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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 여행] 제주 민속박물관 해녀의집과 토속 신앙촌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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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 여행] 제주 민속박물관 해녀의집과 토속 신앙촌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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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해녀는 2016년 11월 ‘제주 해녀문화’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가 확정되었다. 본시 해녀란 공기
탱크 없이 바닷속으로 들어가 해산물을 채취하는 여성들을 말한다.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도 제주와 울릉도, 일본
일부 지역에만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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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가 해녀의 집을 보며 해녀들의 발자취를 따라 가면서 제주의 독특한 언어들을 들여다 보다 보니 재미있는
것을 하나 발견했다. 이 지구상엔 신기하게도 가장 많은 언어를 가진 나라는 남태평양의 작은 열도인 파푸아 뉴
기니다. 약 930만 명이 조금 넘은 인구수에 반해 무려 840여 개의 언어를 가진 파푸아 뉴기니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언어를 가진 나라가 바로 그 옆의 국경을 마주한 인도네시아로 700여 개의 언어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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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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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우리나라의 공용어는 공식적으로 2개가 있다. 그중 하나가 濟州語(제주어)다, 유네스코에서는 한국 표준어
랑 제주도 사투리를 별개의 언어로 분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2022년 현재 사용되고 있는 전 세계
언어 종류는 7151여개로 알려져 있긴 하지만 현재 공식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언어 수는 극소수를 제외한 약 3.000
여개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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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한국어가 전 세계의 언어 가운데서 차지하고 있는 비율은 현재 사용되고 있는 전 세계의 3,000여 개 언어 중
에서 언어사용 인구의 규모로 볼 때 랭킹 20위 안에 들 정도로 큰 언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암튼 해녀들을 위
주로 이루어진 제주 어는 그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현재 古語(고어)가 많이 남아 있는 특별한 방언으로 알려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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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이면엔 아이러니하게도 기나긴 '고립'이 제주에 害(해)가 된 것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한
국에서 가장 독특하다는 평가를 받는 제주의 문화를 보전하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줬다는 해석이 나오기 때문이다.
제주 언어와 해녀문화 등은 제주가 육지와 다른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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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지역 사투리에서도 나타나는 단순한 억양·리듬의 차이만이 아닌 전혀 다른 어휘가 존재하는 제주어의 형성
배경에는 '섬'이라는 특수성과 한반도 육지와 단절된 지리적 환경, 과 '출륙금지령'과 같은 인위적 단절 등이 제주
어의 독자성을 더욱 키우는 데 한몫을 했을 것이라는 게 이 유랑자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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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당시 제주에 '탐라총관부'가 설치돼 100년 이상 언어와 목축업 등에서 몽골의 영향을 받기도 했으나, 이
후 지리적·인위적 단절로 인해 다른 지역의 영향을 최소화하면서 제주 나름의 정체성을 강화할 수 있었다는 설명
이 가능한 대목이기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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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해녀 문화에도 역시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제주도의 출륙금지령이 200년 가까이 지속하는 동안 제주 인구는 서서히 증가했고 자연스레 해녀의 수도
증가했다. 이것이 오늘날 제주를 특별하게 바라볼수있는 계기가 된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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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숙종 때인 1694년 제주목사를 지낸 이익태가 쓴 지영록을 보면 '(제주에) 미역 캐는 잠녀(해녀)가 많게는 800
명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어 해녀의 수는 1700년대 초 900여명으로, 20세기 초인 1913년 8천391명에
이를 정도로 급격히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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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 새 없이 불어오는 바람과 싸우며 밭에서 일하다가도 물때가 되면 손에든 호미를 내던지고 바다로 뛰어들었던
강인한 제주 여성, 해녀들의 생명력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태어났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이 제주
여성들은 살림, 육아를 비롯하여 어업과 농업 즉, 경제활동까지 하였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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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제주 여성을 근면하여 가족을 지키기 위한 강인함으로만 보는 게 타당한 이야기일까?
