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노천명씨는 사슴이라는 시에서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라고 노래했다. 타협을 강요하는 세상에서 자신의 양심을 지켜내야 하는 자아상을 그린 시로 알려져 있다. 세류에 흔들리지 않고 세속에 휘둘리지 않으며 세상 욕심에 굴복하지 않을 그런 목이 길고 고고한 사슴 같은 삶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출애굽기 33장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질타하는 “목이 곧은 백성들”이란 사슴의 삶이 아니라 독사 같은 삶을 말하는 것이다. 독사는 사람을 공격하고 물려고 할 때 머리를 치켜든다.
(출 33: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과 함께 여기를 떠나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네 자손에게 주기로 한 그 땅으로 올라가라 (출 33:2) 내가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고 (출 33:3) 너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길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
시내산 아래서 우상숭배에 빠졌던 이스라엘을 보고 얼마나 실망하셨는지 지난 215년을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 준비하신 세월을 無로 돌리고 모세를 통하여 새로운 민족을 만들겠다고 말씀하셨지만, 모세의 간절한 중보로 간신히 마음을 돌리셨다. 하지만 이 백성들과 더 이상 함께 하실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분의 본심이야 그랬겠는가마는 이 백성들의 못된 버릇을 단단히 채근하지 않는다면 언제 또다시 반역이 일어날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그분의 사자를 보내서 그 앞길을 열어 줄 테니까 너희만 가라고 하시고 당신께서는 올라가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백성들은 모두 숙연해졌다.
(출 33:4) 백성이 이 준엄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자기의 몸을 단장하지 아니하니
잘난체하고 교만한 사람의 특징이 모가지가 뻣뻣한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교만함으로 가득해서 자신을 치장하고 한껏 꾸미서 자신의 우월함을 뽐낸다. 그런데 목이 곧은 백성들이라고 하셨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같이 안 가겠다고 하시니 곧바로 자신들의 몸을 단장하는 것을 그쳤다. 심령의 겸비와 겸손의 표시로 자신을 꾸미지 않은 것이다. 장신구와 단장은 남들 사이에서 돋보이고 싶은 욕망의 표현이다. 그런데 그것을 멈춘 것이다. 백성들의 이런 모습에 주님은 다시 말씀하셨다.
(출 33: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라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한순간이라도 너희 가운데에 이르면 너희를 진멸하리니 너희는 장신구를 떼어 내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할 것인지 정하겠노라 하셨음이라
어디 여기서 말하는 장신구가 옷이나 몸에 붙이는 장신구만을 의미하겠는가? 영적 이스라엘인 오늘날의 교회가 진정으로 떼어 내어야 할 수많은 장신구는 없는가?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수 없는 마음의 교만과 죄들이 우리에게 없는가? 하늘 성산에 올라가려면 우리의 곧은 목을 풀고 겸손히 우리의 생활을 정돈하고 새로운 다짐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시편 기자는 이렇게 적었다.
(시 15:1)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시 15:2)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시 15:3)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하지 않으실지 염려되는 것은 과연 기우에 불과한 것일까? 오늘 새벽은 이런 고민을 하게 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교만을 고쳐 주소서 우리의 곧은 목을 꺾어 주시고 겸손하고 온순한 주님의 양 되게 해 주십시오. 우리 마음에 있는 죄들을 정결케 하시어 주님께 언제나 굴복하고 성령의 음성에 즐겨 순종하는 겸손한 사람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