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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날 주왕산을 갑니다.
지난주에 올해 오스카상 작품상을 수상한 노메드랜드를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떠오른 산이 바로 주왕산입니다. 주왕산은 후주천왕 주도와 신라 왕위계승과 관련한 김주원의 전설이 전하는 산입니다.
주왕산은 예로부터 소금강(小金剛) 또는 여금강(女金剛)으로 불리우며 조선8경의 하나로 꼽혔는데, 주왕산의 다른 이름은 선도(仙道)나 불도(佛道)를 닦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염세(厭世)한 선비들이 은둔해 살기에 적합하다 하여 대둔산(大遁山)이라고도 불렸다 합니다. 말하자면 주왕산은 옛 선인의 또 한 곳의 노메드랜드가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또한 주왕산의 다른 이름은 석병산(石屛山)인데 이는 주방계곡을 중심으로 우뚝 솟은 바위벼랑들이 마치 병풍을 두른 모양새인 연유이고, 주왕산의 또 하나의 이름인 주방산(周房山)은 신라 선덕왕의 아들인 김주원(金周元)과 관계된 이름이라고 합니다.
도착하여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산행을 시작합니다.
산행초입에 눈의 띄는 것이 하나 있는데 주왕산 꽃돌로 제작한 돌거북입니다. 꽃돌이 이곳에서 생산되는 것은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속보를 하여 주왕상의 랜드마크인 기암(旗岩)을 병풍처럼 두르고 자리잡고 있는 대전사(大典사)에 도착합니다.
주왕산 전해져 내려오는 주왕의 이름은 주도(周鍍)인데 그의 8대조는 東晉의 世臣 周顚라고 합니다. 그런데 당나라 덕종 때에 후주천왕을 자칭하여 반란을 일으킨 주도라는 인물은 정사의 기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름입니다. 이는 주왕사 대전사에 전해왔다는 한문소설 `대전도군유전(大典道君遺傳)`에 나오는 인물의 이름입니다.
1933년 5월에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朝鮮`이라는 잡지에 `대전도군유전`의 내용을 당시의 언어체계로 번역하여 간략하게 소개한 글을 옮겨봅니다.
`唐의 德宗時에 周鍍란 사람이 잇섯는대 東晉의 世臣 周顚 八世孫으로 其 父名은 衡, 其 母는 魏氏엿섯다.
四十二歲가 되도록 無子함을 슯허하야 玉井山에 祈禱하야 唐代宗皇帝 永泰十一年寅月寅日寅時에 學中에 低星이 懷中에 떠러짐을 보고 妊孕하야 十三個月만에 周鍍를 나엇다.
骨格이 偉大하며 齒牙가 旣生이여서 其 非凡함을 알수 있섯다.
十七歲時에 天文地理와 六韜三略을 掌上에 運하야 挾山超海의 氣가 鬱鬱難抑하엿다.
恒常同顗의 大事를 回憶하고 晉祚를 回復하랴고 하드니 壯士百餘名과 能耳山에 入하야 衆萬餘人을 募集하야 後周天王이라고 稱하고 長安을 侵하랴 하엿다.
天將郭子儀와 싸와 敗하야 遼東에 進走하엿다.
唐天子가 新羅王에게 討伐하여 달나고 請하야 新羅王이 馬一聲으로 하여금 邀繫케 하엿드니
周王이 破하야 從者千餘名과 石屛山에서 據하야 數年이 지나도록 破하지 못하엿다.
그러는 中 馬一聲의 仇讐 康世淸이란 者가 唐朝에 上書하되 `新羅王及馬一聲이 周鍍 等과 共謀하고 皇城을 犯하랴 한다` 고.......
唐皇帝 震怒하야 郭子儀를 命하야 周鍍를 討伐하는 同時에 新羅王을 捕擒하게 하엿드니 子儀가 上書曰 `新羅王은 東隅에 僻在하야 百年의 筐篚其誠을 盡하고 臣禮가 至極한지라 至今 所賊의 報私之言으로 萬里行師를 함은 不可한가 한다.`고 하여서 停帥를 命하고 使臣을 新羅王에게 보내서 責曰 빨리 周鍍의 머리를 비여 바칠지어다. 萬一에 그러하지 안으면 兵을 이르켜 무찌를 것이다.`
新羅王은 크게 겁이 나서 또 馬一聲으로 上將을 삼아 周鍍를 치게 하엿다.
一聲은 其弟四名과 鐵騎百餘騎를 引率하고 眞城界에 到達하여서 서로 對陣하게 되엿다.
