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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삼굴(狡兔三窟)
교활한 토끼는 굴을 세 개 파 놓는다는 뜻으로, 사람이 교묘하게 잘 숨어 재난을 피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狡 : 교활할 교(犭/6)
兔 : 토끼 토(儿/6)
三 : 석 삼(一/2)
窟 : 굴 굴(穴/8)
교활한 토끼가 제 목숨을 지키기 위해 숨을 굴을 세 개나 마련한다는 뜻인데 교묘하게 잘 숨어 재난을 피하는 것을 이른다. 그런데 자기가 살기 위해 몇 개든 은신처를 만들어 놓는 것은 지혜를 칭찬할 일이지 비난할 일만은 아니다. 단지 아무리 안심할 만한 곳이라도 언제 위험이 닥칠지 모르므로 항상 단속을 잘 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되는 성어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맹상군(孟嘗君)열전과 전한시대 학자 유향(劉向)의 전국책(戰國策) 등에 실려 있다.
하찮은 재주를 가진 사람도 내치지 않아 큰 도움을 받게 된다는 계명구도(鷄鳴狗盜)라 하면 제(齊)나라의 재상 맹상군(孟嘗君)이 연상되는데 여기에도 등장한다.
기원전 403년~221년, 전국시대(戰國時代) 말기 각 제후국에서 활약했던 전국사공자(戰國四公子)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사람으로 식객이 30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무위도식하는 풍환(馮驩)이란 사람도 그중 한 명이었다.
하루는 설(薛)이라는 지역 사람들이 맹상군에 빚을 지고 있었는데 상환 독촉을 위해 풍환이 자청해 가서 빚을 탕감해 주고 차용증을 불태웠다. 새로 즉위한 제왕에 밉보여 맹상군이 재상직에서 물러났을 때 설 지역에 가서 살았는데 백성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아 못마땅해 했던 풍환을 다시 보게 되었다.
첫째 굴 마련에 성공한 풍환이 이웃 나라를 설득해 맹상군을 재상으로 발탁하려 하자 뒤늦게 제왕이 복위시켰고, 제나라 선대의 종묘를 설 지역에 마련하도록 설득하는데도 성공했다. 이리하여 맹상군은 화를 입지 않고 만년을 보냈는데 풍환이 세 보금자리를 마련해준 덕이었다. 전국책엔 같은 내용이지만 풍환이 풍훤(馮諼)으로 나온다.
교토삼굴(狡兎三窟)
꾀 많은 토끼가 굴을 세 개나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는 뜻으로 교묘한 지혜로 위기를 피하거나 재난이 발생하기 전에 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사기(史記) 맹상군열전(孟嘗君列傳)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풍환(馮驩)은 제(齊)나라의 재상인 맹상군(孟嘗君)의 식객(食客)이었다. 맹상군은 왕족인 정곽군(靖郭君) 전영(田嬰)의 아들로 이름은 전문(田文)이고, 맹상군은 그의 호(號)이다.
풍환(馮驩)은 본디 거지였는데 맹상군이 식객을 좋아한다는 말에 짚신을 신고 먼 길을 걸어왔던 자다. 맹상군은 그의 몰골이 하도 우스워 별 재주는 없어 보였지만 받아주었다. 그러나 그는 괴짜였다.
맹상군은 그를 3등 숙소에 배치했는데 고기 반찬이 없다고 늘 투덜댔다. 그래서 2등 숙소로 옮겨 주었는데 이번에는 수레가 없다고 불평을 하는 것이 아닌가. 마지막으로 1등 숙소로 옮겨 주자 그럴 듯한 집이 없다며 투덜댔다.
당시 맹상군은 설(薛) 현재 산동성(山東省) 동남지방에 1만 호의 식읍(食邑)을 가지고 있었다. 3천명의 식객을 부양하기 위해 식읍 주민들에게 돈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도무지 갚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누구를 보내 독촉할까 궁리하고 있는데 1년간 무위도식(無爲徒食)으로 일관했던 풍환이 자청했으므로 그를 보내기로 했다. 출발할 때 그는 "빚을 받고 나면 무엇을 사올까요?" 하고 물었다. 맹상군은 "무엇이든 좋소. 여기에 부족한 것을 부탁하오"라고 대답하였다.
설(薛)에 당도한 풍환은 빚진 사람들을 모아서 차용증을 하나하나 점검한 후 이자(利子)만 해도 10만 전을 받았다. 예상 외의 좋은 결과였다. 징수(徵收)가 끝나자 그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맹상군은 여러분의 상환 노력을 어여삐 보고 모든 채무를 면제하라고 나에게 분부하셨소." 그리고는 모아 놓았던 차용증 더미에 불을 질렀다. 차용증은 모두 재로 변하고, 사람들은 그의 처사에 감격해 마지 않았다.
설(薛)에서 돌아온 풍환에게 맹상군이 "선생은 무엇을 사오셨는가?" 하고 물어 보았다. 이때 풍환이 말하기를, "당신에게 지금 부족한 것은 은혜와 의리입니다. 차용증서를 불살라 당신을 위해 돈주고 사기 힘든 은혜와 의리를 사가지고 왔습니다(此時馮驩曰 君之不足則恩義也 以燒借書爲君賣恩義來)"라고 하였다.
그러자 이말을 들은 맹상군은 매우 마땅찮은 기색이었다. 1년 후 맹상군이 제(齊)나라의 새로 즉위한 민왕(泯王)에게 미움을 사서 재상직에서 물러나자, 3천명의 식객들은 모두 뿔뿔이 떠나버렸다. 풍환은 그에게 잠시 설(薛)에 가서 살라고 권유했다. 맹상군이 실의에 찬 몸을 이끌고 설(薛)에 나타나자 주민들이 환호하며 맞이했다.
맹상군이 풍환에게 말했다. "선생이 전에 은혜와 의리를 샀다고 한 말뜻을 이제야 겨우 깨달았소."
풍환이 말했다. "교활한 토끼는 구멍을 세 개나 뚫지요(狡兎三窟). 지금 경께서는 한 개의 굴을 뚫었을 뿐입니다. 따라서 아직 고침무우(高枕無憂: 베개를 높이 베고 근심없이 잠)를 즐길 수는 없습니다. 경을 위해 나머지 두 개의 굴도 마저 뚫어드리지요."
그래서 그는 위(魏)나라의 혜왕(惠王)을 설득하여 맹상군을 등용하면 부국강병을 실현할 것이며 동시에 제(齊)나라를 견제하는 힘도 될 수 있다고 역설했다. 마음이 동한 위의 혜왕이 금은보화를 준비하여 세번이나 맹상군을 불렀지만 그 때마다 풍환은 맹상군에게 응하지 말 것을 은밀히 권했다.
