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부자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될 수 있어도 큰 부자는 하늘이 낸 다고 하였나. 샘 월튼이 바로 하늘이 낸 큰 부자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다. -현재 샘 월튼가(家)는 미국 제 1의 부자이며 그의 월마트 군단은 GE(제네랄 일렉트릭), GM(제네랄 모터스), Ford, Microsoft사 등과 함께 미국 경제의 톱을 이룬다. - 그렇다고 하여 샘 월튼이 다른 성공한 사람에 비해 노력을 적게 하였거나 반대로 큰 부자가 되기 위해 특출한 수법을 쓴 것은 아니다. Fed-Mart와 Price Club의 창시자인 솔 프라이스(Sol Price)씨는 샘 월튼은 남들이 다 하는 (할 줄 아는) 일을 유심히 지켜보는 데 남다른 관심을 기울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지금까지 한 것은) 그 것을 최고의 수준으로 올리고 더 향상시키는 일이었다.
그렇다. 샘 월튼은 남들이 평범하게 여기는 것에서 옥을 찾아내었다. 그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신도 아니오 어둠에서 비둘기를 꺼내는 마술사도 아니었다. 종업원의 어깨가 보일 정도로 몸을 낮추니 돈 대신 사람이 보이고 그렇게 사람을 모으니 돈이 저절로 들어왔다. 욕심을 버리고 가격을 내리고 꾸준함을 보여주니 지방의 두터운 텃세 벽이 하나씩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 짧은 기간에 세계 정상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혼자 힘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1918년 3월 29일 가난한 오클라호마 주의 Kingfisher시에서 샘 월튼이 태어났다. 그의 유년기는 세계 최악의 경제공황의 여파 속에서 보내야만 했고 그의 청년 시절에는 2차 세계 대란을 직접 겪어야만 했다. 그 와중에서도 샘 월튼은 어렸을 때부터 그의 꿈을 키웠다. 될 성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본 다고 하였나. 샘 월튼은 아주 어린 나이에 이글 스카웃 명예를 얻고 고등학교 시절 때에는 풋볼팀 학교 대표가 되어 미조리주 챔피언이 되었다. 그리고 어려웠던 가족을 돕기 위해 젖소에서 막 나온 우유를 팔고 신문을 돌리며 바쁘게 살았다. 미조리대학 (University of Missouri)을 졸업하고 2차 세계 대전에서 공군으로 활약했다.
1945년 전쟁이 끝나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사업에 눈이 뜨이기 시작했다. 그가 남보다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갈 지를 어느 정도 미리 파악할 수 있는 식견이었다. 그래서인지 그가 처음으로 벌린 사업이 적중했다. 같은 해 그는 알카사스주 Newpork시에 있는 벤 프랭클린 상점의 프렌차이즈를 샀다. 그 것이 대 성공이 되었다. 그는 40대 초반에 이미 알칸사스, 미조리, 그리고 오클라호마 3개 주에 걸쳐 15개의 체인 대리점을 둔 지역 중소기업의 사장이 되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그의 상점들은 다양한 물건을 취급하였으나 비싼 가격을 유지하였다. 그가 만일 거기에 만족하였더라면 그의 회사는 지금까지 그 지역 안에서 그냥 평범한 직매장이 되었을 것이다. 그 때 Berryville시(Ark)에 살던 한 이발사(Herb Gibson)가 할인가격으로 물건을 싸게 파는 상점을 여러 곳에 열기 시작했다. 여기서 월튼은 앞으로의 흐름을 파악했다. 헨리 포드가 자동차를 처음 만든 사람이 아니었으나 자동차로 세계를 평정하였듯이 샘 월튼 역시 최초의 디스카운트 상점을 열지 않고도 디스카운트 스토어로 새 역사를 쓰게 되었다. 1962년 7월 2일 그의 첫 월마트가 Rogers시(Ark)에서 오픈하게 되었다.