先時에 周王의 庶子 曦가 四歲에 其母에게 書를 배우는대 忠孝二字의 意義를 무러가로대
`무엇을 忠이라고 하며 무엇을 孝라고 이르느냐.`고
其母奇氏 對答하여 가로대 `事君하야 몸을 밧치는 것이 忠이고, 事親하야 竭力함이 孝라고 한다.`
曦 忽然히 책을 덥고 꿀어안저가로대 `忠孝의 行實을 배호랴면 무슨 책을 일거야 조흐냐`고
母 가로대 `聖經賢儔을 각금 習讀하면 된다.`고
曦가 八九歲가 됨에 天地曆數를 無不通知이엿다.
일즉이 그 父 周王에게 諫하여 갈오대 `父王께서 幼時에 天尊地卑의 意義를 물은적이 잇섯고
이 天尊地卑라는 것은 君臣의 義를 말함이엿섯다.
晉나라가 滅亡한지가 百餘年이 지나 天命의 곳처지는 것과 곳처지지 않는 것은 聖賢도 엇지하는 道理가 업는대 하물며 우리들이 臣下로서 삼긴지가 발서 百有餘年인대 이것을 背反한다면 卽 逆天함과 갓다.
하날을 거스리는 것은 災殃을 바드려고 하는 것이라 고 하여 그 悔改함을 몃번이나 伏乞하엿스나듯지 아니함으로서 曦 大哭하야 일너가로대 `父子의 사히에는 骨肉의 恩이 잇다.`하며 父 周鍍를 따르게 되엿다.
諸僚들이 일너曰 `大典道君 (大典이라는 말은 器局至大孝라는 것이고 道君이라 함은 達理라는 뜻이다.)라`고 稱하엿다.
그 해 十一月甲寅日에 馬二聲軍과 周王軍이 馬坪(現今의 府東面土坪洞)에서 싸워 馬二聲에게
敗하엿다.
二聲은 意氣揚揚하야 山門外에 나오니 이때 道君은 하날을 우러러 四拜하고 蓮花箭으로 소니
二聲은 百斤이나 되는 鐵推로서 이를 막엇스나 활살은 橫貫하야 투구를 三十里外民田 가운데에다 떠러트리엿다. 그 밧틀 이름지여 馬胄田(淸河郡 川北面 玉溪洞인대 只今은 迎日郡 管內)이라고 한다.
二聲 크게 憤怒하야 스사로 出陣하거늘 道君은 出迎치 안코 右中鐵에게 此를 迎對抗케 하니
二聲은 세번이나 사웟스나 세 번 다 危險하엿다는 것으로 이름지여 三危洞(至今에 三宜洞) 이라하엿다.
二聲은 스사로 그 不利할줄을 깨달어 三危洞에다 城壁을 굿게 닷고 三聲은 六十里外 古羅洞(至今의 羅洞)에 退屯하엿다가 三日만에 紫芝峴에 進屯하고 四聲 五聲은 八角山(至今에 玉溪洞 后山)에 伏兵하엿다가 乙未三月甲子夜에 冠岩峰을 넘어 屛山上에 이르러 機會를 엿보아 屯陣하엿드니 밤 三更이 될 때 道君 潭龍의 세 번 우는 소래를 듯고 大驚하야 氐星을 바라보니 光彩가 업는지라 곳 바위를 뜻고 돌을 파서 물을 쫏고 곳 周王을 匿竄시켯다.(至今의 周王窟)
四聲兄弟 岩頂에 이르니 周王의 群臣들은 할 바를 아지 못하거늘 五聲 가로대 `今日은 卽 甲子日이라 明日에 逮擒하여도 느질 것이 업스리라`고 하니 四聲 曰 `興亡함이 엇지 甲子에 달렷스리요 明日을 期待될 것 업시 밧비 逮擒하는 것이 맛당하다.` 하야 四聲은 스사로 大釣를 가지고 周王을 낙거내고 順次로 其 君臣을 釣出한 다음 大典道君을 끌어내려고 할 지음 大典은 공교히 몸을 날리여 南으로 向하야 나려가 버렷다.
그래서 馬將등은 즐검에 넘치면서 周王을 新羅王에게 바첫드니 新羅王은 周王의 머리를 비혀가지고 唐國皇城에 보내랴고 遼東에 이르러써 뜻밧게도 風波가 이러 배가 破船이 되여 周王의 머리를 墜失하엿다 한다.