이 사실은 제(齊)나라의 민왕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아차 싶었던 민왕은 그제서야 맹상군의 진가를 알아차리고 맹상군에게 사신을 보내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고 다시 재상의 직위를 복직시켜 주었다. 두 번째의 굴이 완성된 셈이다.
두번째의 굴을 파는데 성공한 풍환은 세번째 굴을 파기 위해 제민왕(齊泯王)을 설득, 설(薛) 땅에 제나라 선대의 종묘를 세우게 만들어 선왕 때부터 전승되어 온 제기를 종묘에 비치하도록 했다.
선대의 종묘가 맹상군의 영지에 있는 한 설혹 제왕(帝王)의 마음이 변심한다 해도 맹상군을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이라는 계산에서였다. "이것으로 세 개의 구멍이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주인님은 고침안면(高枕安眠) 하십시오."
이리하여 맹상군은 재상에 재임한 수십 년 동안 별다른 화를 입지 아니했는데 이것은 모두 풍환이 맹상군을 위해 세 가지 보금자리를 마련한 덕이다. 이야기의 주인공 풍환을 전국책(戰國策) 제책편(齊策扁)에서는 풍훤(馮諼)으로 적고 있다. 이 고사는 불안한 미래를 위해 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로, 완벽한 준비 뒤에는 뜻하지 않는 불행은 찾아오지 않는다.
교토삼굴(狡兎三窟)과 전문(田文)
순서가 쓰임의 핵심인 말들이 있다. 대표적인 예로 '갑(甲), 을(乙), 병(丙), 정(丁), 무(戊), 기(己), 경(庚), 신(辛), 임(壬), 계(癸)'는 10간(十干)의 순서다. 자연수 1부터 10까지 차례로 배열한 것과 같다.
'자(子), 축(丑), 인(寅), 묘(卯), 진(辰), 사(巳), 오(午), 미(未), 신(申), 유(酉), 술(戌), 해(亥)'는 12지(十二支)의 순서다. 쥐, 소, 범, 토끼 등 익숙한 실재 동물 11종류에 가상의 동물 용(龍) 하나를 추가한 것이다. 그런데 이 12지에서 각 동물의 순서는 누가 정한 것일까. 몇 개의 주장이 있다.
그 중 전래 설화도 포함된다. 먼 옛날에 동물들이 '누가 빨리 도착하나' 경주를 벌였고, 선착순으로 순번이 정해졌다는 그런 내용이다. 이 설화에서 영리한 쥐는 하루 일찍 출발하기로 결심한 소의 등에 올라타 조용히 힘을 비축하고 있다가 마지막 순간에 잽싸게 뛰어내려 1위를 차지해 버린다. 황당했지만 소는 2위에 만족한다. 그런데 용, 말 등 다른 쟁쟁한 동물들을 제치고 연약한 토끼가 4위를 차지한 비결은 의외로 단순하다. 참여한 동물 가운데 뛰는 종목이라면 토끼가 호랑이 다음으로 빠르기 때문이었다.
교토삼굴(狡兎三窟)이다. 글자로만 보면, 앞의 '교토(狡兎)'는 '교활한 토끼'다. 뒤의 '삼굴(三窟)'은 '세 개의 굴'이다. 본래 '영리한 토끼는 세 개의 땅굴을 파 놓고 만약의 위기에 대비한다'는 의미의 문장이었다. 훗날 이 네 글자로 압축됐다. 한나라 유향(劉向)의 전국책(戰國策)에 관련 기록이 나온다.
맹상군(孟嘗君)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전문(田文)은 중국 전국시대 말기 제(齊)나라의 유명한 정치가다. 그의 생일은 음력 5월 5일, 단오(端午)날이다. 당시 음력 5월 출생한 사내 아이는 '키가 지게문 높이만큼 자라면 아비를 해친다'는 속설이 있었다. 전문의 부(父)는 그를 '거두지 말라'고 전문의 모친에게 말했다.
정(正)부인이 아니었던 모친은 그를 몰래 키웠고, 장성한 후에 부친에게 보낸다. "만약 목숨을 하늘로부터 받는 것이라면 걱정할 일이 없구요. 만약 지게문으로부터 받는 것이라면 지게문을 아주 높이면 그만 아닙니까?" 전문은 첫 대면에서 이 간단한 이치로 부친의 우려를 잠재웠다. 부친은 그의 총명함을 즉시 알아챘다. 훗날 전문은 제나라 재상을 오래 지낸 부친이 세상을 뜨자, 영지 설(薛) 땅과 작위의 승계자가 된다.
전문은 시대를 한참 앞선 뛰어난 감각의 정치가였다. 큰 가문을 이끌면서도 그는 수천 명 규모의 식객을 따로 정성껏 대접하며 교류했다. 그들에게 무료로 숙식을 제공했고, 자주 직접 대화하고 밥도 함께 먹으며 다방면의 지혜를 구했다. 꽤 통큰 처세였다. 제후들 사이에도 차츰 그의 이름은 인자하고 유능한 제나라의 재상으로 알려졌다.
그의 식객 가운데 풍환(馮驩)이라는 괴짜 인물이 있었다. 현재 '교토삼굴(狡兎三窟)'로 압축되어 쓰이는 이 말은 전문의 불투명한 앞날에 대비하기 위해 풍환이 미리 일련의 비밀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진행하는 과정에서 나온다. 설 땅 주민들의 차용증서를 불태워 일찌감치 민심을 다독여 둔 것도 풍환의 이 프로젝트 가운데 하나였다. 전문이 보필하던 제나라 민왕(湣王)은 호전적 기질에 교만한 보스였기 때문이다. 그는 명망이 높은 전문을 늘 경계했다.
중국 전국시대에 4공자(四公子)가 천하에 이름을 떨치며 활약한 시기가 출현한다. '4공자'는 조나라의 평원군 조승(趙勝), 위나라의 신릉군 위무기(魏無忌), 초나라의 춘신군 황헐(黃歇), 그리고 맹상군 전문이다.
이들은 대적하기 버거울 정도로 강성해진 서쪽 진나라의 위협에 맞서고, 한편으로 각자 국익을 위해 기발하고 대범한 계책을 펼쳐 상당한 유명세를 누렸다. 참고로, '계명구도(鷄鳴狗盜)'라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자성어 역시 전문과 그의 기상천외한 재주를 가진 식객들이 함께 등장하는 한 에피소드에서 유래했다.
혹시 직장이나 사회에서, 매너가 거칠거나 의심 많은 보스로 인해 곤욕을 치르는 경우에 처했다면 이 '4공자'의 활약상을 주말에 방콕하며 일독해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구체적 아이디어까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전형에 가까운 이들 사례에서 묘책의 단서를 몇 개 발견하는 귀한 시간이 될 수도 있다.