같은 해에 비슷한 개념의 상점들이 쏟아져 나왔다. S.S.Kresge씨가 첫 K-Mart를 개장했으며 F.W. Woolworth씨가 Woolco 체인점을 그리고 Dayton Hudson씨가 Target을 각각 시작하였다. 이번에도 샘 월튼의 예상이 맞았던 것이다. 디스카운트 열풍은 전국을 강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소 늦은 감도 있었다. K-Mart, Woolco, Target, Sears등 경쟁 업체가 너무 많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샘 월튼의 최종 목표는 다른 곳에 있었다: "We Sell For Less, Always. (매일 매일 낮은 가격으로 팝니다)”라는 구호를 내건 것은 조금 더 후의 일이지만 샘 월튼은 이미 그 것을 실천하고 있었다. 1966년 그는 20개의 월마트 체인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앞으로 비대해질 회사의 운영시스템을 컴퓨터화해 줄 “컴퓨터 가이”를 찾기 위해 IBM 스쿨을 직접 다녔다. 그 결과 모든 품목을 컴퓨터화 하지 않고는 거대해져 가는 회사규모를 감당하지 못하리라는 판단을 내렸다. 그의 지휘아래 월마트는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는데 그 규모는 미 국방부(Pentagon) 다음으로 큰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처리할 능력을 갖추었다. 이로써 20세기 중반 정보시대 최고의 CEO는 샘 월튼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월마트는 계속 급성장을 하였고 월마트에 투자했던 투자가와 중소기업들도 함께 성장하였다. 1985년에 샘 월튼은 포브스에 의해 세계 제일의 부자로 선정되었다. 그가 자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39%의 주식만 계산한 것이다.
월마트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성장하였다. 월마트의 종업원들은 카트를 내주는 할아버지, 할머니부터 장애인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이러한 월마트가 K-Mart, Sears, Target등을 앞서기 시작하자 한동안 안티-월마트 운동이 일어났다. 소도시의 소매상점들을 말살하는 폭군이라는 악명을 쓰게 되었다. 하지만 샘 월튼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소매상인으로 잔뼈가 굵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낮은 가격과 친절로 소비자에게 봉사할 자세가 안 돼있다면 그 상점은 이미 경쟁력을 잃은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제는 지역 시민들에게 바가지 씌우면서 큰 이윤을 남기는 시대는 지났다는 것이다.
샘 월튼의 “예상”은 또 한 번 적중한 것이다. 월마트가 아니었어도 “얼렁뚱땅” 소매상점은 더 이상 설자리가 없었다. 건축 자재와 실내장식을 테마로 소매하는 Home Depot과 Lowes 등 거대 기업이 생겨났고 책을 전문으로 파는 Barnes & Nobles, 비디오를 전문으로 빌려주는 Blockbusters가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로 뻗어나가며 지역 경제에 낮은 가격으로 도전하고 있다. 거기에다 인터넷 온라인 세일까지 붐을 이루게 되었다.
샘 월튼과 그의 월마트는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낮은 가격과 다양한 품목을 제시하면서 소비자들을 상대로 횡포를 부리는 지역 소매상들의 나쁜 상도를 고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그 개혁이 대대적이었기에 그 만한 아픔도 없지 않았으랴. 어느 누가 자신의 밥그릇을 뺏는데 반항 안 하겠는가. 결론적으로 샘 월튼은 전 세계 경제의 흐름을 미리 보았고 그 선두주자가 되어 비판과 어려움을 먼저 감수했을 뿐이다. 오늘날 월마트는 지역 경제의 버팀목이 되고 지역 주민에게 많은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샘 월튼의 성공 비결은 한마디로 무엇일까? 그의 규칙 넘버 6처럼 실패를 하더라도 허허 웃을 줄 아는 여유가 아닐까.
"규칙 넘버 6:
성공을 즐기되 실패했어도 유머를 잊지 마시오. 너무 굳은 표정을 짓지 마시오. 스스로 얼굴을 피면 주위의 사람들도 그리 할 것이오.
즐길 줄 알고 항상 열정을 보이시오. 만일 되는 게 하나도 없다면 광대 복장을 하고 엉터리라도 노래 한 곡 뽑으시구료.”
-전 세계 최대의 슈퍼 마트, Walmart의 설립자, Sam Walton이 세운 10가지 사훈 중 하나.- (장태선)■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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