先時에 周王을 斬首하던 當時 道君이 一陣狂風을 이르켜 砂石이 簸提하야 사람이 敢히 눈을 뜨지 못하게 하여노코 周王의 死體를 가지고 屛山의 北便에 埋葬하엿고 同時에 遼東에서는 覆船을 하엿다는 것인대 이것이 곳 大典의 孝威所致이라고 말한다.
周王의 무덤은 埋葬時 封隧가 업섯든 까닭으로 세상에 아느 니가 업다.
時人이 말하기를 周王이 道君가튼 出天大孝가 업섯드라면 그만한 時間이라도 保命하엿스리요
라고한다.
後 道君은 곳 머리를 깍고 장삼을 입고 중이 되여 屛山에다 庵子를 새우다. 이 庵을 이름하여 遯跡이라고 부른다........`
대전사를 영상에 담고 산행을 진행합니다.
조금 더 가니 김성일이 지은 주왕전고기를 세긴 조형물이 나옵니다.
周王殿故基 주왕전고기 주왕전의 옛 터에서
鶴峯 金誠一(학봉 김성일)
披草尋行闕 피초심행궐 풀숲 헤치며 주왕 궁궐을 찾노라니
山椒落日泜 산초낙일지 산마루 지는 해 낮게 드리웠네.
階平己無級 계평기무급 계단은 무너져 층계 없어졌고
瓦解半成泥 와해반성니 기와는 부서져 반 진흙 되었네.
制陋非堯殿 제루비요전 규모는 초라하여 요임금 궁전보다 못하고
林深是鳥栖 임심시조서 숲은 깊어 산새들 서식지 되었네.
興亡千古恨 흥망천고한 흥하고 망하는 천고의 한을 품고
長嘯過溪西 장소과계서 길게 휘파람 불며 시내 서쪽 지나네.
주봉을 향해 직진합니다. 등산로는 평이하여 건강산행으로는 최적의 코스입니다.
제 1 전망대에서 사진촬영을 합니다. 이곳을 보니 장가계(長家界)가 연상됩니다. 더러는 주왕산을 한국의 장가계라고 수식하는데, 장가계는 석회암 지대가 용식작용을 받아서 형성된 반면에 주왕산은 마그마의 용출로 만들어진 지형입니다. 주왕산의 암봉들이 협곡을 이뤄 절경을 만들게 된 것은 과거 지질시대에 거듭된 화산폭발 때문으로, 이 산의 암질은 화산폭발 시 고온의 화산재가 용암처럼 흘러내려 굳은 바위인 회류응회암으로서 수차례 폭발이 거듭되며 겹겹이 쌓여서 현재의 높은 절벽과 암봉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제 2 전망대에 이르러 사진촬영을 합니다. 이곳에는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사진촬영을 하는데 한 분은 주왕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주왕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해볼까 합니다.
당나라 때 주왕에 봉해진 인물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주왕 이원방(李元方) : 당고조의 제 9 자, 무덕(武德) 4년(622년)에 주왕에 봉함. 사후 후손이 없어 나라를 거둠.
2. 당 중종 이현(李㫫) : 당고종과 무측의 자, 처음에 주왕으로 봉했다가 의풍(義風) 2년(677년) 영왕(英王)으로 옮겨 봉함.
3. 사사명(史思明) : 759년 1월 위주(魏州, 지금의 하북성 大名)에서 스스로 대괴주왕(大圣周王)을 칭함。- 대괴(大圣)는 성인이라는 뜻-
여기에서 주목할 인물은 안사의 난으로 알려진 사사명입니다.
