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신기술 개발해도 검증도 못하고... 대만은 정부가 밀고 있는 [반도체 패키지 혁명] / 9/4(수) / 중앙일보 일본어판
"오래 일본 제품을 쓴 반도체 엔지니어가 가격이 좀 싸다고 위험을 감수하고 한국 소재를 쓰나요. 한국산 소재가 어떻게든 반도체 부품표에 등록돼도 검증이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로 무시되고 사장되는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최근 중앙일보와 만난 한국 소재기업 임원의 하소연이다.
지난 6월 말 대만 경제부는 대만 중소기업이 반도체 패키징 장비 13종을 국산화해 TSMC 등으로부터 76대의 주문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대만 반도체 대기업 TSMC나 UMC에 어떤 패키징 장비가 필요한지를 중소기업에 알려주고 개발한 장비를 TSMC의 검증을 받을 수 있도록 정부 보조금으로 지원한 연구개발 사업의 성과다.
한국의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업계는 삼중고에 처해 있다. 인공지능(AI) 반도체의 관건이자 차세대 고부가가치 산업이라는 첨단 패키징 소재·부품·장비를 개발하고 싶어도 '고객이 무엇이 필요한지 모르고, 만들어도 이것이 맞는지 모르고, 검증되지 않아 아무도 사지 않는' 답답한 처지다. 한국의 반도체 생태계가 첨단 패키징 절벽 앞에 선 이유다.
AI 서버 반도체용 플립칩(FC)이나 광대역메모리(HBM)에 쓰이는 실리콘관통전극(TSV) 같은 첨단 패키징은 반도체 핵심 재료인 원형 실리콘 원판의 웨이퍼 단계에서 적용되는 기술이다. 그런데 국내 소재·부품·장비 업계에서는 "우리는 웨이퍼를 보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미래 기술을 개발하느냐"는 한탄이 나온다. 첨단 반도체용 12인치 웨이퍼 가격이 오르는 데다 대량 구매하는 업체 외에는 웨이퍼를 확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반도체 대기업의 전 임원은 「웨이퍼 지급은 회사의 이익과 직결된 문제. 중소기업에 1년에 한두 번 시험용 웨이퍼라도 제공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대기업 내부에도 있다고 말했다.
한국의 소재·부품·장비가 어떻게든 신기술을 개발해도 이것이 반도체 생산 공정에 적합한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고가의 반도체 생산라인에 중소기업 신제품을 선뜻 적용해주는 업체가 없기 때문이다. 돌다리도 수천 번 두드리는 반도체 업계에서 검증되지 않은 신소재나 장비를 구입할 곳을 찾기는 더욱 힘들다.
대만은 이러한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반도체 이기종 통합패키징 장비검증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중소기업이 개발한 소재·부품·장비 신제품이 TSMC, ASE, UMC 등 반도체 제조·후공정 대기업 공장에서 품질 검증을 받을 수 있도록 정부 보조금으로 지원한다. 연구개발을 위한 연구개발이 아니라 시장 상용화를 위한 정책이다. 대만 경제부는 "장비를 검증하는 자본 부담과 개발 리스크를 줄여 산업 경쟁력을 높이고 국제시장 진출 기회를 확대하기 위한 것"이라고 정책 목표를 밝혔다. 100마디 말보다 'TSMC 인증' 기록으로 수출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중국은 한 걸음 더 내디뎠다. 중국은 장쑤성 우시의 국가반도체혁신센터를 2020년부터 2.5차원과 3차원 패키징, 웨이퍼 레벨 팬아웃 패키징, 대형 FCBGA와 같은 첨단 패키징 전용 연구개발센터로 운영하는데 이곳은 최신 12인치 웨이퍼 테스트 플랫폼을 갖춘다. 중국은 중소기업이 개발한 신소재를 생산 과정에 처음 적용하는 기업이 지는 손실에 대비해 관련 보험료를 정부가 낸다. 국산 소재 육성 과정의 리스크를 반도체 업체가 아닌 국가가 부담하는 것이다. 이순신 한국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세계지역연구제1센터장은 "중국 강소기업 육성을 위해 국산화 소재를 처음 사용하는 기업의 부담을 완화하는 제도"라고 말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 6월 7년간 총 2744억원을 들여 반도체 첨단 패키징 대규모 연구개발 지원에 착수한다고 발표했다. 국내 소재·부품·장비 기업의 연구개발을 지원하고 차세대 패키징 핵심기술을 선점해 기술 리더십을 확보한다는 취지다. 그런데 5568억원 규모로 신청한 이 사업의 예산은 예비타당성 조사에서 절반으로 깎였다.
중앙일보가 입수한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의 예비타당성 보고서에 따르면 예산 절감 이유 중 하나는 개발한 기술의 사업화와 양산까지 가야 하는데 한국에는 반도체 패키징 기술을 검증할 인프라가 없다는 것이었다. 국내에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 나노종합기술원이 2022년 12인치 웨이퍼 테스트 플랫폼을 운영하기 시작했지만 아직은 전 공정 위주다. 산업부는 지적사항과 업계 의견을 반영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협력을 받아 소재·부품·장비 기업이 개발한 패키징 기술을 검증할 수 있는 내용의 보완책을 더한 세부 사업을 조만간 공고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