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閔妃暗殺>⑫-2
하나부사 공사의 귀국과 함께 일본군의 대부분이 사라진 서울은, 청국군의 지배하에 있는 듯하였다. 임오군란을 계기로 대군을 보내고, 대원군을 납치한 폭거를 감행한 청국의 목적은, 일본세력의 조선침투를 견제하고, 자국의 종주권강화를 도모가기 위함이었는데, 그 목적은 충분히 달성하였다. 군란 종결 직후인 9월, 청국은 조선과의 사이에 「商民水陸貿易章程」을 맺었다. 그 전문에는, 조선은 청국의 “속방(屬邦)”이라고 명기하고, 그 전제하에 청국이 최우선의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8개조가 열거되어 있다.
그 위에 청국은, 이제까지 조선이 외교문제에서 누차 실패한 것을 이유로, 외교고문을 보내기로 했다. 이홍장의 안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12월 중순, 임오군란 진압에 임했던 마건충의 형으로, 유럽에 유학하여 국제법이나 국제정세에 밝은 마건상(馬建常)과, 독일인으로 북도이치 세관 동맹이라든가 청국 각지의 해관(海關)에 근무하고, 천진주재 독일 영사 경력을 가진 바울⦁게오르그⦁폰⦁메렌도르프 2사람이 서울에 도착했다. 사례사절로 청국에 갔던 조영하와 어윤중이, 그들과 같이 귀국했다.
마건상과 메렌드로프는 12월27일 국왕을 배알하고, 정식으로 조선정부의 고문이 되었다. 메렌도르프는 정규적인 수속을 밟고 조선에 입국한 제1호 유럽인이었다.
1883년(명치16년)초 귀국한 김옥균은, 반년이 되지 않는 일본 체재 중에 일어난 조선의 변화를 보고, 그의 염원인 개화독립의 실현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서울에 주재하는 일본군은 150명이었으나, 그에 대해 원세개(袁世凱)가 거느리는 청국군은 3.000명이었다. 마건상과 메렌도르프가 정부고문이 된 것은 알고 있었으나, 이제는 그들의 내정간섭은 조선의 외교, 통상을 한손에 쥐기에 이르렀다. 그에 이어 많은 외국인이 청국의 추천으로 입국해 있었다.
민씨 일족의 세도정치는, 일찍이 안동김씨 시대를 뺨치는 기세다. 중앙만을 돌아봐도 민씨 성의 고관 40여명이 즐비한데, 다시 지방으로의 진출도 눈이 부시다. 이 강력한 민씨 일족의 정치적 입장은, 오로지 청국에 의존하는 수구파다. 임오군란이 보여준 그대로, 청국의 지원 없이는 존립할 수 없는 정치체제라는 것을, 민씨 일파는 잘 알고 있었다. 청국과의 관계를 강화하여, 봉건적 특권의 유지를 꾀하자는 그들의 개화에 대한 이해는, 청국에 대한 “교제상의 의리” 정도였다.
조선의 근대화를 평화적으로 수행하고자 하는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은, 먼저 왕에게 그들의 의견을 말하고 그에 대한 찬성의 뜻을 얻으려고 했다. 그들은 왕의 내전에 자유로이 출입하고, 알현이 허용되는 “별입시(別入侍)”라는 대우를 받고 있었다. 왕은 일본을 비롯하여 다른 나라의 사정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그들의 이야기에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청년들에 대하여 왕은 언제나 호의적이었었는데, 특히 그 중에서 연장인 김옥균을 신뢰하고 있었다.
급진개화파 청년들은, 미국에서 돌아와 총리협판(總理協辦)이라는 요직에 취임한 민씨 일족의 호프(Hope) 민영익을 개화파에 끌어들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최후까지 그의 정치적 입장을 바꾸지 않고, 원세개와의 유착이 깊어졌고, 개화파를 적대하는 태도를 관철해 간다.
