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17G 전폭 : 31.6m 전고 : 5.82m 전체 길이 22.6m 총 중량 : 비 무장시 16t 무장시 24t 이륙중량 : 29t 엔진 : R-1820-97 사이클론 1200마력 4발 최대 속도 483km/h 순항속도 : 283km/h 상승한도 : 35000ft 항속 거리 5800km (최대) 승무원 10 명 무장 12.7mm m2 브라우닝 기관총 13정, 폭탄 8000 파운드, 4500파운드 |
2 개발/개량형 ¶
30년대 보잉이 생산한 실험기나 우편기등에 적용된 기술들은 후에 보잉의 기체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1930년 5월 1일 초도비행을 한 모델 200/221 모노메일(Model 200/221 Monomail) 7인승 우편수송기는 종래의 복엽기의 디자인을 탈피해 항공역학적인 설계를 거친 유선형의 동체와 저익의 전금속제 캔틸레버(cantilever)식[1] 날개, 혁신적인 수납식 랜딩기어를 갖추고 있었다.(모델 221은 모델 200의 두번째 생산)
이 Y1B-1 시리즈는 기술적으로 여러가지 면으로 대단했는데, 먼저 미육군 현존하는 모든 전투기의 속도와 대등했다. 게다가 미육군 최초로 밀페식 캐노피를 장착함으로써 매우 선진화된 폭격기었다. Y1B-1은 경합의 그날을 위해 외부,내부 모두 개량을 거듭했다. 경합전에 미군은 1931년 12월 8대의 Y1B-1을 주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승자는 마틴으로 돌아갔지만 이 B-9 시리즈는 후에 보잉의 폭격기 디자인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
비록 군용 항공기에서의 경합에서는 마틴에게 패배했지만 보잉은 굴하지 않았다. 보잉은 민간항공기 시장에서 보잉의 미래를 결정지었다 할정도로 혁신적인 항공기를 내놓았는데, B-17의 직계라 할수있는 모델 247이었다.
이 모델이 모델 299, 그러니깐 B-17의 직계 어머니라 할수 있을 정도로 B-17은 이 항공기에 결정적인 빚을지고 있었다.
이 밖에 미국의 장거리 폭격기 계획(XBLR-1)으로 탄생한 XB-15에도 빚을지고 있었고, 이 계획은 B-29와 직접적인 상관이 있는 계획이었다.
첫째, 항속거리는 1020마일(1641KM)을 충족할것. ※ 되도록이면 2200마일(3540KM)을 충족했으면 함. 둘째. 최고속도는 1만피트 상공에서 200MPH(322KM)를 충족할것 또한 10시간이상 체공해야함. ※ 되도록이면 250MPH(412KM)를 충족했으면 함. 셋째. 폭장량은 2000파운드(907Kg)이상의 성능을 지닐것. 넷째. 실용 상승한도는 25000피트를 충족할것. 다섯째. 1935년 8월까지는 시제기를 생산할것. |
1935년 8월 20일, 모델299는 타 경쟁사의 시제기와의 경쟁을위해 오하이오 데이튼(Dayton)의 라이트필드(Wright Field) 비행장을 향해 날아올랐다. 모델 299는 시애틀에서 오하이오의 라이트필드 비행장까지 2000마일에 이르는 거리를 9시간 동안 235mph(378km)의 속도로 날아왔다. 이 뛰어난 성능은 많은 관계자들에게 감명을 주었는데, 특히 공군 총사령부(GHQ Air Force)의 프랭크 멕스웰 앤드류스(Frank Maxwell Andrews)장군은 이 모델 299가 미육군의 차기 폭격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일찌기 4발 폭격기의 중요성을 인식해왔고, 그의 주장이 반영되어 미육군항공대는 경합전에 모델 299 65대를 주문하기에 이른다. 경합도 하기전에 성능을 입증해 보인것이다.
항공기의 코(nose)는 유리로 덮여있으며 이는 폭격수에게 좋은 시야를 제공해주었다. 폭탄창에는 2개의 수직 선반이 있었고, 총 4800파운드의 폭탄을 탑재할수 있었다. 4개의 엔진에 대한 제어는 폭격기 조종간에 보기좋게 정렬되어 4개의 손가락으로 엔진을 제어할수 있었다. 폭탄창 뒤에 배치된 무전수는 여차하면 폭격기 보수공으로도 활용될수 있었다. 무전수의 좌석 바로위에 기총좌가 탑재되었으며 항공기의 코 아래에도 전방기관총이 설치되었다. 동체의 양옆으로 1개의 기총을 탑재하기 적합한 기총좌가 설치되었으며, 시애틀 타임즈의 기자가 놀란 모델 299의 기총수는 총 5개였다.
Martin Model 146 (B-10의 개량형)
Douglas DB-1(후에 파생형 DC-2 수송기가 B-18 Bolo가 된다.)
