. 서로 우위를 차지하려고 힘을 과시하면 가정도, 직장도, 사회도 위기에 처할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서로 잘났다는 힘, 내가 최고라는 힘, 교만한 힘을 앞세우다가 평화가 깨어지고 있습니다. 많은 가정이 평화가 깨어지고 고통스러워하고 있습니다. 많은 회사가 노사간에 갈등으로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부부간에도 내가 더 잘났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서로 자신의 부족함을 앞세울 때 평화가 오는 것입니다. 입에도 무기가 없어야 됩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무기가 없어야 합니다. 악수가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손에 무기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야 둘이 친구가 되고 하나가 될 수 있는 거예요.
서로가 무기를 내려놓고 손에 손을 잡을 때 가정에 평화가 있고 우리 삶에 평화가 있는 줄로 믿습니다.
2. 예수님이 주는 평안은 예수님이 누린 평안입니다.
예수님의 평안은 네 가지 특성을 갖습니다.
첫째, 순간적이지 않고 영원한 평안입니다.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조건이 좋을 때 생기고 나쁠 때 사라지는 평안이 아닙니다.
둘째, 영적 평안입니다.
셋째, 내면적 평안입니다.
넷째, 완전한 평안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나의 평안'에 반해, 세상이 주는 평안도 네 가지 특징을 갖습니다. 첫째는 짧고 순간적인 것입니다. 둘째는 물질적이고 육적인 것입니다. 셋째는 외면적인 것입니다. 넷째는 불완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끼치시는 '평안'은 영원하고 영적이며 내면적이고 완전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평안을 경험하고 소유해야겠습니다. 인생에 위기가 닥쳐도 주님의 평안을 유지하고 있어야겠습니다.
주님이 누린 평안은 십자가를 눈앞에 두고서도 누리는 평안입니다.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평안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평안했습니다. 제자들이 수천 명을 먹여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초조해할 때도 예수님은 평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셨습니다. 제자들이 풍랑을 맞아 두려워하며 소리를 지를 때에도 예수님은 평온하셨습니다. 오히려 풍랑 속에서 잠을 청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군사들과 싸우기 위해 칼을 뽑았지만, 예수님은 말고의 귀를 치료하시기 위해 손을 드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언제나 평안하셨습니다. 위기앞에서도 그 평안은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위험앞에서도 예수님은 마음의 평안을 빼앗기지 않으셨습니다. 위협앞에서도 예수님은 평안을 잃고 근심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완벽한 평안을 소유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좋은 평안을 예수님께서는 누리셨고 오늘 우리들이 똑같이 누리도록 선물로 주십니다.
에이미 카마이클 선교사는 "예수님의 평안은 모든 종류의 시험과 모든 시련을 견디게 했고 그것은 결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주노라'고 하신 그분 자신의 평안 그 것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의 시련이 얼마나 크든지 작든지 간에 우리는 그 가운데서도 예수께서 그분 자신의 평안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을 믿고 의지할수 있습니다.
어제 제 사무실에 예수 믿은지 한달된 새 가족 한 분이 다녀가셨습니다. 그분이 "마음이 평온해졌어요."라고 여러번 말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가장 대표적인 변화가 마음에 평안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난 후에 여전히 문제가 남아있지만 마음이 예전처럼 불안하고 두려움에 시달리지 않고 평안이라는 선물이 위로부터 임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강력한 힘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도 평안함이 충만하게 됩니다.
여러분 모두 예수님안에 있던 완전한 평안을 선물로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폭풍우치는 바다 한 가운데서도 안심하고 주무실 수 있게한 평안을 선물로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3. 예수님이 주는 평안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27)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믿으면 평안이 밀려옵니다. 새가족은 평안함에 사로잡혀 너무 감격해하는데 오래 믿은 이들중에 평안을 빼앗기고 근심과 두려움에 시달리는 이들이 간혹 있습니다. 원수 마귀가 평안을 훔쳐가려고 틈을 노리고 있습니다. 시시때때로 다가와 근심과 염려의 씨를 뿌리고 있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도록 겁을 줍니다.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평안을 훔쳐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평안은 아주 귀한 선물이기 때문에 잃어버리면 안됩니다. 잘 간직하고 날마다 누려야 됩니다.
미국 교회 부흥 역사에서 윌리엄 퀘일(1860∼1925)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감리교 목사였던 그는 능력있는 설교, 설득력있는 설교로 주목받았습니다. 얼마나 유연하게 설교했던지 사람들은 그를 '감리교의 종달새'라는 별명을 붙여주며 존경했습니다.
그에게도 고통스러운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밤중이 되어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침대 아래로 내려가 무릎 꿇고 기도했습니다. 적막한 한밤중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베고 있었던 베개를 끌어 안고 "주님,이 고통스러운 문제를 제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라며 울부짖었습니다. 그 때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네가 문제를 끌어 안고 고통당하고 있구나. 그러나 그 문제는 내가 해결할 일이다. 너는 자라. 남은 밤 시간 나 혼자 깨어 있으마."
케일 목사님은 감사하며 평안히 잤습니다. 이후 문제는 해결됐습니다. 그는 증거했습니다. "주님께서 깨어 계시니 여러분은 평안히 주무십시오."
요한복음 14장의 핵심 메시지는 보혜사 성령에 관한 것입니다. 26절에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말슴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 보혜사 성령님께서 오신다는 것입니다. 보혜사 성령님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자꾸 생각나게 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기를 쓰고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 냅니다. 설교 시간에 목사님이 뭐라고 했는지, 성경 말씀을 읽긴 했는데 생각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한편 어떤 사람은 다른 것은 생각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말씀만은 항사 샘솟듯 생각해 냅니다. 그것은 아이큐나 기억력이나 추리력과도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하나님의 말씀이 줄줄이 생각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유라굴로 광풍을 만나 죽게 되었을 때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광풍으로 인해 배가 파선당할 위기에 처해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살게 됩니다. 사업을 하다가 부도가 나서 가정과 회사가 풍비박산이 나고 이리저리 쫓겨 다녀도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한다면 살게 됩니다.