민비 일파는 급진개화파 청년들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고, 그들을 냉대했다. 청년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근대화가 진척되고, 옛날 방식의 인습이 일변되면, 세도정치를 지탱하는 봉건적인 기반은 허물어지게 된다. 현상유지에 급급 하는 민비 일파에 있어서, 근본적인 변화는 전부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사절단의 정사(正使)로 방일했던 박영효는 1883년3월1일, 한성부 판윤(判尹)에 취임하고, 치도국(治道局)과 순경국(巡警局)을 설치하여, 근대적인 도시건설과 치안제도 확립을 계획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가 「명치17년의 갑신정변」에 기록하고 있는 「도로 의 사안에 관하여, 민비의 개인적인 부탁을 거절한 사사로운 일로 역린(逆鱗)에 저촉된다」는 사태에 이르렀다.
민비의 역린에 저촉된 자의 운명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역린(逆鱗)의 원인이 정말로 민비의 개인적인 부탁을 거절」한 것인가, 또는 민비가 거절할 수밖에 없는 “부탁”을 가지고 나와서 박영효를 빠져들게 했는가 라는 의문은 남지만, 어떻든 그의 좌천은 시간문제였을 것이다.
같은 해 4월, 박영효는 광주유수(廣州留守) 겸 어영사(禦營使)로 좌천되었다. 여기에서도 그는 일본유학에서 돌아온 사관을 교관으로 하여, 1.000여명의 신군 건설에 착수했으나, 오래지않아 파면되고, 그 군대는 수구파의 전영(前營), 후영(後營)에 편입되었다. 당시의 군제는 이 2영 이외에 우영(右營), 좌영(左營)의 4영이 있고, 병권은 수구파가 쥐고 있었다. 우영의 영사(營使)는 민영익 이었다.
박영효는 한성부 판윤의 직에 있을 때, 유길준(兪吉濬)과 같이 조선 최초의 근대적 신문 『漢城旬報(한성순보)』의 발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가 좌천된 후, 이 계획은 정부 내부에 있던 김윤식 등이 계승하여, 1883년10월에 창간되었다. 세계 각국의 근황보고에 힘을 쏟고 있었으나, 용어는 전부 한문이다.
신문은 처음에, 福澤 諭吉(후쿠자와 유키치)의 문하생 井上 角五郞(이노우에 카쿠고로)에게 편집 지도를 받았으나, 그 후에는 자주적인 편집진용으로 운영되었다. 발행소인 박문국(博文局)은 개화파의 거점으로, 정계, 언론계에서 활동가를 배출했다.
전년 5월에 조선과 수호통상조규를 체결한 미국에서 초대 공사 오거스틴 ⦁푸트가 서울에 부임하여 온 것은 1883년5월이었다. 그가 전한 미국정부의 의향에 따라서, 조선의 사절단이 유사 이래 처음으로 서양세계로 파견 되었다. 정사 민영익, 부사 홍영식, 종사관 서광범, 수행원에 유길준 등, 전해의 방일사절단의 많은 사람이 얼굴을 가춘 일단은 먼저 미국을 방문하고, 나아가 유럽제국을 돌았다.
홍영식은 유럽으로 가지 않고, 미국에서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의 왕에게 올린 보고서에, 다음과 같은 일절이 있다.
「기구의 제조, 및 배, 차, 우편, 전보 등은, 어떤 나라에 있어서도 최급무가 되어야 합니다. 그중에서도 우리가 중요시해야 될 것은 교육이며, 만일 미국의 교육방법에 따라 인재를 양성하고, 모든 것에 대응한다면 어려움은 없어질 것이므로, 반드시 그 법을 보고 익혀야 합니다」
조선의 근대교육은, 주로 미국인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홍영식은 동포자제의 교육근대화에 힘을 기울이지 못했다. 그는 이듬해 1884년 연말 김옥균의 갑신정변에 참여하여 살해 되었다.
김옥균은 개화파의 다음 대를 짊어질 간부양성에 노력하고, 왕을 설득하여 50여명의 청년들을 경응의숙(慶應義塾)과 육군 호산학교(戶山學校)에 유학을 보냈다. 그는 유학생들에게 “일본이 아시아의 영국이 된다면, 우리 조선을 아시아의 프랑스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고, 그들의 활약에 기대를 걸었다고 한다.
