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겉으로만 보면 오해가 될 수 있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는데 사실 하나님께서는 경배를 기뻐하시지 않는 분일 수는 없고 오히려 그 반대이나..
오늘 본문의 다윗의 고백을 정확하게 통찰하면 그때 당시는 사무엘하 12장을 참조하면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을 행하고 그 남편 우리아를 간악한 방법으로 죽게 한 후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해 그러한 죄악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시고 심히 책망하셨을 뿐만 아니라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 등과 같은 징계들을 선포케 하신 직후라 할 수 있기에 바로 그러한 죄악들 가운데에서의 외형적 경배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고 다윗이 고백하고 있는 것이고, 바로 그러한 때에는 그 무엇보다 우선해서 상한 심령으로 자복하고 돌이키는 것이 최우선이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오늘 본문 전에 시편 51편 11절에 보면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라고 간구하는 것도 볼 수 있는데 그러한 모든 이유들은 결코 복잡할 수 없는 것으로 그 성령님께서는 단적으로 말씀의 영이신 것이고, 무엇보다 우리의 모든 경배를 받으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야 말로 근본적으로 말씀으로 존재, 창조, 통치하시는 분인 것이며, 근원적으로는 우리 인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하늘의 힘과 구원의 일들, 실상 우리 인생들이 올려 드릴 수 있는 모든 예배와 경배와 간구 등에 있어서의 주체이시자 중심, 근본, 실체이신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바로 그 자체가 말씀이시고 오직 말씀으로 하나되시어 말씀과 함께, 말씀대로 모든 것을 실행하시고 다 이루시는 분이기 때문인 것이고, 경배나 예배도, 특히 그 속의 모든 중심과 주요 골격들인 설교와 기도와 찬미와 헌신과 교제 등도 본질적으로는 말씀인 것이며 말씀과 전적으로 직결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기에 죄악이라는 것은 직접적으로는 성령님의 임재나 충만이나 역사들 등과 완전히 상극이 아닐 수 없는 것이고, 사실상 죄악들과 몰래 벗하고 계속 반복하면서 올려드리는 예배나 기도, 헌신이나 특별 작정 등은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결코 큰 의미나 소용이 없는 것이며, 어떤 면에서는 회칠한 무덤과 다를 바 없는 것으로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의 신앙 예식들과 같이 심히 가증스러움이 될 수도 있는 것인데..
참으로 그러한 때에는 다른 그 무엇보다 오직 한 분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으며 먼저 자복하고 돌이키는 것이 가장 우선이자 전제인 것이고, 따지고 보면 원론적으로는 이 험하고 죄악들이 많은 세상에서 연약하고 허물 많은 우리 인생들이 의의 근본이시자 전부이신 하나님 앞에 서서 경배드리고 찬미하며 간구하는 자체에 있어서 부터도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하지 않고는 불가능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그러한 모든 사실들, 특히 죄악으로 인한 모든 막힘과 문제들보다 더욱 분명한 사실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들의 억만 죄악들과도 같은 악들보다, 온 세상과 전 인류보다, 모든 시간과 공간보다도 더 크신 성자 하나님이시자 구원자이시며 중보자이시고 특히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인생들 사이의 길과 통로와 접점 등의 위치와 역할이신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 목숨값으로 인한 대속과 대신, 나음과 화평 등의 다 이루신 구원이 비교도 할 수 없이 더 크고 강력하다는 것이고, 그러한 구원의 일들을 위해 그 위치와 역할 상 모든 주권과 통치와 섭리의 하나님 아버지께서 상상도 못할 사랑과 은혜와 능력으로 창세전부터 계획, 약속, 준비, 진행하시면서 그의 시간에 따라 하나하나 나타내시고 경험케 하시며 성취해 나가시고 있는 것이며, 직접적, 현실적, 경험적인 면에 있어서는 그 위치와 역할에 따라 하나님 아버지의 영이시자 구주 예수님의 이름에 약속되신 분이며 시공을 넘는 전지전능의 하늘의 힘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뜻과 약속과 말씀들을 모두 실행하시고 특히 그 한 가운데 계신 구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목숨값으로 다 이루신 구원의 일들을 시간과 공간들을 초월해서 믿음과 함께 말씀대로 모두 실제가 되게 하시는 성령님께서 정말 하나하나 모두 다 맛보고 누리며 성취되어질 수 있게 하시는 것이고, 근원적으로는 그렇듯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가 아닐 수 없는 것이며, 실제로 그러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그 존재와 개념 상 구약과 신약 시대, 오늘날 우리들, 모든 인류 역사들, 심지어는 천지창조와 창세전, 더 나아가 세상 끝 날과 영원에 이르기까지 단 한 시라도 분리, 별개, 변개이실 수 없는 반면 언제나 함께 이시고 그 역할에 따라 완벽하게 조화되시며 완전히 하나되시어 한 뜻을 이루시는 분이 아닐 수 없는 것이기에..
정말 그 어떠한 인생들, 그 어떠한 죄인들이라 하더라도 하나님 아버지의 창세전부터의 뜻과 약속과 섭리 안에서 구약의 믿음의 선배들과 권속들과 같이 구주 예수님에 대한 다양한 예표와 모형들, 약속과 계시들 등을 통해 오실 메시야를 믿고 의지했던지, 또는 오늘날 우리들과 같이 오신 메시야를 믿고 의지하고 있든지 간에 어쨌든 반드시 오직 한 분 구주 예수님을 믿음으로 값없이 구원에 참예케 되고, 마치 목욕하듯 통째로 하나님이 될 수 있는 것이며, 직접적, 경험적으로는 그 이름에 약속되신 성령님으로 인한 시공을 넘는 하늘의 힘과 실제로 인해 천국과 부활과 영생의 백성으로 거듭나게 되고, 본질적으로 말씀의 백성으로 뒤바뀌게 될 수 있는 것일 뿐 아니라 오늘 본문의 다윗과 같이 살면서 범하게 되는 크고 작은 죄악들, 심지어는 있을 수 없어 보이는 심각한 죄악들에 있어서까지도 처음에 믿음으로 구원에 참예케 된 사랑, 이치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아버지의 창세전부터의 뜻과 약속과 섭리 안에서 오직 한 분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고 붙잡으며 그 이름으로 기도하고 찬미하면서 바로 그 이름에 약속되신 성령님으로 인한 하늘의 힘과 은혜를 덧입어 자복하고 돌이킬 수도 있는 것이고, 진정 그러한 예수님 십자가 목숨값의 대속과 대신, 나음과 화평 등의 시대와 나라들을 넘는 구원의 일들이 더욱 강력하고 측량도 못할 정도인 것이기에, 또한 그 이름에 약속되신 성령님의 시공을 넘는 전지전능의 하늘의 힘과 실제들이 말로 다 표현 못할 정도로 생생하고 강렬한 것이기에, 게다가 하나님 아버지의 창세전부터의 뜻과 약속과 계획들과 그 속에서의 사랑과 은혜와 능력들이, 근원적으로는 그러한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되심으로 인한 모든 역사들이 우리들이 생각하고 상상하는 이상으로 강렬하고 생생하며 실질적인 것이기에 그러한 죄악들의 모양과 정도와 강도들에 따라, 그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시간과 계획들, 뜻과 섭리들 안에서 그로 인한 사함과 나음들, 심지어는 회복과 역전들까지도 가능한 것이고, 결국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편51:16~17)
*양범주목사의 '21세기 두란노서원'/2023년 6월 6일(화)1/사진 조연진사모, 이미지 박원영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