교토삼굴(狡免三窟)
꽤 많은 토끼는 亂(난)을 피하는 굴을 셋이나 가지고 있다.
‘꽤 많은 토끼는 亂(난)을 피하는 교묘한 굴을 셋이나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는 지혜로운 사람은 亂(난)을 피하는 교묘한 재주를 세 가지는 가지고 있다는 말로 해석된다. 이 말은 사마천의 사기(史記) 맹상군 열전과 전국책(戰國策)의 '제책'의 '맹상군의 이야기'에서 유래하고 있다.
이 말은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이 위기에 처할 때를 대비하여 세 가지 이상의 계책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나 오늘에 있어서는 어떤 정책을 집행하거나 일을 도모할 때 곤란 상황을 대비하여 계획을 몇 가지로 세워야 한다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이를테면 전쟁, 정책 수행, 기타 어떤 일을 도모할 때 plan 1, plan 2, plan 3 등으로 계획을 세워 만약에 나타날 위기와 곤란에 대비하여야 한다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이말을 인터넷 등 여러 곳에서 ‘교활한 토끼는 굴을 셋이나 가지고 있다’로 해석하지만 여기서는 狡(교)를 ‘슬기로운’ ‘꽤 많은’으로 해석함이 더 적합하다. 계획과 일의 처리에 있어서 경직되지 아니한 유연한 태도를 강조한 말이기도 하다.
1. 경직된 정치와 유연한 정치
현 정부는 정책 수행에 있어서 유연하지 못한 부분이 많은 것 같다. 상당히 경직된 모습을 보여 왔다. 이태원 참사에 대한 접근도 그렇고, 채 상병 사망 사건에 대한 접근도 그렇고, 세계 잼버리 대회의 실패도 그렇고 여러 측면에서 그런 모습을 보여왔다. 그것이 어쩌면 4.10 총선 패배로 이어졌는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현 정부는 오로지 대통령과 정부에 불리하다 싶은 사안에 대해 야당이 다수당의 힘으로 특검을 통과시켜 요구하자 초지일관 거부권을 행사해 왔다. 그것은 강대강(强對强)의 정책 구도로 이어졌다. 결국 힘겨루기의 싸움에서 총선의 패배로 정부와 여당의 패배로 이어졌다. 총선 패배 이후 유화 제스처를 써 보지만 이미 역부족이 되었다. 그런데 지금도 그 경직된 모습은 크게 변화되지 않고 있다.
지금도 극한 대치로 갈등을 겪고 있는 의료 대란에 대해서도 그렇다.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부가 어떤 정책이든 그것을 집행할 때 상당한 영역에서 대민(對民) 갈등을 겪게 되어 있다. 그런데 그 갈등을 전제하지 않거나 전제하더라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그냥 힘으로 밀어붙이려 할 때 더 큰 난관에 봉착할 수 있다. 따라서 정책이나 대형 국가사업을 집행할 때 항상 대민 갈등을 예측하고 그에 따른 다양한 대응책을 수립하여야 한다. 그러나 경직된 정부와 정책수행자는 그것을 다양하게 고려하지 않고 정책 집행의 당위와 입장만을 고집하여 힘과 권위로 해결하려 할 때가 많다. 그런 경우는 권위주의나 독재국가의 정부에서는 가능할지 모르나 온전한 민주주의 정부에서는 어쩌면 불가능한 일이다.
지금의 의대 정원 증원 문제로 의사단체와 정부의 끝없는 갈등은 쌍방의 이해관계 갈등으로 비화하여 엄청난 혼란을 겪고 있다. 이런 과정에서 어쩌면 의대 정원의 증원이라는 당위성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 형성이나 의사단체와의 당위성에 대한 공감은 이미 물건너간 것이 되고 쌍방의 힘과 감정의 대결만 남아 있는 것 같다.
정부는 초기부터 지난 27년간이나 의대 정원이 동결된 역사를 내세우며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의 당위성을 내세우며 밀어붙이려 했다. 정부는 유연하지 못했다. 내가 여기서 유연했어야 한다는 것은 정부의 의대 정원의 2,000명 증원을 양보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지난 27년간이나 증대 정원을 증원하지 못한 역사를 돌이켜 정말 신중하게 그리고 용의주도하게 다양하고 유연한 계획 가지고 접근했어야 했다. 초기부터 의사단체와 전공의들의 강력한 반발을 예측하고 다양한 접근 방법을 계획하고 유연하게 접근했어야 했다. 그러면서 대화의 장을 만들고 유연하게 압박해 갔어야 했다. 특히 국민을 향해 충분한 설명과 설득을 통해 전 국민의 공감대를 형성했어야 했다. 그리고 거대 야당과의 대화를 통해 그들의 동의와 공감을 얻어 냈어야 했다. 그런데 정부의 단독적인 힘으로만 해결하려 했다. 정부는 왜 지난 27년간이나 의대 정원을 증원하지 못했을까에 깊은 고심을 했어야 했다. 그래서 의료계가 반발할 경우 처벌과 징계라는 카드 외에 다양한 접근법과 설득의 방식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여기에는 어쩌면 그 어느 정부도 해결하지 못한 의료 개혁의 성공이라는 업적 영웅주의가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갈등은 이해당사자의 겉으로 드러난 문제보다는 이면에 있는 감정적이고 인간적인 측면에 도사리고 있다. 사람은 힘에 당할 수 없을 때는 납작 엎드리지만 대항할 수 있을 때는 강력하게 반발하는 속성이 있다. 특히 주체인 자기들이 소외되었다는 데 대한 감정적 반발은 상당히 큰 엉뚱한 문제로 전환되어 문제 해결의 방법이 꼬이게 되기 쉽다. 사람은 폭력에는 납작 엎드려 숨지만 무시당했거나 불공정에 대해서는 분노하게 되어 있다.
고려시대에 무신의 난이 일어났다. 그 난의 근본적 원인은 무신에 대한 무시와 불공정에 대한 분노였다. 고려는 근본적으로 문치(文治)의 나라였다. 그것이 골이 깊다 보니 무신들은 무시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무시당한다는 느낌의 골이 깊어졌다. 그것이 무신들이 칼을 들고 정권을 탈취하게 하였다. 고려의 문신과 왕들은 무신들에게 문무(文武) 간의 관계에서 좀 더 유연하였다면 무신정권의 역사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치와 정책 집행에 있어서 무시당했다는 느낌을 받을 때 엄청난 분노를 유발할 수 있다. 의사단체와 전공의들이 강하게 반발하는 것도 그들이 무시당했다는 감정적인 측면이 강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이것은 정치가 유연하지 못하고 경직되었기 때문이다.
