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3일
루카 1,57-66
나의 이름이 누구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 것인지 결정한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입니다.
사실 요한이라는 이름은 마리아처럼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매우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또한 집안에서는 자신들이 사용하는 이름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요한의 집안에서는 요한을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아 즈카르야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즈카르야는 ‘요한’이라는 이름을 지어줍니다.
그 이름은 자신에게서 오는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알려준 대로 하느님에게서 오는 이름이었습니다.
그렇게 이름을 지어주자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이제 요한은 즈카르야가 아닌 주님의 책임이 되었습니다.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루카 1, 66)
이름이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유는 이름이 누구에게 도움을 받을 것인지 결정하는 그릇이 되기 때문입니다.
개밥그릇을 가져온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에게 사람 먹을 음식을 주지는 않습니다.
아이는 사람 밥그릇을 가져와야 합니다.
밥만이 아니라 밥그릇도 자기 부모님이 주는 것입니다.
노력하면 될까요? 노력을 믿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아이가 노력하면 어른이 될까요?
노력이 아닌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부모가 아이의 모든 것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존재일까요?
오히려 자신에게 도움을 받게 만드는 것이 자녀에게 해로운 일이 아닐까요?
'금쪽같은 내새끼' 97회에 ‘분노 조절 불가 금쪽이’가 등장했습니다.
하도 불안하고 화를 참지 못하는데 이 아이의 화풀이 대상, 혹은 자기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대상은 엄마입니다.
학교 갔다 와서 엄마가 없으면 아이는 분노를 참아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엄마에게 욕은 물론이요, 폭력까지 쓰기도 합니다.
신호등 대기를 하는 중에 남이 스치기만 해도 나이 불문 화를 냅니다.
화가 통제가 안 되는 아이입니다.
그러면 이 아이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대상은 누구일까요? 자기 자신일까요?
자기 자신은 자기를 통제할 수 없습니다.
아이는 그래서 도움을 찾습니다.
그게 엄마입니다.
엄마는 아이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이 프로그램에서는 그럴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이러저러한 처방을 내립니다.
그리고 마치 그 처방이 잘 된 것처럼 나옵니다.
하지만 저는 이 프로그램에서 하는 처방은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이의 진짜 문제는 도움을 부모에게서 찾는다는 데 있습니다.
아이는 부모에게 속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아이는 끊임없이 엄마가 없으면 안 된다고 말하고 엄마에게 좋은 아이가 되고 싶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엄마는 아이 마음을 알고는 자기가 더 열심히 해주지 못한 것에 눈물을 흘립니다.
그런데 열심히 아이에게 도움을 주려 했을 때 아이가 변했나요?
아이가 불안한 이유는 자기 안전을 부모에게만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자기 안전을 온전히 책임져줄 수 없다는 것에 화가 나는 것입니다.
아이의 불안은 자기 생명을 책임져줄 수 없는 부모에게서 벗어나 자기에게 생명을 주고 그것을 책임질 창조자의 도움을 받기 전에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녀에게 생명을 주지 않았고 다시 줄 수도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능력이 없는데도 책임지려 합니다. 이것이 자녀를 망칩니다.
그렇다면 자녀에게 새로운 도움을 줄 수 있는 창조자가 있음을 알려주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창조자가 주는 이름을 받는 것입니다.
이번 월드컵 우승은 아르헨티나였습니다. 객관적인 전력으로는 프랑스가 이긴다는 분석이 지배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메시는 아르헨티나 우승을 이끌었습니다. 메시는 나이가 많음에도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였습니다.
포르투갈의 호날두가 비슷한 연령대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 것과 대조됩니다.
메시는 ‘메갓’이란 이름으로 불립니다.
‘축구의 신’이라 불리는 것입니다.
경기장에서 메시를 응원하는 이들은 거의 그를 신처럼 떠받듭니다.
물론 메시는 골의 영광을 무조건 하느님께 돌립니다.
그런데도 자신을 축구의 신으로 부르는 것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인정한 것이 호날두와의 차이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서명은 ‘전 요셉’을 휘갈겨 쓴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십자가 모양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삼용’은 죽고 ‘요셉’의 새 이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것으로 저의 육체적 부모로부터의 도움을 끊고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그분의 도움을 받는 사람임을 되새기려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세례명을 받는 이유입니다.
세례자 요한도 분명 자신의 이름이 왜 요한인지 생각하였을 것이고 그 이후부터는 인간의 도움이 아닌 하느님의 보살핌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 정말 하느님의 사람이 되었고 인간 중에 세례자 요한만큼 큰 인물은 나오지 않게 된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에게도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고 그 이름으로 불러줍시다.
그러면 인간의 도움이 아닌 하느님의 도움을 받는 존재가 됩니다.