먼저 많은 육군의 관계자들은 4발 폭격기는 쌍발에 비해 둔중할수 밖에 없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고, B-17의 2만달러에 달하는 비싼 입찰가격은 육군 관계자들로 하여금 고개를 젓게 만들었다. 게다가 이 프로토타입의 가격은 다른 두회사들보다 월등이 비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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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친데 덮친격으로, 1935년 10월 30일, 최종평가 시험에서 추락사고 일어나 육군 조종사 힐툭(Hill took)을 비롯, 보잉사 관계자까지 승무원 모두가 숨지는 참사가 벌어진다. 이는 지상 정비사가 모델 299만의 조종장금 장치 "gust lock"을 해제하는 것을 깜빡했기 때문이었다.
"Gust lock"은 폭격기가 지상에 계류중일때 승강타와 방향타 등을 고정시키는 역할을 했고, 이륙하기전에 반드시 그것을 해제시켜야만 했다. 장금 장치를 해제하지 않은 이 불운한 시제기는 이륙하자마자 실속해 지면으로 곤두박질쳤다.
기체들은 제 2 폭격단(2nd Bombardment Group)에 소속, 미육군 항공대의 폭격전술 시험에 사용되었다(기체 점검목록은 후에 다른 모든 항공기에서도 사용된다.).
1936년 12월 YB-17은 앞서 언급한 YB-9과 같은 이유로 Y1B-17로 이름이 변경된후 12월 2일 초도비행을 실시하고 시험비행을 하고있었다.
육군항공대는 오래전부터 육군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육군 장교들은 항공단은 오로지 육군의 지원을 위한 존재라고 굳게 믿고있었다. 특히 그들의 개념은 정부와 해군에게 지원을 받고 있었는데, 해군이 육군 항공단의 독립에 관여해 압력을 넣는 이유는 다름아닌 자신들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이 규제는 1938년 9월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 과정에서 빚어진 뮌헨위기가 지나서야 해제되었다.
역시나 여담이지만 보잉은 이 개량형에 다시 10만 US달러를 쏟아부었다. 이것은 터보차저에 대한 개량을 전적으로 보잉이 떠맡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것 또한 회사로선 치명적이었다.
2.1 B-17B ¶
1938년에는 미국을 방문한 영국 공군 준장 아서 해리스(Arthur Harris)가 B-17을 시찰하다 무장을 조롱하기까지 했다(근데 영국은 스털링 'ㅅ').
폭격수의 활동성을 위해 좌석을 기수앞부분으로 옮겼으며 평면으로된 전용관측창이 설치되었다.
육군항공대는 이것을 B-17B라 명명했다. 육군항공대는 이후 29대의 B-17B를 주문했다. 바야흐로 우여곡절을 끝내고 B-17이 정식으로 등장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아직 숫자면으로서 한참 부족했다.
2.2 B-17C ¶
2.3 B-17D ¶
B-17D는 1941년 2월 3일에 초도비행을 가졌으며 같은해부터 배치되기 시작하였다. 42대가 생산되었으며 생산된 7할이 태평양에 배치되었고 하와이에도 배치되었는데, 1941년 11월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 때문에 18대가 파손되었다.
2.4 B-17E ¶
승무원은 총 10명으로, 기수의 총좌와 상부총좌는 특별한 사수가 맡지 않았고, 기수총좌는 항법사나 폭격수가, 상부총좌는 기관사(flight engineer)가 맡았다.
1940년 말부터 미육군 항공대는 277대의 B-17E를 주문하였지만, 여러가지 문제로 인하여 생산은 지연되었고 1941년 9월 21일부터 다시 생산이 시작되었다.
총 512대가 만들어졌고, 곧바로 1942년 8월 17일 제97 폭격전대에 배속되어 프랑스의 하늘을 날았다
2.5 B-17F ¶
전시생산을 맞추기 위해 B-17F 부터 회사간 본격적인 분담 생산이 이루어졌으며, 보잉(Boeing). 록히드의 베가(Vega) 그리고 더글러스(Douglas)의 B.V.D가 맡았고, 이런 생산라인은 다른 폭격기 생산에도 이어진다.
보잉은 캔자스주의 위치토, 더글러스는 캘리포니아의 산타 모니카, 그리고 B-17 생산을 위해 새로 만든 롱비치 공장에서 생산했다. 이러한 생산방식은 B-17E부터 고안되었으나 두회사는 당시 참여하지 않았다.
보잉이 2300대, 록히드의 베가공장이 500대, 더글러스의 롱비치 공장이 605대를 생산했다.
