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閔妃暗殺>⑫-1
개화파 청년들이 본 일본
임오군란은, 청국이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강화하는 결과가 되었다. 청국에 의해 위기를 구제받은 민비 일파는 차츰 반일적이 되고, 청국에 기울여져 갔다.
“제물포조약”에서 정해진 대로, 조선정부는 일본으로 사절단을 보내게 되었다. 그 임무는 임오군란에 의해서 일본에 끼친 손해의 사죄와, 조규의 비준 교환 등에 있었다. 정사 박영효(朴泳孝)는 선왕 철종의 사위 이며, 정일품금능위(正一品錦陵尉)의 영작(榮爵)을 가진 명문 출신이다. 게다가 종사관인 서광범(徐光範)을 비롯하여, 고문인 김옥균과, 민태호의 아들로 민씨 일족의 청년층 대표인 민영익(閔泳翊)이 참여한 이 사절단은, 귀족 명문의 준재로 칭송되는 신진기예 15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조선정부는 방일사절단을 한창때의 젊은이들로 훌륭한 면면을 갖추기는 하였지만, 결핍된 국비 때문에 왕복 여비를 마련하기에도 형편이 어려웠다. 花房 義質(하나부사 요시모토) 공사는 그가 귀국하는 기선 明治丸(메이지마루)에 조선 사절단 일행을 태우고, 일본 체재 1개월간의 경비도 일본정부가 5.000엔을 보조하기로 했다.
현재의 한국 국기인 “태극기(太極旗)”는, 이때 일본으로 가는 메이지마루 선상에서, 김옥균 등이 처음으로 창정(創定)했다고 한다.
메이지마루의 요코하마(橫浜) 입항은 1882년(명치15년) 10월13일이었다. 제물포조약 체결에 성공하여 귀국한 하나부사 공사는, 관민 모두로부터 개선장군과 같은 환영을 받았다.
하나부사는 외무대보(外務大輔) 吉田 淸成(요시다 키요나리)에게, “과거의 경위에 구애되지 말고. 될 수 있는 한 조선사절단을 잘 대우해야 한다”고 말했고, 태정대신 三條 實美(산죠 사네미)의 결제를 받았다. 하나부사는 환영 진의 선두에 서서, 明治(메이지)천황 알현도 실현하고, 사절단에게 각처에서 정중하게 마음을 썼다.
조약비준의 교환도 원활히 이루어지고, 배상금 50만 엔의 지불방법에 대해서는, 면부 5개년에서 10개년으로 기한 연장을 결정했다. 그리고 橫浜(요코하마) 정금은행(正金銀行)에서 17만 엔을 차관하여, 그 중 12만 엔을 조선정부 국고에 납입하고, 5만 엔을 제1회분의 배상금으로 공제하기로 했다.
배상의 조건은 완화되었지만, 그러나 17만 엔의 차관에는 연 8분의 이식이 붙고, 2년 후부터 기산하여 10개년 연부였다. 또 부산세관의 수입권(收入權)과 단천(端川) 사금광 담보를 요구하는 빈틈없는 조건도 붙어 있었다.
일본의 신문들은, 「조선정부로부터 사죄의 국서를 봉정(奉呈)하기위해 내일한 사절단」이라고 호의적인 논조였으며,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도 임오군란을 알았을 때의 조선에 대한 격렬한 비난은 없어지고, 사절단 일행은 어디를 가나 따뜻한 대우를 받았다.
그들은 일본의 실정을 알기위해 노력했고, 하나부사를 비롯하여 일본정부 측은 적극적으로 그들을 도와, 정치, 행정, 교육, 산업 등 각 방면의 견학에 편의를 베풀었으며, 또 정계와 각계의 명사들 접촉도 주선했다.
청년 사절들은 신흥기운에 불타는 일본사회에 눈을 크게 뜨고 봤으며, 그 비약적인 발전에 경탄했다.