암에 걸려 의사로부터 가망이 없다는 진단을 받게 되더라도 근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며 예수님께 의지한다면 살아날 수 있습니다. 자식들이 위기 상태에 빠져 있고 부부 사이는 이혼 직전에 있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한다면 모든 문제들을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힘들지 않으며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아픔을 느끼지 않게 됩니다. 전쟁 중이나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한다면 곧 평안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하면 성령께서 염려와 근심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고 평안을 누리며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당신이 누리던 평안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마음의 평안, 얼굴의 평안, 언어의 평안, 입술의 평안, 생각의 평안, 내 영혼의 평안이 길이길이 넘쳐야 하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것을 누려야 합니다. 여러분이 자동차를 사면 타려고 사는 것이 아니에요? 옷을 사면 입으려고 사는 것처럼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평안을 주신 것은 우리가 평안을 마음껏 누리라고 주신 거예요. 이제는 우리의 평안을 늘 누리며 백 배나 더 행복하게 살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평안을 받아 누리십시오
요 14:27 / 문기태 목사
어떤 청년이 그의 생을 통해서 꼭 소유하고 싶은 것을 종이에 적어 보았습니다. 건강, 지식, 명예, 사랑, 권력, 돈 이런 것들을 기록해 가지고 그가 평소에 존경하는 경험 많으신 어른을 찾아가 그가 적은 것을 보여 드렸습니다. 이 어른은 청년이 적어온 목록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시더니 그 청년을 향해 "여보게, 자네가 여기 적어온 것은 훌륭한 소원이야. 그리고 일리 있는 목록이라고 생각하네. 그런데 자네는 여기 가장 중요한 것을 빠뜨렸어. 그것이 없으면 자네의 소유는 오히려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이 될 걸세." 그래서 이 청년은 "선생님, 제가 무엇을 빠뜨렸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이 청년이 묻는 말에 노인은 연필로 청년이 써온 목록을 벅 그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다가 '마음의 평화'라고 써 주었습니다. 이 청년은 신선한 충격을 받고 크게 깨달았습니다. 건강보다, 지식보다, 명예보다, 사랑보다, 권력이나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마음의 평화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 청년은 나중에 {마음의 평화}라는 제목의 책을 써서 수백만 부가 팔린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 청년의 이름이 죠수아 리브만입니다.
요한복음 13장 말씀에는 예수님이 다락방 강화를 통하여 제자들에게 사랑이라는 큰 선물을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14장 말씀에 제자들에게 평안이라는 선물을 주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제자들이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지 않겠습니까? 얼마나 두렵고 떨리겠습니까? 메시야로 믿고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3년동안이나 열심히 따라다녔건만 예수님께서 이제 그들을 떠나 그들이 따라올 수 없는 곳으로 가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향하여는 닭 울기 전에 세 번 주님을 부인할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 중 하나가 주님을 팔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그가 누굴까? 혹시 내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제자들로서는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또한 그들의 코 앞에 다가올 미래가 심상치 않게 느껴집니다. 주님이 배반을 당하고 고난속에 던져져 사라지고 나면 그들의 운명 역시 불투명하지 않겠습니까? 3년동안 예수님을 따를 때는 '저분이 메시야일 것이다. 이제 곧 저분이 우리 나라를 독립시키고 왕권을 잡으면 우리야말로 일등공신이니 한 자리 차지하지 않겠는가? 하는 은근한 기대가 있었는데 십자가에서 죽으면 그런 우리의 꿈은 어떻게 되는것인가? 나도 함께 잡혀가는 것 아닌가?'
그래서 불안하고 두렵고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하십니다. 그러면서 평안을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안에 있는 평안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선물로 주시는 평안을 받으면 어떤 면에서 좋을까요? 어떻게 예수님안에 있는 평안이 제자들에게 선물로 주어질 수 있습니까? 제자들은 과연 주님이 주신 선물 평안을 받아 누리며 살았을까요?
여러분안에 평안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만나 생명을 선물로 받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큰 특징중에 하나가 평안입니다. 주님을 모르고 살 때는 마음에 불안과 두려움이 가득합니다. 질병과 죽음과 불행의 그림자가 시시각각 다가오는 것 같아 늘 마음을 졸이고 삽니다. 그래서 용하다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가서 물어보아야 합니다. 그런 불안한 심리를 잘 이용하여 갈수록 점집이나 무당집들이 호황을 누립니다. 점치는 이들은 뒤숭숭하고 살기가 어려워지면 불경기속에서 오히려 특수를 누린다고 합니다. 사람들의 불안함이 더 커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의 특징을 큰 질병을 만나고 사고를 당해도 그렇게 불안해하거나 안절부절하지 않습니다. 크게 염려하지도 않습니다.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침착하게 대처하고 기다릴 뿐입니다. 오히려 너무 차분해서 이상하게 생각될 정도입니다. 마음에 평안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저는 늘 아내에게 이런 핀잔을 종종 듣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잠을 잘 자느냐?" 살다보면 크고 작은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제 아내는 잠을 잘 못자고 밤을 거의 세우며 이 생각 저 생각하는 때가 간혹 있습니다. 저는 무슨 일이 생겨도 심지어 아내가 잘 못자고 뒤척여도 그 옆에서 그냥 잡니다. 아주 잘 잡니다. 혼자만 잘 자니까 얄밉고 약이 오르나 봅니다. 한번은 꼬집고 마구 흔들어 깨워보기도 하더라구요. "응, 뭐야."하고는 그냥 잡니다.