당시, 조선정부는 극도의 재정난을 타개하고자 메렌도르프의 안에 따라 주전소(鑄錢所)를 창설하고, 그 소장에 민태호를 임명하여 당오전(當五錢)의 주조에 임하게 했다. 김옥균은 통화의 남발은 국민생활을 압박한다고 반대했으며, 외채발행의 이점을 역설했다.
민비 일파에게 “요주의인물”로 보인 김옥균에게 중앙의 요직을 줄 리가 없다. 동남제도 개척사 겸 포경사(捕鯨使)가 된 김옥균은. 그 포경권을 담보로 일본정부로부터 300만 엔의 차관을 얻으려고 계획하였다. 평화적 방법으로 개화정책을 추진하는데도, 먼저 자금이 필요하다. 그는 전년, 사죄사절단의 고문으로 일본 체재 중에, “국왕의 위임장이 있으면”이라는 조건으로, 외무대보(外務大輔)를 통해서 일본정부의 차관내락을 받았다. 물론 井上 馨(이노우에 가오루) 외무경도 동의한 일이다.
절망적인 경제상태를 우려하고 있던 왕은, 김옥균에게 위임장을 주었다. 이것을 안 민비는, 때를 미루지 않고 김옥균의 차관을 저지할 대책을 강구했다. 만일 그가 300만 엔이라는 막대한 차관에 성공한다면, 반드시 개화책을 추진할 것이다. 그것은 민씨 일족의 세도정치에 있어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민비는 메렌도르프를 불러서 대책을 짰다, 메렌도르프는 청국 이홍장의 추천으로 조선정부의 고문이 되었으나, 지금은 청국의 이해를 도외시하고, 오직 민비를 중심으로 하는 조선왕국을 위해 진력하고 있다.
메렌도르프는 일본공사관을 방문했다. 竹添 進一郞(타케조에 신이치로) 공사는 한문에 소양이 깊어 “문인외교관”으로 불린 사람으로, 청국의 정치가, 군인에 지기(知己)가 많고, 메렌도르프와는 천진 영사시절부터 친했다. 메렌도르프는 竹添에게, “김옥균이 계획하고 있는 차관교섭은 조선정부와 무관하고, 개인적인 사기행위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일본정부는 이런 일에 휘감기지 않도록 자중해 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다시 메렌도르프는 민태호, 민영익과 계획하여 해관세 업무를 제일은행으로 넘겼다. 해관세 수입이 차관의 담보가 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는 계책이었다.
竹添(다케조에) 공사는 평소부터 개화독립당에 호감을 가지지 않았다. 특히 김옥균이 일본에 외채를 요구하는 중대한 건에 관하여, 일본정부를 대표하는 공사를 무시하고, 본국정부와 직접 교섭한 처사에 대해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받았다. 그는 이노우에 외무경 앞으로, “김옥균은 신용할 수 없는 인물이며, 그가 지참하는 국왕의 위임장은 위조”라고 통지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김옥균이 일본으로 간 것은 1883년7월이었다. 일본정부의 태도는 냉랭하고, 특히 전년에 차관 내락을 승인한 井上외무경은, 몇 번이나 방문해도 면회조차 해주지 않는다. 어느새 300만 엔 차관 같은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차관교섭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竹添공사의 중상만이 원인은 아니다. 일본이 거듭 조사한 조선의 경제상태가 너무나 나쁘기 때문에 「상환가능성은 전무하다」는 의견이 대세를 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일 미국공사 존⦁빙감은 김옥균의 입장에 동정하고, 런던이나 뉴욕의 금융시장에 기채를 주선해 주었으나, 여기서도 조선의 경제상태가 문제가 되어, 실현을 이루지 못했다. 김옥균은 마지막으로, 제일국립은행 두취 澁澤 榮一(시부사와 메이이치)에게 차관을 간원했다. 澁澤는, 300만 엔은 무리지만, 井上외무경의 보증이 있으면, 소액쯤, 이라고 답했다. 그러나 井上를 비롯하여, 이에 응할 이도 없다.
실의에 찬 김옥균이 조선으로 돌아온 것은 이듬해인 1884년(명치17년) 4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