경직된 정치는 정책을 집행할 때 정책이 단순하고 방법과 방향이 일직선적(一直線的)이다. 그래서 정책을 집행할 때 한가지 전략과 전술을 가지고 접근한다. 만약에 반대 여론이 심하거나 갈등이 증폭되면 정치적 권위와 힘으로 해결하려 한다. 그것은 경직된 권위주의적인 정부의 모습이다. 민주 정부에서 그런 모습을 보인다면 그 정부의 정책담당자들이 권위적이고 경직되었다는 증거가 된다. 유연한 정부와 정책 집행자는 장차 나타날 반대 여론과 갈등에 대비할 줄 안다. 그래서 항상 반대의견에 귀를 충분히 기울일 줄 안다. 이를테면 ‘악마의 대변인’을 충분히 활용할 줄 안다.
조선의 성군이었던 세종대왕은 항상 반대의견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았다. 신하들과 의논할 때 신하들이 모두 예스맨(YES MAN)이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그 스스로 반대의견이 나올 만한 질문을 자주 하기도 하였다. 세종대왕은 항상 ‘악마의 대변인’ 존중하였고 스스로 그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서 올바른 정치를 할 수 있었다. 세종의 정치 스타일은 확고한 신념에 바탕을 두면서도 늘 인간적이고 유연하였다.
정치인과 정책 입안자 정책 집행자들은 신념과 철학은 확고해야 하지만 그 수행 방법에 있어서는 목적 달성을 위해 유연하여야 한다. 장차 나타날 갈등을 예견하고 그에 대처하는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예견했던 상황은 늘 변화하기 때문이며 아무리 잘 예측하였다고 하더라도 현실은 다른 면이 많기 때문이다. 그것이 곧 狡免三窟(교토삼굴)의 지혜이다.
狡免三窟(교토삼굴)의 지혜는 문제 해결의 예측력과 유연성을 강조한 말이다. 이제 그 狡免三窟(교토삼굴)의 유래를 알아보자.
2. 狡免三窟(교토삼굴)의 유래
전국책(戰國策)의 '제책'에 이런 말이 있다. ‘교토유삼굴(狡兔有三窟) 근덕면기사이(僅得免其死耳)’라는 말이 있다. 사기열전에는 재상이 된 맹상군이 식객(食客-선비)들을 모은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때 풍환(馮驩)이라는 가난한 선비가 맹상군의 휘하에 들어갔다.
전국책(戰國策)에는 풍훤(馮諼)이라 되어 있고, 사기열전(史記列傳)에는 풍환(馮驩)이라고 되어 있음. 여기서는 풍환을 따를 것임] 맹상군은 풍환을 극진하게 대접하였다. 그 소문이 일자 곳곳에서 식객이 모였는데 그 수가 무려 3,000여 명에 이르렀다.
사기열전(史記列傳) 맹상군 열전(孟嘗君 列傳)에 의하면 제(齊)나라의 재상이 된 맹상군(孟嘗君)에게 영지(領地)로 설(薛) 땅 만호(萬戶)가 주어졌다. 맹상군은 식객이 넘치자 읍의 수입으로 식객들을 부양하기에 부족하여 사람을 시켜 설 현에 이잣돈을 놓게 하였다. 그런데 해가 넘도록 이자 수입이 들어오지 않았다. 설 땅에서 돈을 빌린 자들은 거의 이자를 낼 수가 없어 식객 부양의 비용조차 대지 못할 처지가 되었다. 맹상군은 고민에 빠졌다. 그래서 좌우에 물었다. “어떤 사람이면 설 현에 가서 이자를 받아 올 수 있을까?”
전사(傳舍)의 우두머리가 말했다. “대사의 객인 풍환이 용모가 뛰어나고 말을 잘하며 연장자인데 별다른 재주도 없으니 빚을 거두어 오게 함이 적당합니다.”
맹상군은 풍환을 불러들여 사정을 말하였다. “내가 변변찮은 줄도 모르고 빈객들이 모여 3,000이나 되었으니 읍의 수입으로는 빈객들을 공양하기에 부족함이 있어 설 현에 이자를 놓았소. 설 현에서는 해가 지나도록 이자가 들어오지 않고 있고 식객들의 끼니도 대지 못할 지경이니 그대가 설 현에 가서 이자를 받아 오면 하오.”
이에 풍환은 “그리하겠습니다” 하고는 수레를 타고 설(薛) 땅으로 가서 현지 관리를 만났다. 그리고 맹상군의 돈을 꾼 자들을 불러 모아 10만 전의 이자를 거두었다. 그리고 많은 술을 빚어 놓고 살진 소를 사서 잡고 돈 꾼 자들을 불러 모았는데 이자를 갚을 수 있는 자들도 모였고 이자를 갚을 수 없는 자들도 모였다. 그들 모두 돈을 꾼 증서를 가져오게 하였다. 풍환은 날마다 소를 잡고 술상을 차려 잔치를 베풀었다. 그리고 살림이 넉넉하여 이자를 갚을 수 있는 자들은 갚을 기한을 정하게 하였다. 그러나 가난하여 이자를 갚을 수 없는 자들의 증서는 모두 모아 불태워 버렸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였다. “맹상군께서 돈을 빌려주신 이유는 아무것도 없는 백성들에게 생업을 삼게 하기 휘함입니다. 또 이자를 거두는 이유는 빈객을 공양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부유한 자들에게는 기한을 정하게 하였고 가난한 자들의 증서는 모두 태워버렸습니다. 제군들은 음식을 마음껏 드시오. 백성을 이토록 사랑하는 주군이 있으니 어찌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이에 잔치에 모인 자들이 모두 일어나 두 번 절하고는 박수를 치며 환호하였다.
맹상군은 풍환이 가난한 자들의 돈 꾼 증서를 모두 불태워 버렸다는 사실을 듣자 매우 노하여 심부름꾼을 시켜 풍환을 부르게 하였다.
그리고 말하였다. “나는 식객이 3천 명이나 되어 설현에 돈을 빌려주었소. 나는 봉읍(奉邑-부세를 받아 봉록으로 삼는 봉지)이 적고 백성들은 오히려 때를 맞추어 이자를 내지 않아 객의 양식이 모자랄 것 같아 선생에게 부채를 받아 오게 한 것이오. 그런데 듣자 하니 선생께서는 이자를 모아 소와 술을 베풀고, 가난한 자의 증서는 모두 불태워 버렸다는데 어찌 된 일이오?”