<유럽 여러나라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긴 세월에 걸쳐 근대화를 이룩했다고 듣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문명개화’의 메이지(明治)시대부터, 불과 15년에 이렇게 근대화를 하다니! 우리도 메이지 유신을 본보기로, 조국조선의 개화개혁에 매진해 나가야 한다. 일본이 천황(天皇)을 중심으로 급속한 발전을 한 것과 같이, 우리나라도 국왕을 중심으로 하여> 라고, 그들은 결의를 새로이 했다. 그 중심인물이 김옥균(金玉均)이다.
김옥균은 이해 3월의 제1회 방일에서 일본의 문명개화 실태를 알았으며, 福澤 諭吉(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라든가 정계의 사람들을 접촉하고, “우리 조국도 신지식, 신기술을 받아들여, 정부와 일반사회의 낡은 인습을 일변시켜야할 필요”를 확신했다. 청국의 종주권 하에서 벗어나, 세계의 여러 나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독립국으로 발전하자면, 하루라도 빨리 물심양면의 근대화를 진전시켜야 한다는 결의였다.
사절단의 거의 전원이 처음으로 본 일본의 실태에 자극받아, 김옥균과의 동지적 결합을 굳히게 되었다. 그러나 민영익만은, 민씨 일족의 기대를 한 몸에 짊어진 입장에서 당연하겠지만, 일동의 국정개혁 의견에 동조하지 않고, 일단 귀국 후에 혼자 미국으로 갔다. 그는 미국 땅을 밟은 최초의 조선인이다.
사절단 일행은 11월 하순, 신임 주한공사 竹添 進一郞(타케조에 신이치로)와 같이 귀국했다. 그러나 김옥균은 왕의 내명에 의해, 아직 한참동안 일본에 남았다.
임오군란으로 위정척사파가 후퇴한 후의 조선 정계에서는, 청국에 사대의 예를 취하는 수구파와, 개화파, 2파로 나누어 졌으며, 그 사이에 서로 다른 차이가 점차 선명하게 되고 있었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영의정을 아버지로 한 홍영식(洪英植) 등 급진적 개화파로 불리는 사람들은, 청국과의 종속관계를 단절하고, 수구파를 배제하며, 메이지(明治)유신을 모델로 하는 신정권수립을 목표로 했다.
이에 대하여, 김홍집(金弘集), 김윤식, 어윤중 등 온건적 개화파는, 청국과 종래의 관계를 유지하고, 수구파와 타협하면서, 차차 개혁을 진전시키자는 생각이었다.
김옥균과 어윤중은 일찍부터 개화사상을 설파한 박규수(朴珪壽)의 애제자였다. 위정척사파가 세력을 가지고 있던 시대에는 그것을 꺾자는 공통적인 목적 하에서 두 사람은 동지였다. 그러나 청국체제 중에 임오군란을 알게 된 어윤중과 김윤식이 청국에 출병을 요청함으로써, 김옥균은 정치적으로 그들과 결별했다. 김옥균에게는 그것이, 국권을 청국에 팔아넘기는 행위로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일본으로 사절단이 출발한 후, 조선정부는 조영하(趙寧夏), 김윤식(金允植)을 대표로하는 사절단을 청국으로 파견했다. 그 목적은, 군란을 진압해 준데 대한 감사의 뜻을 전하기 위함이었으나, 민비는 대원군의 현상을 살피고, 가급적 장기간 그를 청국에 구속해 두도록 의뢰하라는, 밀명을 주고 있었다.
이 나라의 어디에도 대원군은 없다고 생각할 때마다, 민비의 가슴은 간지러운 해방감으로 감미로웠다. 그러나 대원군이 죽은 것은 아니다. 정성껏 청국의 비위를 잘 맞추어, 하루라도 길게, 될 수 있으면 언제까지라도, 대원군을 잡아 두기를 바란다는---민비의 절실한 바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