"안사의 난"은 안록산(安祿山)과 사사명이 일으킨 반란으로 그 대강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당현종은 즉위 초에는 백성을 위하는 성군으로 추앙되었습니다. 그러나 양귀비를 만나면서 무리한 정사를 펼치게 됩니다. 양귀비의 6촌 오빠에게 "국충(國忠)"이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재상에 앉히게 되는데 이 사람이 바로 안사의 난의 단초가 된 양국충(楊國忠)입니다. 양국충에게 정치적 라이벌로 돌궐족 출신 절도사 안록산이 등장하게 되는데, 안록산은 난을 일으키기 전에는 당현종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었으며, 양귀비에게는 양아들로 받아줄 것을 청한 적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양국충과 안록산의 대립으로 결국 안록산이 천보 14년(755)에 반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안록산은 평로 절도사(平盧節度使) 범양(范陽) 절도사를 겸하였는데 당시 당나라 군사력의 3할 정도를 장악했다고 합니다. 안록산 범양, 즉 지금의 북경에서 난을 일으켜 장안을 장악하고 대연황제(大燕皇帝)를 칭합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 안경서가 반란을 일으켜 안록산을 시해합니다. 이에 안록산의 부장이었던 사사명이 스스로 대괴연왕(大圣燕王)을 칭하고 군대를 이끌고 나가 안경서가 이끄는 제 9 절도사군을 패퇴시키고 안경서를 살해합니다. 그 후에 대연황제(大燕皇帝), 대성주황제(大聖周皇帝), 응청황제(應天皇帝) 등 을 자칭하고, 그의 장남 사조의(史朝義)를 회왕(懷王)에 봉합니다. 761년 사사명은 섬주를 공격했으나 패배하자 사조의를 죽이고 작은 아들 사조청을 태자로 책봉하려고 하자 사조의가 반란을 일으켰고 그의 부장인 낙열 등이 사사명을 죽이자 사조의가 제위에 오르게 됩니다. 그러나 사사명은 762년 당나라의 옹왕 이적(李適)이 이끄는 10여 만 명의 토벌군과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으나 연달아 패배했으며, 그의 군대가 당에 투항하자 그는 결국 목을 매어 자결함으로서 8년 여 간의 안사의 난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즉, 역사는 사사명이 아들 사조의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기록은 실제와 불일치하는 경우가 종종 있음을 감안할 때, 정황을 살피건데 주왕산의 주왕은 바로 사사명이 아닌가 합니다. - 이것은 저의 견해임을 밝혀둡니다. - 사사명은 아들의 반란을 피해서 신라로 도주하여 주왕산에서 후일을 도모했을 가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봉이 가까와지자 나무가 성긴 산길이 나오는데 푸른 하늘이 보입니다.
드디어 정상인 주봉에 도착합니다. 이곳에서 잠시 머물렀다가 하산합니다.
하산길도 숲길이 이어지는데 여름철에도 더위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될 길입니다.
조금 내려갔을 때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애띤 얼굴을 한 두 여성이 숨을 몰아 쉬면서 올라오는데 그 중 한 여성이 정상이 얼마 정도 남았는지 물어봅니다. 천천히 가면 20분 거리고 빨리 가면 10분 거리라고 했더니 쾌활한 표정을 지으면서 힘을 내서 산정상을 향해 갑니다.
탁 트인 계곡이 풍광이 매우 좋아서 사진촬영을 합니다.
주왕(周王)은 본디 주(周)나라의 천자입니다. 주나라(기원전 1046년 ~ 기원전 256년)는 상나라를 이어 중국에 존재했던 나라입니다. 중국 역사에서 가장 오래 존속한 나라이며, 790년간 왕조를 이어갔습니다.
원래 주나라는 상나라의 서부 제후국이었는데, 주족이 처음에 거주했던 지역은 황하가 굽어 올라가는 지역인 지금의 내몽골 일부인 오르도스 지방이었습니다. 오르도스에서 유목민에게 농작물 약탈에 시달리는 것을 피해, 고공단보 대에 상나라의 서쪽(지금의 산시성 서북쪽 기산(岐山))에 정착했고, 주 문왕 시대에 나라(國)로서 주나라의 정체성이 확립됩니다.
은나라 제을황제는 주나라 문왕(周文王)에게 두 공주님을 시집보냈습니다. 제을황제는 성군이었는데 그의 아드님은 상나라 마지막 임금인 폭군 주왕(紂王)으로 주나라를 개창한 주나라 무왕(周武王)과는 의제 외사촌간입니다. 주나라는 상나라에 조공을 바치면서 우호적으로 지내다가도 때때로 상과 전쟁을 벌였는데, 상나라의 주왕이 미녀 달기에 미혹되어 국정을 제대로 돌보지 않고 주지육림을 즐기며 패악을 부리자, 주나라 내부에서는 점차 무너져가는 상나라를 몰아내고 새로운 왕조를 열자는 주장이 대두 되었습니다. 두 나라 사이의 전면적 전쟁은 BC 1122년에 주나라가 시작하였다고 역사가들은 생각하지만, 결정적인 전쟁은 BC 1111년경에 벌어졌던 것으로 추정합니다. 문왕 때 은나라의 3분의 2를 점령하였고, 문왕의 아들 무왕이 45,000여 명의 군대와 300여 개의 전차를 이끌고 황하를 건너 목야 전투에서 상나라 왕 주왕을 몰아내고 중국 전역을 차지하게 되면서 정식으로 주나라가 건국됩니다.
‘중드’를 좋아하신다면 이 시대를 쉽게 말하자면 “봉신연의(封神演義)”의 시대입니다.