종종 교인들이 큰 걱정의 말을 제게 하는 때가 있습니다. 듣다보면 정말 심각합니다. 교회에 큰 위기가 찾아 온 것 같고 문제가 쉽게 풀릴 것 같지 않게 들려집니다. 그런데도 저는 전혀 걱정이 되지 않습니다. 같이 걱정하고 심각해져야 얘기한 사람이 무안하지 않을텐데 그게 잘 안됩니다. 참 이상합니다. 별 것 아닌 것 같이 여겨지고 모든 것이 잘 되어갈 것 같습니다. '문제가 터졌지만 문제 없는 교회가 어디 있으랴? 어떻게 잘 되겠지, 골몰하여 걱정할게 뭐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교회는 어떤 공격을 받고 누가 아무리 흔들어도 뒤집어지지 않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지금은 이래도 미래가 밝아 보이고 가능성으로 넘친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본래 성격이 그렇게 느긋한 사람이 결코 아닙니다. 아무 것도 아닌 일에 큰 일 났다고 생각하고 당황해 하기 일쑤였습니다. 작은 일을 미리 크게 염려하며 불안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제게 큰 평안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사실 주님이 주신 평안을 누리며 기다리면 거의 대부분의 문제는 저절로 풀려버립니다. 그러나 평안을 거부하고 주위의 사람들에 휩쓸려서 같이 염려하며 좌충우돌하다보면 오히려 문제는 더 꼬이고 풀기가 어렵게 되는 것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정 염려와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으면 기도하면 됩니다. 기도하고나면 맡길 수 있는 믿음이 생기고 다시 마음에 평안이 밀려옵니다. 그리고 잊어버리고 있으면 어느새 다 잘 풀려져 있습니다.
성경은 약속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 7)' 염려가 찾아 올 때 염려에 사로잡히지 말고 감사함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을 지켜 주신다고 말입니다.
여러분에게 혹시 지금 어떤 염려가 있습니까? 두려움이 있습니까? 근심이 있습니까? 주님이 주시는 선물 평안을 받으시고 다 몰아내시기 바랍니다. 염려를 주께 맡기고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평강이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시는 은혜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불안해하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는 평안을 주셨습니다. 세상이 알수도 없고 줄수도 없는 주님의 평안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주님의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평안과 세상의 평안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평화라는 말에는 두가지가 있다.팍스(pax)와 샬롬(shalom)이 그것입니다.
팍스는 로마인들이 추구하는 평화였는데 물질적인 만족감이나 법,힘으로 세상을 평정하는 것 등을 의미했습니다. 로마는 이런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넓은 땅을 정복했고 지배했습니다. 로마는 하루도 피를 흘리지 않는 날이 없었고 결국 그 힘과 물질에 의해 망하고 말았습니다.
이에 반해 샬롬이 의미하는 평화는 로마 식민백성인 히브리 민족의 것으로 내적이며 정신적인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은 건강한 자나 성공한 자는 물론 병든 자나 실패한 자들과도 ‘샬롬’이라는 인사를 기꺼이 주고 받았습니다. 위로부터 덧 입는 고귀한 평안을 뜻합니다.
오늘날 믿는 자들이 구해야 할 평화는 팍스가 아니라 샬롬입니다. 스피노자는 “평화란 싸움이 없는 것이 아니다. 영혼에서 솟는 기쁨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새해에는 샬롬의 평화가 여러분의 삶속에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주님안에 있는 평안이 어떤 평안입니까? 갈릴리 바다에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가다가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제자들중에는 어부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그들중에는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 선원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모두들 한밤중에 만난 광풍앞에서 어쩔줄을 모르고 당황해 소리만 지르고 있습니다. 그 요란한 밤바다의 조그만 조각배위에서 모두들 소란을 떨고 있는 순간에도 예수님은 깨시지 않고 깊이 잠드셨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주님안에는 참 평안이 있기 때문입니다. 큰 물결이 주님이 탄 배를 침몰케 할 수 없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밖에서 어떤 엄청난 일이 일어나도 두려워하지 않는 고요한 마음이 주님의 평안입니다.
