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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1: 26. 백성이 무섭다 - 마 21: 28. 두 아들의 비유
마 21: 26. 백성이 무섭다 -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 만일 사람에게로 서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
그들은 서로 말하기를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고 대답하였다.
1]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이 구절에서는 종교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의 교만하고 위선적인 모습을 단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다.
그들은 가장 무서워하고 두려워해야 할 하나님보다는 오히려 상대적 존재인 인간들의 눈을 무서워했다. 백성들의 목소리는 종교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헤롯 궁전 내부에도 영향을 끼쳤다.
* 마 14: 5 – 헤롯이 요한을 죽이려 하되 무리가 그를 선지자로 여기므로 그들을 두려워하더니
예수님의 권위의 출처는 요한과 같이 하나님께로부터 이다.
그러나 악하고 위선적인 지도자들은 이 사실을 인정치 않는다.
만일 저들이 이것을 인정한다면, 회개하고 저를 믿었을 것이다.
마 21: 27. 알지 못하노라 -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
예수께서도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고 대답하셨다.
예수님의 권위의 근원은 세례 요한과 같이 하나님께서부터 다.
그러나 저 악하고 위선적인 지도자들은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1]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가부를 정하지 않고 모르는 척하는 이들의 위선적인 태도는 참으로 악한 것이다.
실로 예수께서는 이러한 위선을 극복하는 답변 방법으로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5: 37)고 가르치셨다.
국내의 종교 문제를 관장(管掌)하고 있는 산헤드린의 직무 중의 하나가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가리는 일이었음에도 '모르겠다'라고 하는 이들의 태도는 직무유기(職務遺棄)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구약에 예언된 계시와 세례 요한의 증언를 거부함으로써 그들은 스스로 책임도 감당할 수 없는 자들임을 자인하고 만 것이다.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그들은 예수의 권위에 대해 질문을 제기(提起)했으나 예수는 그들이 그런 문제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를 문제 삼으셨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가 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 없는 자들이라고 고백함으로써 예수께서 그들의 답변을 거부하실 수 있는 근거가 되고 있다.
저들은 요한도 인정치 않았고 그가 입증한 그리스도 예수도 인정치 않고 있다. 인정치 않을 뿐 아니라, 지금 예수님을 죽이려 모의하고 있다.
3] 도전과 응답
공회원들(대제사장과 장로들)의 악의에 찬 도전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즉각 하나의 반문을 던짐으로써 응답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1) 진리의 응답
① 도전자의 양심을 자극하는 반문
예수의 반문은 그들이 잊어버리고 있었던 세례 요한의 문제를 상기시켰다. 요한이 요단 강에서 베푼 세례가 요한이 자의에 의한 것이냐? 하고 물으신 것이다.
요한의 세례는 분명히 하나님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
* 요 1: 33 -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그러므로 백성들은 모두 요한이 선지자임을 알고 있었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26절) 그래서 그들은 즉시 혼란에 빠져 버렸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양심을 자극한 것이었지만 그들은 그 양심의 소리를 외면하고 사실을 시인하지 않았다. 산헤드린 공회 회원들의 양심이 죽어 있는 것은 율법 종교의 죽음을 의미한다. 양심은 하나님의 법의 지성소요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 잠 4: 23 -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② 진리로 도전자들에게 응답함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도전은 정치적인 목적이었다. 그들은 모든 권세의 출처가 공회 즉 자기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기들이 허가하지 아니한 권세는 사이비이며 불법이었다. 그러나 이 정치적 질문은 진리의 응답으로 패배했다.
그들의 마음속에 '정치'는 있었지만 '진리'가 없었기 때문으로 이것은 교권주의자들의 특징이다.
(2) 교권주의자들의 특징
① 진리보다 사람의 이목에 좌우됨
교권주의자들의 특징은 진리에 대한 소신(충성심)보다는 인간들의 이목에 의하여 그들의 행동 반경이 결정된다. 그들이 혼란을 일으킨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정치'를 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사람들' 즉 다수를 두려워했다. 동시에 그들은 소수를 무시했다. 그러나 진리는 사람의 많고 적음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하는 자의 것이다. 교권주의자들은 사람을 의지하나 진리의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한다.
루터는 그를 정죄(파문)하려는 자들 앞에서 결코 그의 진리에 대한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그 때 이렇게 기도했다. '주여, 내가 여기 섰나이다. 나를 도우소서'.
② 진리보다 이익에 좌우됨
교권주의자들은 진리를 사랑하기보다 이익을 사랑하는 자들로 그들이 '사람'을 의식하는 것은 바로 거기에 원인이 있다.
그들이 예수에게 와서 도전한 것은 그들의 이권이 침해 당했기 때문이며, 동시에 그들은 예수로부터 교권을 침해 당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허가 없이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교권을 무시한 처사였고, 그들은 이권과 교권 때문에 진리이신 예수에게 도전한 것이다. 언제나 교권주의자들은 이권과 교권을 독점한다.