사실 이 분들은 강해지길 원해서 스스로 강해진 게 아니라 먹고살기 위한 苦肉之策(고육지책)으로 택한 길이었을
것이다. 생활수단, 생활방식, 나이 들어가면서 마지 못해 택한 고로한 길, 허리에 찬 연철의 무게를 견디어 내는
것은 손주들의 용돈을 주는 맛에 사는 이것이 제주 좀녀(해녀)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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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그럴 것이 해녀들은 8~9세 때부터 바다에 나가 엄마, 할머니가 하는 물질을 보며 자연스럽게 배우며 그렇게
어린 나이부터 天職(천직)으로 여기며 생업에 투입되었다.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民生苦(민생고)를 해결하기 위
해 그게 당연하고,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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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조 땐 물질, 아닐 땐 밭일과 또한 집에선 살림과 육아를 동시에 했다. 요즘 젊은 여성들이 들으면 바보 같은 삶
이라고 빈정댈지 모르겠지만 당시의 생활 모습은 그만큼 처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그냥 말로만
그리고 그림으로만 보고 듣고 그리고 느낄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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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왁과 망사리를 메고 용천수를 길어오는 일이나, 물질을 해 海産物(해산물)을 잡아오는 것은 사진이나 말로만
들었을 뿐이고 그나마 간간히 물질하는 나이 드신 해녀 분들을 보았을 뿐이다. 도대체 그녀들은 언제 쉬었을까
싶었을 정도로 세월 만큼이나 깊게 파이고 굴곡진 얼굴은 안타깝고도 가슴 먹먹한 이야기 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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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는 섬이라는 자연적 특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많은 신들을 모셔왔다. 따라서 다양한 민간 신앙이 뿌리
를 내리고 있는 곳이기도 한다. 그래서 인지 무속신앙촌에는 점집, 심방집, 처녀당, 포제단, 미륵당, 해신당, 본향
당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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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아이러니한 것은 이런 제주 여성들을 해녀박물관에서조차 '제주경제의 밑거름'이라고 표
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작 거름이란 말이냐! 거름이 하찮고 나쁜 거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 정도밖에 표현하지
못하다니. 만약 남성이었다면 경제를 이끈 영웅, 주역, 거인 이렇게 표현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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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여성이 거름이 되어서 무엇을 길러냈나? 라고 따진다면, 해녀 분들의 삶을 부정하는 게 되어버릴까 조심
스럽지만, 그래도 속상한 것은 어쩔 수 없다. 그 분들의 삶과 뜻을 체득하기엔 나는 너무 다른 사람인걸까?
당시 아니 지금도 나이 드신 해녀 분들이 망사리를 어깨에 걸치거나 머리에 얹고 힘겹게 바다로 나아가는 모습들
은 차라리 애처롭기 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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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해녀 할머니는 망사리를 끌고 간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른다. 허리굽은 뒷 모습을 보면 그 무게마저 힘
에 부치는 모양새다. 하긴 고무 옷과 허리에 찬 납덩이만도 감당하기엔 버거운 무게일 게다. 물에만 들어가면 몸
피 둔한 고령의 할머니는 인어아가씨가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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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지만 물질은 바다라는 험한 공간에서 목숨 걸고 하는 작업이다. 수심 깊숙한 곳으로 잠수하여 작업하다가 물
밖으로 올라올 때는 숨을 남겨두고 나와야 한다. 전복이 보이더라도 나올 시간을 넉넉히 두어야 하므로 욕심 부
려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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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을 절실히 원하는 가정에서는 심방을 청하여 인간이 신에게 기원하는 형식의 애기맞이 궂을 하루 종일
하는 풍습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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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물 위로 떠올라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내쉬는 호오이~숨비소리엔 해방감이 담겨진다. 해녀들이 물속에서
1분 이상 물질한 뒤 수면으로 올라와 참은 숨을 내뱉는 그 소리는 차라리 哀然(애연)스럽다. 처절하게 들려오는
듯한 호~오~이~휘파람새 소리도 같고 슈~우~으~한숨 소리처럼 들리기도한다. 흉부에 켜켜이 쌓인 한을 토해내
는 탄식같이 느껴짐은 나만의 所懷(소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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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의 거친 숨을 몰아친 육십 성상 베테랑 할머니 해녀는 다시 바다속으로 몸을 숨긴다. 물속으로 숨어 들어간
할머니를 갯바위에 서서 염려스러운 시선으로 뒤쫓는 손자 의 근심어린 눈빛은 구지 안 해도 될 일을 하는 할머
니를 짜증스러워 하지 않고 묵묵히 기다려주는 모습이 돋보이는 情景(정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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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은 띠풀(제주에서는 '새' 라 부른다)로 여러 겹 덮은 다음 직경 5cm 가량의 굵은 '집줄'로 단단히 얽어매었
다. 바둑판을 닮았다. 그래서일까. 세계 어느 나라 초가지붕에도 다 있는 지네 모양의 용마름이 없다. 유별난 지붕
마루다. 1년 또는 2년에 한번씩 '새'를 이어 덮은 위에 다시 덮으므로 상마루의 선이 완만하다. 제주 오름을 닮아
선이 부드럽다. 덕분에 제주초가의 지붕은 아무리 강한 돌풍이 휘몰아쳐도 날아가거나 뒤집어질 염려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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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두가 담겨진 사진 장장은 그 자체만으로도 스토리텔링 감이다. 한 마을 해녀들이 떼 지어 헤엄쳐 나가 물질
하는 경우를 갓물 질이라 한다. 이처럼 해녀들은 여러 명이 공동 작업에 나선다. 각자 작업이나 공동체 성격이 짙
어 분배도 상, 중, 하군 위치에 따라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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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 경험과 체험에서 얻어진 몸 기술에 따른 일종의 계층 사회가 해녀 사회다. 물질이 끝나면 다 같이 해녀회관
에 가서 짐을 풀고 물살과 싸우느라 허기진 배를 미리 준비해온 맛깔스러운 점심밥으로 허겁지겁 채울 것이다.