주나라 건국의 주요인물 소개글을 옮깁니다.
후직(后稷) : 주나라의 시조(始祖). 이름은 기(棄)이다. 후직의 모친은 원래 유태(有邰)씨의 딸로 강원(姜原)이라고 했다. 강원은 오제의 일원인 제곡(帝嚳)의 정비(正妃)였다. 어느 날 강원이 들에 나가 거인의 발자국을 본 후 애모(愛慕)하는 마음이 생겨 그 발자국을 밟고 싶어졌다. 그녀가 거인의 발자국을 밟자 마치 아기를 가진 듯 뱃속이 꿈틀거렸다.
열달 후 아이를 낳았으나 아이가 불길하다고 여겨 좁은 골목에 버렸다. 그러자 말과 소가 골목을 지나가면서 아이를 피하며 밟지 않았다. 이번에는 숲속에 버렸지만 마침 산속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할 수 없이 다른 곳으로 옮겨 도랑의 얼음에 버렸으나 새들이 날아와 날개로 아이를 덮고 깃을 깔아주었다. 그러자 강원은 자신이 낳은 아이를 신(神)이라고 여겨 데려다 성인이 될 때까지 잘 키웠다. 처음에 아이를 버리고자 생각했기 때문에 아이의 이름을 "버릴 기(棄)"로 불렀다는 것이다.
기는 어릴 때부터 아주 출중했고 큰 뜻을 품고 있었다. 그가 놀이를 하면서 심은 작물은 무성하게 잘 자랐다. 성인이 된 후 토지의 특성에 따라 적합한 작물을 심자 백성들이 모두 그를 따라 배웠다. 요 임금이 이 말을 듣고는 그를 농사(農師)로 등용해 농업을 주관하게 했다. 이렇게 하자 백성들에게 수익이 많았다. 요임금은 그를 태(邰)에 봉하고 후직이라고 불렀으며 희씨(姬氏) 성을 하사했다. 이처럼 후직이 흥성한 시기는 요, 순과 하나라 시대였으며 후직의 종족은 농업에 뛰어나다는 아름다운 덕망을 지녔다.
후직이 사망한 후 아들인 부줄(不窋)이 즉위했다. 그러나 부줄의 만년에 하나라의 정치가 쇠퇴해 농사(農師)라는 관직을 폐지하고 더는 농업에 힘을 기울이지 않았다. 부줄은 이에 관직을 잃고 이민족들이 사는 곳으로 떠났다. 부줄의 손자가 바로 공류(公劉)이다. 공류는 비록 이민족이 사는 지역에 살았지만 여전히 농경에 힘썼다. 사방으로 다니며 토지의 특성을 살폈고 각종 목재를 채취해 적절히 사용했다.
그러자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이나 고향에 머무는 사람들에게 모두 재물이 쌓였고 백성들이 모두 편안해졌다. 주나라의 정교(政敎)는 이때부터 흥성하기 시작했다. 많은 시인들이 노래를 지어 공류의 덕을 기렸다. 공류가 죽자 아들인 경절(慶節)이 즉위해 지금의 섬서성 순읍현(旬邑縣) 서남쪽 땅에 도읍을 정했다고 한다.
주문왕(周文王) : 상나라 말기에 서백(西伯)이 되었고, 이 때문에 백창(伯昌)으로 일컫기도 한다. 임용(任用) 태전(太顚), 산의생(散宜生) 등의 유능한 사람들을 등용하고, 백성들의 삶을 넉넉하게 해 주는 정책을 시행하니 국력이 날로 성하게 되었다. 이는 제신이 꺼리는 바가 되어 유리(羑里)에 갇히게 되었다. 수금된 기간 동안, 주역 일서(一書)를 써냈다. 이후에 유신씨(有莘氏)의 딸과 려융(驪戎) 문마(文馬) 등 보물을 바치고 조정 신하들과 소통하여 비로소 풀려날 수 있었다. 그는 일찍이 우(虞), 예(芮) 두 나라의 쟁단을 해결해 주었고, 병사를 내어 견융(犬戎), 밀수(密須), 려(黎), 한(邗)을 공격했고, 또한 숭(崇)을 쳐 멸했다. 풍읍(豐邑, 지금의 산시성(陕西省) 후이구(户县))을 수도로 정했으며, 세력을 넓혀 장강, 한수, 여수(汝水) 등의 유역까지 이르렀는데, 이는 상나라를 멸망시킬 준비를 한 것으로 전해오는 말로는 그의 만년에 이미 셋으로 갈라진 천하 중 둘을 취한 국면이었다고 한다.