기수의 측면사수의 사격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서 유리를 좀더 늘렸고, 후기형에 이르러서는 바깥으로 튀어나온 형태의 "Cheek"형 총좌로 바뀌었다. 또한 마찬가지로 후기형에서 기수를 보호하기 위해 기수 아래에 "벤딕스" 총좌가 설치되었고, 이것은 B-17G형에도 이어진다.
1942년 5월 30일 하늘을 난 B-17F는 곧바로 유럽의 B-17E를 밀어냈으며, 1943년 1월 27일 빌헬름스하펜(Wilhelmshaven) 공습때 처음으로 참여했다.
유명한 멤피스 벨의 기체 또한 B-17F이다.
2.6 B-17G ¶
G형은 총 13개의 총좌를 가지고 있었으며, 50구경 기관총은 개량된 K-6 총탑을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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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실전투입 ¶
당연하게도 폭격은 성공하지 못했고 높은 고도에서의 낮은 기온 때문에 기관총은 발사되지 않았다.
7월 24일에 다음 목표에 대해 다시한번 폭격에 들어갔으나 또 실패하고 말았다.
9월까지 영국 왕립공군은 별다른 성과없이 8대의 B-17C를 잃었고, 너무나도 실망한 나머지 B-17C의 주간폭격을 금지하였다.[6] 미군만큼은 B-17C의 강력한 방어력에 주목, 주간폭격을 중지하진 않았지만, 영국 왕립공군이나 미 육군 항공대나 B-17C가 더욱 개량이 필요하다는 걸 느끼게 되었다.
1904년 네덜란드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칼 노든이 1921년 개발을 시작해 1931년 완성시킨 것으로, 이후 개량이 이어져 마크 16(Mark XV)에 이르러서는 세계 어디에도 없는 가공할 만한 성능의 조준기를 완성시켰다. 폭격수 교육만 16주가 필요한 이 물건은 원형공산오차(CEP) 30m 안에 100발을 정확히 꽂아넣을수 있는, 당시로서는 가공할만한 정확성을 가지고 있었다.
진주만 기습 이후 대량생산된 노던 폭격 조준기는, B-17뿐만 아니라 B-24등 여러 폭격기에 쓰였으며 베트남전까지 사용되었다.
영국군 스핏파이어와의 공조는 B-17의 생존성을 보다 높여주었지만, 스핏파이어의 항속거리는 B-17을 끝까지 에스코트 하기엔 부족했기에 언제나 중간에 기지로 돌아와야 했다.
이는 B-17을 끝까지 에스코트할 전투기의 부재로 인한 현상으로, 루프트바페는 호위기가 사라지면 늑대떼처럼 올라와 B-17을 물어 뜯었다.
[2] 스트림라이닝(Streamlining) : 둥글둥글하고 부드럽게 마무리가 되어는 유선형의 구조를 지칭하는것으로 Streamlining은 20세기 초 선박, 항공기, 자동차 등에서 항공역학, 유체역학적인 성능개선을 위해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이런 유선형의 "미래 디자인"은 후에 선박이나 항공기 뿐만아니라 냉장고와 같은 가전적인 분야로 확대되었다.
[3] 제빙부츠(de-icer boots) : 팽창 가능한 고무재질의 제빙장치를 날개에 달아 그속으로 고압공기를 불어넣어 팽창,수축을 통해 얼음이 깨지도록 하는 장치
[4] 미육군은 육상과 연계한 해안방어용 폭격기를 계획했기에, 기자들은 모델 299의 무장에 감탄한 것이 아니라 모델 299 자체를 두고 "해안을 지킬, 나는(飛行) 요새"로 감탄사를 붙여 별명이 생겼다는 말도 있고, 미국의 고립주의적 정책에 기반해 "우리는 적을 공격할 뜻에서 만든게 아니라 본토를 방어하기 위해 - "라는 타이틀을 붙여 탄생했다는 말도 있다.
[5] 배기가스 강제 작동식 과급기(Exhaust-driven turbocharger) : 배기가스에서 발생하는 추력을 공기중으로 날리지 않고, 별도의 터빈실로 보내 내장된 임펠러를 돌린다. 그리고 그 흡기에너지로 공기를 강제로 빨아들여 엔진에 공급해 출력을 높이는 시스템을 일컫는다.
[6] 콜 오브 듀티: 유나이티드 오펜시브에 나오는 폭격기 미션은 이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주인공의 편대는 전멸당한다.
[7] 만화 지팡구에도 나온다. 지팡구에서는 해상 자위대의 이지스함 미라이가 이 공격을 당했고, 이를 요격하려던 미라이의 VTOL기가 기총이 고장나자 몸으로 막아서(...) 미라이를 구했다.
첫댓글 1992년인가 91년인가 플라잉 포트레스 C형 4000원 주고 사서 붓으로 색칠하던 기억이 납니다.. 그 당시 그 박스가 어째 그렇게 크고 웅장하던지요. 그 박스아트가 참 멋졌던걸로 기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