이에 풍환이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소와 술을 많이 갖추지 않으면 사람들을 다 모이게 할 수 없고, 그들이 부족한지 풍족한지를 알 수 없습니다. 풍족한 자들은 이자를 갚을 기한을 정하게 하였으며 부족한 자들은 비록 증서를 가지고 있어도 10년간 부채를 지워도 이자만 많아질 것이며 다급해지면 도망쳐서 제 발로 주군을 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재촉해도 끝내 갚을 길이 없을 것이며 위에서는 주군이 이익을 좋아하여 사민(士民)은 사랑하지 않는다 할 것입니다. 또 아래서는 윗사람을 이반(離反)하여 저버리게 한다는 죄명이 있게 될 것이니 사민을 권면하고 주군을 위하는 일이 아닙니다. 쓸모없는 빈 채권 증서를 불태우고 얻을 수 없는 헛된 계획을 버려 설현의 백성들이 주군을 가까이하고 주군의 훌륭한 명성을 빛나게 하는 것인데 주군께서는 어찌 의심하십니까? 소생은 이자 대신 당신을 위한 은의(恩意)를 가지고 왔습니다.”
이에 맹상군은 손뼉을 치며 풍환을 의심한 것에 사과하였다.
그로부터 일 년이 지났다. 맹상군은 제(齊)나라 민왕(湣王)의 노여움을 사서 재상의 자리에서 물러나 영지인 설 땅으로 가게 되었다. 이 소문을 들은 설 땅의 백성들은 백리 앞까지 나와 맹상군을 맞이하면서 환대해 주었다. 이것은 풍환이 맹상군을 위해 마련해 둔 제일의 은신처였다. 이 모습을 본 맹상군은 풍환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이제야 그대가 얻어 왔다는 은의를 알게 되었소. 고맙소.”
이에 풍환은 맹상군에게 말했다. “꽤가 많은 토끼는 굴이 세게나 있다고 합니다(교토유삼굴狡兔有三窟). 나리에게는 지금 하나밖에 없으니 안심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주군께서 안심하도록 소인이 두 개를 더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맹상군이 정치를 잘하여 제나라 국력이 강성해지자 진(秦)나라와 초(楚)나라 등에서는 맹상군을 끌어내리기 위해 ‘맹상군의 명성이 그 임금보다 높고 제나라의 정권을 좌지우지한다’는 소문을 퍼트리며 온갖 비방을 하였다. 귀가 엷은 제왕은 그런 말을 듣고 아예 맹상군을 재상의 자리에서 폐하고 말았다. 맹상군의 식객들은 맹상군이 재상의 자리에서 폐하여졌다는 소문을 듣고 모두 떠나 버렸다. 그러나 풍환만은 떠나지 않고 맹상군의 곁을 지켰다.
어느 날 풍환이 맹상군에게 말하였다. “저에게 수레 한 대를 빌려주시어 진나라로 들어갈 수 있게 해 주신다면 반드시 주군이 나라에 중용되고 봉읍을 더 넓게 하겠사오니 되겠습니까?”
맹상군은 이에 수레와 폐백을 약속하고 보냈다. 풍환은 이에 서쪽으로 가서 진왕을 만나 말하였다. “천하의 유세 지사로 수레를 타고 서로 진나라에 들어오는 사람치고 진나라를 강하게 하고 제나라를 약하게 하지 않으려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또 수레를 타고 제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치고 제나라를 강하게 하고 진나라를 약하게 하지 않으려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 두 나라는 자웅(雌雄)을 겨루는 나라들로 형세가 두 나라 모두 웅(雄)으로 양립하지 못하며 웅자(雄者)가 천하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에 진왕이 풍환에게 귀를 기울이며 말했다. “어떻게 하면 진나라가 웅자(雄者)가 될 수 있겠습니까?”
풍환이 말하였다. "왕께서는 제왕이 맹상군을 폐하였다는 것을 아십니까? 제나라가 천하에 번성한 것은 맹상군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제왕은 비방을 듣고 맹상군을 폐하여 맹상군이 마음속으로 원망하고 있습니다. 맹상군은 반드시 제 나라를 등질 것이며 만약 맹상군이 진나라로 들어오면 제나라의 정세와 인사(人事)의 사정을 모두 알고 있으니, 정사를 맡기면 곧바로 제나라 땅을 얻을 수 있으니 어찌 바로 웅자(雄者)가 되지 않겠습니까? 왕께서는 지금 바로 사자를 보내시어 폐백을 싣고 맹상군을 맞음의 때를 잃어서는 아니 되옵니다. 제나라가 이를 먼저 깨닫고 다시 맹상군을 등용한다면 앞으로 자웅(雌雄)을 가릴 소재를 알 길이 없을 것입니다."
이에 진왕은 기뻐하며 수레 열 대에 황금 백일을 보내어 맹상군을 맞이하려 하였다. 풍환은 하직하고 먼저 길을 나서 제나라에 이르러 제왕을 만나 진왕을 만났을 때와 같이 유세하였다.
“천하의 유세 지사로 수레를 타고 동으로 진나라에 들어오는 사람치고 제 나라를 강하게 하고 진나라를 약하게 하지 않으려 하는 사람이 없으며, 수레를 타고 서로 진나라로 들어가는 사람치고 진나라를 강하게 하고 제나라를 약하게 하지 않으려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진나라와 제나라는 서로 자웅을 겨루는 나라로 진나라가 강해지면 제나라는 약해지니 이는 형세가 두 웅이 있을 수 없습니다. 신이 들으니 진나라 왕이 수레 열대에 황금 백일을 싣고 맹상군을 맞아들인다고 하니 맹상군이 서쪽으로 가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만약 들어가 진나라의 재상이 되면 천하는 그쪽으로 귀의할 것이며 진나라가 웅(雄)이 되고 제나라는 자(雌)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제나라는 위태롭게 될 것입니다. 왕께서는 진나라의 사자가 도착하기 전에 맹상군을 복위시키고 읍을 더 주어 사죄하면 맹상군은 기쁘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진나라가 비록 강국이지만 어찌 남의 재상으로 청하여 맞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진나라가 강하게 되려는 모략을 꺾어야 합니다.”
이에 제왕은 “좋소”하고는 곧바로 맹상군을 재상에 복위시키고 예 봉읍지에다 천호(千戶)를 더 주었다. 이에 풍환은 진나라의 국경을 살피게 하여 진나라 사신이 도착하자 그에게 제왕이 다시 맹상군을 재상에 복위시켰으니 돌아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진나라 사신은 수레를 돌려 떠났다. 이것이 풍환이 꾸민 맹상군을 위한 두 번째 계책이었다.
다시 일 년이 지났다. 풍환은 맹상군에게 설 땅에 선대(先代-제 왕조의 선대)의 종묘를 세우도록 건의하였다. 선대의 종묘가 맹상군의 영지에 있는 한 민왕은 맹상군을 함부로 할 수 없음을 풍환은 알았던 것이었다. 이에 맹상군은 설 땅에 선대의 종묘를 세웠다. 그래서 맹상군의 지위는 더욱 확고해졌다.