문왕은 임종 시에 둘째 아들인 서주 무왕을 불러 서둘러 상나라를 멸망시킬 것을 도모하라고 당부했다.
전해오는 말로는 현재 통용되는 주역 및 후천팔괘(後天八卦, 또는 문왕팔괘(文王八卦))가 모두 문왕의 저서라고 한다.
문왕은 본래 음주를 좋아하여 술병 천 개를 마실 정도였다고 한다.
측천무후가 무주를 세웠을 때 스스로 무씨(武氏) 가문은 문왕의 후대라고 일컬었고, 이에 문왕을 시조(始祖) 문황제(文皇帝)로 추숭했다.
주무왕(周武王) : 주무왕은 주문왕의 차남으로 왕위에 오른 후에 그의 아버지의 유언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것은 상나라(商)의 격파였는데 무왕은 현명한 관료를 등용하였고, 특히 재상으로 강태공을 기용하였다. 그는 군사(軍師)였다. 결과적으로 주나라는 강대화되었다.
기원전 1048년 무왕은 맹진에서 제후들의 회합을 요청하고 800명 이상의 제후가 참석하였다. 기원전 1046년에는 상나라 정부가 파탄상태가 되고 무왕은 많은 인접 제후와 함께 공격을 시작하였다. 무예의 전투에서 상나라 군대는 파괴돠었고 상나라의 주왕(紂王, 제신)은 궁을 불태우고 분사하였다.
전쟁에서 승리하여 무왕은 중국을 통일했으며 그의 형제와 장군들의 많은 제후국을 세웠다. 그는 즉위 3년 후 기원전 1043년에 붕어하였다.
강태공(姜太公) : 강태공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강상(姜尙)은 염제(炎帝) 신농(神農)의 51세손이요, 백이(伯夷)의 36세손이기도 하다. 주나라 문왕, 무왕, 성왕(成王), 강왕(康王) 4대에 걸쳐 태사(太師)를 지냈으며, 춘추전국 시기의 제(齊)나라의 창시자요, 딸은 주 무왕의 왕후이다.
때는 기원전 1046년 2월 겨울, 상나라 주왕의 흉폭한 정치가 계속되어 천하가 비탄에 젖어 있을 시 홀연히 나타나 주 문무왕의 스승이 되어 4만 5천의 군사로 72만의 상군을 대파하는 기적적인 전쟁을 일구어낸 동이지사(東夷之士)이며 기인(奇人)이다. 이 전쟁을 목야전쟁(牧野戰爭)이라 하며, 목야전쟁이 주는 의의는 적은 수로 많은 적을 섬멸한 기적의 전쟁이요, 아무리 불리하더라도 정의(正義)는 반드시 필승(必勝)한다는 정법을 확립시킨 정의필승의 전쟁이며, 대륙을 통일한 천하통일전쟁이라 할 것이다. 이후 제나라를 일으켜 제1대 초대 국왕으로 제나라는 32대 근 800여 년을 존속하였다.
강태공은 주나라 문왕, 무왕의 스승이자 장인이며 천하의 스승국의 위치로 군림하여 제나라의 임금(제 태공)이 되었다. 제나라의 2대 군주의 지위를 큰아들 강급(姜及)에게 물려주었고, 강급은 제 정공(齊 丁公)이라고 불렸다. 강태공을 이어 제나라가 가장 흥한 시기는 제나라 16대 임금인 제 환공 강소백(姜小白) 시기로 강소백은 춘추시대 첫번째 패왕(覇王)이 되어 중국 천하를 호령하며 강태공의 얼을 이었다. 제나라 최전성기에는 사방 5000리를 이룩한 대국으로 성장하기도 하였다.
강태공이 남긴 유명한 명언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복수불반분(腹水不返盆, 한 번 엎질러진 물은 다시 주워담을 수 없다)이다. 강태공의 전 부인 마씨는 강태공이 주문왕을 만나기 전 생활고에 견디다 못해 강태공 곁을 떠났는데, 이후 강태공이 제나라 왕이 되었을때 다시 돌아와서 아내로 맞아주길 요청했다. 이에 강태공은 하인더러 물을 떠오라고 한 후 그 물을 땅에 엎었다. 그리고 돌아온 아내에게 지금 바닥의 그 물을 다시 항아리에 담는다면 아내로 맞이 해주겠다고 했다. 즉, 한 번 떠난 마음은 두 번 다시 되돌리기 어렵다는 유명한 명언을 남긴 것이다.