그런 주님의 평안이 여러분에게도 필요하지 않습니까? 인생을 살며 만나는 크고 작은 위기앞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여유있게 극복할 수 있는 평안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별 것 아닌 두려움앞에서도 크게 떨고 불안해하는 여러분에게도 주님께서는 평안을 선물로 주십니다. 여러분 모두 주님이 주시는 귀한 선물인 평안을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즉각적으로 평안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주님이 체포되어 고난을 당하며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자 두려움을 감당하지 못하고 모두 달아나 숨었습니다. 그리고 불안해하며 문을 잠그고 숨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요20:19절에 '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 후에도 얼마동안 그들은 평안을 맛보지 못하고 숨어 다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심을 목격하고 약속하신 성령님이 그들에게 충만하게 임하자 제자들을 더 이상 두려움과 불안함이 지배할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주님이 선물로 주신 평안이 무엇인지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평안에 이끌림받아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권세를 쥐고 있는 이들에게서 어떤 위협이 주어져도 움추러들지 않고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하고 대답하며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감옥에 갇히고 쇠사슬에 묶여 다음날이면 사형이 집행될 상황에서도 베드로는 누워 깊이 잠들었습니다. 세상에 어떤 강심장이 그런 상황에서 깊이 잘 수 있겠습니까? 천사가 나타나 감옥문이 열리고 감옥을 지키던 파수꾼들은 모두 혼비백산해서 떨고 있는 상황에서도 베드로는 잠이 깨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깊이 잠들었는지 천사가 그의 옆구리를 쳐서 깨워야 할 정도였습니다. 풍랑이 이는 갈릴리 바다에서 깊이 잠드신 예수님을 이제 닮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이 평안을 누리고 살 수 있게 된 비결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주님이 평안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이고 다음은 성령께서 오셔서 그것을 깨닫게 해 주시고 누릴 수 있도록 도와 주셨기 때문입니다.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우리가 어떤 주님의 선물을 받았는지 생각나게 하시고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할지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고 힘입으려고만 하면 성령님은 우리안에 주님의 평안이 충만히 역사하도록 도우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평안은 무언가 고요하고, 편안하며 순풍에 돗달고 뜻대로 일이 잘 풀리는 것을 연상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말씀하신 평안은 좀 다릅니다. 상황은 기대와 정 반대로 전개되고 꿈은 이루어진다가 아니고 더 멀어지는 분위기가 아닙니까? 전혀 평화롭게 보이지 않는데 평안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얼마나 불안했으면 8절에 빌립이 주님께 "주여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족하겠습니다."라고 하였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 주시지는 않고 비젼을 보여주십니다. (요 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도대체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나를 믿으면 나의 하는 일을 할 것이다. 이보다 더 큰 일을 하리라.' 조금 전까지도 겁 많고 나약한 배신자로 통칭되던 제자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금방 예수님처럼 되고 예수님이 하신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더 나아가 더 큰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하시니 제자들이 얼마든지 어리둥절하겠습니까?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참된 꿈을 심어 주셨습니다. 너희들은 결코 시시한 인생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할 것이고 너희 안에서 나와 동일한 삶을 살 수 있게 도우며 더 큰 일도 감당하게 역사할 것이다. 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비젼을 품으면 근심도 염려도 두려움도 도망갑니다. 비젼의 사람은 오늘의 암울한 현실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고통과 고난에도 쉽게 낙심하고 무릎꿇지 않습니다. 그것을 아시는 주님께서 어렵기 짝이 없는 상황에서 제자들에게 꿈을 나누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제자들이 주님이 하신 일을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주님처럼 기적을 행합니까? 주님처럼 십자가를 지고 인류를 구원합니까? 주님처럼 천국의 비밀을 가르칠 수 있습니까? 제자들이 어떻게 주님보다 더 큰 능력을 소유하고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주님은 이스라엘에 독립을 가져다 주지 않았습니다. 번영한 나라로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사람들앞에 높은 지위나 권력을 잡고 흔들지도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원하는대로 왕이 되어 로마를 정복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죄사함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구원하여 하나님께로 인도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고 제자를 삼아 하나님 나라로 인도했으나 제자들은 모든 족속을 향하여 외치고 제자를 삼아 하나님 나라로 인도했습니다. 주님은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를 다니며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만 사역하셨지만 제자들은 땅끝을 향하여 흩어져 이방인들과 흩어진 유대인들을 찾아 다니며 복음을 증거하며 사역했습니다. 주님은 3년동안 사역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구원을 이루셨지만 제자들은 각각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주인하며 산 제물로 자신을 드리며 일생동안 사역했습니다.
제자들은 정말 예수님을 믿고 주님이 했던 일들을 그대로 하였습니다. 믿음으로 주님보다 더 큰 일들을 감당했습니다. 이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만약 제자들이 어려운 현실에 눌려 계속 숨어 지냈거나 편안한 삶만을 추구하며 살았거나 자신들은 주님 근처도 갈 수 없다고 여기고 위축되어 아주 안전한 작은 일만 찾아 적당하게 살았다면 그들이 참 평안을 누렸겠습니까? 아닙니다. 결코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오히려 평생을 두려움과 염려와 근심에 눌려 지냈을 것입니다. 주님의 도전에 응하여 주님이 하신 일과 더 큰 일을 하리라는 꿈을 꾸며 복음들고 나아 갔을 때 두려움도 근심도 낙심도 다 쫓겨 도망갔던 것입니다.
여러분 제자들이야말로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대단한 면이라고는 찾아 보기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보다 결코 많이 배우지도 않았습니다. 여러분보다 많이 소유하지도 않았습니다. 여러분 보다 잘 생기지도 않았습니다. 여러분보다 좋은 지위에 오르지도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주님을 만나 제자가 되었고 예수님이 주신 비젼을 품고 단순히 믿고 앞으로 나아갔을 때 그들을 통해 주님에게서 나타났던 능력이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주님이 이루신 사역의 열매가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오늘 주님은 여러분에게 똑같은 말씀으로 도전합니다. '너희가 나를 믿으면 나의 하는 일을 할 것이다. 이보다 더 큰 일을 하리라.'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주님께서 주시는 비젼을 받아 들이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시겠습니까? 여러분도 사람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는 일에 헌신하시겠습니까? 여러분도 주님처럼 다른 사람을 제자로 삼아 말씀과 사랑으로 섬기시겠습니까?
하루는 위대한 성자 프란시스가 순례의 길을 가다가 매우 지치고 피곤하고 짜증나서 우물가에 앉아 쉬게 되었는데, 한 여인이 나타나 동이 가득 물을 길은 다음 나무가지를 뚝 꺾더니 동이에 띄우는 것이었습니다.
프란시스는 하도 이상하여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여인이 가로왈 - 그렇게 하지 않으면 물이 흘러 넘칩니다.
프란시스는 땅바닥에 무릎을 끓고 이렇게 기도했다고 전합니다.
- 주님 내 마음에 나무 십자가를 띄워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내 마음에 이는 풍랑을 잠재울 수가 없나이다.
여러분의 마음에도 십자가가 있습니까?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자기를 포기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과 동행할 때 비로소 임하는 가장 귀한 선물입니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안일함을 버리고 주님이 도전하시는 새로운 미래를 꿈꾸며 자신의 인생을 재건축할 때 누릴 수 있는 아주 놀라운 축복입니다. 여러분 이 복된 주일에 주님이 주시는 선물, 평안을 받아 누리지 않으시겠습니까?
