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룡사 연등회 흔적? 등잔 1712점 쏟아졌다
경주 황룡사지 서편지구 발굴
한꺼번에 묻힌 토제등잔 출토
신라 연등행사때 사용 가능성
일각 “고승 설법행사용 일수도”
조선 말기 실학자 석정 이정직(1841∼1910)이 전북 전주 진북사에서 열린 연등 행사를 그린 ‘진북사관등(鎭北寺觀燈)’의 일부. 불교중앙박물관 제공
“저는 가난하여 공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보잘것없는 등불 하나를 올려 부처님의 크신 덕을 기립니다.”
가난한 인도 여인 난타는 온종일 구걸해 얻은 한 푼을 등불 하나 밝히는 데 썼다. 그의 등불 주변에는 왕과 귀족들이 밝힌 호화로운 등불이 가득했지만 거센 바람이 불었을 때 오직 난타의 등불만 살아 어둠을 밝혔다. 이를 바라보던 부처는 “큰마음을 지닌 여인이 정성으로 켠 등불이기에 결코 꺼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불경 ‘현우경(賢愚經)’ 속 이야기로 연등(燃燈) 의례의 기원으로 여겨진다.
최근 경북 경주 황룡사터 서회랑 서편지구의 한 구덩이에서 출토된 토제등잔들. 각 등잔의 지름은 약 10cm다. 이 구덩이에서는 등잔 1712점이 한꺼번에 출토됐는데, 과거 황룡사에서 행해진 연등회 등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신라인들도 등잔에 불을 밝히며 어두운 마음과 세상을 밝히길 바랐을까.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11일 학술대회에서 발표할 예정인 ‘황룡사지 회랑 외곽 공간에 대한 최신 조사 성과’ 자료에 따르면 2018년부터 최근까지 경북 경주시 황룡사터 서회랑(西回廊) 서편지구를 발굴 조사하는 과정에서 지름 약 10cm 크기 작은 토제등잔 1712점이 출토됐다. 황룡사 내 유일한 연지(蓮池)가 있었던 곳으로부터 약 30m 떨어진 데에서 가로 240cm, 세로 220cm, 깊이 90cm 규모 구덩이가 발견됐는데, 이곳에서 등잔이 쏟아져 나온 것. 경주 분황사(130여 점), 안압지(150여 점) 등에서도 등잔이 출토됐지만 이처럼 많이 나온 적은 없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 등잔들은 한꺼번에 묻힌 것으로 나타났다. 최문정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는 “정확한 용도가 파악되지는 않았지만 수량을 보면 대규모 행사나 의례가 황룡사에서 열렸을 것으로 추정된다”며 “매립은 연지를 중심으로 이뤄진 의례의 마무리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했다. 등잔에 불을 밝히는 것은 물론이고 한꺼번에 묻는 행위까지 의례의 일부일 가능성이 있다는 설명이다.
혹시 황룡사에서 행해진 연등회에 쓰였던 것은 아닐까. 한국에서 연등 의례는 불국토를 꿈꿨던 신라의 왕실 사찰 황룡사에서 시작됐다는 게 통설이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경문왕이 866년 정월 황룡사에 행차해 연등 행사를 구경했다’고 기록돼 있다. 임영애 동국대 문화재학과 교수는 “수량으로 미뤄 대규모 연등회에 쓰였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고 했다.
일각에서는 고승 100명이 100일간 설법하는 ‘백고좌(百高座)’ 행사에 쓰였을 거라는 추정도 나온다. 613년에 황룡사에서 백고좌가 처음 시작됐고, 이때 원광법사가 설법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온다. 등잔이 고승들이 가부좌한 자리를 밝혔을 수 있다는 것이다.
등잔이 어떻게 쓰였건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출토된 유물을 토대로 황룡사터 서회랑 서편지구가 의례를 행하고 지원하는 기능을 담당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2020년 서편지구 건물지 1호 주변에서는 중요 물건을 보관하는 용도로 추정되는 6cm 크기 ‘금동봉황장식자물쇠’ 1점이 나왔다. 2021년 서편지구 건물지 79호 주변 또 다른 구덩이에서 등잔 100여 점이 출토된 바 있다. 553년 창건된 황룡사는 1238년 몽골의 침입으로 소실돼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이소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