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의 배경-'도라 도라 도라'
1941년 12월 7일,(일본 날짜로는 12월 8일)
일본군은 하와이 진주만의 미국 태평양 함대를 기습 공격하여, 태평양을 무대로 미국과의 전쟁에 돌입한다.
당시, 미국의 생산력이 일본의 10~20배나 되었기 때문에 일본 군부내에서도 對美戰에 소극적인 목소리가 많았는데도 결국 전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 원인은, 진주만 공격 36년 전에 있었던
러일전쟁의 강화를 중개한 미국과의 갈등(인식차) 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900년 6월, 유럽의 열강이 차례로 청나라로 진출하는 가운데, 산동성에서 발생한 '의화단의 난'이 순식간에 북경으로까지 확산되었다.
이 때문에 일본 등 8개국이 현지에 거주하는 자국민 보호를 목적으로 군대를 동원하여 난을 평정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이후 각국이 병력을 철수시킨 것에 반해, 러시아는 자신의 군대를 만주로 파견했다.
이러한 러시아에 대해 강한 위기감을 느낀 것은 일본과 미국이었다. 남북전쟁 후, 유럽에 맞서 지배력을 넓히고자 한 미국이, 하와이, 필리핀에 이어 노린 곳은 만주였고, 일본도 본토를 러시아로부터 지키는 방어선으로서 만주를 필요로 했다.
그리고 러시아의 진출을 억지하기 위해, 1904년 발발한 러일전쟁에서 일본을 자금 지원한 미국이, 러일양국의 강화체결에 적극 개입한 이유도 만주에서의 이권을 노렸기 때문이다.
강화체결 후 미국의 철도왕 에드워드 핸리 해리먼은 일본이 러시아로부터 획득한 권익 중에, 신경, 장춘으로부터 대련구간을 달리는 철도(南만주철도) 의 공동경영을 1억엔의 재정지원과 함께 맡게 해달라는 요청을 일본측에 제안하게 된다.
1903년 일본 국가예산이 약 2억6000만 엔이던 시절의 1억엔이다.
가쓰라 타로 수상은 해리먼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런데, 해리먼과 길이 엇갈려 귀국한 외상 고무라 주타로는 반대한다.
많은 국민의 희생을 지불하고 얻은 권익을 미국과 나누게 되면 나중에 후환이 될 것이라는 이유였는데,
그렇게 되면 나중에 최종적으로는 이권을 미국에게 빼앗기게 될 우려가 있음을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쓰라 수상은 결국 고무라 외상의 의견에 따르게 되는데, 갑작스러운 일본의 방침 파기에 해리먼은 극도로 분노하게 되었고 이후 일본과 미국은 갈등 양상으로 접어들게 된다.
만주를 향한 미국의 태도는 집요했다. 1909년 일본과 러시아 양국이 보유한 만주내 철도 권익을 중립화시켜 미국 자신을 포함하는 공동관리 체제로 할 것을 제안하는 외에, 기존 만주철도 구간에 새롭게 병행하는 철도의 건설 등도 계획하지만, 미국은 모두 실패하게 된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은 미국은, 1922년 워싱턴으로 주요 9개국을 불러 군축 회의를 개최하여, 日英 동맹의 파기와, 청나라 붕괴후 성립한 중화민국에 대한 일본의 진출 억제 등을 포함하는 '일본 약체화' 를 목적으로 하는 합의를 이끌어 낸다.
아울러, 미국은, 만주를 다스리는 장작림 정권과 만주철도에 대항하는 철도건설과 동시에, 만주철도와 연결되는 대련항에 대항하여, 대련과 발해만을 마주보는 위치에 있는 호호도에 무역항을 건설하는 계획을 추진한다. 중국의 對日 저항도, 미국의 지원하에 점차 강해져 갔다.
그러던 중에 1931년 봉천 교외에서 발생한 만주철도 폭파사건을 계기로 촉발된 중국과의 무력충돌(만주사변)에 이어, 6년 후에는 북경 교외의 노구교에서 중국•국민당 군과의 분쟁이 발발하는 등 전선은 확대되어만 갔다.
여러 사건에도 불구하고 전혀 물러섬이 없는 일본에 대해, 드디어 미국은 <중국에서의 미국 이익이 일본군에게 침해당했다>며 1939년에
日美통상항해조약의 파기를 일본측에 통보한다.
즉, 자원이 빈약한 일본을 향한, 석유와 철 등 전쟁지속 수행에 필요한 물자의 수출을 금지함으로써 일본 약체화를 꾀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조치에 일본은 초반에 동요했지만, 이내 동남아시아의 자원지대로 눈을 돌렸다.