주님, 성령의 능력으로 나를 덮어 주소서.
그럴듯하고 근심없어 보이는 내 교만함을 낮추시고,
내가 원치 않던 삶, 내가 도무지 그렇게 살아갈 능력이 없는 삶,
제자 되고 제자 삼는 내게 주어진 더 큰 십자가를 눈물로 꼭 끌어 안는 삶,
그런 작은 예수의 삶을 살게 하소서
그리하여 세상이 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주님의 평안을 누리며 살게 하소서.
결코 잃어버리지 않고 계속 평안을 누리며 살게 하소서.
불안은 극복할 수 있다
요 14:27 / 옥한흠 목사
우리 가운데서 불안을 느끼지 않고 세상을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겉으로 보기에는 태연한 것 같아도 마음 한 구석에는 이런 저런 이유로 불안을 안고 살아 갑니다. 그 가운데 일부는 불안의 장애를 가지고 밤낮없이 시달리면서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부딪히고 다루고 해결해야 될 문제들 대부분은 우리의 능력 이상의 것을 요구할 때가 많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힘이 미치지 못할 때에는 불안을 느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오늘이라는 시간을 뛰어 넘어 내일을 볼 수 없습니다. 무슨 일이 생길지, 무슨 일이 기다릴지 아무도 모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불안을 주는 중요한 요인이 됩니다. 아무리 총명한 부모라도 내 자녀들이 어떻게 될지, 어떤 인생을 살게 될지 모릅니다. 내가 어떻게 죽을지, 언제 죽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모든 것이 미지의 세계 속에 갇혀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들려오는 소문들이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걱정이 될 때가 많습니다. 요즘 이라크 전쟁이나 북한 핵의 향후 전망을 가늠해 보면서 더더욱 그러합니다. 앞으로 경제가 잘 풀릴지 아니면 더 늪으로 빠질지 아무도 진단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런 것들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듭니다. 어떤 점에서 불안이란 우리가 평생 함께 걸어가야 할 반갑지 않은 길동무일지도 모릅니다.
다음은 어느 주간 잡지사에서 지난 3월 '한국사회 불안감 조사'라는 제목 아래 "당신은 불안을 느낍니까?"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많이 느낀다"고 대답한 사람이 73%, "조금 느낍니다"라고 대답한 사람은 20%가 넘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열에 아홉은 다 불안을 안고 산다는 말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그 가운데서 80% 이상의 사람들이 "작년보다 금년이 더 불안합니다"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 지수가 더 높아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그렇게 불안을 느낍니까?"라는 질문에는, 북핵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까, 경제가 점점 나빠지지 않을까, 잦은 구조조정으로 해고가 계속되면 직장을 잃지 않을까, 건강이 잘못되지 않을까 등 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많은 사람들이 불안의 요인으로 꼽은 것은 교통사고였습니다. 한국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죽지 않을 사람들이 이 땅에 태어나서 얼마나 많이 죽는지 모릅니다. 교통사고는 언제 당할지 모른다는 점에서 불안의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20대, 30대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데가 점집이라고 합니다. 점을 치는 운세 문화는 사회가 불안할수록 점점 번창하고 퍼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젊은 애들이 불안하니까 점집에 가서 뭔가 기분 좋은 소리를 듣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불안이 짙게 깔려 있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게다가 불안은 한번 처리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에게 난제와도 같습니다. 익히 경험하듯이 한번 불안을 잘 처리했다고 해서 계속해서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항상 재발이 됩니다. 한때는 은혜 받고 하나님이 주신 평안을 누리면서 찬양을 했지만, 언젠가는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불안해져 기도도 안되고 밤낮없이 시달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불안을 다루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지속적으로 이 불안을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 것입니다. 한번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불안이 사라지고, 평생 '아멘', '할렐루야' 하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지속적으로 이 불안을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 여부에 따라 불안에 끌려 다닐 수도 있고, 불안을 극복하여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속적으로 이 불안을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분은 평생 독특한 평안을 가지고 사신 분입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는 이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감돌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볼 때 예수님이 이번에는 무사할 수가 없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고, 돌아가는 상황도 너무나 살벌했습니다. 제자들의 장래도 보장할 수 없을 만큼 신변에 위협을 느낄 정도였습니다. 모두가 밥맛을 잃어버리고 잠을 제대로 못 자는 환경입니다. 이런 제자들의 모습을 보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주님이 자기 마음에 갖고 있는 평안, 즉 자신의 평안을 제자들에게 주신다고 합니다. 주님이 평생 세상을 살면서 마음에 간직하고 누렸던 그 평안을 지금 공포에 짓눌려 불안에 떠는 제자들에게 주신다고 합니다.
과연 이런 평안이 어떤 평안일까요? 열이 날 때 아스피린을 먹으면 금방 열이 떨어지곤 합니다. 마찬가지로 "오! 주여, 주시옵소서." 하고 받아 먹으면 그 시간 마음에 있던 불안이 눈 녹듯이 사라져 버리는 무슨 특효약과 같은 것일까요?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물론 어떤 때는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를 처음 믿은 자녀들에게는 자주 체험이 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신비스러운 평안이 우리 마음을 가득 채우고, 어제까지 걱정하고 불안해 하던 사람이 평안한 마음을 가지고 찬송하는 모습을 봅니다. 이처럼 아스피린을 먹듯이 주님이 주시는 평안일수도 있습니다.