물론 갓 잡은 횟거리도 한 접시 수북하게 나올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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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세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처절한 삶의 현장을 목도한 유랑자는 치받는 아픔이 아리고 쓰려 가슴에 찌르
르한 빗금을 긋는다. 모든 노동의 가치는 숭고하고 아름답되 그러나 나뭇가지를 흔들어 대는 스산한 바람처럼 凄
然(처연)한 아픔을 수반하는 아름다움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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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신앙촌이다,
우리는 제주도를 일컬어 1만 8천 신들의 고향이라고 한다. 제주는‘섬‘이라는 자연적 특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
에 많은 신들을 모셔왔다. 따라서 다양한 민간 신앙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곳이기도 한다. 그래서 인지 무속신앙
촌에는 점집, 심방집, 처녀당, 포제단, 미륵당, 해신당, 본향당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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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바닷가 지역의 민간신앙에는 무속이 강한데 이는 집 밖에서 폭풍우에 의한 뱃사람들의 非命橫死(비명횡사)
한 일들이 많은 지역 특성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러니까 집 밖에서 비명횡사한 이들은 특히 억울하다고 생각했
고. 그런 죽음을 더 위로하고 영혼을 달래야 한다는 것이 바닷가 사람들의 전통적인 믿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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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일까, 본시 제주의 민간신앙은 대부분 무속에 뿌리를 둔다. 신과 인간을 중개하는 심방을 통해 신에게 굿
을 하거나, 신당에 가서 심방 없이 직접 기원하는 형식으로 실현된다. 민간신앙에서 여성들은 주로 집안의 안위
를 위해 마을의 수호신을 모신 신당을 찾아가 심방을 통해 당굿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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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남성들은 재관을 정하여 유교식 제사 형식으로 마을공동체의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는 포제를 지냈다.
재미있는 것은 표선 마을 사람들은 지금도 사람이 죽으면 장례를 마친 뒤 귀양 풀이를 하여 망자의 한을 풀어주
는 의식을 치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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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아들을 절실히 원하는 가정에서는 심방을 청하여 인간이 신에게 기원하는 형식의 애기맞이 궂을 하루 종일
하는 풍습도 있다. 이는 집안의 평안과 자손의 번영을 염원하는 간절함에서 발현된 의식이라 볼 수 있다, 하여 여
성들은 신당에 갈 때엔 몇 가지 제물을 마련해 본향당에 가서 당신 자손들이 무사 형통하기를 빌고 또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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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선의 어머니들 역시 9만평 백사장을 만든 해안 '당케세명주할망당’과 상록수림 안에 위치한 ‘저바당한집’ 본향
당에서 그들의 소망을 희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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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선리 사람들의 염원을 담은 설화 설맹디할망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백사장이 펼쳐지는 표선리는 드넓은 바다가 있고 서북 편으로는 기이한 매의 형상을 한 매오름이 위치해있어 지
형적인 특징을 담은 설화가 구비 전승된다. 표선리의 중심이 되는 창조의 여신 설맹디할망은 표선리 사람들에게
거인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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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당캐의 세명주할망당은 설맹디할망을 모시고 있다고도 하고 동일 인물이라고도 하며 조금씩 다른 설로 각
색되어 전해지고 있다. 세명주할당은 제주도의 창조설화인 설문대할망과 상통하는 대목의 이야기를 기본 모티프
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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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형의 초가지붕과 부드럽게 돌아가는 곡선형의 올래가 조화를 이루면서 제주의 선이 빚어낸 아름다운 건축
문화가 그렇다. 제주 옛마을에 들어서면 자기도 모르게 아늑함과 정겨움이 다가오는 이유도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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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표선리 설화에는 용궁과 연결시키는 매와 비슷한 모습의 형상을 담는 (용궁아들 삼 형제와 매오름)의 매오
름 설화, 제주도 일대에 각색되어 퍼져 있는 해녀의 전설을 모티브로 하고 있는 (금덕이 여)라는 전설 등 이외 다
양한 표선리의 자연지형과 사람들의 마음을 반영한 설화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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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맹디할망과 백사장 설화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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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지금의 표선해수욕장 자리는 깊은 바다였고 남초곳은 아름드리나무들이 들어서 있는 큰 숲이었다. 이 원
시림의 숲에는 특히 볼래나무가 많았으며 한 번 들어가면 나오기가 쉽지 않았다. 하루는 설맹디할망이 해수욕장
자리의 바다를 메우려고 남초곶의 나무들을 모두 베어다가 바다에 집어넣었는데 그날 표선리 마을 모든 집의 도
끼와 소들이 다 동원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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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일어나 보니까 바다는 모두 메워져 있었는데 집에 보관했던 도끼와 괭이의 날이 모두 무디어지고 길마를
지웠던 소들은 등이 터지고, 벗겨져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 백사장, 해수욕장이 조성된 9만여 평의 이 패사
모래판은 50여 년 전까지도 멸치잡이를 하던 어장이었으며 마을 사람들은 최근까지도 이 백사장에서 까맣게 탄
나무 등걸들을 찾아낸 적이 있었다고 전해 온다.