당시, 협조 관계에 있었던 독일이 프랑스를 이겨, 프랑스령 인도차이나(現 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 가 마침 일본에게 중요한 지역으로 부각되었다.
그런데, 미국에게 있어서도 인도차이나는, 중국쪽으로 자원을 이송하는 수송 루트에 해당했기 때문에 미국은, 일본군의 인도차이나 주둔에 강경하게 반대한다. 1940년, 일본군은 이러한 미국의 태도를 간파하는 가운데, 북부 인도차이나에 주둔하면서, 독일, 이탈리아와 군사동맹을 체결한다.
1941년에는 남부 인도차이나에 진출한 일을 두고 미국과의 갈등이 더욱 선명해지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대장은, 미국과 싸울 것이라면 우선 하와이의 미태평양 함대를 무력화시키지 않고는 그 이후로 전세를 우세하게 가져갈 수 없다는 판단하에 항공기에 의한 공격을 계획한다.
항공모함 6척과 항공기 400기라는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었던 기동부대를 편성하고, 진행중이던 對美교섭의 결과가 나오지 않은 상태이지만, 선전포고 직후의 기습공격을 위해 11월22일, 하와이를 향해 진로를 잡는다.
그리고 10일 후에 해당하는 12월2일, 태평양을 항행하는 항공모함 '아카기'의 함교내에서, 기동함대의 지휘를 맡은 나구모 주이치 중장은 진행중인 對美교섭 결과를 신경쓰고 있었다.
교섭 결과에 따라 기동부대를 회항시키는 것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 상태였는데, 오후 5시반에, 본토의 연합함대로부터 온 전문을 보고받게 된다.
<본문, 니이타카야마노보레 1208>이라고 된 전문이었다. 12월8일 개전하라는 내용이었다. 니이타카야마는 당시 일본이 통치하던 대만의 산으로서(현재는 玉山) 표고가 3952미터로 후지산보다 높은 대만의 최고봉이었다.
1941년 12월, 하와이로 향한 항공모함 여섯 척으로 구성된 기동부대에 대해, 8일 개전을 명령한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장은 '선전포고'로부터 30분 후에 공격한다는 모험적 스케줄에 대해 일말의 불안감을 갖고 있었다.
몇 번이나 외교적 절차를 확인해 둔 것은, 부임 경험을 통해 미국의 힘을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야마모토가 항공기에 의한 진주만 공격을 처음으로 입에 올린 것은 1940년 3월 합동훈련 당시였다.
항공기에 의한 對艦 어뢰공격의 성과에 만족한 야마모토는,하와이에 대해서도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일본이 애초 의도한 對美戰은 러일전쟁 당시의 海戰 과 같이 진주만으로부터 출항해 나온 미군 함대를, 여러 겹으로 대열을 이룬 잠수함과 항공기를 동원하여 공격함으로써 美함대에 큰 타격을 준 후, 일본 근해에서 결정적으로 요격하여 승부를 낸다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유학과 해군 무관으로 미국에 부임한 경험을 갖고 있는 야마모토는 일찍이 미국의 힘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기습 공격으로 하와이의 태평양 함대를 순식간에 무력화시키는 것 외에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눈을 돌린 것이, 1930년 이후로 개발에 몰두해 온 항공기에 의한 공격이었다.
야마모토는 1941년 1월, 제11항공함대 참모장 '오니시 다키지로'소장에게 작전연구를 명령한다.
오니시는, 특공대의 창설자아고, 야마모토와 함께 해군내에서 제일가는 비행기通이었다.
야마모토로부터 작전 입안 가능성 여부 검토를 명령받은 오니시와, 오니시가 발탁한 제1항공전대 항공참모 '겐다 미노루'중좌(한국군으로 치면 중령格) 등은 작전 검토 결과, 진주만의 수심이 문제가 된다는 결론을 얻는다.
통상, 어뢰를 장착한 뇌격기가 고도 100미터 상공에서 투하한 어뢰는 일단 수심 60미터까지 밑으로 가라앉을 수 밖에 없게 되는데, 진주만의 수심은 12미터 밖에 안된다. 이대로라면 어뢰는 해저에 부딪쳐버리기 때문에, 유일한 대안은, 항공기가 해면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듯 낮게 날면서 어뢰를 떨어뜨려 어뢰가 곧바로 전진하도록 하
는 식의 방법 외에는 없었다. 이에, 진주만과 지형이 비슷한 가고시긴코 만에서 민가 지붕 정도 높이까지
고도를 떨어뜨린 상태로 뇌격기를 조종하며 어뢰를 투하하는 훈련을 하게 되었고, 이런 비행기 모습을 보게 된 주변의 주민들은 "요즘 해군은 군기가 빠져 비행이 엉망이다"는 이야기를 하게 될 정도가 되었다.