강태공은 기원전 1072년에 신선계에 들었으며, 그때 연세는 139세였다. 의관을 서주(西周) 호경(鎬京)에다 안장하였다. 제나라 사람들은 강태공의 덕을 생각하여 제나라에다 강태공 의관총(衣冠塚)을 세웠다. 강태공은 주역(周易)의 확립자이며, 강태공이 저술한 육도삼략(六韜三略)이 현재에도 전해져 오고 있다. 육도삼략은 중국 고대 병서의 최고봉인 무경칠서(武經七書) 중의 둘을 차지한다. 후대인 손무의 손자병법도 강태공의 육도삼략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용연폭포가 가까워지자 개울물을 지나는 산길이 나오는데 숲속의 청량함에 개울물의 시원함이 더하여져서 청량한 느낌이 그지없이 좋습니다.
주나라의 국호 주(周)는 땅의 이름인 주원(周原)에서 유래했습니다.
산시성[陝西省] 서부에 있으며, 우궁[武功]·메이셴[眉縣]·푸펑[扶風]·치산[岐山]·펑샹[鳳翔]·바오지[寶鷄] 등의 현(縣)을 포함하며, 그 범위는 대략 200㎢에 달하며 중심지역은 치산 남안 지역으로 면적은 약 7~8㎢입니다. 주문왕의 아버지인 고공단보가 이곳으로 이주해왔으며, 서주 초기에는 주공과 소공의 채읍이 되었습니다.
전한 시대부터 이곳에서 서주 때의 동기가 출토되었으며, 청나라 때에는 '대풍구', 크고 작은 '우정', '모공정' 등의 유명한 동기가 출토되었습니다. 20세기에 출토된 서주 시기의 동기는 500여 점에 달하며 1949년 이후 치산의 펑추[鳳雛]와 푸펑의 사오천[召陳]·윈탕[雲塘]·좡바이[莊白] 등지에서 궁궐터, 골기 제작터, 많은 청동기가 들어 있는 움막이 발견되었습니다.
펑추 궁궐터의 움막에서는 300개에 달하는 갑골과 은(殷)의 선왕에게 제사지낼 때 사용한 각사가 발견되어 주나라 초기 은나라와의 관계를 고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곳이 바로 용비어천가에 '적인절'에 나오는 곳입니다.
狄人ㅅ 서리가샤 狄人이 ᄀᆞᆯ외어늘 岐山 올ᄆᆞ샴도 하ᄂᆞᇙ ᄠᅳ디시니
野人ㅅ 서리예 가샤 野人이 ᄀᆞᆯ외어늘 德源 올ᄆᆞ샴도 하ᄂᆞᇙ ᄠᅳ디시니
주나라는 이곳에서 일어나 주문왕 때 도성을 지금의 서안으로 옮겨 풍하灃河 서안에 풍경豊京을 건설하고 황도로 삼았으며, 주무왕이 기원전 1057년 상나라를 멸하고 주황조周皇朝를 창건한 후에 풍하 동안에 호경鎬京을 세워 황도로 삼았던 곳입니다. 이로써 서안지역은 장기간 중국고대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이 되었고, 호경은 서주西周 정치의 중심이 되고, 풍경은 제사 종묘와 문화 오락의 장소가 되어 중국 역사상 제일 먼저 '쌍자성雙子城'을 형성한 주황실의 고도가 되었습니다.
이후 서안은 중국에서 가장 많은 14개 황조가 들어서는 도읍지가 되었는데 주요 나라를 보면 서주(373年)、한조(210年)、동한(獻帝6年))、왕망 신(15年)、서진(愍帝2年)、전조(11年)、전진(33年), 후진(34年)、서위(22年)、북주(25年)、수(24年)、당(273年)총 1000여년 등입니다.
이제 용연폭포에 도착합니다. 여기부터는 관광객들이 제법 있습니다.
용연폭포를 지나서 절구폭포로 갑니다.
절구폭포를 가보니 폭포 저편에 청춘남녀 한 쌍이 노니는데 폭포와 어울려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습니다. 시간이 촉박하여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되돌아 나옵니다.
빠른 걸음으로 오늘의 하이라이트인 용추협곡에 도착합니다. 캠코더를 꺼내서 이곳을 걸어가면서 5분여를 촬영합니다. 관광객들이 이곳의 경관을 보면서 놀라와 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용추협곡을 거쳐서 시루봉을 빠른 걸음으로 지나서 주왕암, 주왕굴로 갑니다.