언젠가 한 자매가 세례 간증했던 내용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는 불교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는데, 미션 스쿨에 들어가서 성경도 배우고,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혀 마음이 끌리지 않았습니다. 이제 졸업을 하고 나서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과 가정에 대해 푸른 꿈을 가지고 시작을 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에 허전함과 불안함이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애를 낳고 키우면서도 계속 마음이 허전하고 마음 속 공간이 점점 텅 비어가는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그러던 어느 추운 겨울날, 늘 창문을 열면 내다보이던 큰 건물을 바라보다가, '내가 오늘은 저기를 한번 가봐야지. 저기가 교회라는데....' 하고는 애를 안고 혼자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밀려서 들어왔는데, 바로 사랑의교회였습니다. 처음에는 예배를 드리면서 이렇다 할 큰 감동이 없었습니다. 두서너 번 계속 참석하면서 드디어 설교 말씀이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참으로 안식과 평안이 밀려왔습니다. 그러자 저를 짓누르던 답답하고 무거운 짐이 순식간에 벗겨지던 것 같이 느껴지더군요."
우리가 예수를 만나고 믿고, 우리의 죄가 용서 받았음을 확신하게 되고, 이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언젠가 천국에 들어가서 영원토록 하나님과 함께 살 것이라는 놀라운 구원의 은총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순간, 마음에 있던 불안이 눈 녹듯이 사라지고 평안이 가득 차는 것을 체험합니다. 물론 강하게 체험하는 사람, 약하게 체험하는 사람, 정신이 없을 정도로 체험하는 사람, 조용하게 체험하는 사람 등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가 예수 믿고 나면 이런 놀라운 평안을 체험하고 기쁨을 누리는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할 때 '나의 평안'이 어떤 사람에게는 그런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본문의 내용을 검토해보면 다른 평안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믿는 제자들이 불안에 떨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어떻게 될지 몰라서 별별 근심을 다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신변도 안전하지 못해 언제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적인 위기로 인해 불안해 하며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구원 받은 자에게 하늘로부터 주시는 은혜의 평안과는 다른 것입니다. 실제로 현실 문제에 부딪혀서 헤어나지 못하고 불안해 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나의 평안'은 다른 데가 있습니다. 이 평안은 삼키면 금방 열이 떠나는 아스피린 같은 하나님의 선물이 아닙니다. 무엇을 보고 아느냐 하면 지금 제자들 11명이 앉아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주님은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마음에 금방 평안을 느껴야 하는데 그 자리에서 즉시 평안함을 얻었다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모두가 똑같이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그날만 아니라 그 다음날도 계속 불안해 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나의 평안'은 금방 얻어서 먹는 그런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여러 날, 그 말씀을 듣고도 불안에서 헤어나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나서 그 부활하신 주님을 제자들이 만났습니다. 그리고 "아, 이분이야 말로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구나!" 하는 믿음이 회복되자마자 주님이 말씀하신 평안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임하시고, 성령이 모든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의 놀라운 나라의 비전을 그들에게 보여주셨을 때, 비로소 그들은 주님이 말씀하신 평안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일평생 그들은 그 평안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나중에는 순교하는 자리에 이르러서도 그 평안을 가지고 자신의 생명을 주님을 위해 바쳤습니다. 따라서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고 할 때 눈 감고 기도하면 바로 받는 그런 평안이 아닙니다.
주님이 주시는 '나의 평안'은 우리가 합당한 조건들을 갖출 때 뒤따라오는 특별한 은혜입니다. 어떤 합당한 조건들을 갖출 때, 잘 기억하세요. 조건들을 갖출 때 항상 뒤따라오는 은혜에요. 이게 주님이 말씀하신 나의 평안이에요. 예수님을 주목하세요. 그는 대적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한 평생을 사셨습니다. 그를 향하여 돌을 드는 사람들과 상대해서 그는 사역을 하셨습니다. 한 때는 임금을 삼으려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추종했지만, 나중에는 모두가 다 버리고 도망가는 삭막한 분위기에서 한평생 세상을 사셨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마음 속에 평안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평안이 가능했을까요? 주님의 한 생을 우리가 조용히 묵상해보고, 주님의 말씀을 검토해보면 어느 선까지 추론할 수 있습니다. '이래서 주님은 평안을 유지하셨구나! 제자들에게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할 때는 내가 이 평안을 유지하기 위해서 한 것처럼 너희도 이렇게 하면 이 평안이 너희 것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구나!'
이제 3가지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평안을 나의 것으로 소유하기 위한 첫째 조건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평안을 늘 유지하는 비결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여기는 것은 굉장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신학을 공부하지 않았기에, 신구약 성경을 전문적으로 연구하지 않았기에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 뭐가 대단하냐? 예수님이 항상 그렇게 불렀지 않느냐?'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라고 불러도 그저 막연히 어떤 격식을 차려서 부르는 호칭이 아니었습니다. 마가복음 14장 36절에 보면,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특별히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여."라는 호칭을 보릅니다. 이 말은 4~5살 먹은 어린애가 아빠를 부를 때 사용하는 언어입니다. 현대 아랍어에서는 '지바'라고 합니다. "지바, 지바" 하면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향해서 부르는 호칭입니다. 우리나라 말로 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빠' 라고 부른 것입니다.
주님이 겟세마네 언덕에 엎드려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이 기도를 이 말 속에 있는 뉘앙스를 그대로 살려서 다시 표현한다면 "아빠, 아빠! 아빠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잖아요. 무엇이나 하실 수 있잖아요. 무엇이나 원하시는 대로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 십자가를 안 지게 해주세요." 완전히 어린애와 같은 모습입니다. 주님이 하나님을 보실 때 하나님은 항상 아버지요, 자기는 항상 어린아이처럼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마음 자세였습니다.