그로부터 맹상군은 수십 년에 이르도록 재상의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풍환은 주군인 맹상군을 위해 세 개의 계책을 가지고 실행하였던 것이다. 그 세 가지 계책은 바로 풍환이 말한 狡免三窟(교토삼굴)이었다.
3. 狡免三窟(교토삼굴)에 담긴 지혜
이 狡免三窟(교토삼굴)에 담긴 지혜는 무조건 세 가지 계책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아야 한다. 내용을 살펴보면 계책을 세울 때 고려할 사항이 있으며 그 계책에 포함되어야 할 사항 또한 있다.
풍환이 맹상군을 위해 파놓은 삼굴(三窟) 즉 세 가지 계책을 살펴보자. 그것은 첫째 백성들 특히 가난한 자들에게 은의(恩意)를 베푸는 일이었다. 설 땅의 백성들은 살기가 어려웠다. 풍환은 그 어려움을 어루만져 주면서 주군이 맹상군의 뜻임을 전했다. 그리하여 백성들이 맹상군을 백성 사랑이 깊은 주군으로 여기게 하였다. 어려운 시기에는 은의(恩意)만큼 강한 힘을 발휘하는 게 없음을 풍환은 알고 있었고 맹상군은 그것을 따랐다.
후(厚)한 끝은 있어도 박(薄)한 끝은 없다고 하였다. 이는 순후한 정을 베푸는 사람에게는 위기에 처했을 때 그를 위하여 돌보아 주는 사람이 있지만, 사람에게 야박(野薄)하게 군 사람은 위기에 처했을 때 모든 사람이 등을 돌리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정치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백성을 후하게 대하며 민심을 살피는 일이다. 민심을 잃은 정치는 오래 존속할 수 없으며 그런 정치가는 결국 설 자리가 없어진다. 민심을 살피고 얻는 일은 풍환이 설 땅에서 가난한 사람에게 베푼 은의(恩意)와 같은 것이다. 따라서 위기에서는 어려운 백성의 살림을 살펴야 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것이 유연한 정부의 할 일이다.
그것은 일상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람을 얻으려면 후한 인정을 베풀어야 한다. 사람은 인정을 베푸는 사람의 곁에 모이게 마련이고 따르게 마련이다. 정치가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책과 정강보다 민심을 살피고 그들의 말을 듣고 어루만지며 공감하는 일이다. 지금 현 정부와 여당이 총선에서 지고 현 정부의 지지율이 극심하게 떨어진 이유는 민심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원칙과 자존심, 경직된 정책에만 집착된 정치의 탓이기도 할 것이다. 의료대란을 풀어내는 방법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둘째, 유세(遊說)로 맹상군의 위상을 높혔다. 제나라 민왕이 맹상군을 파면하였을 때 위나라 혜왕이 맹상군을 제상으로 삼으로 한다는 소문이 돌게 하여 제나라 민왕이 위기의식을 느끼게 하였다. 그것으로 맹상군의 지위를 더욱 공고하게 하였다. 위기에서 적절한 유세와 책략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풍환의 유세는 이쪽저쪽을 다니며 이간질하고 거짓말하라는 것이 아니다. 설득의 힘이 얼마나 소중한가는 보여주는 사례가 된다. 풍환은 제왕을 설득하기 위해 진왕을 이용했을 따름이다. 정치의 힘은 설득의 힘이다. 국민을 설득하고 반대당을 설득하고 저항하는 집단을 설득하는 힘이다. 작금의 의료 대란도 그런 점에서 접근 방법을 재고하여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굳이 정치에서만 아니라 일상의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며 사업에서도 통하는 말이다. 적절한 유세와 설득은 지위를 더욱 공고하게 하게 되며 사람들의 마음을 모을 수 있다. 유세와 설득은 지위를 더욱 공고하게 하는 힘이다.
셋째, 절대 권력자가 배신할 수 없는 확고한 믿음의 증표를 만드는 일이었다. 풍환이 맹상군에게 설 땅에 선대(先代)의 종묘를 세우도록 한 것은 맹상군이 제나라 왕실을 길이 받든다는 충성의 의미를 담고 있다. 효(孝)와 왕통의 계승을 생명처럼 여기던 그 당시 제나라 왕은 왕실의 선대 종묘가 있는 설 땅을 함부로 할 수 없음은 두말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그로 인해 맹상군은 제 왕의 큰 신임을 받게 되었다.
풍환이 맹상군의 지위를 가장 강하게 만든 것은 선대(先代)의 종묘를 세우도록 한 것이다. 이는 상대방이 가장 신임하도록 하는 측면을 찾아 그것을 공략하라는 것과도 같다. 상대에게 믿음을 강하게 심을 수 있는 방안을 찾으라는 것이다. 상대가 나의 진정을 강하게 믿게 할 때 그는 나를 지지하게 되어 있다. 믿음을 심는 일은 매우 중요한 책략이다.
이상으로 狡免三窟(교토삼굴)의 유래와 그에 담긴 의미 그리고 그것이 오늘의 상황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정치에서 狡免三窟(교토삼굴)의 지혜를 살리는 일은 원칙을 지키되 정치적 유연성을 발휘하는 일이다. 링컨은 말했다. “적을 없애는 최선의 방책은 적을 친구로 만드는 것이다.” 이는 인간관계와 정치적 관계에서 유연성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해 준다. 지금의 정부와 여당이 그들의 정체성과 원칙을 지키되 유연성을 발휘하여 지금의 여러 난관을 잘 풀어 가길 바란다.
▶️ 狡(교활할 교)는 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개사슴록변(犭=犬; 개)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交(교)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狡(교)는 ①교활(狡猾)하다, 간교(奸巧)하다 ②시샘하다, 의심하다 ③예쁘다, 음란하다 ④사납다, 개가 짖다 ⑤미치다(말과 행동이 보통 사람과 다르게 되다) ⑥해치다 ⑦강건(強健)하다, 용맹스럽다 ⑧재빠르다, 급하다 ⑨어그러지다, 어긋나다 ⑩개의 이름 ⑪짐승의 이름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교활할 활(猾)이다. 용례로는 약은 꾀를 쓰는 것이 능함을 교활(狡猾), 간사하고 꾀가 많음을 교쾌(狡獪), 간사한 재주와 지혜를 교지(狡智), 날쌘 토끼를 교토(狡兔), 성품이 비뚤어지고 교활함을 경교(傾狡), 약삭빠르고 사나움을 교광(狡獷), 교활한 마음을 교정(狡情), 교활하고 음험함을 교험(狡險), 교활하게 생긴 아이를 교동(狡童), 교활하고 간악함을 교악(狡惡), 교활한 관리를 교리(狡吏), 간사한 꾀로 남을 속임을 교사(狡詐), 성품이 비뚤어지고 교활함을 경교(傾狡), 미친 듯이 날뜀 또는 그런 사람을 광교(狂狡), 난폭하고 교활함 또는 그러한 사람을 표교(剽狡),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는 교토사주구팽(狡兔死走狗烹), 교활한 토끼는 굴을 세 개 파 놓는다는 교토삼굴(狡兔三窟) 등에 쓰인다.