주왕암에 도착하여 주왕굴로 급하게 가는데 보살님이 합장을 하여 저에게 인사를 합니다. 저도 엉겹결에 합장을 하면서 인사를 했습니다. 다시 뛰다시피 하여 주왕굴로 향합니다.
주왕굴에 도착합니다. 이곳에 도착하여 사진과 영상촬영을 하는데 주왕이 세수를 하러 주왕굴에서 나왔다가 화살을 맞았다고 하는 주왕굴의 위쪽에서 떨어지는 가느다란 물줄기를 보니 오색 무지개가 보입니다. 주왕 폐하의 반기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다시 돌아나와서 급히 주왕암을 내부에서 촬영하는데 아까 만났던 보살님이 다가와서 위쪽으로 가서 촬영하면 더 좋다고 하십니다. 저는 시간이 촉박하여 다음 산행 때에 다시 오겠다고 하고서 작별인사를 하고 나옵니다.
주왕산성에 도착합니다. 설명 간판의 위쪽을 보니 돌무더기 수준의 것이 있는데 당나라 군사를 방어하기 위해서 주왕이 성을 쌓은 흔적이라고 전해지는 곳이라 합니다.
주왕산의 또 하나의 상징인 수달래가 계곡에 이따금씩 보이는데 시간이 촉박하여 먼 발치에서 사진촬영을 하고 아쉬움을 달래면서 속보를 해갑니다.
수달래 소개글을 옮겨봅니다.
수달래는 진달래과에 속하는 산철쭉의 다른 이름으로 진달래꽃보다 빛깔이 짙으며 꽃잎에 검붉은 반점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전해져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주왕이 마장군의 공격을 피하여 주왕굴에 숨어 지내던 어느 날, 굴 입구에서 떨어지는 물로 세수를 하다가 마장군의 화살에 맞아 숨을 거두게 되었는데 그 핏물이 계곡을 따라 주왕계곡으로 스며들면서 피어난 꽃이 바로 수달래라고 한다.
일명 수단화하고 하는데 물이 붉게 물들어 피어난 꽃(수단화:水丹花)라고 말하기도 하고, 주왕의 목숨을 끊고 난 뒤 피어난 꽃(수단화 : 壽斷花)이라고도 한다.
급하게 가다가 지나쳤는데 안내간판을 보고 다시 가서 읽어보고 아들바위를 촬영합니다.
아들바위님에 등을지고 가랑이 사이로 돌을 던지면 아들을 점지해준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답니다.
이제는 뛰어야 할 시간입니다. 또 다시 마라톤으로 산행버스가 있는 곳으로 갑니다.
출발시각 5분 전에 도착하여 길 옆에 있는 주왕산 사과점에서 사과를 구입해서 버스에 탑승했습니다.
주왕산 돌아보면서 쓴 옛 시인의 싯구 몇 구절을 올려봅니다.
- 先略 -
千岩揷地長屛列 천 개의 바위가 땅에 꽂혀 긴 병풍으로 늘어섰는데
絶岫摩空白日低 깎아지른 봉우리가 허공 찔러 해님도 나지막해라
古窟龍騰三日雨 옛 굴에서 용 승천해 사흘간 비 내리고
春風鶴返千年棲 봄바람에 학 돌아와 천년을 깃들었어라
他年擬結重來約 다른 해에 거듭 찾을 약속 하려 했는데
流水桃花恐却迷 흐르는 물에 복사꽃 떠가니 길 잃을까 두려워라
扶竹登高放遠眸 대지팡이 짚고 산에 올라 저 멀리 바라보니
周王陳迹摠堪愁 주왕의 옛 자취 모두 시름 겨워라
荒城石老千年地 황폐한 성에 돌 늙어 천년이 흐른 땅이요
古窟龍騰百丈湫 옛 굴에 용 승천했으니 백 길의 소로다
-下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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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직도 작성 중이라는 미완성의 리뷰를 읽어봅니다
수달래라 함은 혹시나 수달의 사촌인가 착각할 수도 있지요
보나파르트 님 수달래는 보고 오신 건가요?
미산 대장님, 안녕하십니까.
답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산행시간이 촉박하여 꽃이 핀 몇 그루의 수달래를 먼 발치에서 보았습니다.
황매산 산행기를 올리는데 사진이 용량을 초과한 것이 있는지 업로드가 잘 되지 않아서 시간을 많이 보내서 황매산 산행기 완성은 다음주로 넘겨야 되겠습니다.
저는 내일은 달마산, 모레는 바래봉을 갑니다.
주말 잘 보내시고요, 다음에 또 산행지에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