누구나 자기가 이름을 지어준 이를 책임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주신 이름을 나의 이름으로 받아들입시다.
그리고 나의 자녀가 누구의 손길 밑에서 자라게 할 것인지 생각해봅시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2월 23일
루카 1,57-66
성탄이 아무리 수백·수천 번 되풀이된다 할지라도, 내 영혼 안에 예수님이 탄생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성탄이 아무리 수백·수천 번 되풀이된다 할지라도,
내 영혼 안에 예수님이 탄생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성탄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성탄에 담긴 의미, 특히 성탄이 내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묵상하고고 또 묵상해야겠습니다.
신비가 마이스터 엑카르트가 우리에게 건네는 짧막한 예화 하나가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하느님 육화강생의 신비, 예수님 성탄의 신비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 금슬좋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아내가 큰 사고를 당해 한쪽 눈을 잃고 크게 슬퍼했습니다.
남편이 부인에게 물었습니다.
“여보, 이제 그만 슬퍼하라고 해도 왜 계속 그렇게 슬퍼하오?”
아내가 대답했습니다.
“여보, 내가 슬퍼하는 것은 눈 하나를 잃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 때문에 당신이 나를
덜 사랑할 것 같기 때문이랍니다.”
그러자 남편이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여보, 나는 아무렇지도 않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을 사랑하오.”
잠시 외출을 나간 남편이 집으로 들어왔는데, 그 모습을 본 아내는 기절초풍하는 줄 알았습니다.
남편은 자신의 눈 하나를 뽑아버리고 온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해 나도 당신과 같이 되었소. 나도 이제 외눈이라오.”>
우리 인간에 대한 극진한 사랑 때문에 스스로를 낮추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애틋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예화입니다.
성탄이 아무리 수백·수천 번 반복된다 할지라도, 내가 그것을 감지하지 못하고, 나란 존재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성탄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성탄에 아무리 되풀이 된다 할지라도 내 영혼 안에 예수님이 탄생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인류 구원을 위한 거룩하고도 장엄한 드라마인 아기 예수님의 성탄에는 여러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눈여겨봐야 할 중요한 조연들로 엘리사벳, 그리고 즈카르야가 있습니다.
아들 세례자 요한의 탄생에 대한 천사의 메시지에 즈카르야는 살짝 의혹을 품었습니다.
그 대가는 너무나 가혹했지요. 즈카르야는 10달 동안이나 말 한 마디 못하는 언어장애자로 살았습니다.
즈카르야는 심연의 침묵 속에 깨달은 바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바라시는 바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얼마나 큰 은총을 베풀어주셨는지에 대해서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비록 고목(枯木)과도 같은 즈카르야와 엘리사벳 부부였지만 크신 하느님 자비에 힘입어 새싹을 틔워내게 하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부당하고 부족한 자신들을 당신의 인류 구원사업의 중요한 도구로 선택하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하느님께서 즈카르야의 입을 열어주시자 마자 그의 입에서는 봇물 터지듯이, 기다렸다는 듯이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즈카르야는 운 좋게도 ‘침묵의 10개월’을 통해 그토록 고대했던 ‘구원’을 온 몸으로 맛보았습니다.
강렬하고도 짜릿한 구원체험이 즈카르야의 내면 안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즈카르야는 은혜롭게도 이미 낡은 세상에서 새로운 세상으로, 죄와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암흑에서 빛으로 건너오는 파스카 체험을 맛 본 것입니다.
그 행복한 체험으로 인해 즈카르야 삶의 태도는 180도 변화되었습니다.
어두웠던 그의 낯빛은 기쁨과 설렘의 얼굴로 바뀌었습니다.
절망의 세월은 희망의 나날로 변화되었습니다.
우울하고 어두웠던 그의 일상은 화사한 봄날로 탈바꿈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한 체험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즈카르야가 맛본 구원 체험입니다.
파스카 체험입니다.
하느님께서 인류 전체를 위해 선물로 주시는 보편적인 구원을 개인화하는 작업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을 오늘 이 자리에서 내 것으로 만드는 작업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날이 올 때까지>
2022. 12. 23
루가 1,57-66 (세례자 요한의 출생)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그날이 올 때까지>
하느님께서
당신 모습대로
사람을 내셨으니
사람을 따름이 곧
하느님을 따름이
될 터인데
스스로
하느님 모습을 버린
사람 때문에
사람을 따름이 곧
하느님을 거스름이
되었지만
자비로운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당신 모습
새로 부어주시어
사람을 따름이 곧
하느님을 따름이 되는
그날이 꼭 오기에
그날이 올 때까지
흐트러지지 않고 곧게
머뭇거리지 않고 힘차게
지금여기에서
사람을 거슬러
하느님을 따릅니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