에레미야스라고 하는 유명한 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문학과 경전, 전통을 연구한 매우 깊이 있는 학자입니다. 그분이 다 조사를 해본 결과 이런 결과를 내렸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이야기이다. 유대 나라에서 하나님을 예수님처럼 아버지라고 부른 사람도 없고, 더욱이 예수님처럼 "아바 아버지"라고 어린애와 같이 매달리는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을 찾고 추종한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그리고 그분과 함께 있으면 항상 평안할 수 있는 든든한 분이셨음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하나님을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마음에는 항상 평안이 있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불안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보고 그렇게 하라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아빠, 아빠라고 부르는데, 너희들도 그렇게 해라." 그리면서 기도할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르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아버지라는 말은 다 큰 자식이 자기 아버지에게 나와 점잖게 부르는 호칭이 아닙니다. 이 말엔 '아빠' 하는 뉘앙스가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8장에 보면 우리 마음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항상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한다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에게 친근하신 분이십니까? 얼마나 크신 분입니까? 얼마나 든든하신 분입니까? 얼마나 전능하신 분입니까? 그분이 내 옆에 아버지로 계시는데 뭐가 두려우며 불안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이 하나님을 어린아이처럼 보는 믿음을 가지고 자기 마음에 있는 평안을 지켰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나의 평안'은 이런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이라크에는 끔찍한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데, 연일 연야 공습이 이어지면서 많은 불상사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가끔 TV에 비치 때면 유심히 바라봅니다. 그런데 TV에 비치는 열 몇 살쯤 되는 소년, 소녀들의 얼굴들을 보면 생각보다 굉장히 평안해 보입니다. 마치 걱정이 없는 애들 같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아주 평안하게 웃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내 카메라에 그 옆에 누가 있어요? 든든한 누가 있어요? 아버지들이 있어요. 아버지가 있어요. 그러니까 애들이 철이 없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아버지가 옆에 있으니까 걱정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겁이 안 나는 거예요.
예수님도 세상에 사시면서 하나님을 어린아이가 자기 아빠를 보듯이 보면서 믿고, 의지하면서 살았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하면 주님이 가지신 그 평안을 우리의 것으로 늘 마음에 간직하고 살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게 잘 안 됩니다.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항상 나의 아빠로, 내 곁에 계시는 든든한 분으로 믿기가 힘듭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성경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습관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막연히 읽는 것이 아니라 묵상하는 것입니다. 고향을 떠난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얼마나 지성껏 돌보고, 사랑하시고, 인도하셨는지 마음에 묵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집을 떠나는 야곱을 얼마나 자상하게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가를 묵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헤매던 다윗을 얼마나 지극하게 간섭하시고 인도하시고 평안하게 하셨는지 계속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에게도 그렇게 하실 거야.' 하고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를 책임져 주셨고 든든한 보호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적이 없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이 내 곁에 계시는데, 내가 왜 불안해 합니까?
시편 27편 1절 말씀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이런 말씀을 마음에 담고 묵상하십시오. 이사야 41장 10절 말씀입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 말씀을 마음에 잘 담으십시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를 마음에 담고 운전할 때도 묵상하고, 설거지할 때도 묵상하고, 불안이 고개를 들 때도 묵상하십시오. 그리고 그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을 보면,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것이 느껴지면서 내 마음의 불안이 슬슬 힘을 잃어버리고 쫓겨나갑니다. 그리고 주님이 주신다는 그 평안이 내 마음에 자리를 잡게 됨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 노력하십시오. 가만히 앉아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불안할 때 엎드려서 어린아이들처럼 '하나님, 마음이 불안합니다.'라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진짜 아버지로 느껴지는지 한번 자기를 점검하십시오. 대여섯 살 먹은 애한테 진짜 아버지가 느껴지듯이 나에게도 하나님이 진짜 아버지로 느껴지는지 한번 자기 자신을 보십시오.
둘째로 예수님이 주시는 '나의 평안'은 철저한 순종에서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 편에 서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생명보다도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8:29) 이것이 주님의 확신이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 편에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나를 혼자 두시겠느냐? 하나님이 나를 혼자 두지 않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면, 내가 왜 불안 하느냐? 내가 왜 두려워하느냐?' 주님은 그러한 확신을 가지고 한 생을 평안 가운데 사셨습니다.
우리가 불안을 느끼지 않으려면 하나님과 충돌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불순종할 때 하나님과 충돌하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사이가 서먹서먹해집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불편해집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하나님과 불편해지는데 그 마음이 평안할 수 없습니다. 가령 우리가 아버지와 사이가 안 좋을 때 마음이 평안했습니까? 어머니와 여러 가지 일로 다투는데 마음이 평안한 날이 있었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평안을 늘 유지하려면 하나님과 항상 조화로운 마음, 평안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비결이 바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편에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불화는 우리에게 불안의 씨앗을 심습니다. 공포를 느끼게 합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과 평안한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링컨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추모를 받는 대통령입니다. 링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마자 그 다음해부터 남북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4년 동안 전쟁이 계속되었습니다. 얼마나 그 전쟁이 비참했는지, 전사자만 해도 북군에서 36만 명, 남군에서 25만 명, 총 60만 명이 넘는 전사자가 생겼습니다. 시체로 산을 이루는 전쟁이었습니다. 그리고 개전하고 나서 한 1년 동안 계속 북군이 밀렸습니다. 나중에 굉장히 불안한 상황에 놓이게 되자 링컨은 온갖 스트레스를 다 받았습니다. 심지어 83kg에서 57kg로 떨어질 정도로 체중이 감소했습니다. 그만큼 지도자로서 온갖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메릴랜드 주 앤티담 전투에서 처음으로 북군이 이겼습니다. 그 희소식이 백악관에 전달됐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참모가 링컨에게 축하를 했습니다. "각하, 이제부터 아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항상 우리 편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 북군 편입니다." 그러자 링컨이 정색을 하면서 내 밷은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내가 염려하고 마음에 걱정하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내가 하나님 편에 바로 서 있는가 서 있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내 편에 서 있을 때 나는 걱정을 안 한다. 내가 하나님 편에 서 있느냐가 문제이다. 내가 하나님 편에 서 있으면, 하나님은 항상 내 편이 되실 수 있어. 하나님은 성경의 다윗을 통해서 내게 이 놀라운 진리를 깨달게 해 주셨네." 가끔 참모들은 이런 링컨을 보고 어떻게 저리 태평할 수 있는지 놀랐다고 합니다. 그러나 링컨에게는 비결이 있었습니다. 링컨은 항상 하나님 편에 서 있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노예를 해방시키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마음이 평안할 수 있었고, 그 평안 때문에 그는 흔들리지를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항상 하나님이 내 편이 되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 편이 되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 편이 되기를 원하시기 바랍니다. 이를 위해 순종하시길 바랍니다.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 편에 서있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배웠으면 지키십시오. 진리라는 것을 확신했으면 그대로 살려고 노력하십시오. 그래서 하나님 편에 서면 하나님은 항상 내 편이 됩니다. 그럴 때 내 마음에 평안이 머무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충돌하면서 내 마음이 평안하지 못하다고 늘 하나님께 평안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유치한 일입니다.