......
*하얀 순백의 문주란꽃이 핀 마당을 빠져 나오는 순간 내 귓가에는 할머니와 손자의 다듬이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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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주란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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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만7000여 평의 대지를 한 바퀴 돌아보고 나니, 다리가 아파 왔다. 제주민속촌박물관의 초가를 배경으로 독자와
함께 사진을 찍기도 하고, 당시 제주인 들의 인내와 지혜를 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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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이 설맹디할망과 백사장, 남초곳의 전설은 이 고장 창조 설화인 셈이다. 설맹디할망과 세명주할망당을
동일인물로 보는 설도 있다. 고대 모계 중심 사회에서는 생명을 잉태하는 여성의 능력이 신성시되었다. 이는 대
지의 생산성과 결부되어, 고대인으로 하여금 천지창조의 근원을 여성 신의 모습으로 형상화하는 정신적 배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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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를 창조한 설문대할망 역시 그렇다. 바닷속의 흙을 삽으로 떠서 제주도를 만들었다는 ‘설문대할망’은 그들을
지켜주는 수호신의 역할까지 한다.
암튼 ‘설문대할망’ 설화는 설문대할망이 제주를 창조한 이야기부터 한라산 물장오리 또는 죽솥에 빠져 죽는 최후
의 모습까지를 모두 담고 있다. 설화 향유자들에게 창조주의 죽음은 새로운 세계로의 탄생을 위해 필연적으로 겪
어야 하는 의례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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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세상에서 몸집이 제일 큰 여인, 명주 한 통이 모자라 속옷 한 벌 제대로 입어 보지 못한 여인’으로 제주의 창조
신 설문대할망과 표선리 창조신 설맹디할망을 동일인으로 그리고 있다. ‘물로 뱅뱅 돌아진 섬 근심 걱정 ‘어름 쓸
어 잔잔하게 치마폭으로 덮어주는 세명주할망’, 세명주할망당은 척박한 땅에서 억척스러운 삶을 이어 온 표선 사
람들의 믿음의 표상이라 할 수 있다.
.