▶️ 兔(토끼 토)는 상형문자로 兎(토)의 본자(本字)이다. 본래 긴 귀와 짧은 꼬리를 가진 토끼의 모양을 본떠 그것이 지금의 자형(字形)으로 변했다. 그래서 兔(토)는 ①토끼 ②달(달 속에 토끼가 있다는 뜻에서 달의 별칭이 됨)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토끼털을 토모(兔毛), 달의 딴 이름을 토월(兔月), 토끼 가죽을 토피(兔皮), 날쌘 토끼를 교토(狡兔), 집토끼를 가토(家兔), 야생하는 토끼를 야토(野兔), 달 속에 있다는 금두꺼비와 옥토끼 곧 달의 별칭을 섬토(蟾兔), 부엉이를 목토(木兔), 산토끼를 산토(山兔), 달아나는 토끼로 몹시 빨리 달아남을 일컫는 말을 탈토(脫兔), 털빛이 흰 토끼를 백토(白兔), 병이 든 토끼나 앓는 토끼를 병토(病兔), 다 자란 토끼를 성토(成兔), 토끼를 기름 또 그 토끼를 양토(養兔), 옥토끼로 달을 달리 이르는 말을 옥토(玉兔), 달의 미칭으로 달 속의 흰토끼를 은토(銀兔), 씨를 받으려고 기르는 토끼를 종토(種兔), 사냥하러 가서 토끼를 잡으면 사냥하던 개는 쓸모가 없게 되어 삶아 먹는다는 뜻으로 필요할 때 요긴하게 써 먹고 쓸모가 없어지면 가혹하게 버린다는 뜻 또는 일이 있을 때는 실컷 부려먹다가 일이 끝나면 돌보지 않고 헌신짝처럼 버리는 세정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토사구팽(兔死狗烹), 토끼의 죽음을 여우가 슬퍼한다는 뜻으로 같은 무리의 불행을 슬퍼한다는 말을 토사호비(兔死狐悲), 토끼는 숨을 수 있는 굴을 세 개는 마련해 놓는다는 뜻으로 자신의 안전을 위하여 미리 몇 가지 술책을 마련함을 비유하는 말을 토영삼굴(兔營三窟), 토끼의 뿔과 거북의 털이라는 뜻으로 불교에서 이른바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일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토각귀모(兔角龜毛), 토끼 그물에 꿩이 걸린다는 뜻으로 소인은 계교로 좌에서 벗어나고 군자가 도리어 화를 입음을 이르는 말을 토라치리(兔羅雉罹), 토끼가 달리고 까마귀가 난다는 뜻으로 세월의 빠름을 이르는 말을 토주오비(兔走烏飛), 그루터기를 지켜 토끼를 기다린다는 뜻으로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어 구습과 전례만 고집함을 일컫는 말을 수주대토(守株待兔), 개와 토끼의 다툼이라는 뜻으로 양자의 싸움에서 제3자가 이익을 봄을 이르는 말을 견토지쟁(犬兔之爭), 여우의 죽음에 토끼가 운다는 뜻으로 동류의 불행을 슬퍼함의 비유를 일컫는 말을 호사토읍(狐死兔泣), 우리를 빠져 도망하는 토끼의 기세라는 뜻으로 매우 신속하고 민첩함을 이르는 말을 탈토지세(脫兔之勢), 교활한 토끼는 굴을 세 개 파 놓는다는 뜻으로 사람이 교묘하게 잘 숨어 재난을 피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교토삼굴(狡兔三窟), 금까마귀와 옥토끼란 뜻으로 금오는 태양을 옥토는 달을 가리키는 말을 금오옥토(金烏玉兔), 오는 해이고 토는 달을 뜻하는 데에서 세월이 빨리 흘러감을 이르는 말을 오비토주(烏飛兔走), 토끼를 발견한 후에 사냥개를 놓아서 잡게 하여도 늦지 않다는 뜻으로 사태의 진전을 관망한 후에 응하여도 좋다는 말을 견토방구(見兔放狗), 거북의 털과 토끼의 뿔이라는 뜻으로 있을 수 없거나 아주 없음을 이르는 말을 귀모토각(龜毛兔角), 솔개의 눈에 토끼의 귀라는 뜻으로 잘 보이는 눈과 잘 들리는 귀를 일컫는 말을 연목토이(鳶目兔耳), 노루를 쫓는 데 생각지도 않은 토끼가 걸렸다는 뜻으로 뜻밖의 이익을 얻음을 이르는 말을 주장낙토(走獐落兔) 등에 쓰인다.