당초, 항공기를 이용한 對艦 공격 효과에 의문을 품고 있었던 해군사령부는, 야마모토의 작전에 난색을 보였는데, "작전을 승인해 주지 않으면 연합함대 사령관 자리를 내놓겠다"는 야마모토의 강경한 태도에 놀라,내키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승인한 것이 1941년 10월19일이다.
일부 인원 외에는 알리지 않고 실시한 맹훈련의 결과, 어뢰가 수심 10미터 밑으로 내려가지 않게 투하할 수 있을 정도까지의 기량에 도달하게 되었다.
출격에 즈음하여 고안한,어뢰 양쪽에 붙인 베니어판 필레(살)가 부력효과를 높여준 것도 문제해결에 큰 도움이 되었다. 작전은 극비였던 만큼, 함대 수뇌부 외에는 작전과 관련한 사항이 비밀에 부쳐졌다.
11월22일, 기동부대인 20척 이상의 전함이 히토갓푸만에 입항했다. 마지막으로 항공모함 '가가'가 도착한 23일 이후 비로소 탑승원 및 승조원 전원에게 작전이 공지되었다.
한편, 일본과 미국간 교섭도 당시 막바지 국면을 맞이하고 있었다.
△중국으로부터 일본군의 철수
△만주국 승인
△통상관계 정상화 등이 주요 이슈였는데, 일본이 1941년 7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주둔한 것을 계기로, 영국과 중국, 네덜란드 또한 일본에 대한 경제봉쇄에 나섰다.
그리고 11월27일, '코델 헐' 美국무장관이 내민 '헐 노트'는, 일본군이 중국으로부터 완전 철수하는 것 외에도, 미국이 지원하는 (일본을 대적하는) 장개석 정권의 승인과 日獨伊 삼국동맹의 폐기를 요구하는 등의 내용으로 되어 있는 절연장과 다름 없는 수준이었다.
이에 대해, 일본은 12월1일, 천황이 참가한 가운데 미국과 영국, 네덜란드에 대한 開戰을 결정한 후, 선전포고 시간을 워싱턴 시간으로 12월7일 오후1시(일본 시간 8일 오전 3시)로 정하고, 開戰은 선전포고 후 30분으로 하기로 했다.
미국 현지시간으로 6일 오전 6시半(일본시간 6일 오후 8시半), 도고 시게노리 외상은 駐美 일본 대사관을 향해, '헐 노트'에 대한 각서를 14부로 나누어서 보내는 전문을 발신했다.
정오를 넘기기까지 13부를 보냈는데, 방대한 암호전문이었기 때문에 독해하는 것만 해도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이날은 남미로 전근을 가는 일등서기관의 송별회가 예정되어 있었던 관계로 저녁 때까지 8통을 번역한 상태에서 전원이 사무실을 나오게 된다.
그리고 14부를 수취한 것은, 다음 날인 7일 오전 7시로서, 공격예정 시간으로부터 6시간 전이었다.
이때로부터 4시간반 후인 일본 시간 8일 오전 1시반(워싱턴은 오전 11시반), 진주만 북방 약 460킬로미터 거리까지 육박한 기동부대 항공모함 및 함대는, 탑재한 공격기 중 171기를 그 시각으로부터 1시간 15분 후에 発艦시킨다.
야마모토 대장은 그때, 히로시마 앞 바다에 정박중인 연합함대 기함 '나가토'의 작전실에 있었다.
야마모토는 對美각서를 미국 정부에게 전달하는 시간에 대해 참모에게 재확인을 한 후 눈을 감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공격기가 항공모함으로부터 発艦했다는 電文을 받은 상태에서, 8일 오전 3시 19분, 갑자기 작전실의 문이 열리고 "전군돌격 명령입니다"라는 참모의 긴박한 보고 목소리가 실내를 울렸다.
하와이 공격기 지휘를 맡은 '후치다 미쓰오' 중좌가 탑승한 공격기로부터 발신된 電文이었다.
일본 시간 1941년 12월8일 未明, 하와이 근해에 위치한 일본 기동부대로부터 発艦한 171기의 제1진 공격대는 저공으로 하와이에 침입한 오전 2시 52분에, 기습공격 성공을 의미하는 電文 '도라 도라 도라'를 발신한다.
History channel에서 제작한 진주만 기습에 관한 다큐멘터리입니다.당시의 생생한 장면들이 많이 나옵니다. 영상의 길이는 47분입니다.
https://youtu.be/HTiIljUTK2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