이렇듯이 제주 사람들에게 신앙은 필수적인 생활양식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바다에 나갈 때면 거센 파도와 싸워
야 했다. 가뭄과 바람, 호우는 두려움인 동시에 공동체를 결집시키는 극복의 대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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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이 설맹디할망과 백사장, 남초곳의 전설은 이 고장 창조 설화인 셈이다. 설맹디할망과 세명주할망당을
동일인물로 보는 설도 있다. 고대 모계 중심 사회에서는 생명을 잉태하는 여성의 능력이 신성시되었다. 이는 대
지의 생산성과 결부되어, 고대인으로 하여금 천지창조의 근원을 여성 신의 모습으로 형상화하는 정신적 배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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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를 창조한 설문대할망 역시 그렇다. 바닷속의 흙을 삽으로 떠서 제주도를 만들었다는 ‘설문대할망’은 그들을
지켜주는 수호신의 역할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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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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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설문대할망’ 설화는 설문대할망이 제주를 창조한 이야기부터 한라산 물장오리 또는 죽솥에 빠져 죽는 최후
의 모습까지를 모두 담고 있다. 설화 향유자들에게 창조주의 죽음은 새로운 세계로의 탄생을 위해 필연적으로 겪
어야 하는 의례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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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세상에서 몸집이 제일 큰 여인, 명주 한 통이 모자라 속옷 한 벌 제대로 입어 보지 못한 여인’으로 제주의 창조
신 설문대할망과 표선리 창조신 설맹디할망을 동일인으로 그리고 있다. ‘물로 뱅뱅 돌아진 섬 근심 걱정 ‘어름 쓸
어 잔잔하게 치마폭으로 덮어주는 세명주할망’, 세명주할망당은 척박한 땅에서 억척스러운 삶을 이어 온 표선 사
람들의 믿음의 표상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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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이 제주 사람들에게 신앙은 필수적인 생활양식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바다에 나갈 때면 거센 파도와 싸워
야 했다. 가뭄과 바람, 호우는 두려움인 동시에 공동체를 결집시키는 극복의 대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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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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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민속촌박물관은 조선말 1890년대를 기준 연대로 제주도민이 생활하던 집을 돌 하나 기둥 하나에 이르기까
지 그대로 옮겨와 복원해 놓은 곳이다. 제주 목사가 송사를 보면서 행정을 하였던 "제주 영문"에 들어서자 시원스
레 품어대는 인공폭포와 빨간 연꽃이 오는 이의 발목을 붙잡았다. 특히 "제주영문" 앞에 비치해 놓은 드라마 "대
장금"의 사진은 호기심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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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 가꾸기 사업으로 제주문화는 애환이 많았다. 오랜 세월 삶의 문화를 지탱해준 마을공동체가 무너졌다.
해마다 안거리, 밖거리를 번갈아 가며 초가를 일던 '수눌음(품앗이)' 문화가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집안에 잔치
나 장례를 치를 때 담을 허물어 집을 빌려주던 담장이 사라지고, 대신 시멘트 벽돌이 훈훈한 소통을 막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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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민속촌박물관 한가운데 서 있는 정자에 올라서니 제주의 남쪽 온 동네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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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은 민족의 얼로써, 시대와 환경에 적응하여 변화하면서 대대로 전승되는 생활문화이다. 그런 의미에서 민
속박물관은 과거를 살아왔던 사람들의 얼과 사상을 담은 생활양식과 문화를 느껴볼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따
라서 과거와 현재 미래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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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迎月亭(영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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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선리의 바람은 농사뿐 아니라 전통가옥에도 영향을 주었다. 표선리 사람들은 강한 바람에도 버틸 수 있는 초
가집을 이었다. 일 년에 한 번씩 새끼를 꼬아 단단하게 엮어 지붕을 얹으면 바람을 이겨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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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cafe.daum.net/b2345/9toB/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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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관광은 홈페이지: https://www.visitjeju.ne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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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가기
*홈페이지 :https://jejufolk.com/index.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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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서귀포시 표선면 민속해안로 631-34
*(지번)서귀포시 표선면 표선리 40-1
10월 ~ 02월 :매일 입장시간 08:30 ~ 18:00
03월:매일 입장시간 08:30 ~ 18:30
04월 01일 ~ 07월 15일:매일 입장시간 08:30 ~ 19:00
07월 16일 ~ 08월 31일:매일 입장시간 08:30 ~ 19:30
09월 01일 ~ 09월 30일:매일 입장시간 08:30 ~ 19:00
*휴무일:연중무휴
*대표번호:064-787-4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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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마 서너번은 넘게 둘러봤을 민속촌
그때마다 염불엔 관심없고 잿밥에만 중점(?)을 둔
走馬看山 식 여행이라 막걸리집 찾느라고 두리번 거린
기억만 남아 있는데
博識하신 유랑자님의 설명과 사진을 보니
나는 헛고생 발품팔이만 하고 다녔다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여행이 주는 설레임은 없지만 " 아 ! 이런거 였구나 " 라는 수긍이
편히 앉아 여행의 또 다른 맛을 느끼게 해 주는 유랑자님께
아주 많은 고마움을 전 합니다.
올 해도 변함없을 여행기를 기대하며
건강과 행운이 항상 함께 하시기를 기원 합니다.
감사 합니다. 보잘것 없는 저의 拙筆(졸필)에 이렇게 극찬을 해 주시니
저로서는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감히 어찌 제가 하로동선님의
고명하신 뜻을 이해 하겠습니까만 다만 저 역시도 주마간산격으로
구경을 합니다만 그 와중에 궁금증이 유발되면 좀 더 관심있게 본다는것
그게 전부가 아닌가 싶습니다. 다시한번 감사 합니다.
끝으로 계묘년 새해 하로동선님의 건강과 아울러 복많이 받는 한해가 되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