▶️ 三(석 삼)은 ❶지사문자로 弎(삼)은 고자(古字)이다. 세 손가락을 옆으로 펴거나 나무 젓가락 셋을 옆으로 뉘어 놓은 모양을 나타내어 셋을 뜻한다. 옛 모양은 같은 길이의 선을 셋 썼지만 나중에 모양을 갖추어서 각각의 길이나 뻗은 모양으로 바꾸었다. ❷상형문자로 三자는 '셋'이나 '세 번', '거듭'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三자는 나무막대기 3개를 늘어놓은 모습을 그린 것이다. 고대에는 대나무나 나무막대기를 늘어놓은 방식으로 숫자를 표기했다. 이렇게 수를 세는 것을 '산가지(算木)'라 한다. 三자는 막대기 3개를 늘어놓은 모습을 그린 것이기 때문에 숫자 3을 뜻하게 되었다. 누군가의 호의를 덥석 받는 것은 중국식 예법에 맞지 않는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최소한 3번은 거절한 후에 상대의 호의를 받아들이는 문화가 있다. 三자가 '자주'나 '거듭'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것도 이러한 문화적 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三(삼)은 셋의 뜻으로 ①석, 셋 ②자주 ③거듭 ④세 번 ⑤재삼, 여러 번, 몇 번이고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석 삼(叁)이다. 용례로는 세 해의 가을 즉 삼년의 세월을 일컫는 삼추(三秋), 세 개의 바퀴를 삼륜(三輪), 세 번 옮김을 삼천(三遷), 아버지와 아들과 손자의 세 대를 삼대(三代), 한 해 가운데 셋째 되는 달을 삼월(三月), 스물한 살을 달리 일컫는 말을 삼칠(三七), 세 째 아들을 삼남(三男), 삼사인이나 오륙인이 떼를 지은 모양 또는 여기저기 몇몇씩 흩어져 있는 모양을 일컫는 말을 삼삼오오(三三五五), 삼순 곧 한 달에 아홉 번 밥을 먹는다는 뜻으로 집안이 가난하여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린다는 말을 삼순구식(三旬九食), 오직 한가지 일에만 마음을 집중시키는 경지를 일컫는 말을 삼매경(三昧境), 유교 도덕의 바탕이 되는 세 가지 강령과 다섯 가지의 인륜을 일컫는 말을 삼강오륜(三綱五倫), 날마다 세 번씩 내 몸을 살핀다는 뜻으로 하루에 세 번씩 자신의 행동을 반성함을 일컫는 말을 삼성오신(三省吾身), 서른 살이 되어 자립한다는 뜻으로 학문이나 견식이 일가를 이루어 도덕 상으로 흔들리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을 삼십이립(三十而立), 사흘 간의 천하라는 뜻으로 권세의 허무를 일컫는 말을 삼일천하(三日天下), 세 사람이면 없던 호랑이도 만든다는 뜻으로 거짓말이라도 여러 사람이 말하면 남이 참말로 믿기 쉽다는 말을 삼인성호(三人成虎), 형편이 불리할 때 달아나는 일을 속되게 이르는 말을 삼십육계(三十六計), 하루가 삼 년 같은 생각이라는 뜻으로 몹시 사모하여 기다리는 마음을 이르는 말을 삼추지사(三秋之思), 이러하든 저러하든 모두 옳다고 함을 이르는 말을 삼가재상(三可宰相), 삼 년 간이나 한 번도 날지 않는다는 뜻으로 뒷날에 웅비할 기회를 기다림을 이르는 말을 삼년불비(三年不蜚), 세 칸짜리 초가라는 뜻으로 아주 보잘것 없는 초가를 이르는 말을 삼간초가(三間草家), 봉건시대에 여자가 따라야 했던 세 가지 도리로 어려서는 어버이를 시집가서는 남편을 남편이 죽은 후에는 아들을 좇아야 한다는 것을 이르는 말을 삼종의탁(三從依托), 키가 석 자밖에 되지 않는 어린아이라는 뜻으로 철모르는 어린아이를 이르는 말을 삼척동자(三尺童子), 세 사람이 마치 솥의 발처럼 마주 늘어선 형상이나 상태를 이르는 말을 삼자정립(三者鼎立), 세 칸에 한 말들이 밖에 안 되는 집이라는 뜻으로 몇 칸 안 되는 오막살이집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삼간두옥(三間斗屋), 가난한 사람은 농사 짓느라고 여가가 없어 다만 삼동에 학문을 닦는다는 뜻으로 자기를 겸손히 이르는 말을 삼동문사(三冬文史), 삼생을 두고 끊어지지 않을 아름다운 언약 곧 약혼을 이르는 말을 삼생가약(三生佳約), 세 마리의 말을 타고 오는 수령이라는 뜻으로 재물에 욕심이 없는 깨끗한 관리 즉 청백리를 이르는 말을 삼마태수(三馬太守), 세 치의 혀라는 뜻으로 뛰어난 말재주를 이르는 말을 삼촌지설(三寸之舌), 얼굴이 셋 팔이 여섯이라는 뜻으로 혼자서 여러 사람 몫의 일을 함을 이르는 말을 삼면육비(三面六臂), 사귀어 이로운 세 부류의 벗으로서 정직한 사람과 성실한 사람과 견문이 넓은 사람을 이르는 말을 삼익지우(三益之友), 세 가지 아래의 예라는 뜻으로 지극한 효성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삼지지례(三枝之禮), 머리가 셋이요 팔이 여섯이라 함이니 괴상할 정도로 힘이 엄청나게 센 사람을 이르는 말을 삼두육비(三頭六臂), 세 번 신중히 생각하고 한 번 조심히 말하는 것을 뜻하는 말을 삼사일언(三思一言) 등에 쓰인다.
▶️ 窟(굴 굴)은 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구멍 혈(穴; 구멍)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에 후벼파다(掘)의 뜻을 나타내는 屈(굴)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窟(굴)은 ①굴(窟), 동굴(洞窟) ②움집(움을 파고 지은 집), 토굴(土窟: 땅굴) ③소굴(巢窟) ④혈거(穴居)하다, 둥지를 틀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뫼 구덩이 광(壙), 구멍 공(孔), 구멍 혈(穴), 구멍 규(竅), 구멍 두(竇)이다. 용례로는 빛살이 들어오지 않는 어둔 방을 굴방(窟房), 굴처럼 생긴 모양을 굴형(窟形), 바위나 땅에 깊게 팬 커다란 굴을 굴혈(窟穴), 깊고 넓은 굴을 동굴(洞窟), 좋지 못한 짓을 하는 사람들이 활동의 근거지로 삼고 있는 곳을 소굴(巢窟), 바위에 뚫린 굴을 석굴(石窟), 신선이 사는 곳이라는 뜻으로 속세를 떠난 거처를 선굴(仙窟), 이익이 생길 만한 일거리나 기회를 이굴(利窟), 재물이 많이 모여 드는 곳을 화굴(貨窟), 도가에서 배꼽에 있다고 하는 구멍을 금굴(金窟), 산 속에 있는 굴을 산굴(山窟), 눈이 쌓인 구덩이를 설굴(雪窟), 적의 무리가 뿌리 박고 있는 소굴을 적굴(敵窟), 흙을 파낸 큰 구덩이를 토굴(土窟), 뱀의 굴을 사굴(蛇窟), 숨어 있는 곳 잠복하여 있는 곳을 잠굴(潛窟), 도둑들의 소굴을 적굴(賊窟), 추악한 소행을 하는 무리들의 소굴을 추굴(醜窟), 쓰지 못하게 된 굴을 폐굴(廢窟), 범의 굴이라는 뜻으로 가장 위험한 곳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호굴(虎窟), 현실을 도피하여 깊은 산 속에 숨어서 사는 선비를 굴혈지인(窟穴之人), 창기들이 모여서 사는 소굴을 홍분굴혈(紅粉窟穴), 토끼는 숨을 수 있는 굴을 세 개는 마련해 놓는다는 뜻으로 자신의 안전을 위하여 미리 몇 가지 술책을 마련함을 비유하는 말을 토영삼굴(兔營三窟), 교활한 토끼는 굴을 세 개 파 놓는다는 뜻으로 사람이 교묘하게 잘 숨어 재난을 피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교토삼굴(狡兔三窟)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