세 번째로 주님이 주시는 '나의 평안'은 간절히 기도하는 데서 얻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일평생 기도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예수님께는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불안을 극복하는 비결이었습니다. 주님이 드리신 기도가운데 가장 감동적인 기도는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은 세상 죄를 짊어진 어린양이 되셨습니다. 가장 크고 쓴 잔을 입술 가까이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더할 수 없는 약함, 더할 수 없는 슬픔, 더할 수 없는 고뇌가 그분을 사로잡고 그 영혼을 쇠약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두려움과 놀라움이 그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시간은 사탄의 시간이었고, 어두움의 시간이었습니다. 그 시간에 잠깐 주님은 평안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럴 때 무릎을 꿇으셨습니다. 피 땀을 쏟으며 전력을 다해 "아바 아버지여" 하고 부르짖으셨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 평안을 회복시켜주셨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기도하는 자리에서 일어서 담대하게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들이 가까이 왔느니라." 얼마나 담대합니까? 얼마나 평안합니까? 얼마나 든든합니까? 바로 기도함으로 이러한 평안을 얻으셨습니다. 그리고 너희도 나처럼 기도하면 이 평안을 소유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평생 많은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세월을 보냈습니다.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치 못하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고후 7:5) 사도 바울은 정말 하루도 마음 놓고 쉴 수 없는 나날을 보냈지만 그의 마음에는 평안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비결이 어디에 있는지 빌립보 4장 6, 7절에서 이야기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이 말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닙니다. 자기가 두려움에 휩쓸릴 때마다 이 말씀대로 기도했더니, 실제로 평안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바울도 그렇게 했습니다. 여러분은 불안할 때 어떻게 합니까? 여러분이 불안해 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기도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느끼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의 평안'이 3가지 중요한 조건이 따르는 평안이라는 것을 말씀했습니다. 이제 다시 한번 마음에 정리하십시오. 하나님이 아버지로 느껴질 때까지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그러면 이 평안이 내 것이 됩니다. 하나님 편에 서서 순종하십시오. 그러면 이 평안이 내 것이 됩니다. 간절히 자주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이 평안이 항상 내 안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요즘 암 때문에 많이 걱정들을 하곤 합니다. 암으로 고생하다 세상 떠나는 분들이 많아서 누구나 암에 대한 공포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암에 걸리지 않을지 여러 가지 이론과 학설들을 주워 모아 나름대로 처방을 스스로 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육류를 적게 먹는다, 담배는 아예 끊는다, 스트레스를 가급적이면 받지 않는다, 채소를 많이 먹는다, 생식을 많이 먹는다, 공기 좋은 데 가서 산다, 할 수 있으면 웃으면서 산다, 신경을 곤두세우지 말라, 화내지 말라, 심지어 탄 음식은 입에 넣지 말라 등등. 물론 우리가 이런 예방을 해야 됩니다. 또 그런 사람은 아무래도 건강을 지키는데 도움을 많이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안은 암보다 더 무섭습니다. 불안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계속 이 불안을 놓고 싸워야 되고, 이 불안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됩니다. 암은 걸리지 않으려고 그렇게 신경을 곤두세우면서도, 왜 불안에 대해서는 대책을 세우지 않습니까? 왜 불안을 다스릴 수 있는 성경적인 방법이 있는데도 소홀히 합니까? 아무리 불안이 산적한 환경에 있더라도 예수님이 주시는 '나의 평안'을 갖고 감사하며 찬송하며 살 수 있는 은혜를 주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그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실천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 불안에서 벗어나기를 원합니까? 불안을 항상 이기고 살기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아빠로 항상 느끼고 그분을 절대 신뢰하면서 살 수 있도록 노력하십시오. 다시 말해 하나님 편에 서서 순종하십시오. 시시때때로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불안이 우리를 절대 지배하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은혜를 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마다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평안합니까?" 하고 질문을 던질 수 있을 만큼 세상 사람들에게 뭔가 매력을 주는 귀한 은혜가 있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코넬(W. P. Cornell)이라고 하는 사람이 쓴 찬송가 412장 2절을 한번 부르겠습니다.
"내 맘속에 솟아난 이 평화는 깊이 묻히인 보배로다
나의 보화를 캐내어 가져 갈 자 그 누구랴 안심일세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예수님이 이 험한 세상, 무서운 세상을 사시면서 항상 그 마음에 평안을 가지고 계셨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평안을 마음에 담고 사는 아름다운 주의 백성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은 내 아버지이십니다. 항상 하나님이 내 곁에 계심을, 그리고 하나님이 내 편에 계심을, 그리고 내가 기도할 때마다 들으시는 아버지 되심을 늘 믿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아름답고 복된 삶이 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