모든 이익은 당연히 자기들만이 우선적으로 누려야 한다고 믿으며 자기들이 아니면 아무도 이 진리(교권)를 감당할 수 없다는 독선과 오만에 빠져 있다. 교권이 '봉사'에 충성하지 아니할 때 그것은 필연적으로 '물욕'과 '권력욕'과 '지배욕'으로 전락한다.
(3) 진리의 문이 닫힘
① 양심이 죽은 자들에게
양심이 죽은 자들에게는 진리가 살아 있을 장소가 없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진리가 거부된다. 그들은 양심을 속이고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고 했다.
그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진리의 단절은 죽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나무에서 꺾인 가지처럼 진리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율법주의자들을 감람나무의 꺾인 가지로 비유했다.
* 롬 11: 17-20 – 17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18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19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20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② 의무를 저버린 자들에게
산헤드린 공회 회원들의 중요 임무 중의 하나는 참과 거짓을 분별하여 백성들을 '참 길'로 인도하는 일이다.
그런데 그들은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고 하였다. 그들은 수 많은 군중 앞에서, 그리고 그들에게 그 임무를 부여한 하나님(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그 직무를 유기한 것을 시인하고 있다.
그들은 심판대 앞에서 정죄를 받는다.
* 벧전 4: 5 - 그들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이에게 사실대로 고하리라.
'나도 너희에게 말하지 아니하리라'. 그것은 심판이다. 그들은 살았다 하나 죽은 자들이다.
마 21: 28. 두 아들의 비유 -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
예수께서는 한 사람이 두 아들에게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말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1]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그러나'의 뜻인 접속사 '데'(*)는 앞의 문장에 대한 반대 내용(역접)을 연결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알라'(*)와는 달리 앞의 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새로운 내용(전환)을 전개해 갈 때 사용된다.
이 문구는 '한편 다음과 같은 비유에 대해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의 주장과 반대되는 사실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이야기를 통해서 자신의 주장을 계속 확증시킬 것임을 암시한다.
또한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라는 말은 마태가 예수의 비유를 소개할 때 흔히 사용하는 표현이다.
* 마 17: 25 – 이르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이르시되,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 관세와 국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 마 18: 21 -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본 비유에서 이 말은 사람들의 흥미를 유발시키는 역할 뿐만 아니라 비유의 내용을 객관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써 이 산헤드린의 공회원들로 하여금 비교적 객관적인 대답을 하도록 유도한다.
2]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두 아들과 포도원을 가진 그 '사람'은 하나님을 상징한다.
예수께서는 '아들'이라는 표현을 법적으로 상속권이 강조된 용어 '휘오스'(*)가 아니라 '테크논'(*)을 사용함으로써 아들들에 대한 아버지의 애정을 암시하고 있다.
두 아들들에 대해서
(1) 맏아들은 율법과 의를 강조하면서
세례 요한과 예수의 가르침과 권위를 부인하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율법주의자들을 상징하고, 둘째 아들은 스스로 죄인임을 알고 죄 사함을 얻기 위하여 예수께 나아온 세리와 창기를 상징한다는 견해가 있다. (Bruce, Calvin).
(2) 맏아들은
이미 선민으로 선택받았음을 자랑하는 유대인을. 둘째 아들은 새 이스라엘 백성이 되려고 주께로 돌아오는 이방인들을 상징한다(Plummer).
본문에서 마태는 이 두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위해 일하겠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한 세례 요한과 예수를 거절한 유대 지도자들과, 율법을 완전히 실행할 수 없음으로 인해서 스스로가 죄인임을 알고 있으나 예수를 믿음으로써 새사람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의 서로 상반(相反)된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3]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구약은 포도원이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 사 5: 1 -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 렘 12: 10 - 많은 목자가 내 포도원을 헐며 내 몫을 짓밟아서 내가 기뻐하는 땅을 황무지로 만들었도다.
신약은 교회로 사용되었으며 그것이 무엇을 상징하든지 간에 그 포도원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사실은 결코 변함이 없다.
'오늘 가서 일하라'고 하는 아버지의 명령은 긴박성을 띤 것으로 아들들에게 어떠한 계획(schedule)이 있든지 간에 이에 상관없이 아버지의 명령을 따라야 할 것을 강조한다.
이웃 사랑을 통한 복음전파의 사역은 그 일을 맡은 주의 성도들에게 오늘, 지금, 여기에서 부여(附與)되고 있는 긴급명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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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권위의 근원은 세례 요한과 같이 하나님께서부터 다.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권위의 근원은 세례 요한과 같이 하나님께서부터 다.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별일 없이 사는게 큰 행복입니다.
오늘도 순탄한 하루 되시고 늘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
예수님의 권위의 근원은 세례 요한과 같이 하나님께서부터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